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한나라당 극비 제안 “정몽준을 해외로 내보내라”

대선 최대 드라마 ‘單風’ 막전막후

  • 글: 김기영 hades@donga.com

    입력2002-12-31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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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 같은 협상이었고 거짓말같은 결별이었다. 이질적 두 후보의 공조였던 만큼 단일화 과정은 치열하고 복잡했다. 정대표의 집요한 요구와 민주당의 처절한 방어,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 한나라당의 분열작업, 극적인 합의... 그리고 정대표의 지지철회까지, 숨막히는 뒷얘기를 추적해 보았다.
    한나라당 극비 제안 “정몽준을 해외로 내보내라”
    노무현(盧武鉉)-정몽준(鄭夢準) 두 후보의 후보단일화에서 선거 전날의 전격 파경에 이르는 상황만큼 극적인 정치드라마가 다시 있을까. 11월15일 노-정 두 후보가 단일화에 합의했을 때 정치권은 크게 놀랐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단일화 합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실시된 단일화 방안도 기발했다. 전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두고 정가에서는 ‘해외토픽감’이라는 비아냥에서 역사적인 ‘첫 단일화’라는 칭송까지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12월12일, 정대표는 공식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된 지 2주일 만에 노후보와 손을 맞잡고 청중 앞에 나섰다. 단일화 승복 이후 주저하던 선거공조를 마침내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지루한 협상 끝에 이뤄진 선거공조는 오래가지 않았다. 투표일을 불과 1시간 앞둔 12월18일 밤 11시, 긴급뉴스로 타전된 정대표의 노후보 지지철회 선언은 선거판을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지지 철회는 정대표의 독단”

    정대표의 노후보 지지철회를 두고 해석이 몇 가지로 엇갈린다. 정대표 측근들은 두 당의 합의에도 불구, 노후보가 정책공조의 틀을 깨는 발언을 끊임없이 해왔다고 주장했다. 노후보에 대한 신뢰상실이 지지철회의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통합21 내에서도 정대표의 결정을 ‘독단적 결정’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이철 전의원은 “노후보 지지철회는 통합21의 당무회의에서 추인받지 못한 정후보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전의원은 “따라서 정대표의 의견은 우리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며 “개인의 의견을 당론인 것처럼 발표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 하나. 정대표가 노후보 지지를 철회한 결정적 이유는 12월18일 저녁 종로 유세 때 노후보의 발언이다. 노후보가 정대표를 정동영(鄭東泳) 추미애(秋美愛) 의원 등 민주당의 차기주자들과 같은 경쟁자 그룹으로 분류하는 발언에 감정이 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듣기 불쾌한 발언이라 해도 단일화 합의 자체를 백지화한 정대표의 극단적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 반응이다.

    하지만 후보단일화 전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면 선거 전날 정대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대표는 단일화 논의가 결정된 이후 한순간도 자신의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대표를 가까이에서 봤던 국민통합21 인사들 사이에는, 정대표는 단일후보가 정해진 뒤에도 기회만 있으면 결과를 뒤집으려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시계바늘을 한달 전으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지난 11월17일, 민주당 이해찬, 통합21일 이철 협상대표가 1차 단일화 방안 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사진 기자들 앞에서 환하게 미소짓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1부 : 36시간의 협상

    11월16일 시작한 협상은 다음날 새벽 4시쯤 타결됐다. 양측 협상대표가 합의사항을 두 당의 후보에게 보고한 시간은 아침 6시 반쯤. 이철 전의원의 보고를 받은 정대표는 “잘했다. 그대로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민주당 이해찬 의원도 노후보에게 보고를 했고 역시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추인을 받았다.

    협상대표들은 한숨도 못 잔 채 발표문을 준비했고 오전 11시 기자들에게 단일화 방식에 합의했다고 공개했다. 단일화를 위한 TV토론을 실시한 뒤, 4개 여론조사기관을 통해 국민여론을 물어 다수 조사에서 이긴 후보가 단일후보로 선출되는 방식이었다.

    밤샘 협상에 지친 이철 전의원은 집으로 돌아왔고 이내 골아떨어졌다. 그런데 그날 밤, 김민석 전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큰일났다. 지금 집으로 가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밤 11시 반쯤 김 전의원과 김행 대변인이 이 전의원 집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날 종일 정대표의 전화호출에 시달린 뒤였다.

