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전쟁 속의 여성

‘성폭력 피해자’ ‘잔혹한 전사’ ‘자살 테러범’의 세 얼굴

  •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5-10-25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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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촌 여러 분쟁지역에서 여성은 성폭력의 피해자다. 그러나 이라크에 주둔한 1만1000명의 미국 여군 가운데 일부는 ‘가해자’의 모습이다. 총력전으로 펼쳐지는 현대전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많은 여성이 전선에 뛰어들거나 정보·군수·병참 등 2선 지원임무를 맡는다. 자폭테러의 행동대원으로 나서는 전투적 여성들도 있다. 현대전에서 여성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나폴레옹시대의 유럽 전쟁을 비롯해 19세기만 해도 전쟁 희생자의 90%는 군인이었다. 오늘날 현대전의 희생자 절대 다수는 비전투원인 민간인이다. 후방과 전방이 따로 없는 데다 공습으로 많은 민간인이 죽고 다친다. 분쟁 연구가인 댄 스미스(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 연구원)가 펴낸 ‘전쟁과 평화 상황 지도’(1997)에 따르면, 1990년대 전반기에만 전세계 분쟁지역에서 550만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75%가 비전투원이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여성과 어린이다. 전쟁이란 폭력적 상황은 신체적으로 약한 여성과 어린이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 특히 여성의 경우, 전쟁의 혼란 속에서 성폭력에 희생당하는 일이 잦다. 그래서 전쟁 속의 여성은 ‘피해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1999년 국제적십자사는 제네바협정(1949) 체결 50주년을 맞아 ‘전쟁 중인 사람들’이란 제목의 특별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14개국에 걸쳐 2만명을 상대로 그들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조사했다. 그 가운데 12개국은 설문조사 당시 유혈충돌이 빚어지고 있던 국가였다. 이 조사를 통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여성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왔는지 다시금 확인됐다.

    인터뷰에 응한 여성의 40%는 가족과 헤어져 괴로워한 경험이 있으며, 32%는 본인의 뜻과 달리 살던 집에서 쫓겨나 피란을 갔으며, 9%는 주변 사람이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9%는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무장세력에게 얻어맞거나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소말리아는 응답자의 39%,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6%의 응답자가 주변의 아는 사람이 성폭력을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전쟁이란 광풍에 휘말린 여성의 이미지는 ‘피해자’ 쪽이다.

    현대전에서의 여성



    과학기술의 진보는 더욱 가볍고 살상력이 뛰어난 무기들을 만들어냈고, 여성이라도 그런 무기들을 쉽게 다룰 수 있게 됐다. 여성도 가해자로 나설 수 있는 것이 현대전이다. 전쟁에서 여성은 이제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허약한 존재가 아니다. 여성의 전투행위 참여는 성능이 개량된 소형 무기들이 널리 보급되면서 크게 늘어났다(소년병 숫자가 늘어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래서 전쟁에서 여성은 언제나 피해자라는 관념은 점차 바뀌고 있다.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지, 여자들이 끼어들 일은 아니다.”

    미국 남북전쟁(1860∼64)을 무대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대사다. 국가가 지닌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총력전인 현대전에선 위의 대사가 이렇게 바뀐다.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지만, 여자들도 한몫 한다.”

    더구나 현대전은 후방과 전선의 개념도 무너뜨렸다. 미사일이 날고 전폭기가 뜨는 공습 전술로 후방도 언제든 전선이 될 수 있다. 여성이 후방에서 뜨개질이나 하면서 안전하게 지내던 시대는 갔다.

    ‘가해자’ 이미지의 여군

    현재 이라크엔 1만1000명의 미 여군이 근무 중이다. 전체 미 여군 13만9000명 가운데 8%가 이라크에 가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적어도 37명의 여군이 저항세력의 공격에 죽임을 당했고, 300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라크 주둔 미 여군은 직접적인 전투에는 동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선이 따로 없는 이라크 상황은 여군들로 하여금 적과 맞닥뜨려 총격전을 벌이게끔 몰아간다.

