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계 내부의 권력암투는 김대중·노무현 정권보다 한 수 위다. 대선 승리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인사 독주, 상왕(上王) 정치, 친위 쿠데타 등 보여줄 것 다 보여줬다. 新야권과도 싸웠고 박근혜계와도 싸웠고 자기들끼리는 더 싸웠다. 총선 이후 이들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이다.
“‘친이’ ‘친박’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경선 국면으로 착각하는 것 아니냐. ‘친이’라고 하기에 ‘친 이재오’인 줄 알았다. 국내에 내 경쟁 상대가 있나. 내 상대는 외국 지도자이고, 내 관심은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다.”(4월11일 한나라당 총선 선대위 지도부와의 청와대 만찬)
“과거 친박이었든 친이였든 간에 한나라당은 하나가 돼 국민이 기대하는 경제 살리기를 이뤄내야 한다. 어떠한 계보도 국민이 바라는 경제 살리기 앞에선 힘을 쓸 수 없고, 국민도 바라지 않는다.”(4월13일 춘추관 기자회견)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을 놓고 한나라당 내에선 구구한 해석이 나왔다. 친이 진영에선 총선 과정에서 ‘해당(害黨) 행위’를 한 박근혜 전 대표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했다. 반면 박 전 대표 측에선 “친이 실세들이 공천 과정에서 우리를 겨냥해 숙청의 칼을 휘두른 게 대표적인 계보정치”라고 반박했다.
이명박의 ‘영남 충격’
이 대통령은 이번 총선 결과 영남권에서 68석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22석을 비(非)한나라당 후보들에게 내준 데 대해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후보들의 영남권 약진은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영남은 이 대통령의 고향이지만 대선후보 경선 때도 박 전 대표에게 패배한 곳이다.
이 대통령은 4월11일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별도 회동을 가진 자리에서 턱걸이 과반 의석을 확보한 4·9 총선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수도권 111석 가운데 80석 이상을 얻은 것은 수도권에서는 사실상 지역정서가 없어졌다는 얘기 아니냐”며 의미를 부여했다. 또 청와대 참모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이제 우리는 ‘영남당’이 아니라 ‘수도권당’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이런 언급은 영남에서의 패배를 수도권 승리로 덮으면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일으킨 ‘박풍’을 애써 외면한 것이다. 그러나 속으론 ‘영남= 박근혜’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하는 듯하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4월13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엔 친이가 없다고 본다”고 말한 뒤 “친박은 있을지 몰라도…”라고 덧붙여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 대통령의 고민은 친박 세력의 존재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도와 정권을 창출한 친이 세력마저 새 정부 각료 인선과 총선 공천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분화되자 현실정치의 어려움을 절감했다는 전언이다. 4·9 총선을 통해 의회권력도 자신의 핵심 측근들이 장악해야 향후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을 것으로 보고 이 대통령이 총선에 ‘올인’하다시피 했다는 말도 들린다.
개국공신 3인의 몰살
특히 선거를 불과 나흘 앞두고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은평 뉴타운 건설 현장을 전격 방문, 선거개입 논란을 자초한 것은 초조함의 발로로 해석된다. 이 대통령의 은평 뉴타운 방문은 실패작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이재오 의원이 초반의 열세를 딛고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둔 상황에서 오히려 지역여론의 역풍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어쨌든 총선 투표함 뚜껑을 열어본 결과, 한나라당은 전체 299석 가운데 153석을 얻어 불안정하나마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이 대통령이 우려했던 친이 계열만 따져도 한나라당 당선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05명 정도. 여당에 ‘MB당’ 색채를 입히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양적인 풍작에 불과하다. 질적으로는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의 흉작이었다.
