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골프에 관한 짧은 명상 하나

  • 김이연 소설가

    입력2005-10-25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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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에 관한 짧은 명상 하나
    골프는 운동 가운데 가장 큰 운동장에서 하는 종목이다. 야구장, 축구장이 아무리 넓다 해도 5000평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골프장은18홀은 물론 36홀이 넘는 곳도 있으니 큰 것은 50만평 이상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땅 100평의 넓이는 알아도 500평이 넘으면 그 넓이가 짐작가지 않는다. 아파트 30~40평까지는 알지만 100평 넘는 아파트에선 어떻게 살까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골프를 모르는 사람은 리더가 될 자질이 모자란다고들 말한다. 공간이나 생각의 스케일이 작기 때문이다. 적어도 50만평을 발로 밟아보고 눈으로 돌아보았으면, 안 보고 안 밟아 본 사람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골프를 하다 보면 스케일이 커지기는커녕 좀스러워지고 자질구레해지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아슬아슬한 절벽 아래로 떨어진 쇼트 티를 주우러 목숨 걸고 내려가기도 하고, 남들이 버리고 간 롱 티를 주워서 미들 티로 쓰거나 쇼트 티로 쓰기도 한다. 어쩌다 인심 좋은 골프장을 만나면 티 박스 옆에 티를 담은 바구니가 있다. 그럴 때는 한 움큼 집어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멀쩡한 신사가 이런 꼴사나운 짓을 예사로 한다.

    필드를 걷다 보면 가끔 다른 홀에서 잘못 쳐서 넘어온 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캐디가 그 자리에 그냥 두라고 말해도 굳이 그 공을 집어 주머니에 넣는 골퍼가 있다. 다른 홀로 떨어진 공은 십중팔구 새 공이다. 대개 초보자가 친 공이거나 거리에 지나치게 욕심을 낸 골퍼의 공이기 때문에 새 것이거나, 비싼 것이기 쉽다. 새 공 한 개를 주워 횡재했다고 생각할는지 몰라도 분명 남의 게임을 방해한 것이다. 공의 임자는 로스트 볼로 카운트되기 때문이다. 이 좀스러움을 어떻게 고칠까.

    남의 공을 잘 줍고 일부러 러프에 들어가서 풀 속을 뒤적거리는 골퍼는 새 공은 가방에 넣어두고 매번 헌 공으로 게임을 한다. 집에 가면 헌 공이 서랍에 가득하다고 자랑까지 덧붙인다.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처음 골프 약속을 하는데 한 친구가 티오프가 8시29분이라고 말한다. ‘29분은 뭐야, 30분이면 30분이지. 웃겨. 무슨 엄청 붐비는 국제공항의 비행기 이착륙 시각 다이얼이야?’ 여유, 겸손, 사치, 건강…, 좋은 단어란 단어는 다 갖다 붙인 골프가 왜 이렇게 사람을 죄는 건가. 29분이란 말이 공연히 사람을 초조하게 하고 스트레스 받게 하고 안달나게 한다.

    그래도 또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런 깐깐한 티오프 다이얼 덕분에 ‘코리언 타임’이라는 그 치욕스러운 말이 깨끗이 사라진 것도 같다. 민족의 고질이라는 ‘지각’을 고쳐놓은 게 골프의 힘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두서너 시쯤에 만나자’ 같은 ‘쯤’이라는 단어가 없어졌다. 티오프 시각이 되면 사정없이 스타트한다. 결국 골프백 싣고 몇 홀을 건너뛰고 따라와서 합류해야 한다. 돈으로 따져도 홀당 얼마인데 그걸 놓치다니 무척 억울한 일이다. 고로 이젠 고속도로가 밀리느니 국도가 밀리느니 하는 말은 핑계가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애비가 죽어도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 다 나왔을까.

    골프에서는 무한히 겸손해야 한다. 머리를 푹 숙이고 침착하게 때려야 한다. 제대로 못 쳐도 겸손하면 50점은 된다. 잘 못 쳐도 천천히 때리기만 하면 50점은 된다. 머리 숙이고 천천히 때리면 합계 100점이 된다. 이게 골프식 계산법이다. ‘그렇게 쉬운 걸 못한단 말이야 이 바보야’하고 자책하기를 30여 년이다. ‘아, 또 고개를 들었네’, ‘아 또 스윙이 빨랐네’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외친다.

    다른 사람의 공을 앞질러서 걸어가면 안 된다. 공에 맞을 위험이 있는 건 물론이고, 그렇게 촐싹대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무한 겸손하게 뒤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다른 사람이 치는 걸 뒤에서 지켜보면서 굿 샷, 뷰티플 샷을 외쳐주고 박수도 치면서, 그 공이 밖으로 나가면 위로해주고 공이 떨어진 지점을 일러주며 같이 찾아주는 건 매너이며 기쁨이다. 그렇게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넉넉함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골프에 관한 짧은 명상 하나
    동반자가 벙커에서 공을 치고 나왔을 때 뒤에서 지켜봐주고 잘 나간 공을 확인하고 나서 벙커 안을 정리해주는 친절을 베풀어보자. 그야말로 감동이다. 감동 줄 일을 일부러 찾아서 하기란 어렵지만 골프장에서는 그런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된다. 조금만 넉넉한 마음으로 겸손하고 침착하게 움직이다 보면 기회가 온다.

    흔히 사람들은 산에 오르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북한산을 좋아하던 작가 이병주는 ‘북한산’이라는 시에서 ‘나의 일생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북한산을 알기 전의 나와 북한산을 알고 난 다음의 나로 나눈다’고 했다. ‘모든 것이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모두 내 탓이라는 것을 알았다’로 끝나는 시다. 애인이 떠난 것도 결국 내 탓이었다는 것을….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사랑은 아니더라도 골프를 알고 난 다음의 나는 분명 달라졌다.

    산다는 일이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겸손하게 천천히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하면서, 그리고 크게 멀리 앞날을 보면서 걸어가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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