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두 시간 안팎에 걸쳐 당대의 사회상을 기록하고 독특한 시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영회의 주제의식에 대해 사색하고 토론하면 더 효율적으로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영화가 다룬 역사적·철학적 소재들은 대입 논술·구술시험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번 호 부터 명작 여화를 통해 논술을 공부하는 색다른 연재 기사를 싣는다. 문자보다 영상에 친숙한 청소년은 영화라는 빼어난 시청각교재와 더불어 깊이 있는 사고와 글쓰기에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고, 성인은 다양한 주제를 담은 영화를 즐기며 교양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름대로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기만의 작은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만이 존재할까? 특히 자식을 키우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의 거짓말을 자양분 삼아 성장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을까.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한 선의의 거짓말은 아버지를 속이기 위한 아들의 거짓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비극은 아버지가 한 선의의 거짓말을아들이 알아채기도 전에 아버지가 아들의 곁을 떠난다는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죽음을 앞두고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한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의 독백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이는 죽음에 직면한 극한 상황에서 트로츠키의 너무나도 낙관적인 인생관이 잘 드러난 말이다. 혁명가 트로츠키는 멕시코의 독방에 갇혀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들이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을 남겼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제목과는 달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생존과 삶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서, 관객에게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희망과 삶의 의지를 잃지 말자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랑, 상상력, 유머로 가득 찬 코믹한 기법을 써서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풋풋한 사랑과 부성애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전반부는 소박하고 유머러스한 시골청년 귀도가 아름다운 처녀 도라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까지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로맨틱 코미디다. 후반부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하면서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간 귀도와 아들 조슈아가 겪는 희비극으로 꾸며져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어린 아들을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아버지 귀도.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 피에로처럼 행동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장면에선 가슴이 찡하다. 어린 아들을 살려내려는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투,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사랑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이건 마지막 숨바꼭질이야…”
“동화처럼 슬프고 놀라우며 행복이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라는 내레이션이 깔리며 영화가 시작된다. 배경은 파시즘과 나치즘이 맹위를 떨치던 1939년 이탈리아.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귀도(로베르토 베니니 분)는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이상형의 여인인 초등학교 교사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 분)를 운명처럼 만난다.
귀도는 도라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 끈질기게 구애한다. 귀도는 약혼자와 함께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는 도라에게 조금 떨어진 좌석에서 온몸으로 사랑을 호소한다. 이때 무대에서 공연되던 노래가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중창 ‘뱃노래-아름다운 밤(Bell nuit o nuit d’ amour)’이다.
도라의 마음은 천진난만한 유머로 웃음을 선사하는 귀도에게 조금씩 기울어간다. 마침내 사랑의 신은 두 사람을 동화 속 주인공처럼 결합시킨다. 행복한 가정을 꾸린 이들에게 귀여운 아들 조슈아(조르지오 칸타리니 분)가 태어나고, 그들은 꿈에 그리던 서점을 운영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1944년, 평화롭기 그지없던 이들에게 불행이 닥쳐온다. 나치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이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 것. 아들 조슈아의 생일,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는 귀도가 조슈아에게 “이건 아빠 엄마가 몇 달 동안 고민했던 네 생일 선물이야. 깜짝 놀라게 하려고 말을 안 했지, 어디로 가는지도 비밀이야” 하면서 아들을 안심시킨다. 사랑하는 아내 도라는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자원해서 남편과 아들의 뒤를 따른다.
귀도는 수용소에 도착한 순간부터 조슈아에게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실은 하나의 신나는 놀이이자 게임이라고 속인다. 아들 조슈아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안심시키려는 선의의 거짓말은 실로 기상천외해서 차라리 눈물이 날 정도다.
