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핑클이 야하다고? 이미자·조용필은 어떻고”

신세대 가요

  • 임진모 jjinmoo@hanmail.net

    입력2006-07-28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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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방에서 신세대의 랩송을 듣고 세대차이를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TV 가요프로그램에서 가사를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을 때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요즘 히트하는 노래에는 메시지가 없다고 무시해버린 기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는 언제나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처음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노래도 자세히 뜯어보면 ‘그들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대중가요가 담아내는 정서는 대중의 일상인 것이다.
    ‘더 기다려줄게. 너를 향한 나의 기다림으로. 그토록 널 사랑하기에 오랜 시간을 소중히 견딜 수 있었어. 나 익숙해졌어. 어떤 날은 울기만 했었지만. 그래도 그런 아픔이 날 떠난 널, 날 버린 널 더 높게 만들었어…’

    이런 글을 읽으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많이 기다렸지만 앞으로도 더 기다릴 수 있다는 내용은 한 편의 애절한 연애편지를 생각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글은 편지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이 열심히 불러대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이다. 인기가수 김민종의 히트곡 ‘아름다운 아픔’으로 평범한 내용이지만, 이런 스타일이 바로 신세대들의 전형적인 사랑 표현이다. 뻔한 얘기 같지만 참으로 감각적이다. 다음은 또 어떤가.

    ‘나 태어날 때부터 우리 만남이 정해진 것처럼 편안했어요. 참 이상해요. 사랑한단 이유로 그대의 여자 되고 싶은 맘이 간절해져요. 혹시 알고 있나요. 나 그대로 인해…. 믿고 싶어요. 오늘도 감히 난 그대가 있었기에 행복하다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네 명의 예쁜이들, 바로 핑클의 ‘To My Prince’라는 곡이다. 이런 가사를 접하는 신세대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사랑의 전율을 느낄 테지만 반대로 어른들의 마음은 심란하다. ‘그대의 여자 되고 싶은 맘’ 운운하는 부분이 어쩐지 편치 않기 때문이다. 가사가 참 직설적이라는 인상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룹 이름에다 제목까지 모두 영어로 되어 있으니 거부감이 더할 것도 같다. 요즘 대중가요에 관심이 없는 기성세대의 경우는 팝송으로 오해할 소지도 있다. 한 곡 더 살펴보자.

    ‘비가 와. 잠도 안 와. 이럴 땐 정말 너 생각이 나. 그러다 복받쳐 올라. 자꾸 눈물이 나와…. 어제 널 닮은 여자 애를 봤어. 물론 네가 아닌 줄 알았으면서도 왜 자꾸 보게 되는 건지, 왜 또 너 생각이 나는 건지. 가끔은 너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외로워, 참 괴로워. 나 아프고 힘들 때 그리고 외롭다고 느낄 때 오늘처럼 비라도 오는 밤이면 우리 같이 듣던 CD-Video. 니가 좋아했던….’



    이 정도에 오면 거의 그로기 상태가 된다. ‘복받쳐 올라’라는 표현이 툭 튀어나오고, 가사에 또 CD-Video는 무엇인가. 악동으로 이름난 힙합그룹 디제이 디오시(DJ DOC)의 ‘비·愛’라는 곡이다. 제목부터 헷갈리는 이런 노래는 내용을 떠나서 어법이 기성세대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도대체 왜 이런 가사를 쓰는 걸까? 정말 우리 젊은이들은 누구 말대로 종(種)이 다른 ‘신인류’인 것인가? 어른들 처지에서는 ‘외롭고 괴로운 건 우리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 간절할 듯하다.

