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역사학계의 진보진영과 보수진영 간에 피할 수 없는 논쟁의 서막이 올랐다. 9월29일 연세대에서 ‘한국의 국사학계와 국사교과서 편찬,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열린 ‘교과서포럼’ 심포지엄에서 건국대 이주영(李柱·63) 교수가 국내 진보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강만길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장,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이만열 전 숙명여대 교수 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역사학을 실증주의적 순수학문으로 바라보는 보수학파와 현실참여적인 학문으로 접근하는 진보학파 간 논쟁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이 교수의 비판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격이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시작될 전망이다. ‘신동아’는 향후 전개될 양측의 논쟁에서 이 교수의 발표문 ‘한국 국사학계의 인식론적 토대에 대한 재검토 (근현대사 연구를 중심으로)’가 중요한 텍스트라는 판단에 따라 본인의 양해를 얻어 요약해 싣는다.
9월2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교과서 포럼에 참석해 토론중인 역사학자들. 왼쪽부터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이주영 건국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
그런데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역사학계에는 민족의 자주화, 민주화, 통일을 강조하는 새로운 학파가 부각되면서 역사학의 역할과 위상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역사 지식이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역사학을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김대중 정부의 ‘제2 건국’ ‘제주 4·3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의지 표명’ ‘백범기념관 건립 지원’ 등은 역사 지식이 사회변혁의 수단을 넘어 정권의 성격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 가운데 백범기념관 건립을 지원한 것은 백범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흐름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친일행위를 비롯한 과거사 진상조사’는 경우에 따라서 역사 지식이 한 사회 세력의 다른 사회 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위한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정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경비 일부(언론보도에 따르면 5억원)를 지원받아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면서 일으킨 사회적 파장에서 확인된다. 3000여 명의 명단 가운데는 자유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켰던 인사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 역사 지식이 국가의 성격과 진로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역사학이 최근 화두로 떠오른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와 결코 무관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 논문은 ‘정말 그럴까’ 하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해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그 대안을 마련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만족할 만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국사학계 전반에 걸친 종합적인 검토가 있어야겠지만, 발표자의 역량 부족으로 근현대사 분야, 특히 현대사 분야에 한정하고자 한다.
무섭게 떠오른 ‘민중사학’
역사학의 역할과 위상의 변화는 1980년대 초 대학원생 연령대의 급진적인 젊은 연구자들이 기존의 역사연구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면서 그들이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민중(民衆)사학’이다. 그것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시각에서 현재의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학풍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으로 불렀다.
그들은 기성학회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망원한국사연구실’(1984), ‘구로역사연구소’(1988) 같은 학회를 조직하는 한편, ‘역사와 현실(한국역사연구회)’ ‘역사비평(역사문제연구소)’ ‘역사연구(역사학연구소)’ 같은 학술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사회의식과 학문적 열정이 매우 강한 그들이 국사학계 내부에 미치는 영향력은 급속도로 커져 갔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민주적 변혁과 분단의 자주적 극복을 목표로 내세우고 그것을 실천할 주체로 민중을 설정했다. 또 개항 이후의 한국 역사를 반봉건적 근대화와 반제국주의적 자주화를 위한 농민,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의 민중항쟁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들은 연구 과정에서 ‘유물사관’이나 ‘사회구성체 이론’을 도입하는 실험도 했다. 그런 까닭에 조심을 미덕처럼 여기던 기성학자의 눈에 그들은 무서운 젊은이들로 보였다. 이러한 민중주의적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한국 민중사’ 시리즈가 나왔고, 뒤이어 그 책을 제작한 풀빛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민주화운동이 더욱 거세지면서 젊은 연구자들의 관심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이후의 현대사 연구로 옮겨졌다. 연구 주제는 민주화운동의 참여 과정에서 찾아졌고, 거기서 나온 연구 결과는 다시 민주화운동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됐다.