4월4일 총선을 앞두고 경기 수원 영통 지역구에서 한나라당 박찬숙 후보(오른쪽)가 유권자의 손을 잡고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친이의 굴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선후보 경선 때 이명박 후보 캠프의 대변인을 지냈고 대통령직인수위 기획조정분과위원으로 활동한 박형준 의원도 한나라당 텃밭인 부산 수영에서 친박 무소속 유재중 후보에게 졌다. 부산에서는 한반도대운하 공약을 주도한 박승환 의원(금정), 선대위 2030기획팀장이던 김희정 의원(연제), ‘BBK 수비수’로 활약한 오세경 변호사(동래)가 무소속 바람에 추풍낙엽이 됐다. 송태영 전 당선인 부대변인(충북 청주 흥덕 을), 김해수 전 대선후보비서실 부실장(인천 계양)을 합쳐 모두 9명의 이 대통령 핵심 측근이 낙선했다. 이명박 핵심 측근으로 불린 출마자가 20여 명이었으므로 절반가량이 여의도 입성에 실패한 셈이다.
친이 핵심의 몰락은 한나라당 내부 권력암투의 부산물이다. 선거 기간 중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은 이재오·이방호·전여옥·박형준·오세경 후보 등을 ‘살생부’에 올려놓고 낙선운동을 펼쳤다. 이 가운데 살아남은 인물은 전여옥 후보뿐이다. ‘박사모의 저주’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도 했다. 박사모는 심지어 이방호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를 지원했다. 강기갑 후보는 “(내가 당선된 데는) 박사모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이 진영 내부에서 벌어진 살벌한 파워게임도 ‘이명박의 남자들’이 대선 승리 후 불과 4개월 만에 쓰라린 패배를 당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친이 핵심 간 헤게모니 다툼의 부산물인 새 정부 인사파동과 공천갈등으로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유권자들이 그런 실망감을 총선에서 투표로 표출했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친이 내부의 권력암투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과거 정권의 경우 출범 초기엔 새 대통령을 중심으로 탄탄한 친정(親政)체제가 구축됐다가 임기 중반을 고비로 권력갈등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지만 이번엔 취임식도 하기 전에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졌다.
이 대통령이 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달리 비(非)정치인 출신이어서 여러 세력을 끌어모아 정권을 창출하다 보니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대선 후 4개월 만에 총선이 치러지고 3개월 후에 당 대표를 선출하는 빡빡한 정치일정도 주요 원인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친이 핵심세력의 총선 탈락을 ‘자업자득’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이명박계 내부에서 스스로 분화해가면서 상호간 권력다툼으로 힘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총선 전의 친이 세력은 세 갈래였다. 이상득 부의장, 이재오 의원, 정두언 의원을 핵으로 정립(鼎立)하는 구도였다.
이상득 그룹의 막후 실력자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실무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은 이 부의장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과 장다사로 청와대 정무1비서관이었다. 류우익 현 대통령실장과 이방호 사무총장, 정종복 사무부총장도 이 라인에 속했다.
이재오 의원 그룹에는 공성진·진수희·차명진·이군현 의원 등 현역 의원이 대거 포함됐다. 정두언 의원은 계파 장악력이 이 부의장이나 이 의원보다는 떨어졌지만 ‘MB 직계’라고 부를 수 있는 그룹의 리더였다. 4·9 총선을 통해 국회 입성에 성공한 이춘식·정태근·백성운·조해진·권택기·강승규·김영우 당선자 등이 정두언 그룹으로 꼽혔다. 이들 대부분은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임시절부터 대권 플랜을 짠 ‘안국포럼’ 출신들로 ‘하이서울팀’ 멤버들이다. MB 직계는 심정적으로 이상득계보다는 이재오계에 가까웠다.
정두언, 처음엔 날았다
제18대 국회의원선거 다음날인 4월10일 경남 사천시 삼천포농협 앞. 접전 끝에 당선된 민주노동당 강기갑 당선자의 당선사례 현수막과 낙선한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을 위로하는 현수막이 함께 걸려 있다.
