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입시에서 논술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교육 현장에 논술 붐이 일고 있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의 글쓰기 실태는 실로 참담한 수준이다. 인터넷 용어와 비속어 남발은 예사고,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지 않는 문장도 수두룩하다. 논리 전개와 정확한 문장 구사력도 부족하다. 그 배경에 체계적이지 못한 글쓰기 교육이 있다.
“요즘 ‘일진회’라는 애들이 나타나서 학교를 잡고 있다. 그러한 것들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 빌빌거리기만 한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이제 조그만 일에도 서로 싸우고 난리를 피운다. 학교에 평화라곤 찾아볼 수가 없게 되면서 왕따의 자살소식도 많이 들린다.” (고1 학생의 ‘평화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논술 중)
위의 글은 필자가 실제로 가르친 학생들이 쓴 글에서 뽑은 것이다. 이들의 학업 성적은 반에서 중상위권 수준이다. 위의 글은 같은 제목의 글 가운데 평균 수준의 점수를 받았다. “설마 중·고교생의 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필자는 한국 청소년의 일반적인 글쓰기 수준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최근 불어닥친 논술 붐과 함께 교육 현장에서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실제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은 심각하게 우려스러운 수준이다. 위의 중학생처럼 인터넷 채팅 용어를 남발하는 것은 ‘범세계적 현상’이니 그렇다고 쳐도 은어, 비어, 속어를 거리낌 없이 쓰고 맞춤법, 문장성분의 호응 같은 기본 문법을 제대로 알고 글을 쓰는 학생이 거의 없는 현실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문법을 기본으로 지키면서, 적절한 논리구사로 설득력 있는 글솜씨를 보이는 학생은 정말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문제는 학교 현장에서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1차적으로는 국어 과목에서 이를 다뤄야 하지만, 대부분 국어 교사들조차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못해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부 학교에서 논술 수업을 하고는 있으나 논술은 현재 중·고교의 정식 교과과목이 아니어서 입시를 위한 단기 주입식 교육에 치우쳐 있다. 그나마 대부분 외부에서 초빙된 학원 강사에게 의존하는 실정이다. 학생들의 글쓰기가 이렇듯 참담한 수준을 보이는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학생들의 글쓰기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능적인 문제와 내용의 문제다. 기능적인 문제는 어법을 제대로 지키고, 올바른 어휘를 구사해 정확한 문장을 쓰는가를 말한다. 내용의 문제는 깊은 사고와 적절한 논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가이다.
기본 문법도 실종
요즘 중·고교생의 글은 무엇보다 기능적인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문장의 기본 요건은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이다. 그런데 주술 호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그 의미를 올바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학생들의 문장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특히 국어는 주어 다음에 바로 서술어가 나오는 영어와 달리 주어와 서술어가 각각 문장의 맨앞과 맨뒤에 자리잡기 때문에 두 성분을 호응시키기 어려운 편이긴 하다. 그렇긴 해도 아예 처음부터 이런 호응을 무시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일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문명의 이기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그녀와 이별한 것은 슬픔이었다’는 모두 주술 호응에 문제가 있는 문장이다(각각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슬픈 일이었다’가 맞는 표현이다). 중·고생의 논술을 보면 이처럼 주술 호응이 잘못된 문장이 1000자 정도 길이의 글에서 평균 5개 이상 발견된다. 결국 글쓰기의 기본이 안 돼 있다는 얘기다. 학생들과 상담해보면 이런 어법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숙달이 안 되니 오류가 잦고 교정을 받지 못하니 잘못된 줄도 모르고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들은 영어와 달리 국어의 문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모국어니까 자연스럽게 문법이 몸에 배인 측면이 크게 작용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말이 영어 등 서구어에 비해 문법이 단순하며 또한 규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 같다. 영어에서는 명령문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주어가 생략되는 법이 거의 없다. 또 대명사 같은 지시어를 매우 엄격하게 적용한다. 시제나 복수 표현도 철저하게 지킨다.
반면 우리말은 상대적으로 매우 관대한 편이다. 주어가 생략돼도 문맥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없으면 과감하게 빼버린다. 예를 들어 ‘정부는 지진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에 지원금을 보내기로 했다. 의료진도 파견할 예정이다’는 문장에서 뒷부분은 주어가 없지만 어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영어에서는 세상 없어도 주어를 써야 한다.
시제는 또 어떤가. 영어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기본 시제에 완료형, 진행형까지 있지만 우리말은 훨씬 간단하다. 심지어 한 단어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표현할 수도 있다. ‘간다(go)’라는 동사를 예로 들어보자. ‘철수가 어제 교회에 가는데, 영이가 말을 걸었다’(과거), ‘철수는 지금 교회에 간다’(현재), ‘내일은 일요일이어서 철수는 교회에 간다’(미래)의 세 문장은 모두 문법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단수, 복수도 엄격하게 따지지 않는다. ‘최명희의 소설에는 주옥 같은 고유어가 많이 사용됐다’고 하면 되지, 굳이 ‘최명희의 소설들에는’이라고 복수임을 드러내면 오히려 어색해지는 것이다.