그들의 의기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동유럽의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한풀 꺾기는 듯했다. 그러나 남북해빙 무드가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렸다. 1990년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고, 1994년에는 김영삼 정부에 의해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됐다. 2000년에는 김대중 정부에 의해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6·15선언이 채택됨으로써 한반도는 곧 통일이 될 것 같은 흥분에 빠져들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타고 ‘민중사학’은 ‘통일사학’으로 변신을 꾀했다. 젊은 연구자들의 실천적 과제는 ‘민중이 주체가 된 민족 통일’로 바뀌었고, 연구대상은 광복 직후 분단에 반대하고 통일을 주창했던 김규식, 김구, 여운형 같은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 그리고 좌익인사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과연 어떤 사상적 체계를 마련한 것일까.
민중-전통사학 공통분모는 민족주의
그들의 사상적 체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글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학문에 뛰어든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대부분 특정 주제의 탐구에만 집중됐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과 생각이 통한다고 생각되는 몇몇 원로 국사학자의 세련된 글을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사상과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원로 국사학자인 강만길 교수는 일찍이 1970년대부터 기존의 국사학이 분단 현실을 외면하는, 분단체제를 정착·지속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빗나간 학문’이라고 비판해왔다. 그 대안으로 그는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사론’, 즉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지도 원리로서 올바른 민족주의를 수립하고 그러한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국사학을 제안했다.
또 다른 원로 사학자인 조동걸 교수는 “역사학이 이제 더는 연구실만 지키는 학문에 머물지 말고, 문을 열고 현실참여의 학문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사를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주변사가 되지 않도록 ‘한국사적인’ 관점에서 볼 것을 촉구했다. 반대로 남북분단과 6·25전쟁 연구는 통일에 대한 애정과 염원이 없는 외국학자들의 ‘외국사적’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조 교수는 그 대안의 하나로 해방 직후 분단에 반대했던 남북협상파와 남북연석회에 대한 연구를 제시했다. 더불어 북한에 대한 연구는 물론, 북한 역사를 초·중등학교에서 교육할 것도 강조했다. 그것이 북한과의 민족 공동체의식을 유지하는 불가결의 조건이고, 분단 후 세대가 북한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민족의식을 유지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감상적인, 따라서 비현실적인 민족주의적 감정이 엿보인다.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의 발언 중 일부다.
“한(조선)민족 전체가 북한의 주인으로서, 가령 식량지원 같은 것도 역사적·민족적 공동의식 위에서 국민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래야 후세에 민족적 죄인의 길을 가지 않을 뿐 아니라 통일이 달성될 시점에서 우리 민족이 북한의 주인이라는 민족의식과 국제적 발언권을 행사할 힘을 가질 수 있다.”
이 같은 ‘민중-통일사학’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롭게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전통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존의 한국사 연구 풍토가 민족주의의 토대 위에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나온 것이다. 즉, 민중-통일사학과 전통사학은 민족주의를 공통분모로 연계돼 있었다.
이 사실은 1969년 말에 한우근, 이기백, 이우성, 김용섭 네 사람이 공동 연구한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 방향’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그들은 국사 교육의 목표를 ▲민족 주체성 살리기 ▲세계사적 시야 확보 ▲내재적 발전방향 파악 ▲인간 중심의 생동하는 역사 서술 ▲민중의 활동과 참여 부각 등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의 국사 우대 정책도 민족주의를 조장하는 데 한몫했다. 박 정권이 지식인과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이론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민족 주체성과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 결과 각급 학교에서 국사교육이 강화되고, 대학에서도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선정했다. 언론도 ‘국학 붐’에 일정하게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신채호의 ‘민족사학’이 신성시되고, ‘민족주의’라는 대의명분은 어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절대선(善)이 되고 말았다.
민족주의 목표는 통일국가
민중-통일사학의 첫 번째 특징은 민족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인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이란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본다는 것이다.
강만길 교수는 “역사학이 그와 같은 ‘현재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통일에 도움이 될 사실(史實)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만열 교수는 “한국현대사는 분단이 고착화된 역사이자, 이를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려는 투쟁의 역사였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가 의미를 둔 부분은 정부보다는 민간인 사이에서 일어난 통일운동이다. 때문에 그는 1950년대 자유당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대항해 평화통일론을 내세운 김낙중과 조봉암의 노력과 4·19혁명 당시 남북교류와 판문점 학생회담을 추진한 혁명대열의 학생들을 높이 평가했다. 이들이야말로 분단 국가주의를 통일 민족주의로 바꾸어놓은 주역이라는 것.