    나이가 들면 마음은 있어도 젊은이들의 모습과 유행을 따라가지 못해 속이 상한다. 그러나 만인이 즐기는 대중가요마저 심란하게 만든다면 뭔가 잘못된 일이다. 즐기고 쉬고 재충전하자는 게 대중가요 본연의 임무 아닌가? 하지만 요즘 대중가요가 어른들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리듬이나 선율, 모든 측면에서 최신가요를 받아들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40~50대 장년층이 신입사원들이나 한창 나이의 여직원과 어울려 노래방에 간다면 ‘왕따’를 각오해야 한다. 어른들은 분위기에 취하고 싶어도 젊은이들이 마이크를 잡으면 외돌토리가 되기 십상이다. 이 시대를 점령하고 있는 힙합댄스, 라틴 댄스, 테크노를 그들이 ‘비수’인 양 꺼내들면 ‘가만히 있는 게 중간’이라고 그냥 물끄러미 ‘애들’이 하는 노래와 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어른들에게 노래방은 더 이상 공동체의 공간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노래는 고문에 가깝다.

    이렇게 주눅이 드는 상황을 수차례 경험하면 노래방에 가는 게 부담스러워진다. 만일 회식에서 2차 코스로 노래방이 결정되면 뭔가에 한 대 맞은 듯 겁이 나고 동행하기가 싫어진다.

    “뭔 노래방이야. 시끄럽기만 하고, 제대로 얘기도 못 하잖아. 그냥 술이나 더 마시자구…”

    이런 푸념을 늘어놓으면 ‘구세대’나 ‘쉰세대’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하지만 회식에서 ‘노래하며 놀자’는 고전적 오락이 대세일 때는 위계질서로도 누르지 못하는 법이다. 결심하고 따라가기로 하지만, 마치 그 꼴은 보신탕 집에 끌려가는 개처럼, 무기징역을 언도받으러 재판장에 끌려 나가는 죄수처럼 비참하고 딱하다.

    개중에는 자존심 팽개치고 현실참여가 살 길이라며 애들 노래 한두 곡 가사를 구해 부지런히 연습하는 오기형 기성세대도 있다. ‘내가 스스로 한다’는 이 늙은 ‘DIY’(Do It Yourself의 약자)파들은 ‘나이가 드셨어도 우리 부장님 멋지네요’라는 부하 직원들의 사기진작에 때로 우쭐하지만 그것도 여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요즘처럼 대중가요가 빠르게 바뀌면 잠깐 한눈 파는 사이 까막눈으로 전락한다.

    이거 노래 맞아?

    자꾸 그러다 보면 요즘 노래에 대해 분노가 쌓인다. “요즘 애들 노래는 대체 왜 그래?” 그 속도와 박자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의 일성이다. 사실 1992년 서태지가 ‘난 알아요’라는 랩을 불렀을 때 기성세대는 당황하는 모습이 뚜렷했다. 젊은이들은 흥겹게 따라불렀지만, 어른들은 그냥 가사만 읽는데도 부담을 느껴야 했다. 리듬이 생소한데다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에 숨이 막혔던 것이다. 반면 능란하게 랩을 지껄이는 젊은이를 보면 정말 다른 ‘민족’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품었을 것이다.

    분노는 비단 노래의 빠르기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노래방 TV 화면 하단에 깔리는 가사를 찬찬히 보면 뭔가 막힌 듯 답답하다. 너무 감각적이라서 동떨어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때로 너무 야하고 대담해서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게 애들이 부르는 노래야? 이거 노래 맞아? 막 지껄이는 거잖아.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하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

    정말 그런지, 우리 ‘신인류’의 노래를 한번 보기로 하자. 요즘 미모와 섹슈얼리티로 인기 절정인 여가수 박지윤의 ‘성인식’(박진영 작사·작곡)이다.

    ‘그대여 뭘 망설이나요 그대 원하고 있죠. 눈앞에 있는 날. 알아요 그대 뭘 원하는지 뭘 기다리는지. 그대여 이리 와요. 나도 언제까지 그대가 생각하는 소녀가 아니에요. 이제 나 여자로 태어났죠. 기다려준 그대가 고마울 뿐이죠. 나 이제 그대 입맞춤에 여자가 돼요….

