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정치적 대의나 종교적 명분도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으로 죽인 이번 테러의 ‘죄악상’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충돌’과 ‘이슬람근본주의’라는 두 허상으로는 비명에 간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랠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이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해 창출한 결과물의 총체를 말한다. 이러한 결과물은 인간이 처한 구체적인 환경에 부응해 창출되기 때문에 비록 양상은 다르지만 각 문명은 합리성을 띨 뿐만 아니라 부단히 변모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문명은 인류 공동의 창조물이고 향유물이며 소유물이다. 그래서 특정 문명의 절대적 독점이나 우열은 없으며 문명간의 만남은 필연이다.
독점이나 우열이 없는 문명간의 만남은 서로 다르다고 해서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간의 만남은 처음에는 이질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갈등이 생기지만 전파성과 수용성이란 속성에 의해 이런 갈등을 순리적으로 극복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문명간에 없는 충돌을 인위적으로 있게 하거나, 있다고 보는 데 있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인문과학의 여러 영역을 두루 아우르는 심오한 문명을 얄팍한 사회학이론(정치이론 포함)의 틀에 짜맞추어 해석하고 재단(裁斷)하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다.
요컨대 ‘이익집단’의 배타적 행태를 문명 본연의 ‘충돌’인 양 착각하고 오도하는 이른바 ‘문명충돌론’의 결정적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문명충돌론의 위험성은 인류의 공생공영을 담보하는 유일무이한 공통분모인 문명을 각축장시(角逐場視)함으로써 지구촌의 분란을 숙명화하는 데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참상이 마치 이러한 허구적인 문명충돌론의 정당성에 대한 증좌처럼 대서특필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근간에 대두된 문명충돌론의 요체는 8대 문명권(일본도 한 문명권으로 간주) 가운데서 이슬람문명권과 유교문명권이 ‘문명충돌’의 주범이 될 것이므로 여타 문명권은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서구의 안보관에서 출발해 현대 문명의 전도를 예단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몇 그루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일종의 편견이고 단견이며, 문명사에 대한 왜곡과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역사에서 일어난 그토록 많은 갈등과 충돌, 심지어 세계대전 같은 대재난도 단순한 문명의 충돌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최근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민족분쟁이나 종교갈등 그리고 이번 같은 테러 참상은 결코 문명의 소산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문명의 수혜자인 특정 이익집단이 저지른 행위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어디까지나 문명의 만남이란 큰 흐름의 물굽이에서 생기는 하나의 격렬한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잠깐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고 해서 도도한 물결이 멈춰 서는 것은 아니고, 몇 그루의 나무가 썩었다고 해서 숲이 망가지는 법은 없다. 문명간의 관계는 ‘오행설(五行說)’에서 말하는 것처럼 상생관계이지 상극관계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상생관계의 상승작용에 의해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풍부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생관계에 있는 문명간의 만남을 상극의 충돌로 변질시키는 것은 언필칭 비문명적인 작태라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충돌’임에는 분명한 이번 같은 끔찍한 테러는 공생공영하는 문명간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과 비문명 간의 충돌로 설명하는 게 논리적이고 타당할 것이다. 윤리도덕적으로 보면 공인된 규범을 지키고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문명이고, 그렇지 않고 무법무도(無法無道)하게 행동하는 것이 비문명일진대, 무고한 사람을 마구 살상하는 테러야말로 비문명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비문명적인 테러는 테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역사상 발생한 수많은 테러는 오로지 특정 이익집단의 배타적 폭거일 뿐, 문명간의 충돌로 인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율배반적인 테러를 문명의 충돌로 오인하거나 침소봉대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테러를 문명의 충돌로 비화시키면 그 문명의 소유자에 대한 보복적 테러가 자행되게 마련이다. 결국 악은 또 다른 악을 낳아 피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연일 발생하는 아랍인과 이슬람사원에 대한 보복적 테러가 이를 증명한다.
한편 문명충돌론과 같은 맥락에서 이번 참사를 이슬람문명과 서구 기독교문명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의 소산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이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중세 초반에 서구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명을 저버릴 때 이슬람은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자신의 문명을 키워갔고, 중세 후반에 이르러 서구는 자신의 전통문화가 융화된 선진 이슬람문명에서 자양분을 얻어 르네상스라는 전기를 잡게 됐다.
흔히 크게 오해하고 있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관계만 봐도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의 개조(開祖)는 모두 아브라함의 후예들이고, 세 종교는 똑같이 한 고장의 한 뿌리에서 뻗어나와 유일신을 섬기는 친연(親緣)종교들이다.
