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실크로드에 묻힌 조선족 화가 한낙연

  • 李鍾漢

    입력2005-11-11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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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에 묻힌 조선족 화가 한낙연
    광복 60주년을 맞은 올해, 덕수궁미술관에서는 8월말부터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보통 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제 강점기 중국땅에서 화가이자 고고학자, 나아가 혁명가로 활동하다 끝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뼈를 묻어버린 한낙연(韓樂然)을 기념하는 ‘광복 60주년 기념 한낙연 특별전’이 그것이다.

    그는 일제의 폭압을 피해 화폭 속으로 현실도피한 대부분의 당시 화가들과 달리 붓으로 일제에 저항한, 그리 흔치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광복이 된 지 반세기가 넘도록 그는 우리에게 잊힌 존재였다.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그의 이력 때문에 남과 북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복 전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연안파(延安派)’가 광복 후 남북 양쪽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나 비슷한 이유다.

    조국의 광복을 그토록 원했으면서도 광복 조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한낙연.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그림조차 그의 사후 반세기가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아직도 이 땅이 입은 분단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탓이다.

    반세기 만의 귀향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한낙연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중국과 수교 이후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는 둔황(敦煌)을 발빠르게 다녀온 사람들에게서다.



    “둔황 석굴 어딘가에 한낙연이란 조선족 화가가 남긴 글이 있대. 그 사람은 국공(國共)내전 시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둔황 벽화를 발굴한 공적을 중국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지금도 둔황 벽화 모사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명성을 따라올 이가 별로 없는가 봐.”

    그들도 한낙연에 대해 잘 알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둔황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를 그때만 하더라도 중국 대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필자에게 그들은 역사의 현장인 실크로드를 제 발로 걸어본 여행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은 과장된 듯한 그들의 여행담 도중에 나온 둔황 석굴 이야기는 그후 내게 한낙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시발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술이 깨고 나면 대개 잊히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시테크니 뭐니 해가면서 노동 강도가 점점 높아가는 현대인의 생활에서 자신의 현실적 이익과 별 관련이 없는 대상에 관심을 오래 둘 여유는 별로 없었다.

    다만 한번쯤 그들이 말한 것처럼 환한 보름달빛 아래에서 모래사막을 거닐고 싶은 꿈만은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도 한번 가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중국에서도 오지 중 오지인 그곳에서 1940년대 중반부터 고대 석굴의 벽화 발굴을 주도했다는 그가 누구인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를 찾아가는 작업은 생각마냥 쉽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는 제법 진행되고 있었지만 임시정부나 김산(金山)을 비롯한 몇몇 특별한 인물에 국한됐을 뿐, 특히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에 대한 연구는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자료 부족이라는 현실적 장애에 부딪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서 누구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혼자 힘으로 이미 수십년의 세월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그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힘에 부쳤다. 그가 삶의 마지막을 보냈다는 둔황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무렵은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던 까닭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던 차에 잊고 있던 그가 다시 다가왔다.

    지난해 추석 무렵 베이징(北京)에서 중앙당학교 철학과에 재직 중인 최용수(崔龍水) 교수를 찾아뵌 적이 있다. 물론 그때의 취재 대상은 한낙연이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했던 다른 조선인 독립운동가였다. 인터뷰 도중에 우연히 한낙연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최 교수는 그에 대해서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전해주었다.

    “우리는 지금 그를 단순히 화가라고만 알고 있는데, 사실 한낙연은 현실을 떠나 그림만 그리던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에도 참여했고, 더 나아가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항일전을 수행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고자 했던 혁명가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붓으로 새로운 세상 꿈꾸다

    총이 아닌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고자 했다는 한낙연.

    최용수 교수도 한낙연이 중국에 알려진 것에 비해 정작 조국인 한국에서는 그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하긴 그런 인물이 어디 한둘이랴. 널리 알려진 스타에만 초점을 맞추는 세상 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서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동안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자료를 방 안에 풀어놓고 단 한순간도 살아보지 못한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의 모습을 그려보기로 했다.

    사실 한낙연의 그림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과 수교한 직후인 1993년 봄에 그의 유작전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도 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올해 개최된 한낙연의 유작전은 그때와는 다른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그동안 이념 대립으로 인해 인정되지 못했던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난 광복절, 국가보훈처는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중에서 공적이 인정되는 사람들에 대한 훈포장 명단을 발표했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독립운동의 공적이 명확했지만 그동안 이념적 제약으로 인해 훈포장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던,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Song of Ariran)’의 주인공인 김산을 비롯해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그 명단에 ‘한낙연’, 그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신문에 나온 그의 이름을 보면서 그를 찾아가는 내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념의 색안경을 벗고서 그의 진실된 모습을 세상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현실적 여건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라는 불리함을 딛고 중국인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며 화가로 혁명가로, 더 나아가 고고학자로 광활한 중국의 대지에서 활동하다 실크로드에 뼈를 묻은 그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마지막으로 삶을 불태웠던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이리라.

    1947년 비행기 추락사고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7월30일, 실크로드에 세워진 도시 우루무치(烏魯木齊)를 떠나 란저우(蘭州)로 향하던 국민당 소속 257호 비행기가 자위관(嘉틾關) 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광활한 중국대륙의 오지에서 일어난 이 추락사고는 자칫 긴박한 내전 상황 속에서 중국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영원히 묻힐 뻔했다. 하지만 그 비행기에 한낙연이 탑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국 문화계는 큰 슬픔에 빠졌다.

    당시 한낙연의 나이는 49세. 예술가로서 한창 성숙된 작업을 선보일 나이에 당한 그의 조난 소식은 중국 언론뿐 아니라 영국의 ‘더 타임스’ 등 외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 후 수색대가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했으나 그의 주검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실크로드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 발굴에 전심전력을 쏟아부은 그의 염원대로 자신이 사랑하던 그 땅에 영원히 묻힌 것이다.

    주검도 없이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평소 그를 알고 지내던 많은 인사가 참석했다. 화가이던 그의 장례식에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하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의 인물들까지 참석하자 자세한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장례식장에는 당시 국민당 서북 행영의 주임이던 장즈중(張治中)과 부주임 타오즈웨(陶峙岳) 장군이 보낸 만장(輓章)이 걸려 있었고, 한낙연이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렇듯 어느 한쪽이 아니고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양쪽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그의 죽음에 슬픔을 표시했다는 것은 꽤나 이례적이다. 더구나 당시 정국이 중국 대륙의 주인이 누가 되냐를 두고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무렵이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중국의 저명한 교수인 성청(盛成)은 한낙연을 가리켜 ‘중국의 피카소’라고 했다. 그것은 그만큼 중국 미술계에서 한낙연의 공적이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쏟아진 찬사와 달리 그는 살아 있을 때 중국 중앙화단에서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 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고 항일운동과 혁명사업에 투신해 혁명가로서의 임무에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

    명사들과의 교류

    양후청 장군은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전쟁터로 가는 대신 국민당의 특무기관에 의해 오랫동안 감금상태로 지내다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49년 9월 충칭(重慶)에서 국민당 요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죽을 줄 알면서도 조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런 애국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낙연은 10여 년 만에 중국에 도착했지만 처자식이 기다리는 룽징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항일근거지인 우한(武漢)으로 향한다. 그리고 피로를 풀 사이도 없이 동북항일구망총회(東北抗日救亡總會)의 선전과 연락사업을 담당한다. 그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외국 유학을 다녀온 미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상하이미술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그의 능력으로 볼 때 마음만 먹었다면 교수 자리 하나를 구하는 것은 당시 중국 상황으로 봐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이던 저우언라이의 지시를 직접 받고 있던 동북항일구망총회는 중국 관내 동북민들을 항일의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해 ‘반공(反攻)’이란 반월간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이후 이 잡지의 표지 그림에는 한낙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그와 함께 한낙연은 중국인의 항전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대형 걸개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가 그린 걸개그림 중 대표적인 것이 ‘전민항전’이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인사들과도 사귀게 된다. 이때 그가 교류한 사람으로는 유명인사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비롯해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해진 에드거 스노, 뉴질랜드 출신 작가로 누구보다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했던 레위 앨리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중국 기자로는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을 보도해서 유명해진 판창장(范長江) 등 진보적 중국 지식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야말로 동분서주하던 시기였다.

