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부진료 요청 묵살해 병 키웠다”며 소송 제기
- “10년째 독방·미지정 생활로 공황장애 앓아”
- “재소자 권익보호 위해 법학 공부 시작”
- “재소자 인권, 교도소 문제 다룬 수기 12월 출간”
- “나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은 피해자 두 번 죽이는 일”
- 부산교도소 탈옥 성공 비밀
- 교도소 관계자 “신창원에겐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 있다”
신창원이 보내온 편지들. 그는 최근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2500만원의 피해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유명해진 건 단순히 탈옥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피생활을 하며 훔친 돈으로 장애인 수용시설에 기부하고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가 하면, 그가 남긴 일기장과 편지 등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가 알려지면서 동정을 샀기 때문이다. 탈옥 기간에 강도강간 등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무죄로 결론이 났다. 그는 탈옥으로 22년6개월의 형량이 추가됐다.
기자는 그간 신창원과 수십통의 편지를 주고받고 면회도 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덕분에 그의 재수감 후 10년여의 수감생활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2000년 장애아 복지시설 여교사와의 결혼설 전말, 2004년 고입·대입 검정고시 합격, 2005년 대전교도소에서 극도의 정신질환을 앓은 사연 등을 보도했다.
신창원이 보낸 봉투 안엔 그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25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자필 소장 사본이 들어 있었다. 그는 동봉한 서신에서 “소장을 2월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우편으로 접수시켰다”고 했다.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유는 교도소에서 자신의 요구를 묵살하고 허리디스크 치료를 제때 안 해줘 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봤다는 것. 하지만 근본 목적은 재소자의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 제기임을 분명히 했다.
좌절된 향학열
3월4일, 신창원을 만나러 경북 청송으로 내려가면서 지금껏 그가 보내온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2004년 12월 대전교도소로 이송되기 전까지 그의 편지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2004년 중졸 검정고시와 고졸 검정고시에 연이어 합격하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최종 목표는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살아서는 사실상 교도소를 나갈 수 없기에 일반 대학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머지않아 교도소 안에 사이버대학 강좌가 개설될 예정이고, 여기엔 심리학과 과정도 있다는 걸 안 그는 학사고시를 통한 국어국문학과 학위 취득을 목표로 세웠다. 그 후 사이버대학 강좌가 개설되면 심리학과 과정에 편입할 요량이었다. 따라서 재소자 대상으로 학사고시반을 운영하는 대전교도소로 이송되는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당시 그는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학사고시를 하려는 것은 명예나 사회에 일찍 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에요. 살아서 밖에 나간다는 미련은 접은 지 오래됐습니다. 제가 지은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삶의 초점을 담 안 생활에 맞추게 된 것이지요. 동료들은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랄지 모르지만, 저는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제 꿈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화장실이며 바닥 청소, 식기 닦기, 빨래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더라도 동료들과 함께 바로 서기를 해보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과거의 제 모습을 하고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동료들. 지금 마음을 추슬러 바로 서기를 못한다면 이들의 미래는 저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이 2006년 가을 보내온 사진. 디스크로 쓰러지기 전 찍은 사진으로 언론에 공개되는 신창원의 가장 근래 모습이다.
마음의 상처는 사랑으로밖에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얼어붙은 가슴은 사랑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도 마음이 열려야만 전달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뼈저리게 후회하는 게 있습니다. 지난날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살아보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서 지금의 현실을 만들고 말았어요. 밑바닥에서 지저분한 옷을 입고 땀을 흘리는 모습이 창피하게 느껴졌던 거죠. 출소해서 일을 하려 해도 이런 이유로 금방 포기하고 쉽게 돈을 벌 생각에 범죄를 저지르곤 했던 겁니다. 우리의 공통된 문제점이지요.
‘상태 심각, 시급한 수술 요함’
우리가 바로 서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곳 담 안입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추한 모습으로 추락해 있는 지금, 우리의 잘못된 삶을 돌아보며 문제점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어렵지 않게 잘못된 자존심을 버리고 몸으로 직접 밑바닥 생활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이곳에서부터 밑바닥 생활을 자청해서 해야 사회에 나가서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땀 흘려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밑바닥에 들어가 몸부림치듯 살려는 것입니다.”
당시 그는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했고, 동료 재소자들과도 잘 지냈다. 기자가 2004년 청송 제2교도소로 면회를 갔을 때 그의 후견인인 김신웅 장로는 물론 교도관들도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
그런데 대전교도소로 이송된 지 얼마 후 그의 누나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창원이 너무 힘들어한다며 면회를 가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전교도소는 기자의 면회를 불허했다. 면회신청서 ‘재소자와의 관계’란에 ‘지인’이라고 썼지만 교도소 측은 이미 기자 신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신창원은 편지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어 보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대전으로 간 것인데, 학사고시반 편입이 불허됐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있는 사동엔 4명만이 수용돼 있는데, 교도관을 살해한 정신질환 사형수, 역시 동료 재소자와 교도관을 폭행한 혐의로 추가재판 중인 정신질환 재소자, 그리고 사동 청소를 하는 재소자와 자신뿐이라고 했다.