    그대여 나 이제 허락할래요…. 사랑은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로운 거란 걸 내게 가르쳐줘요…. 하지만 이젠 내게 더 기다려야 될 이유가 없어지는 날이 온 거예요.’

    ‘성인식’(이 말부터가 스트레스다)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지만, 이 곡의 노랫말 속에는 해석하기에 따라 ‘성인이 된 후의 첫 경험에 대한 갈망’의 은유로 가득하다. 단순히 소녀에서 여자로 변하는 나이의 예쁘고 순수한 사랑표현으로 보기에는 가사가 아주 농염하다.

    ‘나 이제 허락할래요’는 순정(純情)의 사랑에서 언급될 언어는 분명 아니다. 더욱이 박지윤이 실제 노래하는 모습과 뮤직비디오를 결부지으면 조금 완고한 어른들은 ‘외설’의 딱지를 붙일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 시대 가요시장에 접근할 때 정통의 연가(戀歌)로는 어필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식상한 표현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정통 연가로는 어필이 어렵다

    대중음악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 그리고 그 반대편의 정서라 할 이별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랫말의 주종은 사랑과 이별이다. 시공을 초월해 대중음악은 언제나 획득한 사랑의 기쁨과 보답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픔을 담아낸다. 그래서 ‘사랑과 이별이 없으면 대중가요는 쓰러진다’는 말도 나온다. 솔직히 ‘너를 사랑한다’ ‘이제 너와 헤어져야 한다’는 말을 어떤 언어와 감각으로 돌려서 다양하게 표현하느냐가 (작사가의) 문제요, 고민일 뿐이다. 기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요즘 노랫말이 돌아가는 상황을 주의 깊게 보면 그런 말에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다. 과거에 알고 있는 재래식 사랑과 이별 표현법은 결코 아니다. 섹스에 대한 은유와 암시가 시사하듯 오로지 감각으로 뒤범벅된 것처럼 들려온다. 노래하는 가수도 젊고, 리듬과 선율 패턴도 젊고, 가사도 젊다.

    ‘니가 원하면 뭐든지 했고 니가 싫다면 하기 싫었어. 너의 여자로 태어난 걸 감사했어. 언제부턴가 변해버린 너. 아닌 척해도 느낄 수 있어. 너의 몸에서 그대로 배어나는 여자 향기. 사랑이 나를 눈뜨게 했고 이별이 나를 변하게 했어. 무정한 니가 내 인생을 망쳐놨어….’ -채정안 ‘무정(無情)’

    이런 신세대 가요를 들으면 곧바로 기성세대들은 세대차이를 절감한다. 언어술이 발달한 건지 아니면 마구잡이로 치닫는 건지 모르지만, 과거의 노래와는 격세지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때 노래가 좋았어. 순수했고…’

    그러나 40~50대 어른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정말 그 시절의 노래가 마냥 좋았고 순수했던가? 반드시 그렇게 볼 문제는 아니다. 만약 채정안의 ‘무정(無情)’이 배신한 연인에 대한 화풀이가 메시지라면, 저 흘러간 노래 가운데 유사한 계열을 찾아 비교해보자.

    ‘얄밉게 떠난 님아. 얄밉게 떠난 님아. 내 청춘 내 순정을 짓밟아놓고 얄밉게 떠난 님아. 떠벅머리 사나이에 상처를 주고 너 혼자 미련 없이 떠날 수가 있을까.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 -도성 ‘배신자’(이인섭 작사·김광빈 작곡)

    1972년에 발표된 이 곡은 지금 생각하면 순수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촌스러움 속에는 강한 자극성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채정안의 ‘무정’에 담긴 ‘너의 몸에서 배어나는 (딴) 여자 향기’와 ‘내 순정을 뺏어버리고’는 자극 수준이 다를지언정 메시지에서는 세대를 구인류와 신인류로 구분할 정도로 큰 편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 가사를 모르는 어른들은 없다. 지금도 가라오케나 카바레에 가면 빠지지 않고 흘러나오는 추억의 인기가요이자 ‘가요무대’를 통해서도 심심치 않게 듣는 노래다. 중년층의 애창가요로 손꼽히는 이 노래의 가사도 찬찬히 살펴보면 결코 순박하다고 볼 수 없다.

