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 : 이중톈 지음, 박경숙 옮김, 은행나무, 520쪽, 1만8000원
그런데 이 서호가에 소동파보다는 조금 늦은 남송 시대 구국의 영웅이자 ‘중국의 이순신’이라 할 수 있는 악비(岳飛·1103~1142) 장군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악비 장군은 알다시피 희대의 간신 진회(秦檜)의 모함을 받아 마흔의 나이에 살해당한 비운의 영웅이다. 중국인들은 억울하게 죽은 악비를 추모하고 그를 모함한 간신 진회를 응징하기 위해 악비의 무덤 앞에다 간신 진회의 상을 쇠로 주조하여 무릎을 꿇려놓았다. 그러고는 지나다니면서 진회의 상에 침을 뱉고 뺨을 때리면서 분을 풀었다. 이 때문에 진회의 상은 얼룩이 지고 파손되어 지금까지 몇 차례나 다시 주조했는지 모른다.
중국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마저 조형물로 형상화해 ‘의식’이 아닌 ‘몸’으로 교훈을 체득하게 한다. 이와 관련해 현재 중국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샤먼대학 이중톈 교수는 ‘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인의 지각, 감수, 체험, 깨달음은 모두 몸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마음이라는 사실은 체험이나 깨달음까지 모두 몸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신체 감각 기관을 통해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고, 자신의 온몸을 통한 체험만 믿었다. 그래서 교육에서 말하는 교육보다는 몸으로 하는 교육을 중시했다. 인지적으로도 귀로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을 중시했다. 학습에서는 말과 머리로 아는 것보다는 노력해서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이런 ‘체화(體化)’는 나름대로 상당한 교육적 효과와 선전 효과를 가져오지만, 자칫 지나칠 경우 ‘포퓰리즘’의 극대화로 치달아 사회와 대중을 발광상태로 몰고 갈 위험도 다분하다. 문화대혁명은 그 가장 가까운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허벅지 살로 국 끓여 주군 대접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춘추시대 초기 오늘날 산시성에 위치했던 진(晉)나라는 문공(文公) 때 와서 춘추시대 패자로 군림하며 한 시대를 이끌었다. 그런데 문공은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겪은 입지전적 인물로 19년에 걸친 망명 생활은 그의 생애에서 단연 하이라이트였다. 망명 생활 중 문공은 숱한 고난을 경험하는데, 특히 여러 날 밥을 굶어 아사할 뻔한 상황에서 개자추라는 수행 신하 덕분에 간신히 살아난 고사가 지금도 전한다. 거의 아사 직전까지 몰린 문공에게 개자추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고깃국을 끓여 주군을 살려낸다. 이것이 저 유명한 ‘할고봉군(割股奉君)’의 고사다.
망명을 끝내고 마침내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문공은 당시 자신을 수행하며 고생한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베풀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개자추만 이 공신 명단에서 빠지는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백성들은 문공은 용이 되어 하늘에 올랐고 수행 신하들도 다 제집을 찾아들어갔는데 한 사람(개자추)만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는 내용의 풍자 노래를 만들어 유행시켰다. 이 노래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여론이 됐고, 조야가 이 문제로 시끄러워졌다. 문공은 노모와 함께 면산에 숨어 있는 개자추를 끌어내려고 산에다 불을 질렀고, 개자추는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노모를 끌어안은 채 불에 타 죽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죽은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이날이 되면 태운 음식이나 더운 음식을 먹지 않았다. 바로 한식날의 기원이다.
개자추에게 별다른 정치적 능력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그가 부당하게 논공행상에서 배제됐다며 노래를 통해 항의했다. 개자추가 무엇보다 굶어 죽을 뻔한 문공을 자기 살을 베어 먹여 살렸기 때문이다. 중국인에게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사례다. 그리고 먹는 것이야말로 정치 문제와 연계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먹는 것은 가장 일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가장 정상적인 것이다. 중국인을 이해하려고 할 때 유별난 코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먹고 입고 사는 모습을 들여다봐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요컨대 중국인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다는 것이다. 다시 이중톈 교수의 말이다.
