2005년 11월호

소련의 북조선 독자정권 구상과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반발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입력2005-11-10 1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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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 9월의 ‘스탈린 지령’은 소련이 미국과 합의한 신탁통치 안에 아랑곳없이 처음부터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련군은 중앙집권적인 정권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조만식은 남한과의 중앙정부 공동수립을,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설립을 요구하며 반발하는데….
    소련의 북조선 독자정권 구상과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반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지휘부와 함께한 조만식 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 조만식 선생 왼쪽이 당시 소련군 실세이던 군사위원 레베제프.

    소련을 대일전(對日戰)에 끌어들여 일본을 협공하는 문제는 태평양전쟁 기간 내내 미국의 외교·군사 전략의 주요 과제였다. 미일 개전 이튿날인 1941년 12월8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리트비노프 주미 소련대사에게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를 제기한 이래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소(對蘇)교섭에 적극 나섰다. 미군의 대일 공격과 일본 본토 진공이 쉽도록 대륙에 일본군을 묶어두어야 하는 전략상 필요에 따라 소련의 참전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대독(對獨)전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극동에서 새로운 전쟁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참전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종결된 후 2~3개월 내에 대일전에 참가해 만주의 일본군을 격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데 최종 합의했다. 소련군의 대일작전에는 만주 진공작전의 일환으로 해군이 한반도 북변 항구들을 봉쇄하고 전황에 따라 해병대를 상륙시키는 한편, 지상부대 일부를 만주 전구(轉句)에서 남하시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계획도 포함됐다.

    소련군의 전략 구상에는 개전과 동시에 한반도로 진공한다는 계획이 포함되지 않았다. 작전계획상 목표는 만주에 있는 강력한 관동군을 분쇄하는 것이었으며 한반도에 대한 작전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보조적인 작전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의 대일 참전은 극동의 전후처리에 소련이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것은 또한 한국의 북변 항구들이 소련군의 작전범위에 포함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후 한국 문제의 해결에 소련이 개입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소련은 대일 참전을 계획하면서 전후 한국 문제 해결과 관련해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을까.

    건준과 공산당이 1대 1로 합작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루스벨트는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관계국의 이해를 조정하는 방안으로 한국에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루스벨트의 구상은 이후 수차례에 걸친 연합국 회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신탁통치 구상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에 ‘적당한 시기’라는 유보 단서를 설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재확인됐다. 테헤란 회담에서도 루스벨트는 한국이 자치능력을 습득할 때까지 40년간 후견제를 실시한다는 구상을 밝혀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냈다. 1945년 2월8일 얄타에서도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전후 한반도에 20~30년 동안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할 것과 외국 군대는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전시 회담에서 소련은 시종일관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을 청취하고 그것에 이해를 표명하는 정도에 머물고 자국의 대한(對韓) 구상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소련군의 대일 작전지역을 만주에 국한해 전후 한반도가 소련의 점령지역에 포함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뛰어넘는 적극성을 발휘해 소련이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미국에 주지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한국의 북변 항구에 대한 보조적인 작전을 통해 전후 한국 문제에 어느 정도 개입할 가능성이 보이자 대한 구상을 서서히 가다듬어 갔다.

    소련군 최고사령부가 대일 작전구상을 완성한 1945년 6월29일 소련 외무성은 한국에 대한 구상을 명확히 하는 정책 보고서를 준비했다. 이 문서는 19세기 이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국제정치를 검토하면서 전후 한국 문제 해결에서 소련이 취해야 할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소련 외무성은 소련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안보를 위협해왔고 앞으로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일본의 영향력을 한국에서 철저히 제거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한반도에 소련에 우호적인 독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소련의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유력한 방안이라고 판단했으며 신탁통치 실시는 소련의 주도적인 역할이 보장되는 조건에서 차선의 방책으로 간주했다.