    이철 전의원을 만난 두 사람은 정대표가 협상결과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며 불만을 나타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김 전의원은 “내일 새벽에라도 정대표를 만나 이대로 가면 여론조사에서 이길 수 있다고 설득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이 전의원은 시내 호텔 사우나로 정대표를 찾아갔다. 합의안대로 여론조사를 해도 정대표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이 전의원의 얘기에 정대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협상을) 깨세요. 그걸로는 안 됩니다.”

    정대표가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이유는 지난밤에 보고받은 4개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협상 직전까지 정대표는 노후보에 앞서 줄곧 2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1차 협상안이 타결된 직후 공개된 4개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노후보에게도 뒤져 3위로 처진 것으로 나타나자 정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 상태로 TV토론을 하고 여론조사를 실시할 경우 패배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 전의원은 협상 파트너였던 이해찬 의원을 찾아 “여론조사 방식 유출책임과 역선택 방지장치문제로 협상이 깨질지도 모른다”며 민주당측의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이에 이의원은 “그렇다면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지요”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분 뒤, 민주당 기자실에서는 예상 밖의 얘기가 흘러나온다. 민주당 관계자의 입을 통해 “협상안에 대해 양측에 별다른 오해가 없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한쪽에서는 사태가 심각하다며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온 데는 민주당과 국민통합21 사이의 또 다른 대화채널이 개입해 혼선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인공은 민주당 김한길 미디어본부장과 통합21 신낙균 최고위원이었다. 신최고위원과 전화통화를 한 김본부장이 “통합21의 문제제기가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다”고 보고함에 따라 민주당은 사태를 느긋하게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통합21의 공세는 거셌다. 여론조사 방식이 유출된 만큼, 한나라당 지지자의 역선택을 막을 안전장치를 만들자고 요구했다. 아울러 유출 책임이 있는 민주당의 사과를 촉구했다. 후보등록일이 임박했는데 단일화 절차에는 제동이 걸렸고 대화채널은 잠깐이지만 끊어지고 말았다.

    이때 양측의 연락창구로 나선 이가 민주당의 신계륜 후보비서실장과 통합21의 민창기 전 홍보위원장이었다. 이제 단일화는 노후보의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 따라서 노후보 비서실장인 신의원이 불가피하게 민주당 쪽에서 총대를 멘 것이다.

    민창기 전위원장은 11월15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단일화 합의 발표 이후, 역사적 사진으로 남을 노-정 두 후보의 소주 ‘러브샷’을 제안했던 인물. 그는 어떻게든 단일화의 명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연락창구를 자임했고 이후 국민통합21의 2차 협상단장을 맡게 된다.

    점심식사를 겸한 첫 대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소주를 맥주 글라스에 따라 각각 4잔씩 나눠 마셨다. 신의원은 고려대 법대 74학번, 민 전위원장은 고려대 정외과 56학번이다. 18년 차이를 뛰어넘어 고려대 동문이라는 이유 하나로 두 사람은 ‘고려대식’ 의기투합을 했던 것이다. 민 전위원장은 신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易地思之 합시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

    “역지사지(易地思之)하자. 이제부터 나는 민주당의 협상대표라고 생각하겠다. 반대로 신의원은 국민통합21의 협상대표라고 생각해라. 서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면 못 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얘기에 신의원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감동했다. 두 협상단장이 이렇게 의기투합함으로써 그날 이후, 날짜로는 3박4일, 36시간이 걸린 마라톤협상은 숱한 결렬의 위기를 넘겨가면서 최종 종착점에 무사히 이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알 게 된 것은 1970년대. 신의원이 대한축구협회에 잠시 근무했는데, 장덕진 당시 회장과 가깝던 민 전위원장이 협회에 가끔 들르면서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신의원” “민선배”로 불렀다.

    협상을 앞두고 두 사람은 2차례 개별접촉을 가졌지만 회담 시간의 3분의2는 회의주제와 무관한 얘기를 나눴다. 대학시절, 두 사람의 사회생활 경험 등등.

    2차 협상은 11월20일 밤부터 시작됐다. 민주당측에서는 신의원과 김한길 미디어본부장, 그리고 여론조사 전문가인 홍석기 전 기획실장이 협상대표로 나섰다. 국민통합21에서는 민창기 전위원장을 단장으로 김민석 전의원과 김행 대변인이 나섰다.