    헌병대 소속의 일부 여군은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이라크 포로들과 얼굴을 맞대고 신문작업을 벌이면서 학대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군 지휘부는 여자를 낮추보는 이슬람 사회의 특성을 이용, 여군을 신문실에 들여보내 포로를 학대함으로써 그들을 내부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종의 심리전을 폈다.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 여군이 군홧발로 수감자를 짓밟거나 여성의 생리혈로 더럽혀진 팬티를 수감자 얼굴에 씌우는 가혹행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본보기들은 여성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일반적인 관념을 깨뜨린다. 1994년 80만명이 불과 석 달 사이에 죽음을 맞았던 르완다 학살 당시, 일부 후투족 여인들도 소수민족인 투치족 학살에 적극 가담했다. 여성도 전쟁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

    원칙적으로 미 여군은 ‘직접적인 지상전투’를 벌이는 전투부대에 배속될 수 없다. 이 규정이 처음으로 문서화된 것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4년. 펜타곤(미 국방부)은 ‘직접적인 지상전투’의 개념을 ‘적군의 총격에 노출되고, 적군과 직접적인 신체 접촉을 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황에서 적과 교전하는 행위’라 정의했다. 이에 따라 미 여군은 지상전을 주요 임무로 하는 여단(brigade) 이하 부대 단위에는 배속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미 국방장관 규약 : 직접지상전투의 정의와 임무규칙’. 1994).

    미 여군은 특수부대원이 되겠다고 나설 수 없다. 미 해군 특수부대인 실(SEAL)은 응모자격 요건으로 ‘만 18세에서 28세 사이의 남성 현역군인으로 전과기록이 없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미 레인저 부대나 델타도 마찬가지로 여군을 대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화 ‘GI 제인’에서 볼 수 있듯, 아무리 뛰어난 체력을 지닌 여군이라도 엄청난 체력 소모가 따르는 훈련과정에서 합격점을 받기가 어렵다. 한 조사자료에 따르면, 특수부대원 훈련이 시작된 6일 동안 몸무게는 평균 9kg 줄어든다. ‘지옥훈련’을 통과했다 해도, 여성이 그 뒤에 실제로 주어질 고난도 특공임무를 해내기는 쉽지 않다.

    정규군보다 반군이 여성 비율 높아

    여성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기록된다. 1914∼18년 사이에 영국군에는 약 10만명의 여군이 복무 중이었다. 이들 가운데 절반은 간호병으로, 최전선에 투입된 이는 거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이 독일군의 공세에 몰리던 1941년 윈스턴 처칠 수상은 병역법을 개정해 여성도 징집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세에서 30세 사이의 미혼녀, 아이가 없는 독신녀(나중엔 43세로 연장) 750여 만명이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수공장 등에 동원됐다. 이 가운데 약 45만명이 군복을 입고 군대조직에 편입됐다. 이에 비해 아돌프 히틀러는 “여성들은 미래의 독일전사를 잘 키워야 한다”면서 여성 징집제를 시행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에서 활동하는 여군의 모습은 당시로선 매우 인상적이었다. 소련 여군은 보병은 물론 전투기 조종사, 탱크병, 저격수, 정치장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치 침공군으로부터 ‘사회주의 모국’을 지키는 데 한몫 했다. 1942∼45년에 소련군 전투기 조종사의 12%가 여성이었다(소련군 내 여군 비율은 8%).

    동유럽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우던 게릴라 가운데도 여성이 다수 끼여 있었다. 또한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동유럽의 반소(反蘇) 게릴라 활동을 돕기 위해 영국군은 418명의 여자 특수요원을 훈련시켜 동유럽으로 내보냈다(이들 가운데 119명이 전사했다).

    현재 140만 미군 병력 가운데 여군은 14%에 이른다(약 20만명). 1991년 걸프전쟁 당시 4만명의 여군이 수송병, 간호병, 통역병 등 비전투 인력으로 참전했다. 현재 이라크 주둔 미 여군은 1만1000명. 한국의 여군 비율은 0.3%지만, 전세계적인 평균 비율은 3%다. 남녀가 모두 병역의무를 지는 이스라엘은 30%, 캐나다도 10%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일본 자위대는 약 4%선. 일반적으로 정부군보다는 반군의 여성 비율이 훨씬 높다. 이 글 앞에서 전체 병력 가운데 여군의 평균 비율이 3%라고 했다. 그것은 정규군의 통계치다.

