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인문학과 예술의 화려한 융합

  •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08-05-06 2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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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 : 임석재 지음, 휴머니스트, 각권 400쪽 안팎, 각권 1만9000원

    ‘무한도전’으로 시작된 리얼 버라이어티쇼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어닥치기 이전, 주말마다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던 추억의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있었다. 좁고 불편한 집에 사는 가족들의 사연을 공개하고 그들의 집을 놀랍게 변신시켜주는 프로그램, 바로 ‘러브하우스’였다. 당시 예능프로그램에 무관심하던 나를 매번 TV 앞에 앉게 했던 힘은, ‘우리 집도 저렇게 예쁘게, 편리하게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알록달록한 공상이었던 것 같다.

    때로는 고생 끝에 낙을 얻게 된 그들의 행운을 철없이 부러워하며, 때로는 저 집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조바심치며, 갈팡질팡하던 내 마음은 어느새 ‘공간’에 대한 일상적인 관심으로 주파수를 이동했다. 같은 넓이의 공간이라도, 엄청난 돈을 투자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적인 노력과 약간의 센스만으로 공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침에 눈만 뜨면 부리나케 뛰쳐나오고 밤에 들어가기만 하면 즉시 곯아떨어지는 숙박용 집이 아니라, 휴식과 놀이와 명상이 모두 가능한 아늑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게다가 그 공간이 ‘아름답기까지’하다면 금상첨화일 거라는 상상으로 내 마음은 두근거렸다.

    그랬다. 아름다움은 늘 마지막 순위였다. 일상적 의식주를 원활하게 해결하는 것,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삶이 가능한 후에야, 마지막에 ‘덤’처럼 떠오르는 것이 공간의 아름다움이었다. 공간의 이미지를 아름다움 그 자체로 소비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러브하우스’를 충성스레 시청하면서도 정작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그림의 떡’이라 생각하며 바라보았던 것은, 미적 충동 자체가 여전히 사치스럽게 느껴졌던 탓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러브하우스’를 TV에서 볼 수 없게 된 후, 큰맘먹고 떠난 유럽여행에서 비로소, 그동안 억압되었던 ‘공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봇물처럼 터져버렸다.

    그곳에서 건축과 미술은 너무도 당연하게 오래전부터 ‘하나’였으며, 인간과 공간, 미술과 건축은 ‘역사’라는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치밀하게 연결된 씨줄과 날줄의 연속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임석재 지음, 휴머니스트, 2008) 시리즈는 ‘당연히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우리의 일상에서는 거의 만남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건축과 미술의 뗄 수 없는 인연의 다큐멘터리로 읽힌다.

    사진과 도판으로 만나는 유럽 공간



    이 책은 일상과 공간, 건축과 미술에 대한 막연한 연결고리만을 상상했던 독자에게 삶이 곧 공간의 배치이며 공간은 곧 미술과 건축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멀리 여행을 떠나서야 비로소 공간의 소중함을 깨닫곤 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여행을 가능케 하는 책을 통해, 2차원의 미술을 3차원의 건축으로 치밀하게 번역해내는 공간의 마술을 체험한다. ‘건축과 미술이 만나다’는 사진과 도판으로 만나는 서양인들의 공간의 역사로 읽힌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떠났던 여행의 복습과 앞으로 떠날 여행의 예습을 동시에 치르는 듯한 생생한 긴장을 맛본다. 단 두 번의 유럽여행으로 인해, 아름다운 공간에 대한 막연한 공상과 일상적 공간의 권태는, 단순한 동경에서 과녁 없는 박탈감으로 바뀌어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이탈리아의 건축은 아름답고 유서 깊지만, 한국의 건축은 아파트 일색이다’라든지, ‘파리의 건축은 전통과 현대가 사이좋게 공존하지만, 한국은 현재가 과거를 살해하는 건축이다’라는 식의 단순 비교로 정리될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었다. 10분만 산책을 해도 모든 시대의 건축을 다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도저히 요약하거나 통계로 정리할 수 없는 공간의 무한한 풍요로움. 그 미적 풍요야말로 그 어떤 ‘자본’이나 ‘기술’로 모방할 수 없는 문화적 인프라였다. 공간은 단순한 3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무수한 시간의 흔적과 인간의 역사가 스며든 다차원적 세계였다.