    한반도를 향해 급속히 남진하던 소련 제25군의 선발대는 1945년 8월21일 함흥에 진주했다.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는 24일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했다. 치스차코프는 도청 간부들과 행정권 접수 교섭을 개시해 일본헌병과 경찰이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사무는 종전대로 도지사와 그 부하직원이 집행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와 건국준비위원회 지도자들이 치스차코프를 방문해 행정권을 비롯한 일체의 권한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치스차코프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도용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집행위원회가 함남의 치안 행정 일체를 장악할 것을 통고하는 한편 헌병·경찰관의 무장해제를 명했다.

    26일 평양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평양관구사령관을 불러들여 일본군 무장해제 계획을 협의했다. 치스차코프는 조만식을 비롯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대표들과도 접촉했다. 29일 소련군 지도부는 건준(建準)측과 공산당측 대표들을 소집해서 건준과 공산당이 1대 1로 합작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요구했다. 건준이 이를 받아들이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할 것”

    소련군의 점령정책은 함흥과 평양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좌우세력의 연합에 기초해 한국인의 행정권 접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방식은 소련군이 새로 진주하는 지역에 순차적으로 적용됐다. 좌우합작의 방향으로 개조한 자치기관에 행정권을 위임하는 소련군의 점령정책은 일제 붕괴 이후 북한 각지에 출현한 자치기관들에서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민족주의자가 다수를 점했던 사정을 고려하면 좌익의 강화에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소련군은 진주와 함께 잘 준비된 점령정책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군이 점령지역인 북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할 정책은 그때까지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9월20일 스탈린의 ‘지령’을 통해 일거에 해결됐다. ‘지령’은 소련군이 북한 점령정책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따라야 할 강령과 같은 방침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열거했다. (1)북한 영토 내에서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해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력할 것. (3)적군이 점령한 북한의 각지에서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단체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그 활동을 원조할 것. (중략) (7)북한의 민간 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탈린은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소련군의 대북한 정책방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스탈린은 이 정권이 ‘소비에트 정권’이 아니라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어야 함을 명시했다. 그리고 이 정권이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의 지도에 따라 북한사회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변혁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동경대 교수 와다 하루키는 이 지령을 “스탈린이 처음부터 북한 단독 정권의 수립을 지시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문서”라고 평가하고, “이 지시가 내려간 시점부터 분단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1945년 8월말 소련 제25군의 전 부대는 북한 각지에 배치됐다. 소련군대가 진주한 지역에는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주민의 경제·문화생활을 정상화하며 군부대에 대한 식량, 생필품, 연료의 체계적인 보급을 보장하기 위한 경무사령부가 설치됐다. 경무사령부는 6개의 도, 85개의 군, 7개의 시에 설치됐다. 소련은 ‘주민들 사이에서 경무사령부의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88특별여단에서 근무한 한국인 대원들을 경무사령관의 부관이나 보좌관으로 혹은 보안대원으로 배치했다. 김일성과 최용건은 평양에, 김책은 함경남도에, 박성철은 함경북도에 배치됐다.

    무소불위, 소련 민정청

    점령지역에서 군사·민사 당국의 대표자인 경무사령관은 행정·경제·정치 영역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경무사령관은 법령의 효력을 지닌 명령·지시를 내리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소련군에 대한 적대행위자로 간주해 처벌할 수 있었다. 경무사령관은 또 친일적인 정당·사회단체의 해산과 그 재산의 몰수 및 경찰서, 헌병대 근무자들과 일본 군대 군무원들의 의무적인 등록을 명하거나 총포, 도검, 폭발물, 라디오방송기의 소지와 제조를 금할 수 있었다. 통행시간 제한, 우편·전신검열, 거주이전의 제한 권한도 경무사령관에게 부여됐다.