    지구촌의 여러 분쟁지역을 살펴보면, 많은 여성이 비정규군으로서 AK-47 소총 등을 들고 전투를 벌여왔다. 이들 비정규 무장조직은 민병대, 게릴라, 준군사조직(paramilitary) 또는 시민군(militia) 등 여러 이름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병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소수민족의 무장세력일수록 여성의 비율이 높다.

    이를테면 인도양 귀퉁이의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의 반군 타밀 타이거 해방전선(LTTE)이 그러하다. 국제적십자사가 펴낸 ‘여성과 전쟁’이란 제목의 보고서(2000)에 따르면, LTTE 전체 병력 가운데 약 3분의 1이 여성이다. LTTE는 정부군에 맞서 힘든 싸움을 벌이면서 여성이든 미성년자든 가릴 것 없이 총을 들고 적을 향해 쏠 정도의 힘만 있다면 반군에 편입시켜왔다.

    1996년 이래로 준(準)내전 상태에 빠져든 네팔도 여성 반군이 상대적으로 많다. 1만명이 넘는 반군은 마오쩌둥주의를 내걸고 네팔 왕정을 전복하려고 게릴라전을 펴고 있다.

    아프리카 반군도 여성 비율이 높다. 2000년 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내전 때 취재한 반군 ‘혁명연합전선(RUF)’ 소속 여성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거침없이 내뱉는 말투나 행동이 웬만한 남자를 주눅들게 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 30대 초반의 여자 반군 한 명은 부하들이 보초를 서면서 담배를 피우며 키득거리자 “보초 똑바로 서라!”며 매섭게 야단쳤다.

    독재자 찰스 테일러가 이웃나라 나이지리아로 망명함에 따라 2003년 8월 내전이 끝난 라이베리아에서도 많은 여성이 반군 ‘라이베리아 화합민주연합(LURD)’ 소속으로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 가운데 ‘검은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의 한 20대 초반 여성 반군 간부가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한 손에는 AK-47 소총을 든 모습이 담긴 사진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내전 중 부모를 잃은 그는 1999년 정부군 병사들에게 강간을 당한 뒤 반군에 합류,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 속의 여성

    6·25전쟁 당시 좌익으로 몰려 살해당한 젊은이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가 시신 앞에서 흐느끼고 있다.

    시에라리온이나 라이베리아 여성 반군의 경우에서 보듯, 아프리카 여성들이 반군의 일원으로 총을 들고 전투에 뛰어드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쟁 중 흔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다. 둘째, 전란 속에서 이렇다 할 생계수단이 없는 여성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다. 아프리카 분쟁지역에서 총을 지녔다는 것은 살육보다는 보호본능 개념이 앞선다.

    전술적 수단으로서의 성폭력

    전쟁은 비이성적인 유혈극이다. ‘이성적인 전쟁’ 또는 ‘이성적인 전사’란 ‘정직한 상인’이나 ‘정직한 정치인’이란 말처럼 모순된 어법이다. 삶과 죽음의 극한상황에서 정부군이나 반군, 민병대 가릴 것 없이 이성적인 존재로 남기 어렵다. 병사의 눈초리는 살벌해지고, 행동은 난폭해진다.

    그런 혼란 속에 여성은 물리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다. 지휘관들은 전술적 필요에 따라 부하들에게 여성을 강간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이 경우 성폭력은 적군이 지배하는 지역에 공포 분위기를 퍼뜨리는 일종의 ‘테러전술’이다. 지구촌 여러 내전지역에서, 특히 아프리카의 콩고, 수단, 르완다, 그리고 발칸반도에서는 성폭력이 전술적 수단으로 널리 사용됐다.

    많은 경우 가해자들은 강간한 피해자들의 목숨을 끊었다. 다행히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피해 여성은 심한 정신적 상처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더욱 운이 나쁜 여성들은 가해자의 성병이나 에이즈균에 전염되기도 한다. 그래서 전쟁 피해 여성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들만의 전쟁’을 힘겹게 치러야 한다.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사회는 성폭력에 희생당한 여성을 감싸기보다는 배척하기 일쑤다. 그래서 피해 여성은 더욱 삶의 벼랑으로 내몰린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끌려갔던 ‘일본군위안부’들도 그러했다.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죽을 고생을 했지만, 전쟁이 끝나도 고향 땅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 냈다).