종교집회, 자매결연, TV시청 등이 모두 금지된 데다 0.7평(2.31m2) 비좁은 독방에 갇혀 있다 보니 극심한 공황장애를 앓은 모양이었다. 밤마다 꿈에 시체가 나타나고 환상과 환청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게다가 방이 너무 비좁아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해 퇴행성 척추질환이 심해지고 신경성 소화기능 질환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동, 조금 더 넓은 독방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다른 재소자들과 어울려 숨통이라도 틔게 해달라는 것도 거부당했다. 처음엔 이감돼 왔으니 ‘군기’를 잡으려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3개월, 4개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기자가 대전교도소 측에 신창원을 그렇게 처우하는 이유를 묻자 “탈옥수였기 때문이다. 우린 규정대로 할 뿐”이라고 답했다.
결국 신창원은 8개월여 만인 2005년 8월, 청송 제2교도소로 다시 이감됐다. 정신적 고통은 사라졌지만 디스크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다시 공부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실제 그는 2006년 4월 지금의 청송교도소로 이감된 후 독학으로 공부해 2007년 3월 치러진 학사고시 1차 시험을 가뿐하게 통과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른 다음날 쓰러져 20여 일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등 허리디스크가 악화됐다. 김신웅 장로에 따르면 “하반신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확한 진단을 위해 외부진료기관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싶다”는 신창원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이유였다.
“많이 망가졌어요”
신출귀몰한 절도행각, 탈옥 등 신창원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 ‘탈주’의 제작 예정을 알리는 인터넷 홈페이지.
청송교도소 면회소에 도착해 “수인번호 5401번 신창원을 면회왔다”고 하자 전산망을 통해 기자의 신분을 파악한 담당직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면회가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신창원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만큼 교도소 측으로선 기자가 그를 만나는 게 달가울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20여 분 후 면회대기자 명단에 신창원의 수인번호가 떴다. 면회가 허가된 것이다.
해당 면회실에 들어서자 아크릴 칸막이 너머로 신창원이 보였다. 2000년 처음 봤을 때처럼 짧은 머리였다. 쑥스러운 듯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하고 안부를 건네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수척해 보였다.
▼ 건강은 괜찮은가요.
“좋아지고 있어요. 여전히 통증이 있고, 하체에 힘이 안 돌아오긴 했지만 움직이는 건 괜찮아요. 칼을 대는 수술을 해서인지 회복이 좀 더딘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씩 운동을 하고 있어요.”
▼ 지금도 독방에 있나요.
“한 달 전쯤에 병사(病舍)로 옮겼어요. 여전히 독방이지만 전에 있던 곳보다는 조금 넓어요.”
▼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습니까.
“많이 망가졌어요. 지금은 종교집회도 참석하지 않아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보려 해도 벽에 부딪히는데다,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회의가 들더라고요. 다시 신앙을 일으켜 세우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목사님도 무조건 용서하라, 참아라, 싸우지 말라고만 하니까 이를 실천할 수 없는 제 맘이 편하지 않아요.”
영화제작 반대하는 이유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면 면회를 제지당할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신창원의 삶은 영화 소재로 그만이다. 최근에도 배우 이동건이 영화제작사 씨네2000으로부터 영화 ‘거북이가 달린다’(가제)의 주인공 신창원 역을 제의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 신창원씨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질 모양이던데요.
“저도 신문기사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려면 제가 동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씨네2000 이춘연 대표에게 편지를 보내 물어보니까 저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답장이 왔어요. 언론에서 왜 그렇게 보도했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썼더군요. 그래도 미심쩍어서 일단 제작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내놓았어요. 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더라고요.
또다른 영화사에서도 저를 소재로 한영화를 기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영화사에선 누나에게 판권을 샀다고 하는데, 누나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설령 누나와 계약을 했다 해도 당사자인 제 동의가 없으면 무효잖아요.”
▼ 자신을 소재로 한 영화 만드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가요.
“지금까지 제게 7, 8개 영화사에서 제안이 왔어요. 교도소까지 저를 찾아온 제작사만 그 정도예요. 영화에서 저를 어떻게 다루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로 인해 피해를 당한 분들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그건 그분들을 두 번 죽이게 되는 거죠. 유족들에게도 미안한 일이고요. 그래서 다 거절했어요.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는 허락할까 생각도 했어요. 당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행정소송을 하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변호사 선임비용 등 이런저런 돈이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도리가 아니다 싶어 맘을 고쳐먹었죠.”
“재탈옥은 불가능”
▼ 허리는 언제부터 아팠나요.
“2001년 5월부터 조금씩 아프다가 2004년 12월 대전교도소로 이송된 후 심해졌어요. 지난해 3월 이후에 급격히 악화됐고요. 의무과장에게 허리와 골반, 복부와 다리 통증을 계속 호소했지만 엑스레이만 찍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예요. 외래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는데 거듭 묵살당했어요. 죽을 병이 아니기 때문에 외부 병원으로 나갈 수 없다는 식이었죠. 일찍 정밀검사를 받아서 원인을 찾았더라면 물리치료나 레이저 수술로 간단하게 완치될 수 있었을 텐데…. 지난해 12월 외래진료를 받았을 땐 이미 늦은 거죠.”