이 교수는 이처럼 ‘진정한 민주적 통일운동’이 평화통일운동,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으로 이어지면서 민족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분석한다. 이런 흐름은 다시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민족·자주적 통일운동이 대중화되는 단계로 접어들도록 이끌었다는 게 이 교수의 시각이다.
이 교수는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와 자주화 그리고 민족 통일이 별개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집약된 운동이었고, 그것은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결실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개신교의 진보적인 연합단체인 한국교회협의회(NCC)가 1988년에 미군 철수와 외세 배제에 대한 요구가 포함된 ‘통일선언’을 발표하고, 그에 따라 1990년대에 교회가 북한돕기운동을 주도한 데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에 대해서도 통일운동을 민중 속으로 확산시킴으로써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상과제로 올려놓은 공로가 있다고 인정했다.
원로사학자 3인의 잘못된 인식
하지만 이들 원로교수 3인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하나는 ‘실제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 기본원칙에서 크게 벗어나 역사학을 명분과 희망, 염원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 위에 올려놨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학은 아무 쓸모없는 비현실적인 것이 될 위험성이 크고, 자칫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영역에서 희망을 찾는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현재 통일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의 대상일 뿐인데 그것을 향후 역사 연구의 초점으로 삼는다면 ‘실제 일어난 일’을 연구자의 희망에 따라 곡해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통일의 가능성을 찾는 데 집착하다 보니 해방 직후의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그러한 과대평가는 그들의 의견에 따랐더라면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운 감정으로 남는 것이다. 오늘날 김구, 김규식, 여운형 같은 중도적 인물이 추앙받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역사 인식의 산물이다.
하지만 ‘실제 일어난 일’의 관점에서 해방 직후의 현실을 보면 좌우합작파나 남북협상파에 희망을 거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게 된다. 그런 희망의 실현은 ‘힘의 문제’와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소련은 이미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이 이정식 교수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미국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1947년 여름부터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외세의 그러한 계획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우리에게 힘이 없었다는 것은 광복 당시 임시정부에 소속된 광복군의 숫자가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좌우합작파와 남북협상파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의 결함은 민중-통일사학이 한반도 분단과 통일의 ‘문명사적’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천년 동안 한반도에 출현했던 국가들은 대부분 중국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 임진왜란과 임오군란처럼 국가안보가 위태로울 때는 중국에 군사적으로 의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구도는 1945년의 광복과 함께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북한은 옛날처럼 중국 대륙문명권의 영향을 받아 집단주의적, 공동체주의적인 생활방식에 따라 살았지만, 남한은 대륙과의 관계를 끊고 낯선 미국의 해양문명권에 포함됐다. 이 같은 문명사적 전환 과정에 이승만이 결정적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방임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에 적응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60년 동안 북한사회가 비교적 조용했던 것과 달리, 남한사회가 격동을 거듭했던 것은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뒤따른 진통이었다. 그 진통의 대가로 대한민국은 반세기 만에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이 35달러에서 1만달러로 높아졌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올해 광복 60주년을 맞아 정부와 시민단체들은 경축사를 통해 그러한 국가적 성공을 이룩한 한민족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 기적을 이뤄낸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지, 한민족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민공화국 국민은 그러한 성공에 기여한 적이 전혀 없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한민국은 점차 해양문명권을 벗어나 옛날처럼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한다. 그것은 중국 유학생 숫자가 미국 유학생 숫자를 능가하고, 집권당 국회의원들이 유사시의 의존 대상 강대국으로 미국보다 중국을 선호한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국민은 여전히 해양문명권의 생활방식을 상당 부분 견지하고 있어 ‘문명충돌’ ‘문화전쟁’의 상태를 느끼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남북문제는 두 국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두 문명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현대사 연구는 이같은 사실을 외면한 채 이뤄져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은 민족자주화 장애물?