    혁명의 근거지, 옌안 방문

    당시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대장정을 끝낸 후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시작되면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속내는 각기 달랐지만 겉으로 보기엔 한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

    우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당시 중국공산당의 혁명 근거지인 옌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938년 10월 저우언라이와 궈머러(郭沫若)가 이끄는 정치부 제3청에서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예술인들의 옌안 참관 방문단을 조직했던 것이다. 그도 그중 한 사람으로 옌안을 방문했다.

    그가 옌안을 방문할 당시 그곳에는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조선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항일군정대학의 음악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옌안송’의 작곡자 정율성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전라도 광주 출신인 정율성은 1933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와 의열단 활동을 하면서 음악을 배우던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이탈리아 유학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오히려 옌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항일전을 수행하던 중국인이 즐겨 부르던 ‘옌안송’과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다. ‘팔로군 행진곡’은 훗날 중국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공식 채택된다.

    이처럼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조선인으로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두 사람이 옌안에서 만났을 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만남을 뒷받침하는 그 어떤 증거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옌안에 도착한 한낙연은 그곳에 세워진 중국여자대학에서 항일전쟁 시기 민족문화예술에 관한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마음 같아서는 그도 옌안에 머무르며 중국의 신예 미술가들을 키워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제각기 맡은 일이 다르게 마련이다.

    옌안에 있는 동안 한낙연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 하나를 새기게 된다. 마오쩌둥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어느 날 밤 예고도 없이 마오쩌둥이 한낙연 일행이 머무르던 랴오둥(遼東)으로 직접 찾아온 것이다.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는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지만 얘기로만 듣던 마오쩌둥을 눈앞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다.

    전선에서

    우한으로 돌아온 이후 어느새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한낙연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엘리트 여성인 류위샤(劉玉霞)와 재혼한다. 20대 초반에 룽징에서 결혼한 첫 부인과는 이미 20년 가까이 연락이 두절되어 생사마저 불확실한 상태였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류위샤는 콜롬비아 유학생 출신으로 한커우(漢口)와 충칭 등지에서 여성항일선전대를 조직해 활동할 만큼 당차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여성이었다.

    실크로드에 묻힌 조선족 화가 한낙연
    류위샤와 결혼한 이후 신혼 아닌 신혼생활을 즐기던 한낙연에게 다시 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긴급지시가 떨어졌다. 국공합작 이후 장제스는 국민당 좌파 인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전지당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참여하라는 지시였다. 1939년 4월, 국민당 소장급 지도원으로 임명된 그는 전지당정위원회에 소속되어 산시(山西)와 산시(陝西) 지방의 전선으로 나갔다. 그가 맡은 주요 임무는 국민당 군대와 팔로군이 대치한 전선에서 동포의 가슴을 겨눈 총부리를 일제라는 큰 적을 향해 돌릴 것을 장병들에게 호소하는 통일전선 사업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그는 통일전선 사업을 수행하던 1940년 시안(西安)으로부터 바오지(寶鷄)를 통과하여 충칭으로 돌아가던 중 공산당 활동 혐의를 받고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바오지사령부에 체포된다.

    정치범 수용소인 태양묘문의 특별감옥에서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그는 1943년에야 당 조직의 도움을 받아 출옥한다. 하지만 국민당 당국은 석방에 앞서 그에게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바로 통일전선 사업의 일환인 전지당정위원회와 동북항일구망총회에서 손을 떼며 앞으로는 서북지방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심한 조건은 바로 그림은 그리되, 노동하는 대중은 그리지 못한다는 조건이었다. 화가로서는 치명적인 조건이었지만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감옥 안에서 밥만 축내고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 혁명의 디딤돌이 될 돌멩이 하나라도 옮기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심정에 대해 훗날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국민당 정권은 내게 풍경화와 정물화만 그리게 하고 노동 대중은 그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태평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만큼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국민당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교묘한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풍경화라고 해서 풍경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풍경 속엔 때로는 사람, 특히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국민당 특무에게 흠 잡히지 않을 정도로 교묘한 수법으로 노동현장의 사람들을 자신의 작품에 포함시켰다.

    한편 출옥한 이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상부와의 끊어진 선을 복구하려 나선 그에게 상부에서는 당분간 화가 신분을 유지한 채 통일전선 사업에 몰두하는 방법을 강구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랫동안 놓고 있던 붓을 다시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시기에 그는 드넓은 중국대륙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풍경과 풍속화를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작품들을 모아 시안과 란저우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서의 새출발을 준비한다.

    실크로드와의 만남

    이 무렵 그는 오랜 세월 속에서 빛을 잃고 바스라져가는 둔황의 천불동(千佛洞) 벽화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깨닫는다. 부처를 모신 1000여 개가 넘는 석굴이 있다고 해서 천불동이라 이름 붙여진 그곳에는 1900년 초부터 외국 학자들에 의해 발굴작업이 시작됐지만 발굴한 석굴보다는 발굴하지 못한 것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석굴 안에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벽화에 밝은 햇빛을 보게 해주는 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또 다른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가 둔황의 천불동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은 사실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머물 무렵 그는 도서관에서 펠리오가 발굴한 유물을 찍은 사진집을 보면서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그곳으로 가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벽화를 확인해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으로 들어온 이후 바쁜 생활 때문에 잊고 지냈던 둔황의 천불동 벽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그곳임을 깨달았다. 그림은 그 다음에 그려도 늦지 않을 성싶었다. 또한 서양화풍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중국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화풍을 익히는 것도 중요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서양의 것만 배우려 했지 정작 중요한 자신의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보따리를 챙겼다.

    석굴 벽화 모사에 전력

    그해가 가기 전인 늦가을 무렵 그는 시안에 있던 가족을 데리고 중국의 오지인 란저우로 이사한다. 그곳의 독특한 풍광을 화폭에 담으면서 그는 신장(新疆) 지구에 흩어져 있는 석굴 벽화를 탐사할 준비를 서두른다. 석굴 벽화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가 그때까지 공부해온 미술 공부와는 다른 차원의 학문이었으므로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다.

    화가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 고고학자로 새출발을 하려는 한낙연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석굴 벽화를 원래 그대로 모사(模寫)하는 기술이었다. 그것은 단시간의 수련으로 이뤄질 수 없는 고도의 손재주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화가로서 그가 갖고 있던 재능은 발굴탐사를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발굴 준비를 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자신의 눈에 비친 중국 변방지구의 풍광과 사람들의 모습을 수채화로 남긴다.

    한낙연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진 것은 키질(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걸친 사막지대)의 석굴 벽화를 재현한 모사화지만 화가로서 그의 탁월한 재능은 동시대의 풍광과 사람들의 삶을 수채화로 생생하게 그려낸 풍속화에서 빛을 발휘했다.