첫 단계인 대통령직인수위 인선 과정에선 잡음이 일 정도의 힘겨루기는 없었다. 국지적 마찰은 있었지만 세 그룹 모두 어차피 한시적인 기구의 구성을 놓고 소모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수위 구성은 이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MB 직계(정두언계)가 주도해 ‘실용적’으로 짰고, 이상득계와 이재오계가 몇 사람씩 밀어 넣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러나 조각(組閣)과 청와대 인선 과정에서 본격적인 충돌이 벌어졌다. 세 계파가 한 사람이라도 더 요직에 포진시키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 결과는 이상득계의 완승이었다. 이 대통령이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준 결과다.
“5000명이 내 손에”
당시 국무총리와 대통령실장 이하 여러 요직의 발탁 대상자는 박영준 비서관의 손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이상득 부의장의 보좌관 출신으로 서울시 정무국장을 지낸 박 비서관은 장·차관급, 나아가 국무총리와 대통령실장 인사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통령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 시절 인수위 기자실을 찾은 자리에서 “한 달여간 무려 5000여 명의 인사 파일을 들여다봐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이재오계나 정두언 의원 측에서 올라온 명단이 박 비서관 선에서 차단되기도 했다. 물론 박 비서관은 재산 및 경력 검증 같은 기초 작업을 마친 인선안을 이상득 부의장에게 보고해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다. 고려대 후배인 박 비서관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임도 각별했다. 이 대통령은 2002년 서울시장선거 때 형인 이상득 의원이 보내준 박 비서관을 곁에 두고 일을 시켜본 뒤, 그의 기획력과 조직구성력에 탄복했다고 한다. 인수위 활동을 끝낸 박 비서관은 대구 중-남구에 출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붙잡았다. 한나라당 공천신청까지 마친 그를 불러 “곁에서 일해달라”고 2시간 동안 타일렀다고 한다.
이처럼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며 새 정부 요직 인선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이상득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각료와 청와대 수석비서관에 내정된 인사들에게서 각종 하자가 줄줄이 드러나면서 ‘인사 파동’이 몰아닥친 것이다. 그러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재오계와 정두언계가 반격에 나선다.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고 공천심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점을 분수령으로 친이 내부의 권력 추는 급격히 이재오계와 정 의원에게로 기운다.
이재오 의원은 정부 요직 인사권은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지만 총선 공천권만은 놓칠 수 없다고 보고 이상득계인 이방호 사무총장과 정종복 의원까지 끌어들여 치밀한 전략을 짰다고 한다. ‘개혁공천’을 기치로 공천심사위를 장악한 것이다.
공천심사 과정에서도 이상득계가 ‘실세’인 것으로 오인한 수많은 공천 희망자가 이 부의장은 물론 최시중 위원장과 박 비서관에게 몰려들었지만 이들은 이미 인사 파동으로 힘이 떨어진 상태였다. 대신 이재오-이방호-정종복 라인이 공천을 좌지우지했다. 정두언 의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상득 부의장과 이재오 의원에게 공천 파동 책임을 지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2선으로 물러나라며 압박했다.
쿠데타 실패와 靑 비서관 사임
이런 와중에 한나라당 수도권 공천자 19명이 3월23일 오후 한나라당 기자실에 떼지어 나타났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서민을 외면한 정책 혼선, 잘못된 인사, 의미가 퇴색된 개혁공천에 대해 청와대와 당 지도부가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인사를 잘못한 청와대 관계자에게 책임을 묻고 사퇴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아가 이상득 부의장의 공천 반납을 요구했다.
이들의 기자회견에 동조하는 공천자가 속속 나타나 나중에는 동참자가 55명으로 늘어났다. 이른바 ‘친이 55인 친위 쿠데타’였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측근들이 대국민 사과를 운운하고 형인 이 부의장 퇴진을 요구하자 단단히 화가 났다. 이날 저녁 주모자로 지목된 이재오 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대선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분란을 일으키느냐”며 호되게 꾸짖었다.