“우리는 지금 굉장히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있어. 벌점을 얻지 않고 1000점을 먼저 따면 이 게임은 끝나고, 이긴 사람에게 탱크를 주지. 다들 1등을 하고 싶어서 너에게 거짓말하는 거니까 절대 속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연찮게 들어맞은는 상황은 이 거짓말을 현실로 믿게 만든다. 가장 비극적인 현실이 스릴 만점의 유쾌한 서바이벌 게임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아들의 눈을 가려버린 아버지에게 가장 두려운 건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진실을 알게 될지도 모를 아들의 맑은 눈망울이 아닐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미래, 가스실, 강제노동, 알아듣지 못할 독일어로 질러대는 호령….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분주히 만들어내는 귀도의 너스레는 무지막지한 홀로코스트(대학살) 앞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조슈아는 아버지 귀도의 거짓말 덕분에 구김살 없이 지낸다. 귀도는 수용소의 나치 장교식당에서 일하면서 여자 수용소에서 지내는 아내 도라에게 스피커로 ‘호프만의 이야기’ 중 이중창 ‘뱃노래’ 선율을 흘려보낸다. 자신과 아들의 무사함을 로맨틱하게 알리는 방법이다. 도라는 귀도와 조슈아를 애타게 그리며 감미로운 선율에 젖어든다.
마침내 독일이 패망하게 되자 나치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용자들을 차례로 처형한다. 귀도는 조슈아에게 “1000점을 채우려면 마지막 숨바꼭질 게임에서 독일 군인에게 들키지 않아야 해”라고 말한다. 그러자 조슈아는 꼬박 하루를 나무궤짝에 숨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혼란스러운 수용소에서 아내 도라를 찾던 귀도는 독일군인에게 붙잡힌다. 궤짝에 숨어 이를 지켜보던 아들 조슈아를 안심시키려고 귀도는 궤짝을 향해 윙크하고 병정놀이라도 하듯 과장된 걸음걸이로 끌려가 사살당한다.
다음날, 패망한 독일군이 물러나고 정적만이 가득한 수용소 광장에 조슈아가 혼자 서 있다. 누가 1등상을 받게 될지 궁금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조슈아 앞으로 연합군 탱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우리가 이겼어요!” 하면서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린 조슈아는 진짜 탱크 위에 올라탔고, 어머니 도라를 다시 만난다.
그러고는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희생한 이야기다. 이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었다”고 회고하는 성년 조슈아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또다시 이중창 ‘뱃노래’가 흐르면서 자막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비극 암시한 오펜바흐 오페라
‘인생은 아름다워’의 이야기는 로베르토 베니니 자신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토대로 구성됐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전란 중 독일의 노동자 수용소에서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아픔과 역사적 진실, 그리고 베니니만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결합돼 휴먼 드라마가 창조됐다.
제2의 찰리 채플린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감독 겸 배우인 베니니가 연출과 각본, 연기를 겸했다. 외국어 영화로는 사상 최초로 1999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귀도와 꼬마 조슈아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연기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하며, 도라 역의 니콜레타 브라스키는 실제로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내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음악이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중창 ‘뱃노래’다. 이 곡은 오펜바흐가 1880년 죽기 직전에 작곡한 마지막 작품이다. 호프만의 여러 단편 소설을 모아 만들어진 이 오페라는 인생 역정과 사랑을 3개의 에피소드로 나눠 들려준다.
영화에 나오는 부분은 두 번째 에피소드로, 한눈에 반한 사랑 이야기와 악마에게 연인을 빼앗기는 비극을 그렸다. 귀도가 도라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이 음악이 삽입된 것은 두 사람 앞에 드리워진 비극을 암시하는 소도구다.
‘영화 속 논술·구술 워밍업’
※비극적인 상황에서 “인생은 아름답다”고 표현한 이유를 음미해보자.
※당신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는지 생각해보자.
‘핵심 기본 논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인생의 부조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부조리란 자신의 바람이나 기대가 현실과 어긋나는 상황을 말한다. 사람들은 때로 인생의 모든 것이 기대와는 달리 무의미하다고 느끼면서도 주어진 그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왜 사람들은 때로 인생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지, 어떻게 하면 그러한 생각들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술하라.
‘예시 답안’
사람들은 관습에 따라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삶의 불가해함과 부조리함조차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닥치면서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진다. 이러한 삶의 허무와 부조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기본 조건일 수 있다.