    한편 1945년 신장과 둔황 등지로 그림을 그리러 떠났던 한낙연은 그곳의 경비책임을 맡은 허시(河西) 경비사령 타오즈웨와 사귀게 된다. 타오즈웨는 국민당 소속 장교였으나 부패한 국민당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내 마음속 이야기까지 터놓고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타오즈웨는 일제의 패망 후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9년 9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중국공산당 쪽으로 귀순하는데, 그 배경에는 모르긴 해도 한낙연이 그에게 끼친 영향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한낙연이 란저우에 머무는 동안 길고 긴 항일전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잠시일 뿐, 드넓은 중국대륙은 다시 국공내전에 빠져들었다. 일제 패망과 함께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조국 광복이라는 그들의 1차적 목표가 달성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낙연은 그들과 달리 귀국 대열에 끼지 않고 계속 란저우에 머물렀다.

    아마 귀국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둔황에 있는, 그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는 석굴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때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석굴들을 하루빨리 발굴 복원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낙엽처럼 바스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국공내전의 와중에 오지에 있는 석굴 벽화의 발굴과 보존에 관심을 가질 책임 있는 중국정부 당국자는 없었다.

    그때부터 한낙연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석굴 벽화의 발굴과 모사 작업에 매달린다. 석굴벽화 모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해방이 된 지 몇 달이 지난 1945년 10월, 그는 그곳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난다. 프랑스 리옹에서 처음 만나 그림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던 화가 창수홍이었다.

    알고 보면 창수홍도 한낙연 못지않게 둔황 석굴 벽화의 발굴과 보존에 인생을 건 사람이었다. 창수홍이 둔황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파리의 어느 서점에서 구한, 펠리오가 편집한 둔황 천불동에 관한 책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유학 와서야 조국인 중국의 고대 미술이 지닌 아름다움을 알게 됐으며, 그것이 중국인도 아닌 외국인에 의해 알려지고 그런 문화유물들이 헐값에 외국으로 반출된 사실을 알고 분노와 슬픔을 한꺼번에 갖게 됐다. 그래서 1936년 귀국해 베이징예술전문학교에 자리를 잡으면서 둔황 유적을 발굴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으나 귀기울여주는 당국자는 별로 없었다. 그의 외침은 1942년 말 국민당 정부가 여론에 밀려 국립 둔황예술연구소를 세움으로써 달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충칭에서 그곳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창수홍과 의기투합

    1943년 3월에야 그곳에 도착한 창수홍은 이후 줄곧 그곳을 떠나지 않고 둔황 천불동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창수홍을 만난 한낙연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어떻게 이곳에 있나? 십년 전 이미 파리미술전에 입상한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쯤 중앙화단에서 한자리 차지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데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뭘 하나. 그림이 대체 뭐야? 후손으로서 조상이 물려준 귀중한 그림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화가라고 할 수 있나?”

    “그렇긴 하지만 너무 뜻밖이라 나도 놀랐네.”

    “물론 나도 자네 말대로 그곳에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네. 그곳에 있으면 그런대로 편안한 일상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게. 그림쟁이의 진정한 길은 무엇인가? 내가 왜 이곳에서 모래 섞인 밥을 먹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지?”

    창수홍의 진지한 말투에 한낙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미술학교에 다니던 때야. 어느 날 일하던 식당에서 청소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다 우연히 근처 서점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펠리오가 펴낸 둔황 천불동이라는 책을 발견했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저 막고굴에 관한 책인데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더군. 왜 우리 중국의 귀중한 문화재를 그들이 마음대로 훔쳐가서….”

    창수홍이 가슴 저 밑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감추지 못하는지 말을 삼켰다. 한낙연도 그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창수홍과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런 울분과 분노가 아무도 이곳으로 가라고 등을 떼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그때 결심했지. 중국으로 돌아가서 내 능력이 닿는 한 둔황의 천불동은 내 손으로 지키겠다고.”

    “자네한테 그런 일이 있었군. 난 내가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자네보다는 항상 한 발짝 늦네. 어쨌든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

    한낙연이 발굴 작업으로 거칠어진 창수홍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화가의 손이라기보다 막일꾼의 손이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였다.

    “그보다 자네는, 잘은 모르지만, 그동안의 활동경력으로 보면 지금쯤 당의 높은 곳에서 조국의 운명을 책임지는 일에 매달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모래먼지와 바람밖에 없는 이곳으로 왔나. 뭐 크게 잘못을 저지르고 귀양이라도 오기 전에는 이런 곳에 발을 내디딜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아네만….”

    창수홍이 씩 웃으며 말했다. 파리에서부터 가깝게 지낸 창수홍은 한낙연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낙연은 그에게 중국으로 귀국한 이후 활동하다 국민당 정부에 체포돼 3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거쳐 주위의 도움으로 출옥한 사연과 자신에게 붙은 출옥조건을 설명해줬다.

    “웃기는구먼. 차라리 그림을 그리지 말라 그러지. 화가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창수홍이 울분을 터뜨렸다.

    “어렵게 멀리 갈 필요가 뭐 있나. 그게 바로 우리가 발 디딘 이 땅 중국의 현실이야.”

    그는 창수홍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정말 반가워. 그렇지 않아도 가끔씩은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외롭고 힘들었는데, 자네가 이 일에 매달린다니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하네. 우리 앞으로 잘해보세.”

    두 사람은 힘주어 손을 맞잡았다.

    생각이 통한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것이리라. 파리에서 헤어진 후 10여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은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발굴작업과 작품활동 병행

    란저우로 돌아온 한낙연은 당시 중국공업합작협회 고문으로 그곳에서 공합(工合)운동을 펼치고 있던 뉴질랜드 출신 작가 레위 앨리를 찾아갔다. 뜻만 있었지 둔황의 석굴 벽화를 발굴할 만한 재정적 형편이 되지 않았던 한낙연은 예전부터 교류를 가졌던 레위 앨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의 뜻에 동감한 레위 앨리가 지원해준 자동차를 이용해 한낙연은 1946년 4월 탐사팀을 이끌고 우루무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탐사와 발굴에 나선다. 둔황 막고굴의 수백개 석굴과 신장과 쿠처(庫車) 등지의 석굴 및 고분 벽화가 그의 탐사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한낙연은 자신의 발굴결과를 ‘신장문화보물고의 새발견-옛 고창국 예술탐사기’라는 글로 정리해 ‘신강일보’에 발표한다. 이 글은 중국에서는 최초로 신장의 고대문화 유적지인 고창국의 문화유물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둔황연구원에서 개최한 학술보고회에서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의 관계’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논문 요지는 키질의 벽화가 둔황의 벽화보다 규모에서는 작은 편이나 대신 벽화의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는 둔황의 벽화보다 가치가 더 높고 또 제작연도도 오래됐다는 것이었다.

    1907년 헝가리의 고고학자 스타인에 의해 둔황 막고굴의 고문서들이 도난당한 이후 둔황 주변의 유적에 대한 탐사연구는 주로 펠리오와 르콕 같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둔황 천불동에서 유적 발굴작업을 하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1908년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단순히 둔황 유적에 대한 발굴과 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굴된 유적을 제 나라로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은 학자적 양심을 위반한 그들의 행동을 비난했으나 정작 그때까지 중국인 학자에 의한 연구실적은 미미한 형편이었다. 발굴작업이 한창이던 무렵 한낙연은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국인 학자들이 자행한 벽화의 약탈과 파괴행위에 대해 깊은 분노를 표시했다.

    “외국인들은 이곳의 석굴 벽화를 훔쳐갔을 뿐만 아니라 벽에 새겨진 한자까지 모조리 지워버렸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미하게나마 이곳의 글자들이 한자로 씌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소. 그리고 벽화의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으로 봐서 그들이 한족인 게 분명히 드러나오. 그런데 어떻게 그자들이 그것을 없앤단 말이오. 어쨌든 이곳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재요.”