이 대목에서 이 의원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뭔가 오해가 있던 것을 풀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신 이 대통령과 이 의원의 회동 이후 55인의 ‘선상 반란’ 주모자가 정두언 의원으로 바뀌어버렸고, 이 의원도 날개가 꺾인 것은 분명하다. 이 부의장이 이를 무력화하면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이때를 전후해 정두언 의원의 ‘위상 실추’를 암시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친위 쿠데타가 무산된 직후인 3월26일, 정 의원의 측근인 이태규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이 돌연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이 비서관은 청와대 비서진 진용을 짤 때 정무비서관직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설기록비서관으로 발령났다. 이 비서관은 “청와대 보직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고, 이동관 대변인도 “적성에 맞지 않는 일 때문에 사의를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청와대 주변에선 이 비서관이 권력암투의 희생양이 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인사격은 없어야 하기에”
여기까지가 4·9 총선을 앞두고 막후에서 숨 가쁘게 전개된 이명박계 이너서클의 헤게모니 다툼 과정이다. 총선이 끝나고는 양상이 변했다. 일단 원내 진입에 실패한 이재오-이방호-정종복 라인은 당분간 힘을 쓰지 못하게 됐다. 국회의원이 아니어도 7월 당권에 도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재오 의원 측은 “(나의) 당권 도전설이 나도는 것은 음해라는 생각까지 든다”며 펄쩍 뛴다.
그러나 이상득계가 친이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당권 장악을 시도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비록 불발 쿠데타에 그쳤지만 수도권 당선자 일부가 이 부의장의 2선 퇴진을 요구했던 내상(內傷)이 남아 있는데다, 너무 앞에 나설 경우 ‘상왕(上王) 정치’라는 여론의 질타도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의장은 막후에서 여권을 거중조정하면서 친박 진영과의 화합을 중재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경우 이재오-이방호 라인의 빈 자리는 누가 채울까?
이명박 정부의 2인자로 불리던 이재오 의원의 자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그만한 역할을 대신할 인물은 찾기 어렵다. 따라서 당장 가상할 수 있는 것은 춘추전국 시대의 도래다. 이 부의장이 드러나지 않는 실력자로 존재하는 가운데 각 계파가 할거하면서 7월 당권을 노리는 판세를 형성하는 상황이다. 이 경우 친이 계열뿐 아니라, 당내 친박 계열, 그리고 중립 성향의 계파들도 여권 안에서 별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먼저 이 대통령의 의중을 당에 전파하고 당내 여론을 보고할 친이 진영의 주도세력으로는 4·9 총선을 통해 새로 금배지를 달게 된 MB 직계를 꼽을 수 있다. 이춘식·정태근·백성운·조해진·권택기·강승규·김영우 당선자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무게감이나 이 대통령의 통솔 스타일로 볼 때 당장 노무현 정부의 ‘386 참모’들과 같은 레벨의 여권 핵심 이너서클로 자리 잡기에는 한계가 있다. 대신 MB의 친위부대로서 특정 파워그룹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정두언 의원은 총선 과정의 친위 쿠데타 실패로 한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정 의원은 당장은 이 대통령의 진노를 산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이 대통령이 어려울 때 급히 찾을 사람이란 데는 이론이 없다. 그는 55명의 친위 쿠데타군 가운데 28명이 생환한 데 대해 “이들을 생육신으로 불러달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또 자신이 친이 진영의 새 얼굴로 비쳐지는 데 대해선 “부담스럽고 난감하다”면서도 “보수진영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여지를 남기는 등 정치적 야망도 감추지 않는다.
새로 형성될 파워그룹에서 이 대통령의 신임을 얻을 또 하나의 세력은 당선인비서실장을 지낸 임태희 의원과 대변인을 역임한 주호영 의원 등 ‘범(汎)MB계’다.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주 의원이다. 대구 수성 을이 지역구인 주 의원은 이 대통령의 돈독한 신임을 바탕으로 영남권 친이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뿐 아니라 친박 계열과의 가교 노릇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주 의원은 당초 박 전 대표에게서도 두터운 신뢰를 받았으나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여 친이 진영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박 전 대표가 4월12일 지역구인 달성을 떠나 서울로 오던 날 주 의원은 친박 인사들 사이에 끼어 박 전 대표를 배웅했다. 앞서 선거가 한창이던 3월29일에도 그는 달성군 가창면에서 유세를 벌이고 있던 박 전 대표를 찾았다. 주 의원은 “부근에서 유세를 하다가 뵈러 왔다”고 인사를 했고, 박 전 대표는 “(선거에) 별문제 없죠?”라며 반갑게 맞았다.