‘거시기식 글쓰기’
많은 학자는 이를 두고 서구식 합리주의와 다른 동양 문화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국어 어법이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제의 경우 우리말에서는 위 문장들처럼 ‘어제’ ‘지금’ ‘내일’처럼 시제를 알 수 있는 단어가 있으니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또 ‘많은’ 이라는 단어로 복수임을 알 수 있으면 굳이 복수 접미사까지 붙여 문장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는다.
이처럼 어법에 관한 한 국어가 영어보다 유연하며 관용적일 뿐만 아니라 합리성 측면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문제는 이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많은 학생이 우리글을 쓸 때 적당히 넘어가려는 ‘대충주의’에 빠진다는 점이다. 즉 의미만 대충 통하면 적당히 써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널리 펴져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한국제품 불법 복제율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어 해외시장 개척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쓴 한 학생의 문장을 보자. 형식상으로 따지면 ‘해외시장 개척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부분의 주어는 ‘불법 복제율’이 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복제율이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발목을 잡는 것은 ‘불법 복제율’이 아닌 ‘불법 복제’이므로 위 문장의 ‘해외시장’ 앞에 ‘불법 복제가’란 말을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 이 문장을 쓴 학생은 “생략해도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데, 글은 말과 달라서 엄밀함을 더욱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번은 학생들에게 ‘우리가 한글과 다른 문자들을 비교해볼 때 매우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임을 알 수 있다’는 문장에서 틀린 부분을 찾아보라고 했더니 답을 제대로 지적하는 학생은 열에 한 명꼴도 되지 않았다. ‘매우’ 앞에 주어 ‘한글이’를 반드시 써줘야 정확한 문장인데도 학생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를 생략해도 의미가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글에는 더 나아가 의미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표현도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이는 중·고생에만 해당되지 않는 전반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확한 단어를 써야 하는데도 대명사를 사용하는 바람에 정확한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표적이다.
‘황산벌’이란 영화에서는 계백 장군이 “우리의 전략 전술의 ‘거시기’는 ‘뭐시기’할 때까지 갑옷을 ‘거시기’한다”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말을 해석하기 위해 신라(같은 민족 아닌가!) 진영에서는 연일 작전회의를 여는 우스개 장면이 나온다. 이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일상, 글쓰기에서도 이런 유의 ‘거시기식 글쓰기’가 자주 나타난다.
‘철수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이 의아스럽다’는 표현을 보자. 여기서 대명사 ‘것’은 완전히 ‘거시기’가 돼 버렸다. 왜냐하면 ‘것’을 씀으로 인해 이 문장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우선 ‘철수의 (텔레비전) 보는 자세가 이상하다’는 뜻일 수 있고 아니면 ‘밤도 아닌 벌건 대낮에 보는 것이 이상하다’나 ‘시험기간임에도 공부를 안 하고 텔레비전이나 보는 한심한 모습이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모호함이 나타난 이유는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야 할 부분에 ‘것’이란 단어를 사용해 의미를 흐려버렸기 때문이다.
문법상으로는 별문제가 없지만 이해를 어렵게 하는 이런 식의 표현은 숱하게 많다. ‘정부가 언론보도에 대해 중재를 신청한 사건이 지난해 20건에서 올해는 50건으로 늘어났다. 이는 정부와 언론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문장도 ‘정부와 언론이 얼마나 갈등관계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는 식으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문장간의 논리관계가 선명해야 하는데 이를 얼버무리는 경우도 매우 많다. ‘어제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결석을 했다’는 문장을 보자.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이다. 경찰에 신고하고 뒷수습을 해야 하느라 결석했는지, 아니면 도둑에게 충격을 받아 쓰러진 어머니를 병간호하느라고 그랬는지, 또는 통학수단인 자동차를 도난당했기 때문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논리적 전개의 중요성
논술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만큼, 학교 정규과정에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또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부족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미국, 유럽에서는 논리적 추론 교육이 우리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대학(원) 입시 등 각종 시험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반면 우리는 이런 교육이 아직 걸음마 단계다. 논리력을 주로 측정하는 PSAT(공직적성시험)도 최근에야 고시에 도입된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체계적인 논리력 훈련을 받지 못해 글쓰기에서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힘이 달리게 된다. 창의력이 뛰어난 글이 적은 것도 대개는 창의성을 뒷받침해주는 논리의 부족 때문이다.
얼마 전 ‘매일 아침밥을 먹는 대입 수험생들의 수능 성적이 1주일에 이틀 이하만 밥을 먹는 수험생보다 평균 19점이 높았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매일 아침밥을 먹어야 성적이 오른다는 게 이 보도의 핵심이었다. 당연한 상식 같지만 이 보도에는 논리적으로 함정이 있다. 물론 아침식사를 할 경우 뇌가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매일 아침밥을 먹는 수험생과 아침을 거르는 수험생을 똑같이 비교할 수 있을까.