    화가로서 안정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고고학자로 새출발을 한 한낙연은 이곳 사람들에게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옛 고창국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옛 성터를 찾아내려고 노력한 끝에 7월말 그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더미에 파묻혀 가던 옛 성터를 발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작업을 하면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발굴탐사 와중에 만나는 신장 소수민족의 삶과 그곳만의 독특한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은 중국 중심부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변방인 신장 위구르 지방의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풍속을 알리는 한편 그림을 판 돈으로 발굴작업에 필요한 예산을 충당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일이었다.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그로서는 발굴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산을 확보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때 그려진 한낙연의 그림에 대해 그의 오랜 벗이던 창수홍은 이런 평가를 내린다.

    “그의 그림은 어떤 작품이나 다 명랑한 빛과 색으로 충만해 딱딱하고 어색한 점이 없다. 특히 그의 숙련된 수채화 기교는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창수홍의 이런 평가는 석굴 벽화를 있는 그대로 베껴내는 모사작업에 특히 유용했다. 벽화가 있는 석굴 속에서 벽화를 그대로 모사하는 작업은 정확성 못지않게 순발력과 신속성이 요구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붓끝에서 되살아난 키질의 석굴 벽화

    해가 바뀐 1947년 봄, 한낙연은 탐사팀을 이끌고 키질의 천불동으로 향했다. 그가 이번에 발굴지로 선택한 곳은 깊은 산속이었다. 대부분의 석굴이 가파른 절벽 중간에 입구를 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외국 학자들의 발굴작업이 수차례 있었지만 그들은 이곳을 피해갈 수밖에 없었다.

    탐사팀은 새로운 석굴을 발견할 때마다 일일이 번호를 매겨나갔다. 이때 그의 탐사팀이 발굴한 석굴마다 매겨놓은 번호는 현재까지 그대로 불린다. 석굴의 번호가 75번이 되었을 때 계획했던 탐사날짜가 거의 다 돼가고 있었다. 이는 외부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그의 탐사팀이 갖고 들어간 식량은 물론 탐사와 벽화의 모사작업을 위한 도구와 물감 등이 거의 바닥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예정된 탐사기일이 일주일쯤 남았을 무렵 탐사팀은 13호 석굴 옆에서 또 다른 석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석굴은 기존에 발견한 석굴에서 보던 벽화와는 그 모양과 색채가 전혀 달랐다. 놀란 한낙연은 그 석굴에 특별1호라는 이름을 붙이고 탐사일정을 열흘 정도 늦춰가며 그 석굴의 발굴과 벽화 모사작업을 안간힘을 다해 끝마쳤다.

    당초 예정보다 훨씬 늦은 7월경에야 우루무치로 돌아온 한낙연은 우루무치의 ‘신강일보’ 대강당에서 그의 생애 스무 번째 개인전을 연다. 특기할 점은 다른 전시회와 달리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입장료조차 힘에 겨워하는 많은 이에게 사막의 건너편에 있는 천불동 벽화를 그림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특히 이 전시회의 중심은 키질 천불동의 벽화였는데, 전시된 그림 가운데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새로 발굴한 특별1호 굴 안의 벽화인 ‘본생의 이야기’와 ‘석가모니의 좌우’였다.

    둔황에 몸과 혼을 묻다

    두 차례의 대규모 발굴작업을 통해 한낙연은 일회적인 발굴 작업이 아닌 체계적인 발굴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리고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하는 작업이 자칫 잘못하면 귀중한 문화재의 보존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신장지역 고고학 발굴 5개년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발굴작업이 급하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을 몇 차례의 발굴작업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성급한 발굴은 오히려 수천년을 내려온 귀중한 문화재의 파괴라는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5년간에 걸친 본격적인 탐사계획의 사전준비를 위해 란저우와 우루무치로 바쁘게 오가던 그는 끝내 실크로드에 몸과 혼을 묻었다. 그러기에 그의 발굴작업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중국의 문화계 인사들은 그의 죽음을 더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는 가고 없지만 석굴 벽화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시기, 누구보다 먼저 그 중요성을 깨닫고 발굴과 보존에 온 힘을 다한 한낙연. 그가 어떤 마음자세로 작업에 임했는지 엿볼 수 있는 흔적이, 현장에 남아 있어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그는 자신이 발굴한 키질 10호굴 북쪽 벽에 이런 글을 새겨놓았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아름답고 귀중한 벽화들을 보니 우리나라의 여러 곳에 있는 동굴들이 이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벽화는 외국 발굴단들이 뜯어가버렸다. 이는 문화상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한낙연의 지적대로 외국 발굴단은 찾아낸 벽화 중 탐 나는 귀중한 부분을 약품을 이용해 그대로 뜯어가는 야만적 행위를 일삼았다. 발굴단이라기보다는 도굴꾼에 가까운 행위였다. 아마 그들은 옮길 수만 있었다면 석굴을 그대로 자기네 나라로 옮겼을 것이다. 벽화가 석굴의 바위틈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그 글의 끝에다 훗날 이 석굴을 찾을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말까지 남겨놓았다.

    “우리의 귀중한 고대문화를 더욱 빛내기 위하여 참관자 여러분께서는 아끼고 잘 보존하기를 부탁드린다.”

    한낙연은 이미 그때 자신이 발굴한 석굴 벽화가 훗날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될 것임을 예견했던 것이다. 발굴작업에 임하는 그의 마음자세를 엿볼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는 키질의 10호굴. 그곳에 들어가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중국 당국이 그의 발굴작업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그곳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초상화 속의 그는 사망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흐르는 세월과 상관없이 나이먹지 않은 그때 그 모습으로 석굴 벽화와 호흡을 같이하고 있다. 다만 한낙연이 아닌 한낙연의 중국식 발음인 ‘한라오란’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 수만리 먼 그곳까지 찾아간 한국인이 보기에 아쉬운 점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한낙연 본인은 거기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생전의 벗 레위 앨리는 그에 대한 회고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나는 아주 친절한 감을 느낀다. 그 이름은 위대한 정신이 있고 사람들의 경모를 자아내며 아주 매력적인 사람의 이름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중국의 혁명사업에 바쳤다.”

    앨리의 지적대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시절, 키질의 천불동 벽화를 발굴하고 모사작업을 하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한낙연. 국공내전 이후 중국대륙의 주인이 된 중국공산당은 그의 공을 잊지 않았다. 화가와 혁명가, 그리고 고고학자로 중국을 위해 살았던 그에게 혁명열사라는 칭호를 내린다. 그리고 그의 유가족에게 ‘광영지가(光榮之家)’라는 호칭까지 하사한다.

    대중 속으로 가라

    한낙연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지만 그렇다고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 공산주의 하면 이를 갈도록 교육받아온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념의 노예는 아니었다. 항일전 시기에 그린 몇몇 작품을 제외한 그의 작품 대다수는 이념의 선전보다 중국 각지의 풍광과 그곳 사람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의 예술적 지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그림 가운데 한 시골마을의 농부가 낡아빠진 다리 위로 짐을 가득 실은 말고삐를 힘겹게 잡아끄는 모습을 그린 ‘다리 위에서’라는 작품에는 당대 중국 농민의 힘겨운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원색적인 투쟁구호도 없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는 화가로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이런 좌우명을 남겼다.

    “미술을 하려면 대중의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진의를 씹어서 완전히 소화한 다음 그려야만 비로소 진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마치 모래 속에서 금을 찾아 씻어내는 것처럼, 스스로를 달구고 채찍질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그림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좁은 화실에 주저앉아 세상과 담 쌓은 채 머리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드넓은 중국대륙으로 들어가 그곳 사람과 호흡을 같이하며 뜨거운 가슴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한 한낙연. 그럼에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진 그를 우리는 오랫동안 방기했다. 모르긴 해도 그가 공산주의의 땅 중국에서 활동했던 작가라는 선입관이 그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았으리라.