8월29일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위원들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1차 예정자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그 책임 추궁 대상 중의 하나가 인촌 김성수와 그를 둘러싼 한민당 세력이다. 이른바 동아일보 오보(誤報) 사건이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는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간 신탁통치한 다음 독립시킨다고 결정했는데, 동아일보가 이를 보도하면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계획을 뒤로 돌리고 신탁통치만을 부각함으로써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불을 붙였다고 분석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와해되고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치닫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민중-통일사학자들에게는 이승만과 그를 지지한 친일파도 책임추궁의 대상이다. 1948년 9월 제헌국회가 반민족적·반민주적 사상, 습관, 태도를 가진 친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실패했다는 이유다. 그리고 그 결과 친일파 인물들은 면죄부를 받은 반면, 민중의 한(恨)은 풀리지 못했고 사회정의 확립은 물론 식민지 문화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채 민족문화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미국도 책임 추궁의 대상에 포함돼 있다. 이만열 교수는 “미국은 해방 후 남한 정부나 인사들의 어떤 민족 자주적 역할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미 군정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 선생의 주석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건국준비위원회’도 무시했다. 또한 1947년 7월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들이 친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부일, 반역,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을 제정했으나 미 군정장관 러치는 4개월여를 끌다가 그해 11월에 가서야 그 법의 인준보류를 통지함으로써 흐지부지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휴전 후 지금까지 미군이 우리 땅에 주둔한 것 자체가 민족의 자주성에 대한 제약이라는 게 이 교수의 인식이다.
명분에 집착한 편향된 시각
미국을 자주화의 방해물로 보는 태도는 젊은 연구자들에게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한 젊은 사학자의 주장 중 일부다.
“유의해야 할 문제는 해방공간에서 좌우를 나누는 기준이 미국에 대한 태도 여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정치 지형은 좌우 대립이었다기보다 오히려 민족 대 반민족의 계선(界線)이 분명했으며, 그것이 기본축이었다.”
미국을 지지하면 반민족이고 미국을 반대하면 자주라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군을 비판한 연구는 눈에 별로 띄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한민족을 속국으로 보고 주권을 침해해왔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에 개입해 한국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중국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도 별로 없다. 또한 일제로부터 한반도가 해방된 일차적인 원인이 미국에 의한 일본의 패전인 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 연구물이나 책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련군이 한반도로 먼저 진주한 사실을 부각함으로써 마치 일본이 소련에 항복해 한민족이 해방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분단 책동 세력에는 경찰과 군인도 포함된다. 그것은 광복 직후와 6·25전쟁 중에 남한의 경찰과 군대에 의한 이른바 ‘양민학살’에 관한 연구가 많이 나오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반면 좌익과 북한군의 ‘양민학살’에 관한 글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발표자가 확인한 글은 단 1편에 불과하다. 최근 발간된 대중용 한국현대사 책도 6·25전쟁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전쟁 당시 민간인 피해를 서술하면서 저자는 국군에 의한 집단 학살을 22줄에 걸쳐 설명하면서도 좌익에 의한 학살은 간단히 1줄로 처리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국군을 미국의 용병이라고 주장한 연구도 있다. 그것은 “한국군은 미국이 지급하는 전투 수당을 받고 참전했다”는 미국 내 진보적인 정치인 풀브라이트 상원 의원의 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처럼 편향된 시각은 역사적 사실에 ‘실제 일어난 일’을 근거로 접근하기보다는 자주성이나 정통성, 통일 같은 추상적인 명분에 집착한 데서 빚어진 현상이다. 그런 현상은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즉,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각하려는 과정에서 그것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분까지 결부시키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제헌헌법에 임시정부는 없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은 반공·자유주의 국가로 출발했다. 그것을 세우는 데 주도적으로 일한 사람들 가운데는 독립운동가도 있지만, 일본인 밑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미 군정 상황에서 성장한 엘리트도 있다. 그들이 친일적, 친미적인 성향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엘리트는 전문 지식을 가진 관료, 군인, 기업가, 교육자, 기술자, 종교인, 예술인들로서 신생국의 생존에 꼭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이와는 달리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 정부였다. 건국 초기 반공법(국가보안법)을 제정한 대한민국의 성격과 많이 달랐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 군정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따라서 1948년의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가 빠져 있다. 대신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대한민국의 연원이 임시정부가 아닌, 3·1운동에 있음을 명시했다. 