주 의원은 또 경선 때 박 전 대표를 도운 방석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를 선거 기간 중 대구에서 만나 총선 이후 친이·친박의 화합 방안 등을 놓고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진다. 주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게 그런(친이-친박 화합 추진) 역할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서로 간에 오인사격은 없어야 하기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차기 총리는 강재섭?
친이 계열 밖에서는 강재섭 대표도 하나의 세력 축으로 등장했다. 공천파동에 책임을 지고 지역구인 대구 서구 출마를 포기한 채 전국에 지원유세를 나가며 ‘차기’를 도모한 강 대표는 공천을 통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상당수의 자기 사람을 심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 핵심 측근은 “당선자 중에서 다른 계파와 중복되는 범강재섭 계열까지 따지면 50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대통령은 4월11일 강 대표와 취임 후 첫 정례회동을 가진 자리에서 친이 진영 일각에서 조기 전당대회에 의한 새 대표 선출론이 나오는 것과 관련, “대표는 자기희생을 해서 성공적으로 총선을 마무리했고, 임기제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며 힘을 실어줬다. 강 대표는 “큰 정치를 하는 데 굳이 금배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7월 대표 경선에 재도전할 가능성은 전면 부인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국무총리직을 맡은 뒤 차기 대권 경쟁에 뛰어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서울 동작 을에서 통합민주당 정동영 후보를 제압하고 6선 고지에 오른 정몽준 의원은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안에는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당권 도전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박 전 대표가 당권에 재도전하지 않고 친박에서도 후보를 내지 않을 경우, 재계 출신 초·재선 의원 등을 규합하면 친이 계열 후보와 대결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정 의원 외에 4선이 된 홍준표·안상수·남경필 의원, 3선 중진 반열에 오른 박진·임태희·원희룡 의원도 당권 주자로 떠올랐다. 5선으로 한나라당 내에서 이상득·정몽준 의원에 이어 최다선이 된 김형오 의원은 18대 첫 국회의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
MB 직계와 중도파 각축전 예상
한나라당에선 MB 직계 소장파 외에 ‘원조 소장파’들도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당권 도전설이 나도는 원희룡·남경필 의원과 정병국 의원이 그들이다. 결국 총선 후 권력 헤게모니 다툼은 당분간 MB직계와 중도 계열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는 양상으로 전개되겠지만 여기에 중요한 변수가 하나 있다. 바로 친박 세력의 복귀 여부다.
현재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친박 계열은 33명.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여기다 복당을 희망하는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당선자 26명이 가세하면 모두 59명의 거대 계파가 형성된다.
지금 친박 세력의 기세는 하늘을 찌른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됐다는 것이 입증된 만큼 일괄 복당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친박연대 서청원 공동대표는 “친박연대가 살살 빌면서 갈 이유가 없다. 현재도 의석수가 14석인데, 교섭단체(20석)를 만들면 우리가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 비굴하게 할 것 없다”고 배짱을 튕기기도 한다. 한나라당 내에선 친이와 친박이 동상이몽을 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의장에게 반기를 들었던 수도권 당선자들이 언제까지 숨을 죽이고 있을지도 미지수다. 결국 여권 각 계파는 7월 전당대회에 임박해선 한두 차례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4월 지방선거, 같은 해 7월 전당대회, 2012년 4월 19대 총선, 그해 연말 18대 대선까지는 시간이 많아 파워게임의 최종 승자를 예측하기는 현재로선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