    글로벌 시대에 그가 주는 교훈

    그는 스스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만큼 자신이 조선인이란 점을 별로 내세우지 않았다. 또 조선인이란 사실 때문에 중국인들 사이에서 주눅 든 채 살지도 않았다. 어쩌면 드넓은 중국대륙이 조선인으로 태어난 그를 중국인으로 살아가게끔 보듬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인이냐 중국인이냐를 따지기 전에 그의 진정한 예술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프랑스 유학 당시 프랑스공산당에 스스로 가입할 만큼 민족과 국가라는 경계에 연연하지 않고 살고자 했던 사람이 그였다.

    어쩌면 그가 끝까지 저항하고자 했던 것은 무지막지한 힘을 앞세운 제국주의가 아니었을까. 글로벌 시대를 맞아 총 대신 돈이라는 신무기를 앞세운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운명의 굴레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당당하게 민족과 국가라는 현실적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자 했던 불굴의 도전정신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록 그가 살았던 세상과는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지만 그가 보여준 삶과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세상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림 자체에만 몰두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발 디디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려 했던 사실에 비춰볼 때 더 넓은 의미의 화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을 때부터 혁명사업에 뛰어든 그를 두고 현재 중국 역사학자들은 ‘동북지구 중국공산당 초기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예술평론가들은 그를 ‘조선족을 대표하는 위대한 세계적인 예술가’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되새긴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른 까닭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이런 호평과 달리 정작 그의 모국인 이 땅에 그의 이름이 전해지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1993년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한낙연 유작전’이 그가 화가로서 이 땅에 처음 알려지게 된 계기나 마찬가지다. 살아서는 단 한 번도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한낙연. 대신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유작이 이 땅을 밟아본 것으로도 그는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청춘을 조국의 광복에 바쳤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대신 중국 대륙에 머물렀던 한낙연.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크로드의 모래먼지 속에서 잠자고 있던 고대 석굴 벽화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던 것이다.

    조국 독립 위해 고향을 떠나다

    1898년 중국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한낙연은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그림에 재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유민이 되어 조국을 떠난 가난한 조선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체계적인 그림 공부를 할 기회를 갖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집안을 부양하는 책임은 오로지 어머니의 가녀린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한낙연은 그림 공부보다는 우선 먹고 살 길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1914년 그는 어렵사리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룽징전화국에 교환원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전화교환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당시 룽징에 있던 세관의 사무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직장을 옮긴 가장 큰 이유는 전화국보다는 세관의 보수나 대우가 더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룽징 세관은 중국 본토에 있던 상하이(上海) 세관이 관할했기 때문에 긴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정세를 접하는 데 유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출세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국을 잃은 민족이 어떤 수모와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피부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한반도에서 3·1운동이 벌어지자 당시 간도의 중심지인 룽징에서도 3월13일, 3만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미 1919년 초에 결혼해 한 집안의 가장임에도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한 한낙연은 룽징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힘을 동반하지 못한 만세운동은 시위에 참여한 많은 조선인의 희생을 불러왔다. 그도 3·1운동 이후 몰아닥친 일제의 검거를 피해 소련땅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몸을 피한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집결해 있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3·1운동 이후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 모여 임시정부를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그곳에 가서 본격적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리라고 결심한다.

    이듬해인 1920년 설날 무렵 상하이로 가는 길에 잠시 룽징의 집에 들렀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 최신애에게 그 사실을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독립운동에 나서는 그 길이 어떠한 길인지 잘 알고 있는 아내가 박수치며 환영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이 두 사람 사이에는 태어난 지 다섯 달밖에 안 된 딸 인숙이 있었다.

    한낙연은 인근의 백부댁에 세배를 드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떠난다. 그런 이별 아닌 이별이 부부의 마지막이란 사실을 두 사람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말하지 않아도 남편이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을 짐작한 최신애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라를 되찾는 그날 남편이 돌아오리라 믿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룽징을 떠난 한낙연은 이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고향 룽징 땅을 밟지 못한다.

    쑨원 만난 뒤 중국 공산당 입당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 조계지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재정형편이 취약해 그의 생계를 해결해줄 수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주로 취직하던 전차회사의 차장 노릇을 하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때 그는 잠시 접어뒀던 어릴 적부터의 꿈, 화가가 되는 길을 찾아 나선다.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소묘를 비롯한 미술의 기본기를 익힌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까지 버린 채 그림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지켜본 임시정부의 실상은 원래 그가 꿈꾸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다. 임정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내분은 처자식마저 버리고 떠나온 열혈청년을 실망하게 만든다. 결국 그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꼭 임시정부 휘하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크로드에 묻힌 조선족 화가 한낙연
    그가 상하이로 오기 전 잠시 머무른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이미 공산주의의 물결이 들어와 있었고, 조선의 청년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낯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중국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번져 나갔고, 그가 상하이에 도착한 지 1년 뒤인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건된다.

    그 무렵 전차회사에서 인쇄공장의 식자(植字)공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그곳에서 중국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항일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던 중 그로 하여금 항일과 혁명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한 계기가 있었다. 중국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쑨원(孫文) 선생을 직접 만난 것이다. 1922년 겨울 그는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과 쑨원 선생의 집을 방문한다. 쑨원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투쟁과 활동을 지지하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혁명에 성공하자면 자국 국민이 한결같이 단합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우선이다. 궁극적으로는 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국민이 연합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는 한편 안으로는 국내의 반동파 세력을 소멸해야 한다. 그리고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되찾는 이 일에는 누구보다 청년들이 앞장서야 한다. 바로 자네들 같은 젊은이들에게 중국과 아시아 각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평소 쑨원의 지론이라는 것을 한낙연도 이미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내용이라도 책으로 접할 때와 평생을 중국혁명에 몸바친 노혁명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 감동이 달랐다. 하여튼 쑨원과 만난 일은 한낙연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그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조선인으로서는 꽤 이른 시기에 입당한 셈이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도 이 무렵 상하이에서 활동하며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는데, 당시 상하이의 조선인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한낙연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뒷받침할 그 어떤 증거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것을 밝혀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상하이미술전문학교 우등 졸업

    한낙연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당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이란 큰 목표 아래 국공합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한낙연에게 상부로부터 특별한 임무가 부여됐다. 그것은 국민당에 위장 입당해 대외적으로는 국민당원으로 활동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중국공산당적은 비밀리에 유지한 상태였다.

    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그는 그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24년 1월, 상하이미술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그에게 조직의 상부에서는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로 가서 사업할 것을 지시한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는 아무래도 중국인보다는 조선족인 그가 훨씬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사업과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하느라 학업에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은 남달랐던 것 같다. 상하이미술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것이다. 이때 상하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촉망받는 예비 조선족 화가들을 취재한 신문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24년 1월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일월 십오일에 상하이미술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두 청년이 있다. 한 사람은 평안북도 의주군에 본적을 둔 김복형(金復炯)이고 또 한 사람은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한 한광우(韓光宇·한낙연의 본명-필자 주) 군인데 중국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인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4년의 과정을 항상 우등으로 지내고 이제 졸업한 것이다. 한광우 군은 생각이 높고 심히 활발한 청년으로 가까운 시일 안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국에 들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낙연이 간도로 돌아가는 길에 조국땅에 들렀다는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와 달리 그는 고향 룽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처자식과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룽징 대신 당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줄곧 선양(瀋陽)에 머물렀다. 아무리 당의 임무가 급하다 하더라도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한번쯤 고향 룽징에 얼굴을 내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룽징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선양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한광우라는 본명 대신 한낙연이란 이름을 사용한다. 이름을 바꾼 구체적 이유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아마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흔히 사용했다.