제5차, 제7차, 제8차 개헌에서도 임시정부에 관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헌법에 들어간 것은 1987년 6·29선언 직후인 10월 제9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을 때다(87년 체제). 이런 점에서 볼 때 임시정부의 헌법과 제헌헌법을 비롯한 오늘날의 헌법 사이에 법적 연관성은 사실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얼마 전 어느 젊은 학자가 논문에서 제기한 국군의 날 변경 제안은 근거가 없다. 국군의 날은 6·25전쟁 당시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한 10월1일로 되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창설된 9월15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토대를 둔 주장이 아니다. 광복군은 좌우합작 정부인 임시정부의 정규군이고 국군은 반공정부인 대한민국 정부의 정규군이다. 서로 간에 직접 연관이 없다. 이는 민족의 자주성, 정통성과 같은 추상적 명분에 사로잡혀서는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중-통일사학의 세 번째 특징은 민주화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 나온 연구물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와 근대화는 민족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인 통일 민족국가가 세워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강만길 교수가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현재의 분단시대를 ‘불행한 시대’로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 교수는 “국민주권이 달성되지 못한 시기에는 올바른 의미의 근대화도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민족주의에는 진보적인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보는 시각은 구한말 일본에 대항해 싸운 위정척사파,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왕실의 부활을 위해 싸운 복벽운동파를 민족주의 운동에서 제외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들이 수구적이고 복고적인 세력으로서, 진보적인 요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주제를 옹호한,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주역들도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민족주의 운동에서 제외됐다.
강 교수의 그런 시각은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도 부정한다. 독재정부 밑에서 진정한 발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군 출신 박정희를 수뇌로 한 정권은 친일파 숙청을 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정치·사회·문화적 민주주의도 전진시킬 수 없었으며, 경제건설에 주력한다고 했지만 민주적 경제체제가 아닌 극심한 재벌 중심 경제체제를 수립했다. 옳은 의미의 평화통일을 추진할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이 역사적 정통성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다 민주적인 세력이 산업화를 추진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양성된 우리의 민족적 저력이 군벌과 재벌의 유착에 익숙해진 구일본군 출신이 아닌 다른 지도력에 의해 더 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이 바람직했음은 물론이다. 비록 그 속도를 다소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경제건설을 이룩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강 교수는 그러면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을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공로를 민족 전체에 돌리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1960년대의 경제성장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식민지 시기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결과가 아니라 중세시대부터 쌓인 우리 민족사회의 문화역량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나 산업화는 민주화된 사회에서만 이루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독재국가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또 민주화, 근대화의 문제를 통일국가의 문제와 결부시켜 설명하는 것도 잘못이다. 통일국가가 건설됐다고 해서 반드시 근대화와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통일·근대화·산업화·민주화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이데올로기 없는 민중-통일사학
현재 민족주의 운동은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국가가 세워졌을 때 그 성격을 형성할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통일국가라는 그릇에 담을 내용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물은 일관성 있는 이념 체계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 정책, 생활방식, 가치관 등이다. 따라서 민족주의 운동이 그러한 내용물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파시즘과 같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결합돼야 한다. 19세기 초 유럽의 민족주의 운동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됐기 때문에 그것이 장차 세울 통일국가에는 개인의 기본권, 헌법, 대의제도, 사유재산 제도, 자유방임적 경제정책, 정치와 종교의 분리 등과 같은 프로그램이 포함될 것을 예고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민중-통일사학이 내세우는 민족주의에는 아직 그것과 결합될 이데올로기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민주화, 자주화, 근대화, 산업화 같은 좋은 내용을 모두 갖춘 것으로 보이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민족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통일국가만 이룩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민중-통일사학이 말하는 민족주의는 민중주의(Populism)와 결합된 ‘민중주의적 민족주의’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힘을 가진 엘리트에 대한 힘없는 민중의 저항의식을 표현하는 민중주의 또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못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할 수 없다.