통상 모범생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므로 제때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반면 밤새워 게임에 몰두하는 등 ‘딴 짓’을 많이 하거나 부모의 체계적인 뒷바라지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은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을 것이다. 따라서 ‘매일 아침밥을 먹어야 성적이 오른다’는 가설만큼 ‘원래 성적 좋은 학생들은 아침밥을 제대로 먹게 마련이다’는 가설 또한 무시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결국 설득력 있는 비교가 되려면 똑같은 학생이 아침밥을 규칙적으로 먹다가 중단하는 경우나 반대의 사례를 따져보는 게 더 타당한 조사일 것이다(물론 필자도 규칙적인 아침식사가 성적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또 한 예로 ‘아침에 조깅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수명이 길다’는 통계조사 결과가 있다면 상식으로 이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사람은 대개 건강에 신경을 쓰므로 술·담배도 적게 할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조깅이 장수에 도움이 되는지, 술·담배를 안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식의 발상 전환도 필요하다. 필자는 이런 논리적 사고가 학생들의 글쓰기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불행히도 교육 현장에서 이런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주관적 의견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흑백논리나 극단적 사고방식도 청소년 글쓰기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본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를 다뤘는데, 찬반론자들이 서로 반대편을 ‘극우 보수주의자’ ‘극좌 친북론자’로 비난했다.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자는 사람을 단순히 친북론자로 매도하는 것이 논리적 비약이듯이, 동상을 지키자는 사람을 모두 극우 보수로 매도하는 것 역시 흑백논리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단순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게 현실이다.
최근 한미 관계에 대한 고교생들의 논술을 보니 상당수 학생이 미군 장갑차에 의한 효순, 미선양 사망사건을 거론하며 가해 미군을 ‘살인마’라고 표현했다. 당시 재판에서 고의적인 사고임이 밝혀지지 않았던 이상 ‘살인마’라는 말은 정치적 격문이 아닌 논술에서는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런데도 많은 학생이 주저 없이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또한 ‘적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괴롭히거나 불법을 저지른다’고 표현해야 마땅한 것을, ‘적지 않은’을 빼고 일반화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 또한 일도양단(一刀兩斷)의 선명한 자세를 보이려는 데 집착하기 때문이다.
‘원조 진짜 순 참기름’?
흑백논리, 극단적 사고는 당연히 과장된 표현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말의 격을 떨어뜨리는 이런 자극적인 표현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국내에서 공연된 ‘니벨룽의 반지’는 총 공연시간이 18시간이어서 과거엔 ‘마라톤 오페라’란 별칭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울트라 슈퍼 마라톤 대장정 오페라’로 업그레이드됐다. 마치 동네 기름집들 간에 경쟁이 붙는 바람에 간판의 참기름이 ‘순 참기름’ ‘진짜 순 참기름’ ‘원조 진짜 순 참기름’으로 바뀌었다는 우스개를 연상케 한다.
우리 사회의 ‘대의명분주의’도 알맹이 없는 글을 양산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명분만 내세우니 ‘공자 말씀’으로 흐르고 결국 하나마나한 얘기로 귀결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핵 문제에 대한 논술에서 ‘하루 빨리 국가간의 협력이 이루어져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처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거나 남북한 문제에 대해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더 많이 추진해 통일을 이루자’로 마무리하는 식의 뻔한 글들이 남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사 하나로 달라지는 맛
앞서 우리 문법이 크게 복잡하지 않다고 설명했는데, 대신에 우리말은 조사가 발달해 이를 익히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조사는 다양한 구사에 따라 영어에는 없는 맛깔스러운 표현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글의 필수적인 조미료라 할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한 예로 ‘삼식이가 삼순이를 사랑한다’와 ‘삼식이는 삼순이를 사랑한다’는 두 문장은 조사 하나 차이지만 뉘앙스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즉 앞 문장은 단순한 사실의 표현이지만, 뒷 문장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삼순이를 사랑하지 않아도 삼식이만은 삼순이를 사랑한다’는 뉘앙스까지 담고 있다. 이렇듯 국어의 오묘한 맛을 살리는 글쓰기 훈련이 집중돼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 중·고생을 상대로 국내의 가장 우수한 문화재가 무엇이냐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훈민정음’이 1위로 꼽혔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각에서 국보 1호를 한글로 정하자는 주장도 제기하는 등 한글 재평가 움직임도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의 문맹률이 세계 최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배우기 쉬운 한글 덕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의 국어 능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란 조사 결과가 심심찮게 나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한글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그 가치는 한글을 도구로 한 글쓰기를 통해 발휘되는 것이다. 선진 문자를 갖고 있으면서도 글쓰기는 후진을 면치 못하는 현실에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진부한 속담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