    그런데 ‘동아일보’ 기사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의 조선인 학생인 김복형은 이후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특기할 점은 그 또한 노선은 다르지만 한낙연처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상하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선생을 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흥사단 단원으로 안창호 선생이 상하이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그의 비서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임시정부에도 관여한다. 특히 그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폭탄 투척 당시 임정을 비롯해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한인연맹의 주요 인물들과도 교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뤄볼 때 김복형도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 재학 중일 때부터 독립운동에 관여한 학생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광복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에 그대로 눌러앉은 김복형은 독립운동의 공적을 뒤늦게 인정받아 1998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성공적인 첫 전시회

    한편 상하이 기독교청년회에서 써준 소개장을 들고 선양의 봉천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간 한낙연은 그곳에서 진보적인 청년들의 의식을 깨우는 조직사업에 열중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는다. 덕분에 ‘상하이미술전문학교 졸업생 한낙연의 유화전시회’라는 이름으로 생애 첫 개인전을 봉천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한다. 이미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조선인 사회에 소개된 그의 이력 때문에 첫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전시회를 통해 그의 이름이 만주 전역에 알려지자 그에게 그림을 배우겠다는 학생이 많이 찾아왔다. 자신 또한 상하이에 가서야 제대로 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던 한낙연은 그림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많은 학생을 다 가르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친하게 지내던 상하이미술전문학교의 동창생 몇몇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동참해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얼마 후 루사오페이(魯少非), 루이(陸儀) 등 반가운 얼굴 몇몇이 선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낙연은 그들과 함께 선양의 소남관 풍우대 근처에서 미술학교를 열고 자신이 직접 교장을 맡아 학교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이름만 허울 좋은 교장일 뿐 월급은커녕 오히려 모자라는 학교 운영비를 해결하기 위해 번번이 자신의 그림을 판 돈까지 보태야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선양 제1사범학교의 미술교원을 겸직하면서 힘들게 미술학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그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이 왜 선양으로 왔는지에 대한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메이퍼광(梅佛光) 등 진보적인 중국 청년 지식인들과 힘을 모아 쑨원의 삼민주의를 따르는 ‘계몽학사’를 설립한다. ‘계몽학사’의 주요 구성원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계몽순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는데 한낙연은 잡지 편집을 맡으면서 청년학생단체들과 연대를 도모한다.

    다시 상하이로

    그런 가운데 만주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1925년에 발생한 5·30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양에서도 6월10일 학생 시위가 벌어진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한낙연을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그해 겨울이 끝나기 전 선양에도 중국 공산당 지부가 결성된다.

    탁월한 활동을 보인 그를 눈여겨본 상부에서는 한낙연에게 1925년 7월 하얼빈(哈爾濱)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지시한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국경을 넘어 탈출해온 백계 러시아인이 북적여 ‘중국 속의 러시아’로 불릴 정도였다.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을 왜곡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전파하는 일이 시급했다. 한낙연은 그곳에 설립된 보육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조상지(趙尙志) 등과 독서회와 야학을 꾸리며 조직사업을 병행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공산당 동북지구당의 중심지라 할 하얼빈에서는 공산당 계열에서 선전사업의 일환으로 ‘하얼빈일보’를 발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얼빈일보’의 기사와 논조에 불만을 가졌던 군벌은 끝내 이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직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위험을 직감한 상부에서는 군벌의 주시를 한몸에 받고 있던 한낙연으로 하여금 신분이 드러나기 전에 하얼빈 인근 치치하얼(齊齊哈爾)로 급히 옮기게 했다. 군벌의 체포를 피해 가까스로 치치하얼로 피신한 그는 그곳에서 용강시립공원 도시건설사업의 책임자로 일했다. 지금까지도 치치하얼의 용강시립공원엔 한낙연이 이때 설계한 팔각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치치하얼에 있는 동안 한낙연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보태 또 다른 사업을 벌인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낙천사진관’이란 이름의 사진관을 운영한 것이다. 그는 하얼빈에서 틈을 내어 사진 촬영기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배워두면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배운 사진기술을 이용해 사업을 시작할 만큼 그는 다재다능했다. 한편 사진기술은 이후에도 그의 인생에 여러모로 긴요하게 쓰이게 된다.

    긴박한 정치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치치하얼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 한낙연에게 다시 상부로부터 활동거점을 옮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던 것이다. 다음 장소는 더 깊은 오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그의 다음 활동장소는 뜻밖에도 상하이였다.

    프랑스 유학을 떠나다

    1929년 여름 한낙연은 몇 년 만에 상하이에 도착한다. 하지만 상하이는 예전의 활력에 넘치는 도시가 아니었다.

    상하이에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미 지하로 숨어들어 은밀하게 활동하던 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그로서는 더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만나기로 한 연락원이 상하이 도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됐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 연락원이 소련에서 귀국하면서 갖고 온, 당의 운영자금으로 쓰일 거액의 수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수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당장 당의 활동에 막대한 지장이 있으리란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한낙연은 그가 그 큰돈을 분명히 몸 어딘가에 지니고 있으리란 점을 확신하고 적의 감시에 노출될 위험을 무릅쓴 채 시체를 뒤진 끝에 은밀한 곳에서 수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수표를 찾아낸 그는 동지의 시체를 길거리에 차마 내버려두고 올 수 없어 적당한 곳에 묻어준다. 언제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급 상황에서 한 이런 행동에서 그의 대담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우려대로 한낙연은 국민당 특무의 감시망에 노출되고 말았고, 그 바람에 그는 상하이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또 어디론가 피해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모든 대외활동을 중지한 채 얼마 되지 않는 단출한 짐을 정리하던 한낙연은 문득 말라비틀어진 붓을 발견하고 자신이 한동안 붓을 놓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상하이에 돌아온 뒤로는 워낙 막중한 임무의 특성상 긴장을 늦출 수 없어 붓을 잡는 것조차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되든 화가가 붓을 놓으면 다시 예전 수준을 회복하기까지 붓을 놓은 기간보다 몇 배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한낙연이었다. 어차피 국민당의 감시를 피해 한동안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녹슨 붓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대륙 곳곳에 국민당의 감시망이 둘러쳐진 가운데 속 편하게 붓을 잡을 수 있는 장소는 별로 없었다. 차라리 국민당의 감시가 없는 외국으로 가서 그림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낙연은 이미 외국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와 명성을 날리고 있는 몇몇 화가를 알고 있었다. 난징(南京)에서 활동하며 화가로서 높은 명성을 누리던 쉬베이훙(徐悲鴻)도 그중 한 명이었다. 훗날 중국공산당정권 수립 이후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에게서 격찬을 받은 쉬베이훙은 1919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8년간 유학생활을 마친 후 귀국하여 난징을 근거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쉬베이훙도 처음 프랑스로 떠날 때는 그저 이름없는 화가에 불과했다. 나이도 한낙연과는 서너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 그와 쉬베이훙의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낙연은 더 늦기 전에 파리로 건너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당시 프랑스 파리가 예술의 중심지라는 것은 분명했고, 그 영향은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 조계지에도 미쳤다. 이미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곳곳에는 파리의 아틀리에를 본뜬 개인화실이 생겨났으며, 몽마르트르 언덕을 본뜬 화랑거리까지 형성될 정도였다.

    포기도, 실망도 없다

    그는 숱한 고민 끝에 외국에서 체계적으로 그림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상부에 밝혔다. 상부에서는 쉽게 한낙연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목숨 걸고 당의 활동비를 되찾아온 그에 대한 상부의 보답이었다.