인간이 삶의 부조리를 느끼는 까닭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예측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우연에 의해 자신의 삶과 자신이 믿고 있던 가치가 흔들릴 때 사람은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카뮈의 소설, ‘시지프의 신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애써서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지는 상황에서 삶의 허망함을, 그러면서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운명에서 삶의 부조리를 느낀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의도나 바람대로 되지 않고 자신이 힘들게 노력한 것이 결국 물거품이 될 때 삶의 허무함과 부조리를 마주하게 된다.
삶의 무의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삶의 부조리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부조리를 인간이 지닌 한계로 인식하고 주어진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부조리에 절망하여 삶을 포기하거나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거나 무조건 견디며 살아가서도 안 된다. 부조리함이 인간만이 느끼는 삶의 실존적 조건이라면, 회피하지 않고 맞서는 태도야말로 ‘인간다움’의 전형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은 사유할 수 있기에 삶의 부조리를 느낄 수 있으나, 갈대처럼 나약하기에 때로는 그 부조리한 상황을 용감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다. 삶의 부조리를 깨닫는 데에는 삶에 대한 진지한 사색이 전제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사색은 매우 의미 있는 정신 활동이다. 그러나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생각이 지나쳐 삶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에 대한 낙관적 사고와 자기 성찰적 사색을 지속하는 노력으로 그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탈피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소중함을 깨달아 긍정적 자세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관련 기출문제*
※다음 제시문은 루쉰(魯迅)의 ‘아Q정전(阿Q正傳)’에서 발췌한 것이다. 주인공의 사고와 행동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기술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역사적 존재로서의 진실한 삶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논술하시오. 1400자(±40자) (서강대 1999 정시)
제시문
(가) 아Q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나중에 하나하나 다 입 밖으로 말했기 때문에 아Q를 놀리던 사람들은 거의 다 그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승리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는 그의 노란 변발을 잡아챌 때마다 사람들이 먼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Q, 이건 자식이 아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다 네 입으로 말해봐. 사람이 짐승을 때린다고!”
아Q는 두 손으로 자신의 변발 밑동을 움켜잡고 머리를 비틀면서 말했다.
“벌레를 때린다. 됐지? 나는 벌레 같은 놈이다. … 이제 놔줘!”
벌레가 되었어도 건달들은 아Q를 놓아주지 않았다. 전과 똑같이 가까운 아무데나 그의 머리를 대여섯 번 소리나게 짓찧었고, 그런 뒤에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이번에는 아Q도 꼼짝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초도 지나지 않아 아Q도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그는 자기가 자기 경멸을 잘하는 제일인자라고 생각했다. ‘자기 경멸’이라는 말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제일인자’다. 장원(壯元)도 ‘제일인자’가 아닌가?
“네까짓 것들이 뭐가 잘났냐!?”
아Q는 이처럼 여러 가지 묘법을 써서 적을 극복한 뒤에는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 술을 몇 잔 마시고 또 다른 사람들과 한바탕 시시덕거리고 한바탕 입씨름을 하여 또 승리를 얻고, 유쾌하게 사당으로 돌아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잠이 들었다. 돈이 생기면 그는 야바위 노름을 하러 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Q는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속으로 끼어들었다. 목소리는 그가 제일 컸다.
“청룡(靑龍)에 사백!”
“자~ 열어요~ 얏!”
물주가 상자 뚜껑을 열고서 역시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를 읊어댔다.
“천문(天門)이군요. 각(角)은 텄고요, 인(人)이랑 천당(穿堂)은 아무도 안 걸었고요! 아Q 돈은 가져오고요!”
“천당에 백 백오십!”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는 로베르토 베니니 자신의 가족이 겪은 아픔을 토대로 구성됐다.
