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증유의 자살 테러는 미국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문제는 그 상처가 얼마나 치명적이냐는 것. 미국의 뉴 이코노미는 이미 장기 호황을 낙관한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의 방향 잃은 금리 정책으로 몰락 위기에 처해 있다. 테러는 몰락의 결정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시작된 비극의 ‘심리적 분기점’일 뿐인가.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지난해 3월 강연 가운데 한 대목이다. 미국 경제는 10년째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린스펀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정보기술이 가져온 새로운 혁명이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을 낳으며 물가상승 없는 장기성장이라는 신기원을 열고 있다고 강조해온 터였다.
“미국 경제는 더 이상 기존 경제이론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궤도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라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학은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뉴 이코노미(신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곳곳에 흘러 넘쳤다.
그렇게 장담하고 대다수가 믿어 의심치 않던 미국 경제의 장기 고성장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미국 경제는 지난해 3분기 활력을 잃는가 싶더니 점차 내리막을 타 급기야 지난 6월까지 2분기에는 거의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컴퓨터와 인터넷, 이동통신 등 정보기술(IT) 부문에서 내로라하던 기업들이 수익 격감 추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은 수지를 맞추기 위해 생존을 걸고 감량을 감행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심장부를 강타한 미증유의 테러가 세계금융시장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며 불안심리를 부추겼다. 경기가 하강하고 있는 가운데 던져진, ‘미국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는 충격은 미국 내 소비와 대미투자를 움츠러들게 할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 경제는 과연 잠시 슬럼프에 빠져 있을 뿐, 이르면 연말부터 회복이 가능한 걸까. 그렇다면 뉴욕 증시는 지금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인가. 희망 섞인 전망과 달리 세계 최대 시장 미국이 침체에 돌입할 경우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불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일각에서 여러 유사점을 들어 언급하는 바대로 1930년대 대공황 같은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하려면 우선 1990년대 후반, 좁게는 1997년 이후 부추겨진 뉴 이코노미를 향한 기대와 전개과정을 해부해야 한다. 현 경기 사이클은 뉴 이코노미에서 비롯됐기에,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전망의 실마리도 여기서 찾아야만 하는 때문이다.
미국 경제는 지난 1997년 이후 4년 동안 4%대 고성장을 지속했다. 1992년 불황을 벗어나 성장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했지만 1994년 한 해를 제외하면 경제성장률이 2%에 머무른 데 비추어 비약적인 성장세였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1999년 4분기에는 무려 8.3% 도약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런데 별안간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증시는 급전직하, 지난해에는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나스닥지수는 연간 39.3% 급락했다. 1998년 39.6%에 이어 1999년에는 무려 85.6% 치솟은 뒤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6.2%, 미국 경제를 대표하는 대형주 위주의 S&P 지수는 10.1%까지 미끄러졌다.
주가는 기업 수익의 하락을 따라 곤두박질쳤다. S&P 500 편입종목의 전년 동기 대비 수익은 1분기에 약 6.2%에 이어 2분기에는 17% 줄어들었다. 이번 3분기에도 13% 감소가 예상되고 있으며 4분기 회복도 어렵다는 전망이다.
GDP는 1999년 4분기 8.9%를 정점으로 신장세가 둔화, 지난 1분기 1.3%에 이어 2분기 성장률은 0.2%에 그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실업률은 지난해 9월 3.9%에서 8월에는 4.9%로 4년 중 최악이 됐으며 연말에는 5%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경제와 함께 달러도 흔들리고 있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FRB는 일시적인 공급초과와 이를 덮친 고유가를 들었다. 지난 2월 상원 증언에서 그린스펀은 “첨단기술 산업의 경우 지난해 생산능력이 50% 확충되는 등 공급능력이 수요를 앞질렀다”고 진단했다. 그린스펀은 수요 부족의 충격은 원유 가격 상승으로 기업과 가계의 구매력이 위축되며 더욱 증폭됐다고 설명했다. 갑작스런 국면전환으로 기업 재고가 쌓였지만 현재 재고를 조정중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바람직한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요컨대 당시 상황을 “경제가 균형성장 경로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국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일시적인 재고조정으로 수습될 상황이 아니었다. ‘뉴 이코노미스트’들의 과장과 달리 컴퓨터, 인터넷, 이동통신 등 첨단기술 부문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한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무너질 경우 경제 전체에 타격을 줄 만한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파국은 첨단 부문의 급성장이 지속 가능한 선을 이미 넘어섰다는 데서 배태됐다. 신산업 부문의 수요는 한편에서는 투자가,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가 이끌었다. 소비 수요는 왕성하게 채워진 뒤 포화 또는 둔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투자수요는 투하된 자본에 수익을 돌려줄 수 없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주가는 천정부지로 오른 뒤였다. 주가와 투자수요는 미세한 충격에도 도미노로 쓰러질 준비가 돼 있었다.