    경무사령관은 일본군 군사장비뿐만 아니라 일본군이나 일본인 소유의 원료창고, 양곡, 연료, 공장·제조소 설비, 산업·상업기업소 토지, 유가증권, 기타 귀중품의 보관과 이용에 대한 모든 권한을 보유했다. 반소(反蘇) 선전을 분쇄하고 적대분자를 적발하는 일은 경무사령관의 중요한 정치활동이었다. 집회나 회의는 소련군 대표의 참가 없이는 개최할 수 없었고, 연주회나 연극 공연도 경무사령부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전 체제에서 발간된 신문은 모두 폐간됐고, 라디오방송은 경무사령관의 명령·지시를 전달하는 것 외에는 이용이 엄격히 제한됐다.

    그러나 소련군 사령부는 민정업무 수행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군부대를 지휘하는 고유 업무 처리에 여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정 업무를 할 만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스차코프는 연해주군관구사령관 메레츠코프에게 경험 있는 전문가들로 전담기구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1945년 11월 50명의 장교단을 통솔하는 민정담당 부사령관에 로마넨코 소장이 임명됐다. 로마넨코 밑에는 정치행정부, 산업부, 재정부, 상업조달부, 농림부, 보건부, 사법검찰부, 경찰통제지도부가 조직됐다.

    민정담당 부사령관 기구는 1947년 5월까지 존속했으며, 이후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으로 개편됐다. 소련민정청은 13개 부에 78명으로 구성됐다. 민정청은 소련 제25군 정치부와 연해주군관구 정치부 산하에 있던 보도국, 군사검열부, 라디오방송편집부, 조선신문(朝鮮新聞) 편집부의 사업도 지도했다. 6명의 도 고문을 비롯해 총원 971명으로 구성된 6개의 도 경무사령부와 85개의 군 경무사령부, 총원 45명으로 구성된 3개의 시 경무사령부와 경비소대가 민정청의 통제를 받았다. 시경무사령부 경비소대 성원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모두 1182명이 민정청 통제를 받으며 활동한 셈이다.

    주민 정치사업과 정당 사회단체 사업을 지도하기 위해 각 도에 도 고문직제도 도입했다. 도 고문은 사단정치부장, 각 군 정치부원 중에서 엄선됐다. 도 고문은 각 도에서 소련군사령부를 대표했으며, 소련민정청장의 지시를 받아 도내 각급 경무사령부의 활동을 지도했다. 도 고문은 도 경무사령부를 통해 각급 인민위원회와 정당 사회단체의 사업에 원조를 제공했고, 도 인민위원회와는 직접적인 연계를 맺고 있었다. 도 경무사령관은 도 고문에 직속이었다.

    소련군 사령관 예하에 정치고문단도 설치됐다. 주일 소련대사관에서 다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발라사노프가 한국 문제 관련 정치고문에 임명됐다. 1946년 가을부터는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영사 샵쉰이 발라사노프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비밀투표로 이장과 면장 선출

    1945년 10월 스탈린의 지령은 실천 단계로 접어들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10월8~11일 5도 인민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을 실천에 옮겼다. 8일 치스차코프는 개회사에서 소련군이 한국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민주 독립국가의 건설은 한국 민중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라며 소련군은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원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치스차코프는 먼저 민주적인 방법으로 지방 정권기관을 수립하고 북한 6개 도의 경제·문화생활을 지도할 중앙기관을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회의 참가자들은 8~10일 행정, 산업, 농업·상업·조달, 재정, 철도교통 등으로 나뉘어 분과 활동에 들어갔다. 분과활동에서는 북한의 행정·경제·문화생활을 통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대책을 심의해 일련의 결정을 채택했고 이는 11일 총회에서 공포됐다.