그러나 참으로 ‘인간 만사는 새옹지마’인 것인지, 아Q는 불행히도 딱 한 번 이기기는 했는데 도리어 낭패를 보았다. 그것은 웨이좡(未莊)에서 마을 제사를 지내는 날 밤이었다. 그날 밤에는 관례대로 연극을 했는데, 무대 왼쪽에서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노름판이 한창 벌어졌다. 연극판의 징소리와 북소리가 아Q의 귀에는 십리 바깥에서 나는 것 같았고 아Q에게 들리는 것은 오직 물주의 노랫소리뿐이었다. 그는 따고 또 땄다. 동전이 작은 은전으로 바뀌었고, 작은 은전이 큰 은전으로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큰 은전이 두둑이 쌓였다. 그는 대단히 신바람이 났다.
“천문에 두 냥!”
누가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움을 시작했는지 그는 몰랐다. 욕하는 소리, 때리는 소리, 발걸음 소리,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그가 간신히 일어나 보니 노름판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으며, 몸이 여기저기 아픈 걸로 보아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몇 번 당한 것 같았다. 몇몇 사람이 이상스러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넋을 잃고 사당으로 돌아왔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기의 은전 뭉치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삿날 벌어지는 노름판에 낀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마을 사람이 아니니 어디 가서 재산을 찾는단 말인가? 하얗게 반짝이는 은전더미! 더구나 자기 것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져버린 것이다! 자식이 가져간 셈치자고 해도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자기를 벌레라고 해보아도 역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실패의 고통을 조금 느꼈다.
그러나 그는 금세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 뺨을 힘껏 연달아 두 번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리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때린 것이 자기라면 맞은 것은 또 하나의 자기인 것 같았고, 잠시 후에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았으므로 ─ 비록 아직도 얼얼하기는 했지만 ─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드러누웠다. 그는 잠이 들었다.
(나) 아Q의 귀에도 혁명당이라는 말은 진작부터 들려오던 터였고, 올해는 혁명당을 죽이는 것을 제 눈으로 구경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혁명당은 곧 반역이며 반역은 곧 자기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껏 ‘깊이 증오하고 극히 원통’해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이 백리 사방에 이름이 높은 거인(擧人) 어른을 그토록 겁먹게 하였으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동경’을 품게 되었고, 더구나 웨이좡 사람들의 당황한 표정에 아Q는 더욱 유쾌해졌다.
“혁명도 좋은 거구나”라고 아Q는 생각했다. “그 개 같은 놈들을 혁명해버리자. 혐오스러운 놈들! 가증스러운 놈들! … 그래, 나도 혁명당에 항복해야지.”
아Q는 요즈음 돈이 궁해서 아마 다소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빈속에 낮술을 두 잔 마셨는지라 더욱 빨리 취해서 한편으로 생각하고 한편으로 걷다 보니 다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어찌 된 것인지 갑자기 자기가 혁명당이고 웨이좡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포로인 것 같았다. 그는 득의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떠들었다.
“반역이다! 반역이다!”
웨이좡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불쌍한 눈빛은 아Q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보자 그는 유월에 빙수를 마신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그는 더욱 신이 나서 걸어가면서 고함을 질렀다.
“좋아, … 원하는 것은 전부 다 내 것, 마음에 드는 여자도 전부 다 내 것. 뚜뚜, 창창! 후회한들 어쩌리, 술김에 잘못 알고 쩡 아우들 목을 쳤네. 후회한들 어쩌리, 아아아.… 뚜뚜, 창창, 뚜, 챙그랑창! 내 손은 쇠채찍을 들어 너를 때린다.…”
차오씨 댁의 남자 두 분과 두 사람의 친척이 대문 앞에 서서 혁명을 논하고 있었는데 아Q는 그것도 보지 못하고 머리를 꼿꼿이 쳐든 채 노래를 하면서 지나쳐갔다.
“뚜뚜….”
“라오(老)Q” 차오 노어른이 겁먹은 태도로 맞이하면서 낮은 소리로 불렀다.
“창창.” 아Q는 자기 이름에 ‘라오(老)’자가 붙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므로 자기하고는 무관한 어른 말이려니 여기고 노래만 불렀다.
“뚜, 창. 챙그랑창, 창!”