    여성들은 대개 피란을 가지 않는다. 피란을 가기 어려운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돌보고, 아울러 집과 땅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들은 ‘설마 비무장에다 연약한 우리들을 죽이겠냐’는 생각에서 피란 보따리를 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의 야만적인 속성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바로 그들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무장세력에게 공격을 당한다.

    1990년대 전반기 발칸반도를 휩쓴 내전의 피바람 속에 갇힌 여성들이 그러했다. 보스니아 내전, 크로아티아 내전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남성들은 일찌감치 몸을 피했지만, 많은 여성이 노약자와 어린이를 돌보고 집을 지키려고 피란을 가지 않았다.

    이 여성들을 기다리는 것은 성적 학대였다. 유엔이 설정한 안전지대로 몸을 피한 여성들도 소수의 경무장 유엔군이 세르비아 세력에 밀려 물러난 뒤 성폭행을 당했다. 1990년대 중반,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에게 집단강간을 당한 끝에 임신한 보스니아 여성들이 서로 어깨를 감싸고 흐느끼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기억날 것이다.

    좀처럼 불길이 꺼지지 않는 콩고 내전도 많은 여성을 울렸다. 정부군과 반군 가릴 것 없이 모든 무장세력이 젊은 여성들에게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적인 인권단체인 ‘인권감시(Human Rights Watch, 약칭 HRW)’는 ‘전쟁 속의 전쟁 : 동부 콩고에서의 성폭력’이란 보고서에서 르완다 정부군이 점령한 콩고 동부지역에서 때로는 체계적인, 때로는 무차별적인 성범죄가 저질러졌음을 밝혔다.

    피해자와 목격자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114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르완다 정부군과 그 동맹세력인 콩고무장조직 RCD, 그리고 이들에 맞서 싸우는 콩고 마이마이 반군조직이 모두 전쟁범죄자라고 고발한다. 이들은 지역을 무력순찰하면서 지역민들이 ‘적군’에게 협력적이라는 트집을 잡아 여성들을 붙들어 강간하곤 했다.

    체첸 여성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군과 경찰은 “테러용의자들을 잡으려 한다”는 구실로 체첸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있다. 집안을 약탈하고 심지어 불태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이 성폭력의 희생자로 눈물을 흘려야 한다. 체첸에서 벌어지는 자살폭탄 테러사건의 범인들 가운데 여성이 여럿 있다.

    2003년 러시아군을 태운 버스를 자살폭탄 공격해 18명을 죽인 사건을 비롯해 지금껏 14건의 자폭테러가 여성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들은 러시아군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거나 그 자신이 성폭력의 피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쟁 희생자가 가해자로 나서는 모습은 지구촌 분쟁지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체첸, 팔레스타인, 스리랑카에서 벌어지는 자살폭탄테러가 단적인 예다.

    난민수용소 여성의 고난

    내전에 휘말린 여성들은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때로는 몸을 빼앗기면서도 집에 재워주고 밥을 차려줘야 한다. 부족한 식량을 그들에게 바친다는 것은 두 가지 위험을 뜻한다. 하나는 그녀가 돌보는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의 굶주림, 다른 하나는 적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언젠가 아군에게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다.

    1980년대 내전을 겪은 엘살바도르의 한 여성이 국제적십자사 요원에게 털어놓은 하소연은 절박하기만 하다.

    “게릴라들에게 밥을 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난폭해졌다. 정부군에게 밥을 해주지 않으면 그들도 난폭해졌다. 우리는 양쪽 모두에게 협력자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전쟁은 대량 난민을 낳는다. 난민수용소는 현대전이 그려내는 우울한 초상화 가운데 하나다. 난민촌에 들어서면, 우리는 그곳 사람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 노인임을 알게 된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자료에 따르면, 난민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의 비율이 75%에 이르며, 어떤 경우엔 90%에 이른다. 많은 성인 남성이 군에 징집되거나, 전선에서 죽임을 당했기에 수용소 안에서 남성 비율은 그만큼 줄어든다. 필자가 시에라리온 난민수용소나 발칸반도의 코소보와 보스니아 난민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도 남자보다 부녀자가 많았다.