    한낙연이 상하이를 뜰 무렵, 또 한 사람의 화가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싫은지 조용히 상하이 푸둥항을 떠나는 여객선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훗날 중국혁명의 전환기를 이끈 여성 화가로 칭송받은 그녀의 이름은 허샹닝(何香凝). 그녀는 남편과 함께 쑨원이 이끌던 ‘동맹회’의 핵심 인물로 쑨원의 직계 심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고 반년이 채 되기도 전인 8월에 남편마저 장제스(蔣介石)가 이끌던 국민당 우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녀는 모든 직무에서 손을 떼고 그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비록 상하이를 떠나는 처지는 다르지만 쑨원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겠다는 화가인 허샹닝마저 좌절한 채 조국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 당시 중국이 처한 현실이었다.

    실크로드에 묻힌 조선족 화가 한낙연
    체계적인 그림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만 가지고 프랑스로 건너가는 한낙연에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당시 중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림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상하이를 떠난 여객선은 홍콩과 베트남의 사이공 등 유럽인이 진출해서 건설한 주요 항구를 거치면서 유럽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낙연은 그 시간마저 편하게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급하게 떠나느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불어를 익혀야 하는 다급함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길고 긴 항해 끝에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그는 애초에 생각했던 파리에 머물지 못하고 프랑스 중동부지방의 공업도시 리옹에 정착한다.

    부자 나라로 생각했던 프랑스의 현실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 무렵 유럽도 심한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어 경제적으로 꽤 어려웠다. 프랑스인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려운 판국에 외국에서 건너와 불어조차 제대로 못하는 그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질 리 만무했다.

    그것은 프랑스에 처음 도착한 중국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훗날 ‘황하대합창’의 작곡가로 중국의 내로라하는 대음악가의 자리에 오른 셴싱하이도 학비를 벌기 위해 밤마다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좀체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 정도 고생쯤은 각오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자신만의 무기인 붓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좋은 점은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아무것이나 그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거리의 화가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 리옹의 주택가에서 인상적인 집을 찾아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이 완성될 즈음 주변을 산책하던 한 프랑스인이 걸음을 멈추고 그의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동양인을 별로 볼 수 없는 리옹에서 그것도 날랜 솜씨로 그림을 그리는 동양인이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그림을 그리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그에게 노부부가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건넸다. 아직 불어가 서툰 한낙연은 처음엔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동문서답이 오간 다음에야 한낙연은 노부부가 바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집의 주인이란 사실을 알았다.

    “왜, 무슨 이유로 내 집을 그리죠?”

    “집이 하도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그렸을 뿐입니다. 저는 이곳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는 중국인 화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림을 그릴 때도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그게 아니고, 그림을 잘 모르는 제 눈에도 우리 집을 꽤 인상적으로 그려서 눈여겨봤습니다. 방해가 됐다면 사과드릴 게요.”

    예상치 못한 한낙연의 당돌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남편을 아내가 거들었다.

    “방해가 된 건 아닙니다. 다음부터는 허락을 받고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한낙연이 재치 있게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왕 그리는 것이니 우리 집을 예쁘게 그려주세요. 그럼….”

    인사를 끝내고 돌아가던 노부부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다가왔다.

    “그림이 거의 다 그려진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할 생각이죠?”

    “그건 아직….”

    할머니의 질문에 이번엔 한낙연의 말문이 막혔다. 무슨 특별한 생각이 있어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다. 다만 화가로서 인상적인 풍광이 있기에 그렸을 따름이었다. 그 뒤처리까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그림을 우리한테 팔 생각이 없소? 우리 집이 담긴 그림이라 우리에겐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기념이 될 텐데….”

    “그렇다고 너무 비싸게 부르지는 마시오. 보기와는 달리 우리도 빈털터리라오.” 남편이 아내의 말에 지원사격을 했다.

    생각지 않게 그림은 노부부에게 팔렸다. 노부부에게는 푼돈에 불과했지만 그야말로 빈털터리인 한낙연으로서는 며칠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돈을 받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간 그는 우선 주린 배부터 채웠다. 사실 주머니에 돈이 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아침부터 쫄쫄 굶은 참이었다. 다음날부터 한낙연은 일자리를 찾는 대신 그 주택가 거리로 출근하다시피했다. 이후 그 동네는 한동안 그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만들어주는 화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화풍과 다른 그의 그림은 그 동네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 모양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그는 생계의 위협에서 벗어나 마음껏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온 것은 아니었다. 빨리 학교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학교에 등록할 돈이 필요했다.

    어디서나 당당한 조선인으로 살자

    한낙연은 1929년 연말에 중국에서부터 힘겹게 들고 간 자신의 수채화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리옹에 도착한 이후로 미술의 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진 창수훙(常書鴻), 뤼쓰바이(呂斯百) 등 한낙연보다 먼저 프랑스에 와 있던 중국 유학생들이 만류했다. 특히 창수홍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뜻은 좋지만 너무 성급한 것 아냐? 너도 알다시피 프랑스는 예술 수준이 중국보다 높은 나라야. 그것이 우리가 그림을 배우러 이곳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데….”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속시원히 얘기해봐. 아직 내 그림이 개인전을 열 수준은 안 된단 말이지?”

    그는 주위 사람들이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안에서 삼키고 있는 말을 대신 내뱉었다. 창수홍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도 내 그림이 부족한 것은 알아. 그러기에 땡전 한 푼 없이 이곳까지 그림 공부를 하러 온 거고. 하지만 난 프랑스인이 아니야. 그러니 그림은 배우되 프랑스 화가와 똑같이 그릴 필요는 없지 않겠어?”

    “네 생각이 뭔지는 알겠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괜히 창피를 당하기만 할 텐데. 아직은 네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의 수준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리옹도 그림에서는 파리 못지않은 도시야.”

    “충고는 고마워. 하지만 나는 매달 정부에서 돈이 나오는 너희들 관비생과는 처지가 달라. 나는 지금 빵을 사 먹을 돈과 이달치 월세로 낼 돈도 필요해. 당장 길거리로 쫓겨나야 할 판이야. 하지만 나를 동정할 생각은 마. 한족인 너희들과 달리 조선인인 나는 이미 중국에서부터 늘 이렇게 살며 그림을 그려왔어. 중요한 것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거야.”

    당시 중국 정부는 관비 유학생을 선진국으로 보냈다. 그들은 충분하진 않지만 학비를 중국정부로부터 보조받았기 때문에 고학생인 한낙연보다는 공부하기가 수월했다.

    실패로 끝난 수채화 전람회

    한낙연도 자신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프랑스에서 중국에서 그린 풍경화로 전시회를 연다는 것이 승률이 희박한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화가라는 증명을 받고 싶었다. 사실 그림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면서 당장 중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속 편하게 그림 공부나 하는 것이 진정으로 올바른 선택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붓 대신 총을 잡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상부에서는 한낙연에게 그림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것이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라면서 자신의 선택에 힘을 보태줬다. 그래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고 중국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한낙연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 않자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얼마 뒤 리옹의 한 중국식당에서 독특한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 바로 한낙연의 수채화 전람회였다. 그림 전시회는 통상 화랑이나 살롱에서 열리는 것이 상례였지만 그가 그런 곳을 빌릴 만한 돈이 있을 리 만무했고, 설령 돈이 있다고 해도 명성도 없는 그에게 선뜻 공간을 빌려줄 마음씨 좋은 화랑 주인도 없을 터였다.

    그래서 궁리 끝에 중국식당의 남는 벽을 이용해 전시회를 연 것이다. 화교인 중국식당 주인으로서도 돈 들이지 않고 인테리어를 바꾸는 셈이 되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예상대로 한낙연이 프랑스에서 연 첫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좌절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전시회가 끝나는 날 밤늦게 팔리지 않은 그림을 포장하는 그에게 창수홍이 찾아왔다. 말도 없이 한낙연의 옆에 앉은 창수홍은 두 팔을 걷어 붙이고 그림 포장 작업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얘긴 들었어. 우리라도 제대로 도와줘야 하는데…미안해.”