    총회에서는 먼저 ‘북조선 지방자치기관 조직의 기본원칙’이 채택됐다. 일반적 평등 선거권에 기초한 비밀투표로 리장은 1945년 11월1~15일 리 총회에서 선출하고, 면장은 11월15~30일에 면 대회에서 선출하되 도·시·군 인민위원회 위원은 따로 선거하지 않고 현시점에 조직된 대로 그대로 두거나 ‘원칙’에 따라 보완할 것을 결정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성별, 재산, 신앙, 교육, 정주기간, 민족별 차별 없이 20세에 이른 모든 주민에게 부여됐다. 또한 강령과 지도기관의 성원을 각 도 인민위원회와 소련군 사령부에 등록한 모든 민주정당 단체에 후보자를 천거할 권리가 부여됐다. 북한에 중앙집중적인 경제관리기구를 창설하기 위한 결정도 총회에서 채택됐다. 경제복구, 신용대부의 발전, 화폐유통의 조절을 위해 북조선중앙은행을 설립할 것도 결정했다.

    5도 인민위원회 회의에서 분명해진 것은 북한을 독자적인 행정·경제 단위로 분리해 북한의 정치·경제·문화생활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중앙집권적인 관리기구인 중앙 정권기관을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10월13일 치스차코프와 제25군 군사위원 레베제프는 메레츠코프에게 보낸 회의결과 보고서에서 ‘북한에서 정치·경제·문화생활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행정·경제관리를 중앙집중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소련군정의 계획은 1945년 10월17일 작성된 소련 정부의 지령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지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945년 11월초 평양에 북한 주민의 민주적인 분자들 중에서 25~30명을 성원으로 하는 북조선임시민정자치위원회를 창설한다.

    임시위원회는 도·군 자치기관의 사업을 지도하고, 도·시·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다. (2)임시위원회 내에 산업, 농업, 상업, 재정, 교통, 통신, 교육, 보건, 보안, 사법의 10개 행정국을 조직한다. (3)임시위원회와 행정10국의 사업은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직접적이고 상시적인 통제하에 놓인다. (4)임시위원회와 행정10국의 사업을 통제하고 지도하기 위해 북한 주둔 소련점령군사령부에 민정담당 부사령관 직제를 도입한다. (5)민정담당 부사령관 예하에 인민 경제의 각 부문 소련 전문가들과 정치활동가들로 실행기구를 창설한다.

    조만식의 서울방문 계획

    이처럼 소련 정부는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기구를 수립하려는 소련군정의 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정의 계획이 아무런 반대 없이 곧바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조만식은 소련군정의 구상에 분명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11월15일 김일성과 한 대담에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정부의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만식은 이러한 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기 위한 자신의 서울 방문 계획을 김일성과 협의했다.

    김일성은 “인민의 참여에 기초해서 밑으로부터 정권기관을 수립해 나가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답변했지만, 조만식은 “12월1일 이전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서 외국군대의 철수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일성이 점령군의 철수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1월초에 북한에 독자적인 중앙정권기관을 수립하는 것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소련군정은 시간을 마냥 보내지는 않았다. 중앙정권기관으로 가는 가교 마련에 분주했던 것이다. 11월19일 소련군 사령관 명령에 따라 북조선 행정10국이 창설됐다. 행정10국은 소련군 사령관의 직접적인 통제와 각국에 파견된 소련군 사령부 고문의 지도를 받아 각 도 사이의 경제적 연계를 확보하고 행정·경제의 각 부문을 지도하는 부문별 중앙행정기관의 기능을 했다.

    11월말엔 북한의 민정업무를 지도하기 위해 소련군 사령관 예하에 민정담당 부사령관 기구도 설치됐다. 행정10국은 10국 전체를 총괄하는 중앙지도기관이 없어 중앙집권적인 집행기구의 성격이 약하고 다분히 연락을 위한 과도 조직에 머물렀다. 그러나 소련군정의 정책방향을 염두에 둔다면 행정10국의 창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행정10국의 창설은 조건만 갖춰지면 중앙지도기관이라는 지붕을 얹어 소련군정의 통제를 받는 중앙 정권기관을 창설할 준비가 완료됐다는 것을 뜻했다.

    소련의 북조선 독자정권 구상과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반발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만난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왼쪽)과 트루먼 미국 대통령.