▼ 교도소 측에서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요.
“이유는 단 하나죠. 교도소 윗분들이 저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는 거예요. 청송 제2교도소에서는 보안과장이 저를 믿고 일반 재소자처럼 대우했어요. 그래서 제가 검정고시 공부도 하고, 새로운 인생 설계도 할 수 있었죠. 그런데 대전교도소나 여기는 수용자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주기보다는 격리시키려고만 해요.
규정을 위반해 징벌을 받은 수용자라도 1년이 지나면 어떤 제한이나 차별도 받지 않아요. 탈옥수도 재판 종료 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2~3년이 지나면 취업장에 출역시켜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일하며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줘요. 그런데 저는 지난 10년여 동안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고 성실히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탈옥수 취급을 하니 답답하죠.”
▼ 교도소 측으로서는 아무래도 탈옥에 대한 부담이 있겠죠.
“감시대와 정문 후문만 근무수칙대로 근무하면 탈옥은 불가능해요. 6m 담장, CCTV와 적외선 감지기, 3m 정도의 철조망과 소총으로 무장한 경비교도원, 이렇게 5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부산교도소를 탈옥할 수 있었던 건 당시 그곳이 담장을 허물면서 차단막만 설치한 채 교회당 신축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차단막으로 인해 감시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생겼고, 땅을 조금만 파도 차단막을 통과해 공사장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게다가 차단막 때문에 적외선 감지기를 꺼놓은 상태였고, 공사장엔 담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철근과 밧줄이 있었죠.”
‘독거수’ ‘미지정’의 위험성
▼ 아무튼 디스크 수술은 이제 지나간 일이고 수술도 잘 됐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물론 덮고 지나갈 수도 있어요. 문제 제기를 해봤자 저한테 좋을 게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럼에도 소송을 하는 건 저 같은 피해자가 더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몸이 아픈데 외부진료를 안 보내주니까 수용자와 교도관 사이에 마찰이 심해져요. 수용자는 병이 더 악화되고, 교도관들은 스트레스로 병들어가요. 외부진료를 좀더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갖춰지면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그래서 소장을 접수시켰는데,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답이 없네요.”
▼ 편지에서 소송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손해보상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요.
“10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법이 아무리 합리적으로 개정되어도 담 안의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재소자 교정·교화는 불가능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고 있지만 재범률과 범죄율이 감소하지 않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봐요. 교도소 일선 직원들도 지금 상태로는 교정·교화가 결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해요. 그런데 법무부의 높은 분들은 이런 현실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그래서 앞으로 담 안의 구조적인 문제, 즉 재소자 인권 문제를 개선하는 데 제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해요. 부당한 것은 소송을 통해, 불합리한 부분은 헌법소원을 통해 하나하나 개선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공도 국문학에서 법학으로 바꿨어요.”
▼ 소송을 하면 앞으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를 개선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어떠한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용자들의 정상적인 사회복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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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소자 인권 문제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대략적인 내용을 편지에 적어 보냈는데 발송이 불허됐더군요. 우선 외부 병원 진료와 보건·치료 프로그램의 문제점, 그리고 1시간 남짓한 운동시간 외엔 종일 비좁은 독방에서 생활해야 하는 독거수와 미지정(작업을 하지 못하고 방에서만 생활하는 수감자)들의 교정·교화 문제점과 위험성을 지적하고 싶어요. 저와 재소자들이 겪은 인권침해, 그리고 수용자의 교정·교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교도소 체제의 구조적 문제 등에 대해 낱낱이 조명한 책을 12월에 출간할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 스스로 독방 수감을 원하는 재소자도 있다던데, 독방 생활이 그렇게 고통스러운가요.
“교도소마다 적게는 10% 이상의 재소자들이 독방에 갇혀 살아요. 장기간 독거생활과 미지정 생활을 하면 사회성 상실, 무기력증, 이상성격 형성, 폐쇄공포증, 피해망상 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제가 10년여 동안 직접 체험했기에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만약 제가 인내력이 부족했거나 꿈이 없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겁니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3범 이상의 수용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 사회성이 떨어지고 인성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이들을 지금처럼 격리시키고 23시간 비좁은 독방에 가둬 방치한다면 상태가 더 악화될 위험성이 커요. 출소하면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고요. 사형수들도 정신적 안정을 위해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사회성을 길러주고 갱생 프로그램을 제대로 작동해서 교화해야 합니다.”
▼ 교도관들에 대한 불만 때문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이젠 교도관들도 많이 달라졌어요. 특히 과거의 탈옥 동기가 됐던 교도관들의 폭력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교도관들 의식도 변했고요. 예전엔 비인간적인 교도관이 90%, 인간적인 교도관이 10%였다면 지금은 그 반대예요. 교도관들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그들도 어떤 의미에선 현 교도행정체계의 피해자예요.
재소자는 죄를 지었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는 보호받아야 합니다. 갇혀 있는데 아프면 얼마나 더 힘든지 모를 겁니다. 정말 아픈 환자들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면회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신창원은 기자에게 먼저 퇴실하라며 손짓했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