    ‘사나이 벌판 같은 가슴에다 모닥불을 질러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사랑에 취해 있나. 못 믿을 님아 꺾어진 장미화야…. 사나이 불을 뿜는 그 순정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행복에 잠겨 있나. 야멸찬 님아 꺾어진 장미화야.’

    남인수의 1958년 마지막 히트곡으로 유명한 ‘무너진 사랑탑’(반야월 작사·작곡)이다. ‘배신자’보다 한 세대 위의 어른들이 즐겨 목청을 높였던 노래지만, 내용은 조금도 약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다. 떠나간 사랑에 대한 분노는 실로 ‘3대’에 걸쳐 별로 변한 것이 없다. 각 세대에 통용되는 나름의 감각적 언어가 동원되는 것뿐이지 패턴은 같다. 이 노래들이 나왔을 당시 가요팬들은 지금 채정안의 노래와 똑같은 강도의 쇼크를 받았을 것이다(물론 가사를 전혀 따져보지 않고 노래하는 사람들은 빼고).

    기성세대의 아픔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수수한 사랑과 달리 신세대들은 앞을 가리지 않을 만큼 대담하고 직격포 일변도인가? 과연 신인류의 애정법은 어떤지 그들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자.

    ‘어쩌다 맘에 드는 그녀 남자친구가 있고, 별로 예쁘지 않은 그녀 괜히 콧대만 세고, 거리에선 본 괜찮은 여자에게 용기를 내서…. 주위를 보면 나보다 못난 남자들이 예쁜 여자와 잘도 다니는데 나는 왜 이럴까.’ -015B ‘신인류의 사랑’(정석원 작사·작곡)

    1992년에 발표된 것이지만 솔직히 사랑 앞에 용기 없고 수줍은 것은 ‘구인류의 사랑’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나는 왜 이럴까’는 정말 오랜 세월을 거쳐 한결같이 발견할 수 있는 가요 문장의 전형이다.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돌연변이 같아도 잘 보면 영향을 주었을 법한 원조격의 옛 노래는 얼마든지 있다.

    ‘노을에 물들은 구름처럼 꿈 많은 소녀. 꿈 찾아 꿈을 찾아 저 멀리 떠나버렸네…. 언제부터 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까. 내가 왜 혼자서 이 빗속에서 울고 있을까.’ -윤형주 ‘비와 나’(윤형주 작사·송창식 작곡)

    1972년에 발표된 노래로 앞의 곡과 정확히 20년의 세월 차가 있지만 정서의 간극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기야 아무리 세상이 기계화되고 디지털로 지배되어도 유일하게 바꿀 수 없는 것은 인간이요, 인지상정과 사랑 아닌가?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데 노래가 근본적으로 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성세대들이 걱정하는 대담하고 야한 애정표현도 그렇다. 그러면 흘러간 노래 중에는 ‘에로티카’가 없었는가. 아주 놀랄 만하고 충격적인 노래도 많다. 먼저 1974년 이장희 자작곡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다.

    ‘나 그대에게 드릴 게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게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오늘밤 문득 드릴 것은 무엇인가? 터질 것 같은 사랑이라지만 머릿속을 떠도는 것은 남녀상열지사로 연결되는 그 무엇이다. 제목부터 강도가 만만치 않다. 언젠가 만난 40대 현직 기자의 솔직한 고백. “어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멋모르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까 굉장한 노래들이야. 정말 야한 가사들이었어.” 그렇다면 현재 신세대들의 노래가 뭐 어쩌고 운운하는 것은 ‘애들 하는 것은 못 본다’식의 완고함에 불과하다.