    국민통합21 협상단에 김 전의원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민주당은 긴장했다. 김 전의원은 불과 두 달 전 민주당에서 국민통합21로 넘어간 인물. 그가 협상대표로 나오는 게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김 전의원은 누구보다 민주당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 아니던가.

    협상 장소는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 10층 스위트룸. 첫날 밤을 꼬박 새 설문의 핵심 문항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역선택 방지안은 ‘최근 2주일 동안 조사한 이회창 후보 지지도 결과의 최저치 오차범위 하한선’으로 정했다.

    설문 항목의 쟁점이 해결되면서 협상은 마무리단계에 접어드는 듯했다. 합의문 타이핑 작업이 이뤄졌고 양측 협상대표의 서명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21일 아침 두 진영은 각각 노후보와 정대표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노후보는 “수고했다”는 짧은 대답으로 협상안을 추인했다. 하지만 정대표에게 전화를 건 김민석 전의원은 오랫동안 수화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협상안에 대한 정대표의 불만이 수화기 저편에서 쏟아졌다. 설문 문항에 ‘경쟁력’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며 역선택을 방지할 안전장치도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정대표는 역선택 방지를 위해 이후보의 지지도를 최근 조사 가운데 최저치에서 평균치로 바꿀 것과 여론조사 실시 시간을 TV토론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1시부터 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합의문 작성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위해 면도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협상단은 정대표의 문제제기에 다시 짐을 풀어야 했다. 오전 10시로 예정됐던 기자회견은 11시 반으로, 다시 오후 3시로 연기됐다.

    한나라당 극비 제안 “정몽준을 해외로 내보내라”

    1차 합의문은 실행되지는 못했으나 이후 협상안의 기초가 됐다.11월17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한 합의문에 서명하는 이철(왼쪽), 이해찬 두 협상대표

    그 사이 뭔가 일이 꼬이고 있다는 낌새를 챈 기자들이 협상장소로 몰려들면서 협상단은 극비리에 제3의 장소로 옮겨갔다. 협상단은 호텔을 나서 각각 여섯 방향으로 흩어졌다. 누가 봐도 협상을 마치고 제각각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어서 기자들도 추격을 단념했다.

    하지만 잠시 뒤 이들은 ‘집결지’인 평창동의 포포인츠 쉐라톤서울 호텔(구 라마다 올림피아 호텔)로 모였다. 9층에 객실 둘을 잡고 협상을 이어갔다. 둘쨋날 협상의 핵심 의제는 설문 문항에 경쟁력이라는 표현을 넣을 것이냐와 역선택 방지대책을 어떻게 보완할 것이냐였다. 오후부터 시작된 협상은 밤 11시를 넘어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설문 항목의 표현, 즉 민주당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대항할’ 단일후보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십니까?”와 국민통합21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대결에서 ‘경쟁하여 승리할’ 단일후보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두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했다.

    민주당측은 ‘경쟁력’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지금까지 여론조사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노후보가 불리하다고 판단했고, 국민통합21은 반대로 ‘경쟁력’이 들어가야 유리하다고 믿고 있었다. 양측의 여론조사 전문가인 홍석기 김행 두 협상대표를 중심으로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이 문제가 합의되지 않으면 협상타결은 어려울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김한길 본부장이 불쑥 나섰다. 김본부장은 홍 전실장에게 “그거 받아” 하고 말했다. 다들 놀라 눈이 동그래졌는데 김본부장은 거듭 “‘경쟁’으로 받아버려”라고 말했다.

    김본부장의 판단은 이랬다. 전화로 여론조사를 하게 되면 응답자는 질문의 앞부분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질문 첫머리에 ‘대항할’로 물었건 ‘경쟁하여 승리할’로 물었건간에 맨 마지막 질문, 즉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만을 기억하고 답한다는 것이다. 김본부장은 양측 모두 결국 응답자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할 지엽적 문제로 다투고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 여론조사에는 ‘경쟁하여 승리할’로 설문 항목이 정해졌음에도 노무현 후보가 이김으로써 민주당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이날 오후 그랜드힐튼서울 호텔을 나선 직후 신의원은 노후보를 만나 국민통합21측이 ‘경쟁력’을 고집한다는 뜻을 전했고 노후보로부터 “정 고집을 하면 설문 문항에 ‘경쟁력’을 넣어도 좋다”는 내락을 받아둔 상태였다.