경기상승의 선순환을 정리해보자. 새로운 부문을 축으로 한 고도성장에 대한 자신감은 상당 기간 현실에 발을 딛고 있었다. 기업은 수요 확대에 힘입어 수익을 늘려나갔고 개인 소득도 증가했다. 기업과 개인은 각각 투자와 소비수요를 통해 수익에 정방향으로 피드백을 줬다. 수익을 발판으로 주가가 몇 곱절 올랐다. 주가 상승은 투자를 자극했다. 증시에서의 자본이득은 소비수요를 가져왔다. 다시 수요가 늘면서 수익은 더 증가했다.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쳐 뉴 이코노미로 승화하면서 선순환은 내부에서 붕괴의 싹을 틔웠다. 낙관론은 경계심을 무장해제했다. 투자는 증시를 타고 한푼도 수익을 낼 수 없는 환상의 경계를 개척해나갔다. 뉴 이코노미와 현실과의 괴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주가가 깨지고 투자가 되감기며 소용돌이쳤다. 첨단 산업 부문은 재고 뿐 아니라 신규투자를 접고 기존사업 및 인력구조조정에 돌입했다. 그린스펀이 든 고유가라는 외생 변수는 주변적인 요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지금 경제는 기존 경제학의 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기존 법칙에서 벗어난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난 1998년 5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렇게 운을 뗐다.
“미국 경기는 제가 하루도 빠짐없이 경제를 연구해온 지난 50년 중 가장 최상입니다. 기업은 컴퓨터와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에 따른 노동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그린스펀은 지난해 1월 클린턴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4년 임기를 한 차례 더 연장하게 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 경제는 정보기술로 정의됩니다. 심각하면서도 중요한 어떤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유례 없는 생산성 향상의 뿌리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있죠. 컴퓨터는 수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효율적인 재고관리를 가능케 합니다. 신기술이 빠른 속도로 전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더욱 주요한 진보가 앞에 놓여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린스펀은 뉴 이코노미의 환상이 ‘제도권’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1993년 무렵부터 ‘과거와 판이한’ 경제현상에 관심을 갖고 파고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코노미의 가설을 현상을 통해 나름대로 검증,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생산성 가설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FRB 조사부의 이코노미스트에게,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멤버들에게 이를 설명했고 루빈 재무장관과 주마다 한 번씩 가진 조찬에서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별 반향이 없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97년 하원 금융위원회에서 그린스펀은 자신의 견해를 꺼내놓는다. 물가안정 속 호황을 생산성 향상으로 돌린 뒤 “1세기에 한두 번 가능한 생산성의 비약이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가 필립스곡선, 혹은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는 실업률(NAIRU, non-accelerating inflaion rate of unemployment)의 기존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주장이었다.
필립스곡선과 NAIRU는 물가와 실업의 역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경기가 일정 기간 이상 달아오르면 일손을 구하기 어려워져 임금이 오르는 가운데 수요가 공급을 압박, 인플레이션을 낳는다는 설명이다.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통화를 조이고, 이에 힘입어 물가가 안정되는 반면 경기는 하강하고 실업은 증가한다.
미국 경제가 어떻게 필립스곡선으로부터 오랜 기간 벗어나 있을 수 있었는지는 논외로 하자. 문제는 취약한 여건에 대한 냉정한 분석 없이 좋았던 경험을 미래에 투사한 점이다.
뉴 이코노미의 완결판은 미국 상무부가 맡았다. 상무부는 지난해 6월 ‘디지털경제 2000’ 보고서를 통해 정보기술(IT)산업과 인터넷이 생산성을 높이고 인플레를 억제하는 등 미국 경제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국 경제는 내연기관이 촉발한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위대한 경제발전과 가능성의 시대에 진입했다. 미국경제가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징조는 보이지 않으며 이는 디지털 경제의 발전이 근본적인 이유다. 인터넷과 IT산업을 원동력으로 한 높은 생산성은 장기간 지속될 것이다.”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는 명제는 ‘영구기관 개발’ 못지 않은 환상이다. 생산성은 국내총생산(GDP)을 단위노동으로 나눠 내는 값에 지나지 않는다. 생산성 향상이 지속 성장을 보장한다는 주장은 전반기에 수익을 많이 낸 기업은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토당토않다.