    어른은 로맨스, 애들은 스캔들?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 찾을 수 없어요.’ -김추자 ‘늦기 전에’(신중현 작사·작곡)

    만약 늦는다면 이 곡의 주인공은 연인의 무엇을 갖지 못하는가. 노래로는 마음이지만 연상되는 것은 꼭 그렇지 않다. 이게 1969년에 만들어진 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로는 굉장한 표현수위라고 할 수 있으며, 곰곰이 따져보면 더 대담하게 다가온다. 노래란 광고의 카피처럼 이중(二重)법을 즐겨 쓰는 게 일반적이다. 명기된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괜찮겠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상당한 자극이 엄습한다. 다만 옛날 사람들은 좀 감출 줄 알았던 것에 비해 지금 사람들은 감추지 않고 직설법을 구사하는 데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지금 40대가 된 사람들에게는 ‘가요의 시인’이었던 김창완의 그룹 산울림이 남긴 1978년 노래 ‘둘이서’를 보자.

    ‘시계 소릴 멈추고 커튼을 내려요. 화병 속에 밤을 넣어, 새장엔 봄날을. 온갖 것 모두 다 방 안에 가득히. 그리고 둘이서 이렇게 둘이서. 부드러운 당신 손이 어깨에 따뜻할 때…. 귓가엔 당신 숨소리.’

    제목은 ‘둘이서’고, 곡조는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이러한 노랫말을 듣는 이의 기분은 야릇하다. 성(性)의식이 따로 없다. 실제로 이 노래가 나왔을 때 커튼을 내리고 유사한 환경을 조성한 뒤 LP를 플레이어에 건 사람도 있다.



    “님 주신 밤에 씨뿌렸네”

    음악 팬은 두 종류가 있다. 가사를 챙기지 않고 멜로디나 리듬에 집중하는 부류와 가사까지 음미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는 가사보다 곡조에 더 신경을 쓴다. 그래서 꽤나 강도가 있는 노래들도 부르는 재미에만 그치고 노랫말이 주는 쇼크는 그냥 간과되곤 한다. 우리 시대의 가왕(歌王)이라는 조용필의 1981년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야’(이주현 작사·조용필 작곡)가 이 경우에 속하는 노래일 것이다.

    ‘님 주신 밤에 씨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 여름 어인 광풍 그 여름 어인 광풍. 낙엽 지듯 가시었나. 행복했던 장미 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님 주신 밤에 씨뿌린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운다? 이보다 더 생생한 ‘첫날 밤’의 묘사는 없을 것이다. 언제나 성에 대한 은유는 사람을 짜릿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랑과 성의 표현 가운데서도 아마 가장 흥분을 자극하는 것은 ‘한 남자에 한 여자’라는 고전적 연애 관계를 벗어난 ‘다수와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이를테면 단수(單數) 아닌 복수(複數) 커넥션이 제공하는 ‘일탈의 정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바로 박신자 오리지널로 1970년대에 리메이크됐으나 금지된 ‘댄서의 순정’(김영일 작사·김부해 작곡)이 떠오른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푸른 등불 아래 붉은 등불 아래, 춤추는 댄서의 순정. 그대는 몰라 그대는 몰라. 울어라 색소폰아. 새 빨간 드레스 걸쳐 입고 넘치는 그라스에 눈물 지며….’

    비록 다수의 남자를 상대해야 하는 댄서라는 직업여성인 줄 알지만, ‘남자 품에 얼싸 안긴다’는 표현은 적어도 이 곡을 어렸을 때 들은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직업여성은 아니되 비슷한 계열의 노래로 1990년대 중반 널리 회자된 임주리의 곡 ‘립스틱 짙게 바르고’(양인자 작사·김희갑 작곡)가 있다.

    ‘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영원하지도 않더라.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 속절없는 사랑아. 마지막 선물 잊어 주리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별이 지고 이 밤도 가고 나면 내 정녕 당신을 잊어 주리라.’