    설문 문항에 합의하면서 협상은 급진전됐다. 하지만 역선택 방지문제로 넘어가면서 다시 지지부진해졌다. 국민통합21측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최근 2주간 조사 평균보다 낮게 나오면 조사결과를 통째로 무효화하자”고 주장했다. 민주당측은 “단일화 합의 이후 이후보의 지지도가 빠지는 상황이어서 2주간 평균 이하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그럴 경우 단일화 여론조사 자체가 무효화될 공산이 크다”며 “정대표가 정말 후보단일화를 이룰 의지가 있는거냐”고 몰아붙였다.

    신계륜, 김한길의 눈물

    협상이 길어지면서 정대철(鄭大哲) 선대위원장, 김원기(金元基) 이해찬 의원 등 민주당 핵심 의원들이 응원차 호텔로 찾아왔다. 한편 그날 저녁 민주당 선대본부장 회의에서는 “역선택 조항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초강경 분위기였고 이 분위기는 고스란히 협상팀에게 전해졌다.

    민주당 협상단이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으로부터 선대위의 강경 분위기를 전해듣고 있을 무렵, 국민통합21 협상단도 긴급 구수회의에 들어갔다. 민창기 단장은 김민석 김행 두 협상대표에게 “분위기로 보아 저쪽이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이 높다. 협상이 재개되면 나는 가만히 있을테니 두 사람은 강하게 밀어붙여라”고 주문했다.

    선대위의 격앙된 분위기를 전해듣고 들어온 신의원이 “오늘은 더 이상 협상이 안 되겠다”고 하자, 김민석 전의원이 거세게 반발하며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는데, 이는 ‘사전 각본’에 따른 행동이었던 것이다.

    일부 언론에는 김 전의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노무현은 내가 죽여버리겠어”라고 소리쳤다고 보도됐으나 당사자인 김 전의원은 이를 부인했다. 다음은 얼마 전 한 언론에 공개된 김 전의원의 해명.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닌가. 2차 협상 저녁 때 잠정 타결이 됐다. 사인만 남겨둔 상황에서 갑자기 민주당 쪽에서 문제가 있다며 사인을 못하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자체 대선본부장회의에서 비토를 했던 모양이다. 후보에게만 보고하기로 했는데, 민주당이 원칙을 깬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서운하다. 우리는 당내에서 비판을 받으면서도 보안을 지켰다. 합의된 것을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들어서 어렵다고 하니까, 단일화를 하지 말자는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다. 내가 화를 냈던 건 사실이다. 갑자기 깨자는 것으로 느꼈으니까, 일부러 화를 더 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러 잠시 방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 떠났다고 하는데, 그 전날은 국민통합21에서 방값을 냈고, 그날은 민주당에서 냈다. 민주당이 방 주인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일어나서 ‘내일 만나자’고 하는데 일어나야지 어떻게 하겠는가. 실무자들이 내가 노후보에게 극언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 실무자들은 협상장에서 멀리 떨어진 라운지에 있었다. 그들이 무슨 내용을 알겠나.”

    민주당 협상단은 “역선택 방지조항만 받아들이면 나머지 부분에서 조정의 가능성이 있다”며 여기서 협상을 깨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이어가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본부장들은 강경했다. 그렇게 불리한 조건을 수용하느니 협상을 깨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배후의 아군과 협상장의 적군 사이에서 ‘안팎 곱사등이’가 된 민주당 협상단이 겪은 심적 갈등은 대단했다. 신계륜 의원과 김한길 본부장은 화장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한나라당 극비 제안 “정몽준을 해외로 내보내라”

    11월24일 밤 후보단일화 협상단이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실제 선거공조가 이뤄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1월22일 아침 9시 협상의 핫라인 신계륜-민창기 협상단장이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커피숍에서 마주앉았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야 하며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면 이번 대선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비슷한 시각, 노무현 후보는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TV토론을 전제로 정후보가 요구한 모든 사항을 받아들이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그는 모든 불리한 조건을 극복할 무기로 TV토론을 믿었던 것이다.

    같은 시각, 민주당 대회의실에 모여있던 본부장급 핵심 당직자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노후보가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한 마당에 남은 것은 패배밖에 없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성공회 신부인 이재정(李在禎) 유세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시다.” 종교를 불문하고 참석자들은 손을 모았고 일부 흐느끼는 참석자도 있었다.