    “미안하긴. 그래도 많이 도와줬잖아. 너희들이 있었기에 이렇게라도 끝난 것 같아.”

    “이번 일을 통해서 내가 너한테 배운 게 하나 있어. 백인 사이에서도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용기 말이야. 사실 나는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겠다는 생각조차 못해봤거든.”

    파리의 품에 안겨

    그날 밤 한낙연은 창수홍과 밤 깊도록 가슴을 터놓고 얘기를 나눴다. 창수홍은 한낙연보다 몇 년 전인 1927년 프랑스로 유학을 와 당시 리옹미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이후 파리로 자리를 옮겨 파리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계속한 다음 한낙연이 귀국하기 한 해 전인 1936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같은 중국의 하늘 아래 살면서도 서로 만날 수 없던 두 사람은 10여 년 세월이 지난 다음 둔황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한낙연은 리옹에서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다시 프랑스의 남부 도시 니스로 주거지를 옮기게 된 것이다. 니스에서의 생활도 리옹에서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던 그는 월세가 밀리기 일쑤였고 가끔씩은 끼니를 때울 바게트를 살 돈이 없어 물만 먹고 주린 배를 달래야 했다. 일거리가 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림이 팔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과 외로움도 그의 붓을 꺾지는 못했다.

    프랑스에 온 지 2년 뒤인 1931년, 한낙연은 프랑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끝내 루브르미술학교의 입학 허가서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루브르미술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틈만 나면 루브르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은 책에서만 보고 말로만 들었던 고대 미술의 걸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그곳은 그 어떤 선생도 가르쳐주지 못하는 화풍을 배울 수 있는 그만의 또 다른 학교였다. 이 무렵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화가를 놓고 말하면, 생활은 밥과 옷처럼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그림으로 상인의 구미에 맞추는 것을 반대할 뿐 아니라 생활을 자연주의적으로 그대로 재현하는 수법도 반대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고 세상과 담을 쌓은 그림 속으로만 빠져들지 않았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돈이 떨어져 몇 끼니를 건너뛰어도 그는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머니의 나라 조선과 아버지의 나라 중국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하루하루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제법 통하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그는 또 다른 모색을 한다.

    그가 머무르는 파리는 유럽 문화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십년 전에 일어난 파리코뮌의 역사적 전통이 골목 곳곳에 묻어 있는 도시였다. 정확한 날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이 무렵 프랑스공산당에도 입당한다. 이것은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어 국제주의자로 살고 싶었던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루브르미술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이미 몇 차례의 개인전을 열 만큼 그림의 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는 한동안 파리의 공장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했으나 예술가적 기질은 그를 한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공장을 그만둔 그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벗어나 스위스와 소련, 영국, 이탈리아까지 전 유럽을 횡단하는 긴 여행을 떠난다. 그냥 보고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그림 공부를 위한 여행이었다.

    맨 처음 도착한 덴마크에서 그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현지의 반응은 예상외로 호평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유럽인 사이엔 중국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심지어 그의 그림을 보고도 일본인이 아니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자존심이 상한 그는 이후 항상 전시회를 열 때마다 ‘중국화가 한낙연의 작품전시회’라는 글씨를 큼직하게 써서 전시회장 입구에 붙여놓았다고 한다.

    프랑스공산당에도 입당

    이처럼 비록 몸은 중국을 떠나 있었으나 한낙연의 마음은 언제나 중국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1936년 여름 파리에서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들의 대표자대회인 화교항일구망단체(華僑抗日救亡團體)에도 참석한다. 그러나 그의 열망과 달리 중국대륙의 운명은 자꾸만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듬해인 1937년 7월 중국 베이징 인근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어난 사건은 외신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국대륙을 침략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을 한눈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낙연은 마침 이탈리아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을 접하는 순간 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파리시보’에 사진기자로 취업하는데, 예전 하얼빈에서 배워둔 사진기술이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위기에 빠져드는 중국대륙을 지키는 데 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봐야만 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갈등도 만만치 않았다. 그 무렵 그는 이제 자신이 돌아갈 때가 됐음을 직감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가 프랑스에서 그린 그림을 포장하는 일이었다. 빵을 살 돈이 없어 끼니를 건너뛸 때도 물감 살 돈만은 최후의 비상금으로 남겨놓던 그였기에 자신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그림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프랑스에 머물던 10여 년 동안 그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화가의 자화상’과 ‘바다 풍경’이다.

    양후청과의 만남으로 다시 중국행

    실크로드에 묻힌 조선족 화가 한낙연

    한낙연 작 ‘광명을 찾아가는 유목민’(1945년).

    그 무렵 유럽 각국을 순방 중이던 양후청(楊虎城) 장군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자 한낙연은 ‘파리시보’의 기자 신분으로 그를 인터뷰했다. 그리고 그의 항일 업적을 프랑스 사회에 알리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장쉐량(張學良)의 주도로 장제스가 시안(西安)에 연금당한 ‘시안 사건’ 당시 서북군 총사령관이던 양후청은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하지만 이후 그는 목숨은 건졌으나 장제스에 의해 실질적 권력을 모두 빼앗긴 상태에서 울분에 가득 찬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번 유럽 여행도 명목은 선진 유럽을 방문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강제 외유나 마찬가지였다.

    한낙연도 양후청 장군이 처한 상황은 이미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공식 인터뷰를 끝내고 나서 그는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렵게 외국에 나오신 것으로 아는데 좀더 많은 나라를 돌아보고 가시죠. 왜 이렇게 급하게 돌아가려 하십니까?”

    “지금 중국은 다급한 지경에 처해 있소. 왠지 아시오? 나처럼 세상에서 잊혀 이제는 총을 들 용기조차 없는 사람마저 필요로 하기 때문이오. 이미 한번 죽음의 끝으로 몰려봤던 내가…그때 그 사건 이후 내 인생은 그저 덤으로 딸려 있는 것이오. 그런 내가…조국이 부르는데…그게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도 할지라도…조국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가야 하오. 사나이로 태어난 이상 죽더라도 내 조국에서 죽고 싶소.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오.”

    양후청 장군은 말을 중간중간 끊어가면서 천천히 내뱉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현재 그가 겪고 있는 갈등과 고민이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낙연은 마음 한구석에 싹트고 있던 귀국을 조금이나마 뒤로 미루고 싶다는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프랑스에 있는 한 생명의 위협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위험이 자신 앞에 닥칠지 그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국으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잘 알면서도 귀국을 포기하지 않는 양후청 장군을 보면서 한낙연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곤 귀국을 서둘렀다. 중국으로 가는 제일 빠른 배편은 양후청 장군이 타고 갈 배였다.

    결심하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성격대로 한낙연은 양후청 장군과 함께 10월29일 프랑스를 떠나는 배에 올랐다. 그가 탄 여객선이 수에즈 운하와 싱가포르를 거쳐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해도 얼마 남지 않은 11월26일이었다.

    중국땅이 멀리 보이자 양후청 장군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일행을 모두 갑판에 모이게 한 다음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도 그 일행 틈에 끼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을 찍고 갑판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그에게 산책하던 양후청 장군이 다가와 옆에 멈췄다.

    “그래, 오랜만에 중국땅을 보는 기분이 어떻소?”

    “그저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찹니다.”

    “가슴이 벅차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구먼. 지금 우리 중국은 벅찬 가슴과 올바른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필요하오. 그런데….”

    깊은 한숨을 내쉬던 양후청 장군은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귀국하시면 전선으로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마음이야 하루라도 빨리 항일전선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과연 믿지도 못하는 나에게 총을 쥐어줄지 의문이오.”

    그때 부관이 다가와 선실로 내려갈 것을 재촉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선실로 내려가는 장군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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