    예를 들어 대영박물관 하나에 수천년 전 예술가의 숨결과 지금까지 그 박물관을 가꾸고 지켜온 사람들의 노고, 나아가 오늘날 대영박물관에 긍지와 사랑을 느끼는 동시대인의 숨결까지 모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난 유럽여행을 통해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공간은 역사이자 현재이자 예술이자 사랑이었다. 길거리 자체가 총체적 시공간의 박물관이 되지 않는 한, 공간의 아름다움이란 철저히 ‘계급’의 순위로 점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의혹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건축과…’ 시리즈는 풍부한 도판과 친절한 설명으로 미술사적/건축학적 관심을 촉발하지만, 아쉽게도 ‘그 다채로운 아름다움의 격전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구체적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것은 이 책이 이야기 중심이라기보다는 정보 중심의 구조로 이루어졌기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문제일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건축 속의 일상’이라는 문제는 바로 독자가 창조적으로 채워야 할, 독서의 유쾌한 ‘빈 칸’일 것이다.

    서양 건축 넘어 삶의 건축으로

    이제 건축과 미술의 뗄 수 없는 인연의 함수관계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첫 발을 내디딘 이 기획이 서양의 건축을 넘어 세계의 건축을, 일상의 건축을, 나아가 ‘더 많은 타자의 건축’으로 뻗어나가기를 꿈꿔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은 일상적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들끓고 있다. TV 속 ‘러브하우스’는 끝났지만, 블로그나 미니홈피에서 저마다 ‘자신만의 러브하우스’를 만드는 노하우를 공개하는 네티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그들은 ‘러브하우스’처럼 엄청난 제작비와 화려한 인테리어를 구비하지 않고서도,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정보만을 가지고, 작은 원룸을 아늑한 카페처럼, 오래된 아파트를 멋들어진 궁전처럼 만드는 경이로운 재능을 펼쳐 보인다. 귤껍질을 이리저리 짜 맞추어 세계지도를 척척 만들어내는 네티즌, A4 종이 한 장으로 세계 굴지의 건축물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내는 예술가를 보면, 건축이란 반드시 건물로만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행복한 깨달음에 도달하곤 한다. 그리하여 건축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모든 이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꿈의 설계도다.

    괴테는 건축가의 운명을 이렇게 한탄한 적이 있다. “건축가의 운명은 가장 짓궂은 것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도 못할 건물을 낳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자주 그의 모든 영혼, 그의 모든 마음, 그의 모든 정열을 쏟아놓는가!”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건축가의 운명은 축복받은 것이 아닐까. 공간의 재배치를 통해 타인의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나 공학을 넘어 한 개인이 수많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재구성을 통해 타인의 운명을 바꾸는 것. 좁다란 화폭의 예술을 넘어 우리가 사는 지구 전체를 화폭으로 삼는 것이 바로 건축가가 아닐까.

    의사는 아플 때 우리 몸을 돌보지만, ‘집’은 아플 때든 슬플 때든 노여울 때든 행복할 때든 우리의 몸을 둘러싸고 간직하고 양육하는, 존재의 사후적 자궁 아닌가. 진정한 건축가에게 일상과 미학, 실용과 예술은 분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의식주가 해결된 후의 ‘덤’이 아니다. 기름값이 없어 보일러도 때지 못하는 독거노인의 삶을 배려하는 건축가, 작은 화분이나 조명 하나로 집안의 분위기 전체를 바꾸는 주부의 정성 하나하나, 단돈 몇만원으로 집안의 인테리어를 개벽하는 신혼부부의 창조적 열정, 그 모두가 ‘미술’의 시작이며 ‘건축’의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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