이러한 친연성을 감안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숙질간’이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사촌간’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기로서니 숙질이나 사촌이 앙숙으로 남아 있을 까닭은 없지 않은가. 사람들은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의 갈등 원인을 700~800년 전에 발생한 십자군원정에서 찾고 있는데, 원정의 발생원인이나 진행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살펴보면 이 원정은 주로 지중해 아래의 이슬람세계와 신흥 유럽세계의 패권다툼이지, 두 종교나 두 문명간의 대립이나 충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가 이러하건대 오늘의 아랍-이슬람세계와 유럽세계의 갈등의 연원을 멀리 중세까지 소급한다든지, 두 종교나 두 문명간의 ‘구원(舊怨)’에 귀착시키는 것은 견강부회적 논리다.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 참상의 동인을 놓고 떠도는 또 하나의 허상은 소위 ‘이슬람근본주의’다. 아랍-이슬람과 관련이 있다고 확증 아닌 심증을 굳혀가고 있는 이번 사건을 비롯해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외향적(外向的)인 ‘이변’들을 싸잡아 이슬람근본주의(혹은 원리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이 작금의 언론계나 학계의 중론이다. 그 진원이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용어에서부터 개념이나 내용에 이르기까지 허상을 실상인 양 사변화(思辨化)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슬람근본주의를 하나의 허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선 용어와 개념의 괴리에 있다. 소위 근본주의는 영어 단어 ‘fundamentalism’의 번역어다. 원래 근본주의는 미국의 한 개신교 교파 내에서 일어난 보수주의 종교운동이다. 18세기 전반 미국에서 성행한 ‘천년왕국운동’에 뿌리를 둔 이 운동의 가담자들은 1902년에 ‘미국성서연맹’을 결성하고 1910년부터 1912년 사이에 ‘근본적인 것, 진리의 증언’이란 제하의 소책자 12권을 시리즈 형식으로 발간해 자기들의 반모더니즘적 주장을 전파했다.
여기에 연유되어 그들의 주의주장을 ‘근본주의’라고 명명했다. 19세기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부정하는 ‘성서비판학’(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 분리론)이 대두되어 기독교의 세속화와 자유화가 심화하자 성서의 무오류(無誤謬)와 축자적(逐字的) 해석, 예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재림 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출현한 것이 바로 기독교의 근본주의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근본주의는 근본을 살리기 위한 운동(사상)이라는 점에서 용어와 개념이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1400여 년간의 이슬람역사에서 근본교리나 ‘6신(信)5주(柱)’(여섯 가지 믿음과 다섯 가지 종교 의무)를 비롯한 ‘근본적인 것’이 도전받거나 거부되어 그것을 회복하거나 지키기 위해 근본주의 같은 것이 필요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슬람에서 경전 ‘꾸르안’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이어서 비판의 여지란 있을 수 없고, 또한 이슬람 자체가 근본이요 원리이기 때문에 따로 어떤 근본주의 같은 것이 이슬람과 병존한다고 상상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근본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이슬람근본주의란 분명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런데도 왜 오늘날 이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 낱말이 버젓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가? 원래 이슬람에 없는 개념이라서 이슬람의 경전 언어인 아랍어에는 근본주의란 단어가 없다. 근간에 이슬람권 외부에서 왈가왈부하기에 ‘우수릿야’(근본적인, 근본주의)라는 조어(造語)가 생기기는 했으나 정통 이슬람학자들은 이를 무시한다.
이슬람근본주의란 낱말은 유럽인들이 처음 썼다. 영국에서 이슬람 연구의 태두라고 하는 와트는 1988년에 쓴 책 ‘이슬람근본주의와 모더니즘’에서 이슬람의 전통적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대로 실현하려는 자들을 이슬람근본주의자로, 전통적 세계관을 몇 가지 측면에서 수정하려고 하는 자들을 자유주의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펴낸 ‘세계종교 부흥 관련 연구논문’에는 “다른 적절한 대체어가 없지만 이슬람과 기독교 근본주의 사이에는 ‘전투성’이란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이슬람근본주의란 말을 채택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이른바 이슬람근본주의는 전통 고수의 보수주의이며, 그 용어는 전투성 때문에 차용했다는 것이다.