    북한에 중앙집권적인 정권기관을 수립한다는 방침이 확정되자 이 정권기관의 활동을 지도할 공산당의 결성이 현안으로 떠올랐다. 소련군 지도자들은 한국에 통일적인 공산당이 조직적으로 형성되지 못했으며, 재건파와 장안파의 파쟁이 당 단체들의 조직·사상적 강화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통일적인 공산당을 수립하기 위한 조치를 신속히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련군 지도자들의 불만

    소련군 지도자들은 북한의 당 활동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도당위원회 지도부는 대부분 정치·사상적 준비가 미약한 신참 당원으로 채워져 있으며, 당원들은 누구도 당원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고, 지도부도 선거를 통해 임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당위원회는 조성된 정치상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소비에트 정권을 즉시 수립하려는 좌경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 이러한 문제는 북한의 당 사업을 지도할 단일한 중앙 지도기관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이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를 소련군이 진주한 평양으로 옮기고 평양에 독자적인 공산당을 조직해 이를 매개로 북한을 비롯한 전체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확고한 통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 것이다. 레베제프는 “서울의 당과 관계없이 이북에 조직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중에 합치는 한이 있어도 이북에 조직위원회를 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군정의 구상은 서울 중앙을 지지하는 토착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박헌영은 ‘중앙의 지도와 연락의 중계기관’으로, 또는 ‘정치행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북한의 각 도당 책임자와 열성자가 ‘중앙지도하에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조직하여 지도하도록’ 지시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복종하는 북조선분국의 창설로 타협점을 모색한 것이다.

    소련군 지도자들은 북한에 독자적인 정치·조직 기반을 갖는 정당 사회단체를 창설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소련군정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조직화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민족주의자가 각급 자치기관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배제하고 대북한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을 연소용공(聯蘇容共)의 방향에서 순치(馴致)하기 위해서도 이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연소용공은 불가피했다. 소련군정 치하에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한 생존은 불가능했다.

    11월3일 조선민주당 창립총회에서 조만식은 “붉은군대만이 우리가 자유롭게 회합해 오랫동안 갈망해온 정당을 조직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었다. 김일성의 이니셔티브에 의해 조선민주당은 조직될 수 있었다. 남조선 인민은 우리가 북조선에서 향유하는 그러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소련군과 김일성의 업적을 치켜세운 뒤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해 한국 민중의 민주주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호소했다. 연소용공합작을 분명히 한 것이다.

    루블화를 군표로 대체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부대와 군인들은 시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처음에는 루블화(貨)를 사용했다. 소련군 부대와 군인들이 지출한 루블화는 1945년 11월27일 현재 약 3000만루블에 달했다. 이 금액은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1억2000만엔에 이르는 적지 않은 규모였다. 그러나 소련군 부대와 군인들이 루블화를 사용하는 일은 곧 중지됐다. 소련 정부의 재정상황이 열악해 북한 주둔 소련군의 유지비를 국가예산으로 지급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주둔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북한의 자치기관들로부터 금전을 갹출하기도 했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재정부장 김병연은 소련군 재정고문의 명령에 따라 ‘도내 은행의 총예금액 중 그 반분인 3000만원을 도재정의 파탄을 초래할 줄 뻔히 알면서도’ 소련군 사령부 비용으로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안북도인민위원회도 ‘붉은군대 접대비’를 지출했다. 그러나 ‘접대비’ 모금은 소련군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어 지속될 수 없었다.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함께 소련 정부에서는 북한 주둔 소련군의 유지비를 공급하는 방안이 신속히 논의됐다. 1945년 9월5일 소련인민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북한 주둔 소련 적군과 해군 부대들과 기관들의 유지비, 군인의 봉급 및 파견근무에 종사하는 정부기관 직원의 경비는 조선엔화로 표시된 소련군사령부 군표를 발행해 지급하게 됐다. 소련군 부대에 납입되는 일체의 생필품과 공산품의 대금도 군표로 지급하게 됐다. 군표는 9월21일부터 통용되기 시작해 10월18일 현재 2억4100만엔의 군표가 유통됐다.