생산성에 대한 맹신은 의외로 넓게 뻗쳐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생산성 향상이 세계경제 회복의 최대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BIS는 지난 6월 펴낸 연례보고서에서 “세계경제의 단기 전망은 불투명하지만 지난 몇 년간 미국에서 나타난 생산성 향상이 세계 각국으로 확산된다면 세계 경제 둔화는 가벼운 단기증상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고 분석했다.
앞에서 경기의 선순환이 소용돌이로 돌변하게 된 원인은 과도한 자신감이라고 지적했다. 그 자신감은 다른 이가 아니라 그린스펀이 조장했다. 그린스펀은 통화정책 책임자로서 가장 요구되는 덕목인 신중함을 내던졌다.
지난해 1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전능하신 앨런 그린스펀’이란 기사를 통해 그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가 도덕적 해이로 흐를 위험을 경고했다. FRB의 경기 및 금융시장 조절 능력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게 형성되면서 이전 같으면 회피했을 위험을 감행해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키울 우려가 있다는 분석이었다. 이는 물론 적절한 지적이었다.
장기호황 성공신화의 주역으로 떠받들어진 그린스펀. 그는 뉴 이코노미 동력의 한 축이었던 증시에 어떻게 대응했나. 주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은 바는 아니다. 1996년 말에는 ‘비이성적 흥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엔 증시에 찬물을 끼얹지 않았다. 연방기금 금리도 올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은행간 단기차입 금리인 연방기금 금리는 1995년 7월 이후 2000년 3월까지 4년 반 동안 5%대에서 맴돌았다.
그는 대신 인터넷 등을 뼈대로 하는 산업혁명, 신세계를 펼쳐 보이는데 주력한다. 지난해 3월6일 보스턴. 보스턴 대학이 개최한 뉴 이코노미 컨퍼런스 강연 현장으로 가자.
“지난 반세기 동안 지속적인 혁신을 통해 고도화된 새 기술은 상품과 서비스가 생산·유통되는 방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인터넷 이용자 급증으로 대변되는 이번 혁신은 기업 설립의 봇물을 텄습니다. 많은 신생 기업은 경제의 생산 및 유통 가운데 큰 부분을 혁명적으로 바꾸며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노라고 호언합니다. 자본시장 참여자들은 경제구조의 불연속적인 변화에 불안해하면서도 이들 기업의 적정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 암중모색 중입니다. 일부에서는 고평가 됐다고 하는 신생 기업의 주가 변동성은 앞으로 수십 년 내에 지배적이 될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점치는 어려움을 나타냅니다.”
이른바 ‘건설적인 모호함’(constructive ambiguity)으로 속마음을 숨기는 그린스펀의 강연치고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강연 원고를 넘겨 그는 “FRB가 당면한 목표는 경제 및 금융환경을 개선, 구조적인 생산성 향상을 촉진할 기술적인 혁신과 투자를 장려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흘 뒤 나스닥지수는 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그린스펀이 던진 이같은 ‘신탁’은 오독의 여지가 없었고, 투자자들은 주저할 까닭이 없었다. 주가는 1999년 6월 이후 FRB의 금리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술주는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금리인상에 타격을 받지 않는다며 마냥 치달았다.
기업, 투자은행, 펀드매니저 등이 증시에 맹렬히 돌진했다. 언론이 뇌동했고 일반 투자자는 언론보도를 통해 신기술과 관련된 대부분의 기업이 확실한 투자처라고 믿게 됐다. 그러나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주의 가치평가는 ‘가상현실적’이라 할 만큼 허황됐다. 기업공개가 큰 수입원인 투자은행에서 애널리스트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로운 분야의 기업에 후한 등급을 매겼다. 애널리스트들은 수익 등 기존 분석틀로는 새로운 분야의 기업을 적절히 평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익은 고사하고 매출이 일어나지 않는 기업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가입자 수 등이 활용됐다.
애비 조지프 코언, 헨리 블로짓 등 숱한 점쟁이들이 돗자리를 깔았다. 코언은 ‘슈퍼 탱커’ 미국 경제를 막을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다며 고장난 시계처럼 언제나 매수관점을 유지했다.
지난해 10월 코언은 S&P 500 지수가 저평가돼 있다며 연말에 1575까지 오른다고 내다봤다. S&P 500 지수는 지난해 1320으로 마감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3%로 점쳤다. 올해 들어서는 S&P 500 지수의 연말 전망치를 두 차례 낮춰 잡았다. 당초 1650에서 1550으로, 그리고 8월에는 다시 1500으로 하향한 것. 인터넷 전도사 헨리 블로짓은 아마존의 주가가 40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마존 주가는 9월 들어 10달러를 밑돌고 있다.