    이날 점심 노후보는 오랫동안 그와 호흡을 같이했던 안희정·이광재 두 비서와 점심을 함께했다. 노후보는 동생처럼 생각하는 두 사람에게 “나 아니었으면 돈도 많이 벌고, 골프도 하고 그랬을텐데, 나 때문에 고생만 했다”며 그동안의 수고를 격려했다. 노후보도 이 무렵 단일화과정에서 질 수도 있다는 점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세 번째 협상장은 여의도 맨해튼 호텔이었다. 낮에 사실상 노후보의 수용선언이 있었던 터라 협상은 순조로웠다. 설문 문항 문구 수정도 마쳤고 국민통합21의 안대로 역선택 방지 장치도 마련했다. 당초 3개 여론조사 기관에 조사를 의뢰하기로 했으나 시간이 없어 1개사로 축소하기로 했다. 대신 조사 샘플수를 5000개로 해 정확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갤럽을 조사기관으로 선정했고 갤럽측의 동의도 얻었다.

    다음날인 11월23일 토요일 민주당 측은 조사 비용을 준비하고 계약서를 쓰기 위해 갤럽측에 연락을 했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갤럽이 위험부담을 들어 조사를 거부한 것이다. 신계륜 의원을 비롯한 협상단이 총동원돼 박무익 조사연구소장 등 갤럽측 인사들과 접촉했지만 허사였다.

    그날 밤 10시 양측 협상단이 다시 만났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조사기관을 새로 선정해서라도 여론조사를 강행하기로 하고 매출액 15위 이내 조사기관을 대상으로 희망 업체를 물색했다. 2개 회사를 선정해 각각 2000~2500샘플씩을 맡기기로 조사방법도 일부 변경했다. 민주당의 신계륜 홍석기 협상대표와 국민통합21의 김민석 김행 협상대표가 각각 전화기를 들고 조사기관 사장과 정치여론조사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매출액 상위 회사부터 연락을 취했으나 끝내 담당자와 연락이 안 되거나, 연락이 돼도 거절의 대답만 들어야 했다.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가며 전화통화를 한 끝에 새벽 4시가 돼서야 비로소 매출액 9위와 10위, 두 회사가 조사에 참여하겠다고 답했다. 리서치앤리서치(R&R)와 월드리서치가 그 주인공이었다. 두 회사 대표에게 새벽 6시까지 호텔로 나와줄 것을 요청했고 두 회사 사장들은 약속시간에 호텔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통합21측이 R&R의 노규형 사장이 이회창 후보와 같은 경기고 출신이어서 조사의 공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제동을 걸고 나온 것이다. 협상단은 구수회의 끝에 국민통합21 김민석 전의원이 노사장을 따로 면담해 검증을 거친 뒤 판단하기로 합의했다. 김 전의원과 노사장과의 면담은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노사장은 김 전의원에게 “역선택을 걱정하지만, 실제 조사에서 역선택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조언했다.

    노사장과의 면담이 끝난 뒤 국민통합21은 기존에 합의했던 역선택 방지조항을 사실상 없애기로 결정했다. 전날 실시된 6개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2주간 이후보의 평균 지지율 35% 이하를 얻은 조사를 무효로 처리할 경우 단일화를 위한 두 여론조사 모두가 무효처리돼 단일화 자체가 깨질 수 있다는 데 두 정당 대표들이 처음으로 생각을 같이한 것이다.

    전쟁 같은 협상을 거치면서 협상단도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다. 최종 타결 직후 김한길 본부장은 탈진한 나머지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민창기 단장은 협상기간 내내 독감으로 고생을 했다. 호텔에서 밤샘협상을 할 때 민단장은 양복 위에 호텔 객실가운을 껴입고 이불속에 누워 협상을 해야 했다. 땀을 흘려 조금 나아지면 협상테이블에 앉고 몸이 나빠지면 다시 이불 속에서 협상을 하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11월24일 밤, 두 후보 진영은 R&R과 월드리서치의 조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결과는 ‘1승1무’로 노무현 후보의 승리.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하는 서울 라마다르네상스 호텔에서 신계륜, 민창기 두 협상단장은 기자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노무현 후보를 단일후보로 공표하기 위해 라마다르네상스호텔 발표장에 들어서는 순간, 신의원은 민단장의 손을 꼭 잡았다. 훗날 민단장은 “신의원이 어떻게나 힘을 주던지 손이 아플 정도였다”고 말했다. 승자인 신의원은 패자인 민위원장에게 이렇게 고마움과 위로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제2부 : 선거공조에서 지지철회까지

    11월24일 밤 11시 반쯤, 정몽준 대표는 국민통합21 대표실에서 민창기 단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결과는 패배였다. 워낙 역사적인 순간이라 정대표의 옆자리에는 부인 김영명 여사와 아들 기선씨도 있었다. 축배를 들기 위해 가족들까지 자리를 같이했건만 패배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정대표를 대신해 민주당과의 단일화 협상에 나선 사람들마다 정대표의 승리를 장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정대표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관철되지 않았던가.