“라오Q”
“후회한들 어쩌리….”
“아Q!” 수재가 할 수 없이 직접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Q는 그제야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요?”
“라오Q…요즘….” 차오 노어른은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요즘, … 벌이가 좋은가?”
“벌이가 좋으냐고요? 물론이죠. 원하는 것은 전부….”
“아…Q형, 우리같이 가난한 동무들은 괜찮겠죠….” 차오바이옌이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혁명당의 속셈을 떠보려는 것 같았다.
“가난한 동무들? 당신은 나보다 돈이 많잖아”라고 말하면서 아Q는 가버렸다.
사람들은 낙심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오 노어른 부자는 집으로 돌아가 밤에 등불을 켤 때까지 의논했다. 차오바이옌은 집으로 돌아가 허리춤에서 전대를 끌러내려 자기 처에게 주면서 상자 밑에 숨겨놓으라고 했다.
(다) “반역이라? 재미있구나,… 하얀 투구에 하얀 갑옷의 혁명당이 온다. 청룡도에 쇠채찍, 폭탄, 총,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 구겸창(鉤鎌槍)을 들고서 사당 앞을 지나가며 부른다. ‘아Q, 같이 가세 같이 가!’ 그래서 같이 간다.… 그때가 되면 웨이좡 사람들은 꼴 좋겠지. 무릎을 꿇고 부르겠지, ‘아Q, 살려줘!’ 누가 들어준대?
제일 먼저 죽여야 하는 건 샤오디와짜오 노어른이야, 그리고 수재도, 그리고 가짜 양놈도…. 몇 놈이나 남겨둘까? 왕 털보는 원래 남겨둬도 되겠지만 그래도 안 돼… 물건은,… 곧장 들어가서 상자를 열면 원보(元寶· 은으로 만든 말굽 모양의 화폐)에 은화, 옥양목 셔츠,… 수재 마누라의 영파(寧波)침대부터 사당으로 옮기고, 그밖에 쳰씨 댁의 탁자랑 의자를 놓고… 아니 차오씨 댁 것을 쓰자. 나는 손대지 말고 샤오디를 시켜 옮기자, 빨리 옮겨야지 안 그러면 따귀를 때릴 테다… 짜오쓰천의 누이동생은 너무 못생겼어. 쪼우치댁의 딸은 젖비린내 나고. 가짜 양놈의 마누라는 변발도 없는 남자랑 잤으니. 흥, 좋은 물건이 아냐! 수재 마누라는 눈까풀에 흉터가 있지… 우마는 못 본 지 오래됐는데, 어디 있나 몰라. 아깝게도 발이 너무 크지.”
아Q는 미처 생각을 매듭짓기도 전에 벌써 코를 골았다. 넉 냥짜리 초는 아직 반치도 채 타지 않았고 붉은빛이 그의 벌려진 입을 비추었다. “어어!” 아Q는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들어 황망히 사방을 둘러보더니 넉 냥짜리 초가 보이자 다시 머리를 처박고서 잠들어버렸다.
다음날 그가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거리로 나가 살펴보니 모든 것이 다 전과 똑같았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고, 생각해보려 해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정수암(靜修庵)에 도착했다. 암자는 봄에도 그랬던 것처럼 고요했으며 흰 벽에 검은 문이었다.
그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다가가서 문을 두드리자 개가 안에서 짖었다. 그는 급히 벽돌 조각을 몇 개 집어들고서 다시 좀더 힘껏 두드렸다. 검은 문에 곰보 자국이 숱하게 생기고 나서야 누군가 문을 열기 위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Q는 얼른 벽돌 조각을 움켜쥐고 다리를 떡 벌리고 서서 검은 개와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암자 문이 빠끔히 열렸을 뿐 검은 개는 뛰쳐나오지 않았다. 들여다보니 늙은 비구니 한 사람만 있었다.
“자네 왜 또 왔나?” 그녀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혁명하려고요… 알아요?….” 아Q는 아주 모호하게 말했다.