    과거 같으면 속절없는 사랑이라도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하겠지만 이 노래는 훌훌 털고 립스틱 짙게 바르고 새 사랑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야릇한 기분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들은 아직 완전한 자유연애의 모습을 취하지는 않다. 자유연애의 시작을 알린 곡은 아마 ‘한국 록의 시조’로 숭앙되는 신중현의 기념비적인 1974년 노래 ‘미인’이 아닐까 한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나도 몰래 그 여인을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모두가 넋을 잃고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나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주의를 기울일 대목은 ‘모두 사랑하네’ 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1960년대 서구의 히피즘(hippism)의 주요 캐치프레이즈인 ‘프리섹스’, 즉 ‘성 공동체’적인 자유연애의 사고가 슬쩍 녹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개념으로 ‘모두 사랑하네’는 1 대 1 관계를 넘어서는 분명한 파격이며 동시에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부분이다. 1975년 이 곡은 가요규제 조치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공륜으로부터 김추자의 등과 함께 ‘풍기문란’으로 금지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신시대의 암울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 유신정부는 히피의 생활양식에 묻어 있는 저항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마초나 자유연애와 같은 ‘미풍양속에 대한 저해’ 관련 부분을 집중적으로 부각해 국민의 반감을 자극했다. 군사독재는 가요의 자유로운 표현을 막는 큰 벽이었다. 특히 남녀간의 무절제한 애정표현은 바로 ‘외설’의 사슬이 날아드는 탓에 가사를 쓰는 사람은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일정한 선을 넘어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말아야 했고 허용된 범위 내에서 극한치의 자극을 구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민주화 투쟁과 그에 따른 상대적 자유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가요계에는 다시 성적 은유의 노래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해석하기에 따라 부도덕한 내용일 수 있는 노래는 물론, 상기한 ‘복수관계’에 대한 암시가 두드러진 노래들이 우후죽순 쏟아진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노래들을 보자. 1986년에 크게 히트한 최성수의 ‘남남’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가 오늘밤 내 곁에서 떠나갔네…. 담배 연기에 눈물을 흘릴 뿐이라고 말했지만 슬픔이 물처럼 가슴에 고여 있기 때문이죠. 오늘밤만 내게 있어줘요. 더 이상 바라지 않겠어요. 아침이면 모르는 남처럼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사랑해요 그것뿐이었어요….’

    뭐가 이상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 가사의 일부인 ‘오늘밤만 내게 있어줘요’가 주는 효과는 대단했고 그만큼 젊은이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헤어지는 마당에 오늘밤만 내게 있어 달라는 애원은 즉각적으로 음악팬들로 하여금 주인공들의 순수한 사랑 아닌 운우지정에 대한 상상을 부르기에 충분했다(도대체 어떤 사이였을까?). 심지어 누군가 그랬다. 이 곡은 ‘에로 발라드’라고.

    ‘…지난 날들을 되새기며 수많은 추억을 헤이며, 길고긴 밤을 새워야지 나의 외로움 달래야지. 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

    가사만 들어도 즉각 멜로디가 떠오를 정도로 친숙한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이다. 1988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발라드 시대’와 ‘100만장 신화’를 새롭게 열었던 기념비적 노래로 하광훈이 작곡하고 탤런트 출신의 지예가 노랫말을 쓴 이 곡은 평범한 이별노래 같지만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부분이 걸린다. ‘이별은 두렵지 않은데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는 말은 조금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이별한 사람이 아닌 어떤 이성이라도 나타나면 슬프지 않다’(한마디로 어떤 여자라도 있으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전통의 별리(別離)와는 영 딴판인 셈이다.



