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교육인적자원부로 파견을 나가서도 평생직업교육국장과 인적자원개발국장을 지내 고용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은 그의 큰 자산.
고용을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방향에 적임자라는 평도 그래서 나온다. 온화한 성품과 꼼꼼한 일처리가 돋보여 별명도 그에 걸맞게 ‘충청도 양반’으로 통한다.
협상과 조정력이 돋보이는 그의 일처리 솜씨는 여러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1998년 2월 외환위기(IMF) 당시.
적지 않은 기업이 쓰러지고 실업자가 200만명에 달하는 등 국가가 부도날 위기에 처했던 긴박한 시기. 국가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노사정이 경제 살리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꼭 필요할 때였다.
노동부가 ‘정리해고와 파견노동’ 등을 허용하는 내용의 ‘노사정 대타협’을 추진할 때 실무 책임자인 노정과장을 맡았다. 민주노총까지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협상 조정력을 발휘한 일은 노동계에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당시 대타협 선언 직전 그간의 합의를 번복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뛰쳐나갔다.
‘국가 구조조정’이 필요했을 당시 노사정위원회가 중심을 잡고 나름의 역할을 통해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합리적 조정력은 재해보상과장 시절에도 빛을 발했다.
당시 원진레이온 근로자 200여 명이 과천청사 앞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황화탄소에 중독된 것은 명백한 업무상 재해”라며 노동부 장관의 면담을 요구하며 강경 자세를 풀지 않았다.
마침 그날 대통령이 과천청사를 방문하기로 예정돼 과천경찰서는 비상이 걸렸다. 과천경찰서장이 농성 근로자들을 해산시키려다 오히려 농성근로자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보상과장이던 그가 나섰다. 성난 근로자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결국 원진레이온 근로자들은 농성을 풀었다.
지금도 정 차관은 주(駐)리비아대사관에서 노무관으로 재직할 때를 가끔 떠올린다. 당시 리비아는 정세가 매우 불안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생사를 넘나드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당시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고 집에 왔더니 강도가 들었다. 결혼예물을 포함한 패물과 돈 되는 것은 모두 훔쳐가는 바람에 지금도 결혼반지가 없다. 잊지 못할 경험담이다.
행시 22회 출신으로 부인 최해실씨와 슬하에 2남을 두었다.
노무현 정부 때 법제처장을 지낸 남기명씨와는 대전고 3학년 같은 반 친구이자 대학생활(충남대 법대)도 함께 한 단짝. 정우택 충북지사, 한범덕 전 행자부 차관과는 고시 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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