    정대표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전화기 저편에서 민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자실로 가셔서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기회가 옵니다.”

    정대표는 전화를 끊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철 박범진 신낙균 전의원 등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승복할 것을 권했다. 11월25일 0시10분, 국민통합21 기자실에 나타난 정대표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를 축하한다. 노후보가 당선되도록 열심히 돕겠다. 내일(11월25일) 노후보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이날 정대표의 승복선언을 두고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1987년의 단일화 실패 이후 처음으로 성사된 유력 대선주자 간 후보단일화라는 점을 긍정적으로 부각하는 언론도 있었고, 한 차례 TV토론에 이어 역시 한 차례 여론조사로 승패를 결정지은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비난여론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단일화 성사 이후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급등한 것으로 미뤄 단일화를 보는 국민의 반응은 일단 긍정적이었다.

    11월25일 새벽의 승복선언에도 불구하고, 정대표의 머리에서는 오랫동안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정대표 주변에는 단일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애쓴 참모도 있었지만, 반대의견을 가진 참모들도 적지 않았다. 단일화에 반대한 참모들은 오래전부터 정대표의 비서진으로 일한 그룹인데, 단일화 협상이 진행중일 때도 끊임없이 정대표에게 단일화에 반대하는 의견과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의 내용은 주로 ‘후보단일화 불가론’ ‘여론조사의 비과학성’ ‘역선택 가능성’ ‘설문내용의 불공정성’ 등에 관한 것이었다. 협상기간 동안 정대표가 끊임없이 국민통합21 협상단에게 까다로운 조건을 주문하고 관철을 요구한 데는 이들 측근 그룹의 조언과 보고서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2차 협상 타결 이후에도 정대표의 마음은 흔들렸다. 11월25일 노후보를 만난 뒤 그는 설악산으로 떠났다. 정대표는 중대결심을 할 때면 산을 찾는다. 지난 8월 출마결심을 굳힐 때도 그는 지리산을 찾았었다. 이번 설악산 등정은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온 정대표는 웬일인지 노후보와 손을 맞잡고 유세현장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국민통합21의 창당과정에 참여해 온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정대표는 대선 출마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반응이 좋으니까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당을 만들 때도 정대표는 최소한의 요건만 갖춘 정당을 구상했다. 그 스스로 ‘페이퍼 파티(Paper Party)’라 불렀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기업을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라 부르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이 정도로도 당선이 가능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율이 떨어지자 불가피하게 당 내외에서 단일화 압력을 받게 됐고 마침내 후보단일화 협상에 운명을 걸게 된 것이다.”

    이 인사는 “처음 협상을 시작할 때만해도 우리(정대표)가 이길 확률은 8대2, 적어도 7대3이었다. 모든 게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구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11월24일 밤, 주변의 권유로 승복 기자회견을 했지만 그날 이후 정대표의 일부 측근들을 중심으로 단일화를 무산시키고 대선출마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정대표가 단일화에 불복하려 했던 흔적을 크게 세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첫째 정대표는 단일후보에서 탈락한 뒤 당내에 ‘여론조사 협상 조사위원회(위원장 신낙균)’를 구성했다. 1, 2차 협상에 참여했던 협상대표단을 상대로 협상과정의 문제점을 점검한다는 게 이 위원회의 구성 목표. 하지만 1차 협상단장이던 이철 전의원은 이에 강하게 반발해, 조사는 1, 2차 협상팀 6명에 한해 실시됐다. 조사위원회의 실무는 정대표를 오랫동안 ‘모셔온’ 이달희(李達熙) 비서실장이 맡았다.