    가사는 시대를 반영한다

    이전의 이별가들과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보자.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와 1966년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다. 두 곡 모두 한산도가 작사하고 백영호가 작곡 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아가씨’

    ‘너무나도 그 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모친 미움.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해.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흐느끼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음 때는 늦으리.’ -‘동숙의 노래’

    이 시절 노래에는 ‘오늘밤만’이라든가 ‘홀로 된다는 것이 슬프다’는 메시지는 없다. 그러니까 한창 때 ‘남남’이나 ‘홀로 된다는 것’과 같은 노래를 들었던 386세대들도 요즘 자유분방한 노래에 대해서는 솔직히 토를 달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런 아슬아슬한 단계를 거쳐 지금처럼 허리띠를 마음껏 풀어헤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어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노래가 역사의 씨앗 없이 개화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노래란 어느 나라를 망라하고 시대 따라 세월 따라 ‘순수와 이상-긴장과 갈등-욕구와 자유’라는 3단계를 거치는 경향이 있다. 노랫말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광복기와 미군정 이후 1940~60년대의 트로트와 외국음악(스윙 재즈와 스탠더드 팝) 수입시대는 ‘순수와 이상의 시대’로 볼 수 있다. 또한 군사독재 시대인 1970~80년대는 ‘긴장과 갈등의 시대’, 문민정부 출현 이후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욕구와 자유의 시대’라고 개괄할 수 있다.

    물론 시대상황이 갖는 특수성에 따라 음악의 흐름과 노랫말의 색깔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단계적 진행도 어디까지나 표현방식과 자극성의 차이일 뿐이지 대중음악 노랫말의 근간인 사랑과 이별은 면면히 중심을 이어왔다. 문화감성의 골격이라 할 연정(戀情)을 각 시대의 모습에 맞춰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 두 가지 측면, 이를테면 ‘단계론’과 ‘동질론’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각 시대의 노래를 다시 한 번 보기로 한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이부풍 작사·박시춘 작곡)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 준 꽃반지 끼고…. 생각난다 그 바닷가. 그대와 둘이서 쌓던 모래성. 파도가 밀리던 그 바닷가도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은희 ‘꽃반지 끼고’(은희 작사·변혁 작곡)

    ‘아시나요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댈 보면 자꾸 눈물이 나서. 차마 그대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해야 했던 나였음을…. 왜 그런 얘기 못했느냐고 물으신다면 가슴이 아파 아무 대답도 못하잖아요.’ -조성모 ‘아시나요’(강은경 작사·이경섭 작곡)

    트로트의 대명사라고 할 ‘애수의 소야곡’은 1938년 발표된 곡이고 텔레비전의 포크 붐을 주도한 ‘꽃반지 끼고’는 1971년에 나왔으며 주지하다시피 조성모의 ‘아시나요’는 올 2000년의 히트곡이다. 60여 년이라는 세월의 두터운 벽이 존재하지만 과연 넘어서지 못할 거리감이 있는가? 하나같이 지나간 사랑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다만 각각 순박하게, 로맨틱하게, 자유롭게 운을 띄운 분위기의 차이에 불과하다. 노래는 그 시대에 부합되는 언어장치를 동원할 뿐 뼈대는 언제나 동질하다.

    사랑을 빼놓고 대중음악이 수용하는 또 하나의 표현정서가 있다. 그것은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에 항거하는 이른바 ‘저항정신’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트로트 세대는 이후의 가요에 대해 상당한 거리감을 느낀다. 자신들 시대에는 그런 무거운 노래들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트 세대의 소외를 가져온 포크 세대도 신세대 최신가요에 담긴 저항은 너무 과격하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지적한다. 포크세대 중 신세대 가요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드물다. 이 부분에서 세대격차는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옛날 일제 치하에서도 저항가요는 분명히 존재했다. 심지어 1934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손목인 작곡)의 경우도 삼학도를 배경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사람과의 이별을 다룬, 일제에 대한 저항정서가 투영된 곡으로 전해진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한국 포크의 빛나는 별 김민기가 만든 1972년 양희은의 노래 ‘작은 연못’은 우리 분단에 대한 고찰로 좌파적 이데올로기에 근저한 논리 전개를 보여준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이러한 묘사법은 포크와 민족음악의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면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금 3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지성인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저항가요의 일반형이다.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저항의 대상을 잃은 탓에 우리의 저항가요는 크게 흔들려 1992년 서태지가 출현하면서부터는 급격히 광채를 상실했다. 서태지의 노랫말은 이전의 방식을 골동품으로 만들면서 신세대 저항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했다.