‘문화의 핵심은 가장 강령적인 것으로, 가장 보편적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는 분석하고 해부해야 하며, 근원을 탐구하거나 간파해서 암호를 풀어야만 비로소 비밀을 풀 수 있다.’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고
암호니 비밀이니 한 것은 다소 어감이 지나치지만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만큼은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은 아주 많이 닮아 있다. 한국인이 생활에서 가장 중시하는 ‘체면’을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지 살펴보자.
진나라 말기 유방과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항우는 절대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방에 패하여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마지막 해하 전투에서 패한 항우는 고향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뱃사공 노인의 권유에 자신이 무슨 면목으로 고향 사람들을 보겠느냐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기서 ‘면목’은 바로 ‘체면’과 동의어다. 목숨보다 체면을 더 중요시한 것이다. 항우의 체면은 거의 못 말리는 경지였던 걸로 보인다. 그는 천하 평정을 코앞에 두고 느닷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다. 참모들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귀해져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좋은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며 면박을 주었다. 이 역시 체면을 중시한 결과다.
이 대목에 이르면 고시에 합격하거나 장관이 되어도, 심지어 서울에 있는 대학에만 합격해도 동네방네 현수막 따위를 내거는 우리네 풍경이 오버랩된다. 그런데 이런 항우를 두고 누군가가 ‘원숭이가 모자를 쓰고 인간 흉내를 낸다’며 비웃었다는 사실에 이르면 가슴이 뜨끔해진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이런 특성이 있었다.
‘중국의 체면주의 때문에 항상 이 두 가지(예술과 현실, 허구와 사실, 겉치레와 실속) 경계선을 잊고 자기기만에서 타인기만이 되고,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점이 유감스럽다. 그 결과 반드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자기 자신을 해쳤다.’
근현대사를 겪으면서 중국과 한국은 많은 점에서 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두 나라 사람들의 생활 양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찌 그렇게 닮았는지 감탄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이중톈 교수의 이 책이 흥미를 끄는 점도 이 때문이다.
가부장적 의식, 집단(단체, 국가) 의식이라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중국인의 생활이 급변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전히 가정과 국가는 이 탯줄을 끊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식들의 결혼과 교육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간섭하려는 변태적 행위가 다반사로 자행된다. ‘잘못된 사랑’을 내건 채. 이중톈의 중국인 분석에서 우리가 읽어도 가장 아픈 대목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이내믹 한국’ vs ‘파워풀 중국’
‘더욱 걱정되는 것은 자식을 도둑 지키듯 지킨다는 관념이 상당히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많은 부모가 꼭 때리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자녀를 감시하거나 심지어는 직접 나서서 자녀의 행위에 참견하고 간섭하며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 이런 행위는 무력을 행사하거나 일신상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사회의 주목을 받지 않는다. 때로는 사회적으로 용납되거나 장려되기도 하는데, 그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 사실 자녀의 마음에 가한 상처는 육체에 가한 상처 못지않다. 육체의 상처는 치명적이지 않다면 치유될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쩌면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가정에서 시작된 지나치고 비뚤어진 잘못된 사랑이 가족관계와 교우관계와 사회관계를 망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왜곡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중국 사람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중국 사람의 모습 한 켠에서 어른거리는 우리의 어두운 모습을 착잡하고 씁쓸한 심정으로 흘겨본다.
먹고 입는 것으로 시작해 수다를 뜻하는 한담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아홉 개의 장이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의식주가 사회와 직장 그리고 관료 사회의 처세 방식이자 수단으로 연결되고 그것은 결국 권력과 정치 및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로 나타난다. 우리 삶의 기본 단위인 가정과 결혼 그리고 연애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그 사회와 국가의 문화를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이 책은 ‘다이내믹 코리아’와 ‘파워풀 차이나’의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문제점들을 심도 있게 확인해가며 의미있는 책읽기를 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와 함께 한자와 중국어의 묘미도 느낄 수 있으며,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속담이나 격언을 짚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