    국민통합21 내부에서는 이미 단일후보가 정해진 마당에 뒤늦게 이런 조직을 만들어 협상대표들의 책임을 묻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조사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운영해 온 인물이 이달희 비서실장인 점도 못마땅해했다. 당의 공조직이 아닌 정대표 측근을 중심으로 일이 이뤄지는 것을 불쾌해한 당직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위원회를 통해 정대표가 노린 것이 무엇이었나는 위원회 활동이 마무리된 직후 열린 고위당직자회의에서 드러난다. 정대표는 신낙균 최고위원에게 “여론조사 협상 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다 됐느냐”고 물었다. 신 최고위원이 “준비됐다”고 답하자 정대표는 “유용한 활동이었느냐”라고 되물었다. 이에 신최고위원은 “정당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며 안한 것이 이상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날 정대표의 “유용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회의 참석자들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앞서의 인사는 “무엇이 유용했다는 것인지 의문”이라며 “뒤늦게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협상단을 조사하는 등 법석을 떤 것에서 단일화 실패에 대한 정대표의 불편한 심기와 미련을 읽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둘째, 단일화 결정이 난 뒤 서울 여의도 국민통합21 당사는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정대표의 출마 포기에 반발해, 정대표 지지자들이 몰려와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에 반발하는 시위를 하는가 하면 협상단의 멱살을 잡고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 상황이 벌어진 것. 협상단 내부에서는 이들 열성지지자들의 당사 난입 배후에 정대표 측근들이 있다고 믿고 있다.

    셋째, 단일화 결정이 난 뒤에도 정대표 측근들은 후보등록 서류를 준비하는 등 등록 마감일까지 정대표의 출마에 미련을 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관행을 깬 협상방식

    이런 정황을 들어 국민통합21 내부에서는 11월24일 밤 정대표가 주변의 권유에 떠밀려 승복 성명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기회만 있으면 단일화 결정을 깨고 싶어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결국 출마가 좌절된 이후에도 정대표는 약속했던 공동유세를 미룬 채 노후보를 상대로 지루한 협상에 들어갔다. 정대표의 협상방식은 기존 정치권의 관행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보통 정치권의 협상은 서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공개한 뒤 논쟁을 벌여 쟁점을 하나씩 줄여서 포괄 타결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정대표는 하나의 안건을 내걸어 협상을 한 뒤,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쟁점을 내놓고 협상을 벌이는 나열식 토론을 즐겼다.

    예를 들어 북한 핵문제가 불거지면 여기에 대한 노후보측의 입장변화를 요구하고, 이것이 관철되면 재벌정책, 상속세, 대외개방정책 등 개별 정책분야에서의 공조를 명분으로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정책 조율을 벌여나갔다. 이것마저 타결되면 다시 공동정부 구성을 요구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쟁점을 내놓고 타결을 요구하며, 이것이 안 되면 유세공조가 불가능하다고 버텼다.

    후보등록 후 2주가 지나도록 양당간에 정책공조 협상이 지루하게 이어지자 한나라당이 이 틈을 비집고 들었다. 한나라당은 정대표를 향해 “제발 이대로 중립만 지켜달라”는 메시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했다.

    한나라당 조아무개 의원은 국민통합21로 정대표에게 중립을 요구하는 내용의 팩스 서신을 보내왔다. 이 편지는 정대표의 측근을 통해 정대표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서신에는 ‘선거공조를 해서는 안 되며, 만약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어려워진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고위인사가 직접 국민통합21측 인사를 만나 정대표의 중립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국민통합21의 핵심 인사인 A씨는 지난 12월초 서울 63빌딩에서 한나라당 서청원(徐淸源) 대표와 만났다. A씨는 한때 한나라당과도 인연이 있었던 인물인데 서대표의 요청으로 이뤄진 이날 만남에서 서대표는 A씨에게 “이회창 후보의 뜻”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음은 A씨의 증언.

    “서대표는 내가 한나라당에 있을 때 잘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어 노-정 공조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서대표는, 정대표가 선거기간 중 해외에 나가 있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만약 이 일이 성사돼 이후보가 당선되면 내게 자리를 보장해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는 마지막 조건은 적절치 못하다고 말했다. 대신 앞에 들은 내용은 정대표에게 전달하겠다고 대답하고 일어났다.”