    ‘심사의 세대. 닫힌 네겐 서툰 새 빛조차 두렵겠지만 난 좋기만 해. 난 더 기대가 돼. 너 다시 내게 짓궂게 굴 땐 가만 안 두리라. 넌 이제 울트라의 이름으로 심판 받으리라. 네 잣대로 다 우릴 논하다 조만간 넌 꼭….’ -서태지 ‘울트라맨이야’

    서태지의 저항은 우리 사회의 계층적 분화(分化)가 가져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서태지 이전만 해도 우리한테는 지배그룹과 좌파그룹만이 존재했다면 서태지 세대는 그 좌우와 무관하고 별도의 룰을 가지려는 이른바 ‘제3그룹’으로 일컬을 수 있다. 이들은 이전의 기성세대나 지배그룹에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 따라서 음악적으로는 트로트 스윙 세대나 포크 민족음악 세대 모두와 완전히 격리된 셈이다.

    힙합과 펑크, 헤비메탈 그리고 하드코어 등 부모가 싫어하는 음악들을 선호하는 것이 이를 생생히 말해준다. 이 ‘공격적 소외층’의 정서는 서태지(제3그룹의 리더?)나 DJ DOC(제3그룹의 기쁨조?)의 노래에 잘 표현되어 있다.



    노랫말에 ‘혁명’은 없다

    탈(脫)이데올로기든, 자기중심적이든, 공격적이든 이들의 과격한 표현법도 결국 사회가 여러 계층으로 분화 발전하는 데 따른 문화적 현상으로 관대하게 볼 필요가 있다. 서구사회가 보여주듯 기성세대의 외면은 사회 그룹들간의 대치를 심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는 사회적 산물이다. 우리가 부대끼고 살아가는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느냐가 대중가요라는 채널에 그대로 반영된다. 사회는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요즘 노래는 왜 그래?’ 하고 반문한다면 그는 정지되고 박제된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반면 새롭게 쏟아지는 노래를 관심있게 분석하면 신세대의 의식을 꾸준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형식은 급변하고 있다. 하지만 노래에 담긴 메시지는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아련한 사랑의 흥분이나 이별의 슬픔 그리고 다른 편의 기성문화에 대한 저항이 대중가요 정서에 근간을 이룬다는 사실은 시공을 초월해 변함이 없다. 아니 변할 수 없다. 적어도 대중가요의 노랫말에서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세대차이를 보는 각 세대의 눈이다.



    다른 세대의 정서를 인정해야

    어차피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차선책이다. 젊은이는 어른을 인정하고 어른은 젊은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세대의 정서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호선린’이 존재하는 나라의 문화는 풍요롭다. 한두 가지 장르의 음악이 국내 가요계를 독점하는 편향은 어쩌면 정서적 대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모순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기성세대의 관대함이 필요하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귀동냥한 20대 딸과 50대 어머니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딸이 좋아하는 노래 쿨의 ‘해석남녀’(이승호 작사·윤일상 작곡)를 두고 나눈 대화였다. 잠깐 이 노래의 가사를 보자.

    ‘물론 너를 처음 봤던 그 순간에 다리에 힘이 쫙 빠지고 정말 끝내줬지. 하지만 양귀비도 2박3일 결국에 얼마 못 가 난 슬슬 지겨워졌지. 여자들 괜히 좋으면서 이런 말도 하지. 아직은 아니라는 아리송한 말….’

    “엄마 이 노래 가사 정말 야하지? 징그럽지 않아? 엄마는 젊었을 때 맨날 점잖은 노래만 들었을 거 아냐?”

    “얘가 무슨 소리하는 거야? 우리 때 노래도 얼마나 진한 게 많았는데. ‘사랑을 가르쳐주세요’인가. 나도 처녀 때는 노래 듣고 짜릿할 때가 많았어. 너희들 때만 그런 노래가 있는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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