    군표 출현에 북한 주민들은 반감을 드러냈다. 오영진은 ‘하나의 證言, 蘇軍政下의 北韓’에서 소련군이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재정부와 사전 협의는커녕 발행 후에도 아무런 연락도 없이 독자적으로 ‘붉은 지폐’를 발행해 유통시켰지만 주민들은 군표를 신용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붉은 지폐는 소련군인의 호주머니에서 무진장 흘러나와 시장과 상가에 범람했다. 그러나 소련군인을 신용하지 않는 고려인은 그들이 발행한 군표도 신뢰하지 않았다. (중략) 소련군은 도처에서 흥정 거부를 당했다”고 기록했다.

    지불 수단으로서 군표의 가치에 대한 회의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군표는 북한의 인민자치기관들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소련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발행됐고,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권위 외에는 아무런 지급보증도 없이 강제로 유통하게 한 탓이다. 군표는 출현과 동시에 그 가치가 급격히 하락해 군표를 발행할 때 인위적으로 정해진 구조선은행권과의 교환비율(1:1)이 유지되지 않았다. 군표는 도처에서 할인됐다. 군표의 할인을 금지하는 경고가 있었음에도 1946년 2월 현재 상인들은 구조선은행권 100엔으로 130엔의 군표를 교환했다.

    북한사회의 동요에도 군표는 계속 발행됐다. 군표 발행고는 1946년 1월18일 현재 14억8600만엔으로 늘어났다. 군표는 대부분 소련군 유지비와 소련정부기관 경비로 지출됐다. 소련군 유지비는 군인 봉급 지급과 조달비용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군표의 범람에 따른 통화팽창은 시장물가를 폭등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소련군 사령부도 “군표 발행은 북한의 재정상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상당량의 여유자금을 소지한 소련군대 군인들이 시장에서 상품을 닥치는 대로 구매하고 있어 물가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중략) 물가상승은 노동자 사무원의 임금인상을 초래하고 있으며, 군표의 구매력을 저하시키고 있다”고 인정하고, 군표 발행고를 줄일 것을 소련 정부에 요청할 정도였다.

    실패로 끝난 농산물조달사업

    광복 직후 북한의 농업 생산 관계, 즉 지주 소작 관계는 위기에 직면했다. 농민이 더는 지주의 노예로 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은 일제와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의 노력과 가족수에 따라 분배하는 방식으로 토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에 걸쳐 실시된 농산물 조달 사업인 양곡성출(糧穀誠出) 사업의 실패로 빚어진 식량위기도 토지개혁의 실시를 가속화했다.

    농산물 징발 사업은 1945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회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의에서 도시 주민과 소련군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곡물조달 문제가 논의됐다. 회의에서는 75만t의 농산물 조달 계획을 결정하고 각 도·군·면·부락 단위의 조달량도 확정했다. 1945년 10월12일부터는 북한 전역에서 단일한 조달가격이 확립됐고, 조달계획이 완료되기 전에는 농민이 조달에 응해야 할 곡물 종류를 판매하는 것이 금지됐다.

    5도 인민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된 농산물 조달 계획은 사실상 좌절됐다. 소련군 병참장교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도시 주민의 양곡 수요를 위한 곡물조달 사업은 거의 추진되지 않았다. 소련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농산물 조달 사업만이 전개됐지만 그 실적도 목표치를 현저히 밑돌았다. 1945년 12월25일 현재 소련군 수요를 위한 곡물 조달 실적은 12만868t으로 계획(21만t)의 57.4%에 지나지 않았다. 감자와 채소는 1만6850t을 조달해 계획(3만8000t)의 44.3%를, 소는 1만8830두를 조달해 계획(3만6000두)의 52.3%를 달성했다.