다시 그린스펀으로 돌아가자. 그린스펀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 경제를 안정적으로 성장케하는 통화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또 지난 1987년 10월 블랙 먼데이 증시 붕괴를 수습하고 1990년 부실채권으로 인한 금융시스템 위험을 해소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 이동통신 부문 확장에 힘입어 경제가 성장을 지속하면서 그는 점차 오류에 함몰됐다.
그린스펀이 과연 전후좌우를 분별하는 체계적인 인식능력을 갖고 있을까. 올해 들어 일의 추이를 뒷북치며 따라온 건 한번 잘못 택한 관점 탓으로 치부하더라도 의구심은 여전히 남는다.
한 가지 사례. 정보기술이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건 불확실성 해소라고 그는 설파했다. 이전 기업은 소비자의 요구, 재고의 위치, 생산 과정 등 필요한 정보를 제때 뽑아내 활용할 수 없었다. 이제 정보활용의 퀀텀 도약에 따라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를 접하게 된 만큼 기업은 제대로 된 의사결정에 다가설 수 있게 됐다는 것. 그러나 틀렸다. 판단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두 경영자 가운데 분석 및 판단력이 떨어지는 이에게 그가 원하는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입력해보면 어떨까. 논리 실증주의자의 한계였다.
혹자는 그린스펀이 1999년 6월부터 금리를 올려대는 통에 잘 나가던 경기가 고꾸라졌다고 비판한다. ‘경기는 노쇠해서가 아니라 FRB의 침대에서 숨을 거뒀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미국의 단기금리는 1999년 6월 이후 여섯 차례에 걸친 1.75%포인트(175 베이시스 포인트·bp) 인상에도 불구하고 1995년 7월 이후 2000년 3월까지 4년 반 동안 5%대를 위로 벗어나지 않았다. 앞서 러시아 금융위기 등에 대응해 금리를 75bp로 낮춰놓은 수준에서 인상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금리인상은 몇 년 앞서 단행됐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린스펀 말대로 ‘비이성적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린스펀 자신도 들떠 있었음에랴!
지난해 말 미국 경기가 수직낙하하자 당황한 그린스펀은 올해 벽두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두 차례 비정례회의를 통한 50bp씩을 포함, 모두 일곱 차례 연방기금 금리를 깎았다. FRB 사상 가장 공격적인 조치였다. 연방기금 금리는 6.50%에서 3.50%로 300bp 떨어진다.
이미 엎지른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구멍난 거품에서 새나가는 바람을 금리인하로 틀어막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케인스의 표현을 빌리면 ‘금리인하는 줄을 미는 것’처럼 무력했다. 즉 기업이 과잉투자를 되감는 국면에서는 금리인하로 투자를 촉진하기 어렵다.
통화정책이 전혀 쓸모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주가는 하락했지만 대신 부동산으로 돈이 몰렸다. 다른 금리와 달리 주택저당금리는 떨어져 주택거래를 자극했다.
부시 행정부의 감세는 아니 한만 못한 정책이다. 많은 이들이 금리인하와 올해 380억달러에 이르는 세금환급이 수요를 활발한 상태로 유지할 것이라며 3분기, 늦어도 연말 반등을 전망했다. 임금 삭감과 실업이 상당 기간, 적어도 연말까지 계속되리라는 예상을 무릅쓰고 돌려받은 세금을 전액 지출할 집은 많지 않다. 경기 하강국면에서 정부는 세금을 돌려줄 게 아니라 재정지출을 늘려 민간의 수요부족을 메워야 한다.
공화당은 집권할 때마다 세금부담 경감이라는 만병통치약을 들고 나왔다. 월 스트리트 저널을 ‘기관지’로 한 공급경제학은 지난 1980년대 레이건에 의해서도 시도됐지만 신통한 효험을 봤다는 평가는 거의 없다.
결국 정체 단계에 이른 미국 경제의 향후 행보는 어떻게 될까. 낙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 경제가 서 있는 지반이 탄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가계는 호시절을 거치면서 주식 수익 등에 의존, 소비지출을 키워왔다. 가처분소득에서 저축하는 비율인 개인저축률은 1994년 6.1%에서 1997년 4.2%로, 2000년에는 1.0%로 떨어졌다. 또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최근 15년 중 가장 높은 수위를 가리키고 있다.