“혁명 혁명, 벌써 혁명했잖아… 자네들이 우리를 어떻게 혁명한다는 거야?”
늙은 비구니가 두 눈을 붉히며 말했다.
“뭐라고요?….” 아Q는 의아했다.
“그 수재하고 가짜 양놈이!”
아Q는 너무 뜻밖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대경실색했다. 늙은 비구니는 그의 예기(銳氣)가 사라진 것을 보자 날쌔게 문을 닫았다. 아Q가 다시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고, 다시 두드려보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한 Tip’
●제시문은 중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1881∼1936)의 소설 ‘아Q정전’에서 발췌한 것으로 주인공 아Q의 무의지적인 사고와 행동 양식을 희화적으로 그린 내용이다. ‘아Q정전’은 신해혁명(辛亥革命) 전후 중국인의 무기력한 모습을 아Q라는 전형적 인물을 통해 희화화한 전기 형식의 소설이다. 신해혁명은 1911년 10월10일 쑨원(孫文) 등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혁명이다.
●루쉰의 ‘아Q정전’이 수록된 ‘루쉰 소설전집’은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 포함된 책이다.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을 통해 중국인은 자신들의 전통과 근대를 성찰하고 사유했다. ‘루쉰 소설전집’에는 그가 평생 출간한 3권의 소설집이 모두 담겨 있다.
첫 번째 소설집은 ‘함성’이다. 여기에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와 중국인의 본성을 날카롭게 해부한 ‘아Q정전’ 등 15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두 번째 소설집은 ‘방황’으로 여기에는 ‘축복’ 등 11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세 번째 소설집은 ‘고사신편’이다. ‘옛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제목의 이 소설집은 일반 민중에게도 친숙한 신화나 전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논제는 ‘주인공 아Q의 사고와 행동 특성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기술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역사적 존재로서의 진실한 삶이 어떠한 것인가’이다. 주인공 아Q의 사고와 행동 특성을 파악해보면 제시문 (가)에서 그는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고 그러한 상황을 ‘정신적인 승리법’이나 ‘자기 경멸’의 방법으로 합리화하는 자기 정체성이 결여된 인물이다.
제시문 (나)에서 아Q는 혁명 당원으로 변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떤 의식을 가지고 혁명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거인’ 어른이나 웨이좡 사람들 앞에 군림할 수 있다는 사실에 혁명 당원에 가입한 것으로 즉자적이고 무의지적 인물의 특성을 보여준다. 제시문 (다)에서 아Q는 혁명 전사로서 온갖 부정적인 행위를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수재’와 ‘가짜 양놈’)이 이미 혁명한 후라는 말을 듣고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는 상황 인식이 결여된 무기력한 인물이다.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의 진실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아Q의 행동 특성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야 한다. 한 개인은 역사적 존재로서 어떤 형태로든지 현실을 떠나 생활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은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식 태도를 지녀야 한다. 아Q의 행동 특성의 모순을 통해 볼 때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진실한 삶의 자세를 갖추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예시 답안’
인간은 항상 구체적 상황 속에서 인식하고 행동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거기에 대처하여 진실하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상황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반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직시하지 못할 때,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게 됨은 물론 주어진 사회·역사적 상황에 대한 책임도 다할 수 없게 된다. ‘아Q정전’에서 발췌한 제시문은 후자의 사례를 보여주며, 역사적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케 한다.
제시문의 주인공 아Q는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불행에 빠지는 인물이다. (가)에서 그는 심리적 자기 합리화로 열악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처신을 보인다. 남에게 맞는 수모의 순간을 ‘자기 경멸’이란 나름의 ‘정신적 승리법’으로 모면하려 한다거나, 돈을 잃어버린 패배의 순간을 엉뚱한 승리로 바꾸어버리는 것이 그 사례다. (나)에서 그는 반대의 성격으로 제시된다. 부정적으로 여기던 혁명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마치 혁명당의 전사처럼 의식하고 행동한다. 주어진 상황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그는 (다)에서 온갖 부정적인 혁명 전사의 행태를 공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수재’와 ‘가짜 양놈’)이 이미 혁명한 후였기에 이렇다 할 행동도 하지 못한 채 패배를 경험한다.