    농산물 조달 계획이 제때에 완수될 수 없었던 것은 이에 필요한 재정자금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5도 인민위원회 회의는 소련군 사령부에 농산물조달 계획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자금 7억8000만엔을 소련군 사령부 군표로 발행해 북조선중앙은행에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 소련군 수요를 위한 농산물 조달에만 2억8800만엔이 필요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25일 현재 농산물 조달을 위해 제공된 자금은 소련군 조달 비용으로 제공된 3800만엔이 전부였다.

    농산물 조달은 농촌사회 모든 주민 집단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지주와 부농(富農)은 농산물 조달에 협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달계획의 완수를 방해했고, 곡물을 은닉하거나 시장에 몰래 내다 팔았다. 농민도 왜정(倭政) 때 공출이 있었는데 해방된 지금도 공출이 계속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식량공급 악화와 이에 따른 식료품 가격 급등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농촌 주민들이 농산물 조달에 반대한 것은 농산물 조달이 이들에게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조달가격은 시장가격과 큰 차이를 보였다. 시장에서 농민들은 미곡 1kg을 8~10엔에 팔 수 있었지만 조달가격은 1.39엔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은 고정가격으로 농산물을 판매해야 했지만 공산품은 비싼 변동가격으로 구입해야 했다.

    지주, 부농 대대적 숙청

    소련군의 징발정책은 축우 수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했다. 황해도는 광복 직후 10만4807두의 소를 보유했는데, 소련군이 소 수매사업을 시작한 이래 1945년말까지 3만1442두가 도살됐다. 소련군이 소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농민에 의해 ‘소 대량학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복 후 1945년 말까지 북한 전역에서 전체의 29%에 이르는 소가 도살됐다.

    각급 인민위원회 지도부도 농작물 조달 사업에 협조하지 않았다. 군·면 인민위원회 지도부는 대부분 조달계획이 비현실적이며 농민을 기아 상태로 내몰 것이라고 반발했다. 농산물 조달 사업이 전개된 시기, 특히 1946년 1~2월에 각급 인민위원회에서는 농산물 조달 사업에 반대한 지주와 부농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전개됐다.

    농산물 조달 사업은 소련군의 식량 수요는 충족시킬 수 있었지만 농촌 주민의 모든 계층에서 소련군정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커다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농산물 조달 사업을 통해 도시 주민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소련군정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곡물징발정책의 실패로 조성된 정치경제적 위기에서 탈출할 방안을 시급히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 패망 이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한이 분할되자 북한에는 조선 공업의 4분의 3 이상이 집중되게 됐다. 당시 북한의 공업총생산액은 남북한 전체 공업총생산액의 70%에 달했다. 북한에는 특히 흑색·유색금속공업, 화학공업, 광공업이 집중됐고, 전력생산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거대한 수력발전소도 집중됐다.

    일제 패망 당시 북한에는 모두 1034개의 경제적 의미를 지닌 기업소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 기업소들의 설비와 시설은 매우 낡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전쟁을 벌일 때 보수작업 없이 무리하게 가동해 마모율이 50~60%에 이르렀다. 19개의 수력발전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기업소가 조업을 중단했다.

    일제 패망시 많은 기업소가 파괴되거나 침수되거나 파손됐다. 북한의 공업은 그 자체로서 식민지적 편파성이 커서 원료·자재·설비의 수입 의존도가 심했다. 광복 이후 북한의 공업은 식민지 본국과의 연계가 단절됐다.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거의 모든 일본인 기술자, 경제관리가 북한에서 도주했다. 조선인 공업간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북한에는 독자적인 공업관리기구도 없었다.