보수를 근본주의로 보는 것은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대로라면 이슬람근본주의에는 의당 보수적인 사상이 가미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근본주의 주창자들은 보수주의 뿐만 아니라, ‘개혁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는 행동주의’, 즉 혁신주의마저 이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오류와 혼탁은 연구의 가설이나 분석의 방편에 불과한 ‘차용어(借用語)’가 ‘본래의 것’으로 착각되어 용어와 개념이 불일치 내지 괴리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슬람근본주의를 허상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이슬람 정치사상사에는 그러한 실체가 없다는 데 있다. 용어와 개념이 괴리되다 보니 명색이 각이할 뿐만 아니라, 개념이나 정의도 각인각색이다. 혹자는 ‘부녀자에게 차도르를 되씌우는 등 이슬람의 원리로 회귀하는 복귀운동이 바로 (이슬람)원리주의’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이 주의를 ‘반동적인 복구사상’이라거나 ‘이슬람의 르네상스’라고 정반대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이슬람의 정치사상사에는 통칭 근본주의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사상조류사 측면에서 보면 역대 이슬람사회에도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항시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와 같은 보수와 혁신이라는 대립관계만이 존재해왔다. 지난 1~2세기 동안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종교신앙과 사회정치 및 생활규범의 복합체로서의 이슬람에도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여 여러 가지 사상조류와 그에 따른 사회정치운동이 발생했는데, 그 흐름은 크게 보수주의와 혁신주의의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외에 별도의 근본주의라는 사상조류는 없었다. 오늘날 이슬람근본주의 논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일부 극단행동 포함)은 이러한 보수와 혁신의 두 가지 사상조류에 두루 뒤섞여 있다.
끝으로, 이른바 이슬람근본주의를 한낱유령에 불과한 허상으로 보는 이유는 단지 ‘전투성’이란 유사성 때문에 전혀 차원이 다른 타종교의 근본주의에 어거지로 접목시켰다는 데 있다. 원래 미국에서의 근본주의는 출발할 때부터 많은 분파의 출몰이 이어지고 그 발전과정에서, 특히 후기에 오면 비타협적인 전투성을 띠게 된다. 이로 인해 비난 받게 되자 스스로 ‘복음주의’, ‘보수적 복음주의’로 개명하기에 이른다. 각기 다른 내재적 논리구조를 가진 주의나 학설들을 비본질적인 표출양식이나 행동방식 면에서 한두 가지 요소가 비슷하다고 해서 서로 결부시키는 것은 무리다.
원래 종교와 폭력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종교가 종교이기를 포기하기 전에는 사랑과 평화를 이념으로 추구하는 법이다. 종교로서의 이슬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대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 스콜라철학의 대부격인 신학자 아퀴나스가 “한 손에는 꾸르안, 다른 손에는 검”이라고 말한 것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 양 오인되어 왔다. 그 결과 이슬람은 폭력 종교로 비치고 있으며, 급기야는 이러한 호전성이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과 분쟁, 폭력의 화근이 된다는 식의 연역논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사상은 극단을 배격하는 중용사상(中庸思想, 와싸튀야)이다. 경전에도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오늘 이슬람세계에서 대표적인 근본주의 집단으로 낙인찍힌 무슬림형제단운동의 사상이론가인 까르다위마저 현대 이슬람부흥운동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조류는 ‘이슬람적 중용조류’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 내용으로 원초(전통)주의와 혁신주의의 배합, 불변요소와 가변요소의 균형, 경직성과 외세 추종으로부터의 해방, 이슬람에 대한 포괄적(신앙, 사회, 정치, 입법 등 측면) 이해의 네 가지를 꼽고 있다.
평화와 중용에 바탕을 둔 이슬람과 무모한 폭력이나 극단적 행동은 원래부터 서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중동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세계는 동·서의 틈바구니에 끼어 역사상 빛나는 기여도 했지만, 근·현세에 와서 너무 많이 찢기고 당하면서 약자로 살아왔다.
인간이 항시 ‘화약고(火藥庫, 중동에 대한 비유)’ 속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자. 비운에 떨기도 하지만 악에 받치기도 한다. 그래서 소수의 급진파나 극단파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전체일 수는 없고, 더욱이 그들의 행동이 합리화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근본주의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하나의 허상이다. 허상으로 무엇을 설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공허한 염불에 불과하다. 당면과제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고 나서 비이슬람적인 것, 비문명적인 것을 가려내는 일이다.
어떤 정치적 대의나 종교적 명분도 무고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살상한 이번 테러의 죄악상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충돌’과 ‘이슬람근본주의’라는 두 허상으로는 비명에 간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랠 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