그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구체적인 현실 인식을 결여한 존재였다는 것이 문제다. (가)에서 ‘자기 경멸’ 방식으로 패배를 승리로 바꾸는 모습은 동정의 여지가 있다. 매우 나쁜 처지에 놓인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의식과 행동이, 열등한 자신의 처지를 타개하려는 하층민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다)에서는 비판의 대상일 뿐이다. 특히 열악한 처지에서 한없이 굴종적이던 그가 뒤바뀐 상황에서 폭력적 지배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에서 그렇다. 그의 의식과 행동은 혁명적 상황에 대한 판단에서도 그랬듯이, 매우 즉자적이다. 이쯤 되면 (가)부분도 한갓 자기 기만 내지 허위 의식의 발로였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기만과 모순적인 의식 조작으로 주인공은 구체적 상황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채 역사적 진실에서 멀어진 존재로 전락했다.
역사적 존재로서 진실하게 산다는 게 거창한 영웅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날의 삶에서 개개인이 자각적 존재로 거듭나려는 진지한 노력을 계속할 때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다. 허황한 자기 기만이나 허위 의식, 구체적 상황 인식을 포기한 즉물적 행동의 모순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역사라는 반성의 거울을 통한 올바른 현실 인식과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실천적 존재로 거듭날 때, 개인의 정체성이 고양되고 집단은 소망스러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다양한 예를 들고 그에 공감한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하시오. (서울대 2001 정시 심층면접)
‘문제 해결을 위한 Tip’
●심층면접에서는 상식적이고 단편적인 대답을 요하는 것은 묻지 않는다. 대입에 출제된 바 있는 ‘폭력’ ‘욕망’ ‘쾌락’에 대하여 통상적인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정당방위나 독립운동을 위해 부득이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나, 삶의 원동력으로서의 ‘욕망’ ‘쾌락’의 긍정적인 면까지 고려하면서 입체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거짓말이 통상 부정적이지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선의의 거짓말처럼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거짓말이 나쁜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선의의 거짓말이 정의롭게 쓰이는 경우 등을 예를 들어 대답해야 할 것이며, 선의의 거짓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예시 대답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실제 심층면접에 임하며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선의의 거짓말을 예로 든다면 문화적인 소양을 드러내는 것으로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대학에서 제시하는 논술·구술 모범답안에 영화의 장면을 예로 든 경우가 많다. ‘노동’의 주제에 대해 ‘모던 타임스’,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서는 ‘빌리 엘리어트’, 생명 복제의 경우 ‘A.I’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예시 답안’
우리는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나쁜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남을 속이는 행위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단지 거짓말이 참,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항상 참, 진실만을 말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기적 욕구에 따라서 거짓말을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거짓말이 우리에게 나쁘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단지 거짓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기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매우 이기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감안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선의의 거짓말은 하얀 거짓말(White Lie)이라고도 합니다. 남에게 피해나 아픔을 주는 나쁜 거짓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지만 상대방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고 도움이 되는 거짓말이라면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픈 사람에게 “당신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어서 준비하십시오”라는 말보다는 “어떻게든 살 가망은 있습니다. 희망과 용기를 가지세요”라고 하면 정말로 희망을 가지고 꿋꿋이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나 형제에게 서로를 칭찬하는 마음으로 그다지 잘한 것은 아니지만 잘했다고 거짓말하는 것은 서로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는 지름길이 됩니다. 또 “오늘 너 정말 예뻐 보인다”라든지 “옷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상대방을 기분좋게 해주는 말들은 가끔씩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한번쯤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꼭 나쁜 데 쓰라는 법은 없습니다. 친구를 놀리거나 남을 속여서 이용하는 등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거짓말은 때에 따라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의의 거짓말을 단지 거짓이라는 이유로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동기가 말 그대로 선한 것이라면 그 행동 또한 선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선의의 거짓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