가계는 올해 들어서도 관성에 따라, 일부는 주택경기 호조에 힘입어 씀씀이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증시 손실이 확대되고 주택 경기도 주춤하는 가운데 실업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지출이 계속 활발하게 유지되기 어렵다고 전망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부채 대비 저축액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가계는 지출을 유지하기는커녕 허리띠를 한껏 졸라매며 ‘비오는 날’에 대비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투자에 이어 가라앉은 소비가 경기를 본격적인 침체로 몰고 갈 것으로 예상된다. 소비는 미국 수요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동안 증가세를 유지하며 투자가 격감하는 미국 경제를 침체로부터 방어해 왔다.
해외 수요에 의존할 수도 없다. 일본 GDP는 1분기 0.1%로 제자리에 머문 뒤 2분기에는 0.8% 위축됐으며 유로 지역 경기도 밀리고 있다. 오일 쇼크와 아시아 외환위기 등 이전의 충격은 세계경제 전체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미국이 부진하면 유럽이 방어선을 쳤고 일본이 저조할 때는 미국과 유럽이 충격을 완화했다. 이제 세계경기는 2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동반 둔화를 겪고 있다.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최악의 연쇄테러는 항공수송 등 차질을 빚었지만 실물경제에 직접적으로 미친 타격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증시의 주가와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며 소비를 한층 더 제약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미국 소비자는 이미 예전보다 알뜰한 소비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소매판매는 지난 7월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소비자신뢰지수도 8월까지 두 달째 악화됐다. 이런 가운데 터진 테러는 금융시장을 흔들고 소비자 불안감을 부추겨 본격적인 소비 위축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즉 미국 국방부 펜타곤 건물까지 무인지경으로 유린당했다는 충격에 주가와 달러 가치 하락의 악순환이 더해질 경우 ‘과거 좋았던 시절’의 소비 행태는 유지하기 부담스럽게 된다.
특히 가계는 저축액이 적은 반면 부채는 많은 위태로운 불균형을 이어왔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암울한 비관으로 돌변할 경우 각 가정은 이전보다 덜 쓰면서 많이 저축하려 들 것이다.
미국 심장부 연쇄테러로 미국과 중동간 긴장이 고조돼 원유가가 치솟을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미국이 테러국가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면서 세계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요컨대 세계무역센터 테러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기 침체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분기점으로 분석된다. 그러잖아도 아래로 향하던 미국경기가 테러를 계기로 침체 단계에 더욱 빠른 속도로 진입한다는 얘기다.
한편 대공황 이전과 지난 수년에서 유사점을 찾는 접근도 나오고 있다. 1930년대 대공황 직전 세계경제도 자동차, 철강, 라디오 등 당시의 신산업이 주도하며 고속 성장했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에 거품이 형성됐다.
대공황과 비슷한 구조적인 원인으로 이번 경기침체가 비롯됐다는 데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기침체가 또 다른 대공황이 되려면, 즉 세계경기가 10년 가까이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려면 세계 각국의 정책당국이 여러 단계에 걸쳐 경쟁적으로 ‘나쁜 정책’을 펴야 한다.
우선 불황에 돌입한 뒤에도 통화를 조여야 한다. 1929년 미국 경기둔화로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 해외로부터 유동성(금본위제였던 당시에는 금)이 유입됐다. 그러자 FRB는 물가를 잡아야 한다며 채권을 발행, 유동성을 흡수하며 통화긴축에 들어갔다. 또 자국 시장을 지키기 위해 앞다퉈 수입장벽을 쳐야 한다. 미국은 1930년 악명 높은 스무트 홀리 법을 제정, 시장폐쇄 경쟁을 촉발했다. 그 결과 무역이 소용돌이쳤고 불황은 더욱 심화됐다. 아울러 재정긴축도 감행해야 한다. 균형재정론자였던 후버는 1932년 ‘자신감 회복’을 위해 세율을 올렸다.
미국 경기는 과연 얼마나 깊게, 오래 하강할까. 과잉투자에서 비롯된 구조적인 경기하강은 금리인상으로 인한 순환에 비해 골이 깊고 기간도 길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경기수축은 모두 수요조절을 위한 통화긴축에서 비롯됐으며 기간은 평균 11개월이었다. 미국 경기는,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앞으로도 1년 이상 기다려야 바닥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회복 시기는 미국의 경제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거품과 과잉을 얼마나 신속하게 해소할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존 경쟁을 통해 한계 기업이 정리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지켜볼 일이다. 그래야만 남은 기업이 미래를 내다보며 투자에 들어간다. 살아남기 위한 고통이 정점에 이를 무렵, 주가도 비로소 바닥을 치고 올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