물론 민중-통일사학의 민족주의가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결합돼 있으면서도 아직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실제 그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관련 역사학자들의 발언도 있다. “우리가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겠지만 오늘 현대사 연구의 목적과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말처럼.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내놓고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통일이 되면 근대화·민주화가 이뤄지고, 근대화·민주화가 되면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 없는 주장이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은 제각기 거대한 미국의 해양문명권과 중국의 대륙문명권에 속해 있다. 따라서 두 국가간의 문제는 통일, 자주화, 민주화와 같은 명분의 문제만으로 설명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양태를 결정하는 생활방식, 즉 문화와 문명의 문제로도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은 두 국가의 ‘현재적 요구’의 구체적인 내용이 서로 다른 사실에서 확인된다. 인민공화국 국민의 ‘현재적 요구’는 그 국민이 굶주리지 않고 개인적 자유를 얻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현재적 요구’는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적 갈등 요인을 줄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두 국민 사이에는 ‘공통된 언어’와 ‘공통된 과거’는 있어도 ‘공통된 현재의 요구’, 즉 ‘공통된 이해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한국현대사 연구는 바로 이와 같은 분단체제의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실증주의 전통사학으로 돌아가라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는 후진국인 중국과 북한에 호의적이면 진보적이고,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에 호의적이면 수구적이라고 보는 희한한 풍조가 널리 퍼져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비현실주의적이면서 관념주의적이고 감상주의적인 방향으로 쏠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우리 국민이 주체성, 민족, 통일, 민중, 민주화, 정통성, 반제, 반봉건, 내적 발전과 같은 추상적인 용어가 뿜어내는 명분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데는 민중-통일사학을 포함한 국사학계 전체에 책임이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국사학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 위기’를 가져온 데 기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우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사학계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로 생각된다.
첫째는 국사학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밝히고 서술하는 역사학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그것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건 고(故) 이병도 교수가 세워놓은 ‘실증사학’ ‘문헌고증학’의 전통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앞으로 문화가 더욱 더 강조되는 시대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러한 전통적인 방법의 역사 연구는 더욱 더 커져가는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국사학자가 가지게 될 감정은 맹목적이고 모호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 문화유산의 연구와 보급에 대해 사명을 느끼는 애국심이다.
둘째는 국사학이 사회주의를 제외한 뚜렷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고 그 위에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학파를 형성하는 것이다. 민중-통일사학에 속한 연구자들을 보면 연구 열정은 있지만 뚜렷한 이데올로기와 구체적인 프로그램 없이 연구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그들의 글에서는 어떤 분위기는 있지만 그것이 앞으로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글의 결론을“이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때”라는 막연한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기성의 권위는 무너뜨리지만 그것을 대신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갖지 못한 서유럽과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식인들을 연상시킨다.
‘자유주의 사학’으로
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발표자는 ‘자유주의 사학’의 출범을 제안한다. 자유주의 사학이란, 개인의 자유와 자기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역사학을 말한다. 그것은 구한말 서양문명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에 의해 인식되기 시작해 맥을 이어오다가 대한민국에 이르러 자유와 번영을 가져다줄 정도로 성장한 ‘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대한민국의 정체를 옹호하는 역사학이 될 것이다.
자유주의 사학의 주된 대변자로서는 개화파 연구의 개척자인 이광린 교수를 지목하고자 한다. 자유주의 사학이 선명한 색깔을 내세우게 되면, 그것에 대립되는 학파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조건 민족주의라는 편리한 장벽 뒤에 몸을 숨기는 솔직하지 못한 행태는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발표자가 자유민주주의 대신 ‘자유주의’ 또는 ‘자유화’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것은 광복 이후부터 민주주의와 민주화란 말이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을 숨기는 용어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에서 자유주의가 진보주의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그것과의 혼동을 피할 필요가 있다면, ‘신자유주의 사학’, ‘자유방임주의 사학’ 또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사학’이란 말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