    난민수용소는 결코 여성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다.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지배하는 밀림의 법칙이 통하는 곳이 난민수용소다. 전란을 피해 수용소로 오기까지 온갖 고초를 겪은 여성들은 수용소 안에서 또 다른 전쟁의 공포를 겪기 십상이다. 많은 경우 난민수용소 여성들은 그곳을 지배하는 무뢰한들의 성폭력에 희생당한다. 그 혼란 속의 눈물과 희생은 고스란히 약자인 여성들의 몫이다. 르완다 내전 당시 투치족의 공세에 밀려 이웃 콩고로 도망간 후투족이 세운 난민촌이 그러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동티모르의 투쟁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때다. 호주군을 선두로 한 유엔평화유지군이 들이닥치자 10만이 넘는 동티모르 난민들이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는 민병대의 협박과 속임수로 서티모르로 강제 이주당한 적이 있다. 그 무렵 서티모르에 세워진 난민수용소는 국제사회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틈을 타 강간범죄가 날마다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그곳 난민수용소는 유엔 난민구호기관인 UNHCR 관계자들도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동티모르 현지 취재 때 서티모르에서 막 빠져나온 난민들을 만났다. 그들은 “인도네시아를 지지해 방화와 살육을 저질렀던 민병대원들은 우리가 동티모르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면 ‘죽이겠다’며 폭력을 휘둘렀다”고 전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운이 좋아 보였다. UNHCR은 난민 여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법에 따라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해놓았으나, 서티모르 난민수용소처럼 밀림의 법칙만이 통하는 곳에서 규범이 지켜지길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화 유지에서 높아지는 여성 비중

    전쟁에서 여성의 역할이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 부차적 역할을 맡는다. 간호사로 부상병을 돌보거나, 후방 군수공장에서 탄약을 만드는 일 따위다. 아직도 국제정치는 남성 위주로 돌아간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전선에서 싸우는 일도,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협상과정에서도 여성의 얼굴을 보기는 어렵다.

    보스니아 내전을 끝장낸 데이튼 평화협상(1995. 12.) 과정에서도 여성은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쪽엔 약 40개의 여성단체가 조직돼 있었지만, 그들에겐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캄보디아, 동티모르, 소말리아, 라이베리아 등 1990년대 지구촌 곳곳에서 빚어진 분쟁을 끝내는 협상과정에서 여성은 배제됐다. 다만 남미 과테말라, 아프리카 부룬디의 내전에서는 공식 평화협상 석상에 여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서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들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안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 한 보기로, 벨기에 정부와 국제아동기금(UNICEF)은 여성들이 나서서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에서 반군이나 정부군 쪽에 붙잡혀 있는 소년병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들이 풀려나는 데 힘쓰는 역할을 제안한 바 있다. 2000년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여성과 평화안보에 관한 1차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평화협상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담고 있다. 여성이 협상에 참여함으로써 평화 분위기를 쉽게 띄울 수 있다는 논리다.

    전세계적으로 군에서 여성의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이는 군의 역할 변화와도 관련된다. 지난날 군 병력은 전쟁을 벌이는 인력을 뜻했지만, 이제는 전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인력으로 개념이 바뀌었다. 전투부대로서가 아니라 평화유지군으로서의 군 개념은 여성의 역할을 더 확대할 수 있다. 지금 유엔이 파견한 유엔평화유지군에는 많은 여성 병력이 포함돼 있다. 이들 여성은 분쟁지역의 선거 감시, 충돌 예방 순찰 등의 임무를 수행해왔다. 지구촌에서 여성이 평화 임무를 더욱 많이 맡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지난해 필자는 미국 뉴욕의 헌책방에서 6·25전쟁 당시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사진가 칼 마이던스가 펴낸 책을 발견했다. 제목이 ‘폭력적인 평화’(1968)인 이 책에 실린 여러 전쟁 사진 가운데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전쟁으로 죽은 한 남자의 시신 앞에서 3명의 여인이 서럽게 우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었다. 그 여인들은 죽은 남자의 아내, 어머니, 할머니였다.

    3대에 걸친 여인들이 나란히 앉아 윗몸을 굽힌 채 서럽게 흐느끼는 사진을 보노라니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처럼 전쟁은 여성에게 크나큰 시련과 슬픔으로 다가온다. 이라크도 현재진행형이다. 전쟁이 사라지고 지구촌 전체에 평화가 깃들일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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