    석탄관리국과 전기주식회사

    이처럼 광복 직후 북한의 공업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은 화폐·신용체계의 붕괴, 각도 각군 사이의 교역과 교환의 마비, 남한 및 다른 국가들과의 경제적 연계의 단절, 경험이 풍부하고 잘 교육받은 민족간부의 부족 등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부대는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이나 일본인 소유의 공장·기업소, 원료, 설비, 기타 전리품을 접수하고 이의 보관과 이용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장악했다. 대기업에 대한 보호관리는 소련군 부대가 직접 담당했고, 소기업에 대한 보호관리는 소련군 부대의 통제 속에 지방자치기관이나 기업소의 조선인 직원들에게 위임됐다.

    1945년 10월 소련군 사령부는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북한 공업의 정상화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소련군정 지도부는 “북한 공업 각 부문의 정상적인 가동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북한 각 도 사이의 경제적 연계를 활성화해야 하며 공업에 대한 지도관리를 중앙집중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45년 9월 소련국방위원회 전권대표 사부로프 대장이 지휘하는 조선그룹도 중공업의 복구 가동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안한 바 있다.

    5도 인민위원회 회의 결정과 조선그룹의 제안은 1945년 11월 이후 대부분 현실화됐다. 1945년 11월19일 소련군 사령부는 ‘경제생활의 통일적 지도와 관리사업에 만전을 기하며 민정에 관한 협의를 위해’ 북조선 행정10국을 창설했다. 산업국장에는 정준택이 임명됐다. 산업국은 각 도 국유기업장의 운영방침을 허가하는 권한을 갖게 됐다. 산업국은 각 도 국유기업장의 운영방침과 관리자 선정을 허가하거나 기술자 재배치를 직접 지시할 수 있게 됐다.

    공업 부문별 관리기구도 창설됐다. 주요 탄광들은 2개의 관리국으로 통합됐다. 1945년 11월27일 평안남북도, 황해도, 강원도의 50개 탄광을 망라해 서선석탄관리국이 창설됐다. 12월11일 함경북도의 78개 탄광을 관리하는 12개 탄광관리소를 통합해 북선석탄관리국이 창설됐다. 전력산업의 지도를 위해 북조선전기주식회사가 창설됐다. 이 회사에는 일체의 발전소, 변전소, 송전선, 배전망이 망라됐다.

    소련으로 반출된 공업설비

    1945년 11월에는 소련으로 반출할 공업제품을 생산할 목적으로 중공업 기업소의 복구와 가동이 시작됐다. 1945년 11월15일에서 1946년 5월1일까지 24개의 광업기업소, 5개의 유색금속공장, 2개의 흑색 금속공장, 흥남화학공장, 2개의 전극·카바이트 생산 공장, 3개의 화학공장 등 38개의 중공업 기업소가 복구돼 가동됐다.

    기업소가 복구 가동되면서 북한 상품의 반출이 시작됐다. 1946년 5월1일까지 3460만엔의 전리품과 신상품이 소련으로 반출됐다. 반출된 제품 중에는 ①1500kg의 금과 5t의 은이 함유된 4261t의 구리와 납 광석 ②20t의 베릴륨 ③78t의 페로텅스텐 ④1550t의 형석 ⑤454t의 흑연 ⑥1388t의 전해연 ⑦2.5t의 탄탈니오브가 포함됐다.



    1945년 11월 공업설비의 철거와 반출도 개시됐다. 소련 전문가들은 중공업 분야의 석탄 수요 감소에 따라 조업을 중단한 일부 석탄공업 기업소를 폐쇄하고, 모든 고가 장비를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할 것을 제안했다. 흑색금속공업 분야에서는 북한 공업과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연산 18만t 규모의 설비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해 소련으로 반출할 것과 5개의 알루미늄 공장 가운데 4개를 철거할 것도 주문했다.

    당시 소련으로 반출된 공업설비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소련군에 의한 공업설비의 철거와 반출이 매우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전개된 것은 분명하다. 공업설비의 철거는 생산제품의 판로를 대부분 수출에 의존하고 조업에 필수적인 원료가 현지에서 충족되지 않는, 비교적 발전되고 현대적인 공장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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