    하지만 A씨는 한나라당측의 앞부분 제안도 정대표에게 전하지 않았다. A씨는 “그런 얘기를 전달하는 것 자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서대표의 제안을 정대표에게 전한다면 훗날 역사에 더러운 흔적을 남기는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통합21 주변에서는 A씨 외에도 최소한 10군데 이상의 경로로 한나라당의 메시지가 정대표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당의 ‘정몽준 발목잡기’가 실제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까. 국민통합21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지난 12월9일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통치구조 개편을 위해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임기를 줄여서라도 개헌을 하겠다며 국민통합21이 주장해 온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에 동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정대표는 아침 회의에서 “이후보가 늦게나마 개헌론을 제기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환영의 발언으로 참석자들은 이해했다.

    그런데 국민통합21의 공식 언론창구인 김행 대변인은 논평을 내면서 “우리당이 민주당과 분권형 대통령제를 논의할 때 ‘나눠먹기’라고 비난했다가 뒤늦게 개헌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은 정략적 비난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라며 거꾸로 한나라당을 비난했다. 김대변인의 ‘뒤집힌’ 논평 덕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무렵 정대표는 한나라당으로부터 집요하게 ‘중립’요청을 받고 있었고, “개헌론 긍정 평가” 발언은 갈등의 산물이라는 게 국민통합21 주변의 반응이다.

    아무튼 정대표는 11월25일 노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후 3주가 다 가도록 선거공조에 나서지 않았다. 정책분야에서 하나하나 민주당의 양보를 얻어내더니 마침내 12월10일을 전후해서 공동정부 구성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정대표가 제안한 공동정부 구성안의 핵심은 외치와 내치를 나누되 외교 등 외치 분야를 사실상 정대표가 맡는 방안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두 당은 공동정부 구성 논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장관 배분과 같은 권력 나눠 갖기는 없다”는 것이었다.

    정대표 측의 공동정부 구성안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노후보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 채널이 민주당 김원기 의원과 국민통합21 최운지 전의원 사이의 핫라인. 이 라인을 통해 정대표는 새정부에서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분명히 했다고 한다.

    국민통합21의 한 고위관계자는 “정대표가 노후보에게 요구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총리에 대한 제청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국정원장, 국방부장관, 외교통상부장관, 통일원장관, 법무부장관 등 5개 부처 장관을 포함, 각료 제청권의 50%를 달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12월11일 정대표는 노후보에게 앞서의 내용이 담긴 합의서에 서명해야 공조유세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 김원기 의원이 국민통합21측의 요구사항을 노후보에게 보고했다.

    합의서를 받아든 노후보는 불같이 화를 냈다. 후보 집무실 밖에서도 노후보의 성난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내가 대통령을 안하면 안했지 이런 합의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습니다.”

    잠시 뒤 얼굴이 붉어진 김원기 의원이 후보실을 빠져나왔다.

    같은 날 아침 국민통합21 고위간부회의 자리에서도 파란이 인다. 평소처럼 정대표의 일방적 훈시가 끝난 뒤 회의를 끝내려는 순간, 민창기 단장이 품 속에서 탈당계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민단장은 “이제나 저네나 하고 선거공조가 이뤄질 것을 기다렸는데 오늘도 소식이 없어 탈당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순간 회의실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채 정대표의 표정만 살폈다. 잠시 후 정대표가 “섣부른 결정 아니냐”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조남풍 선대위원장 등도 민단장의 결정을 만류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민단장은 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을 갖고 탈당 의사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날 오후, 국민통합21의 중진들이 긴급 회동을 가졌다. 더 이상 탈당사태가 이어지기 전에 선거공조를 단행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정대표에게 전할 건의문을 만들었다.

    이 무렵, 당 안팎에서는 추가 탈당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철, 최욱철 전의원 등이 탈당할 것이라는 첩보가 나돌았고, 김행 김민석 등 2차 협상단 멤버들이 민단장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 다음날인 12일 아침, 국민통합21 당사는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최근의 대선후보 지지도 여론조사 결과를 수소문하는 당직자들로 술렁거렸다. 전날까지 노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후보보다 평균 10% 앞선 채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건의문에 추가탈당 움직임, 여기에 노후보의 우위가 분명한 여론조사까지…. 정대표에게는 ‘불리한’ 뉴스투성이였다. 결국 정대표는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공조를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날 오전 정대표와 국민통합21 당직자들은 민주당을 방문했다. 노후보와 정대표는 양당의 정책공조와 국정 운영에 대한 공동책임을 명시한 합의문에 서명을 하고 이를 공개했다. 마침내 명실상부한 후보단일화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단일화 최후의 미스터리

    마지막 미스터리 하나. 정대표측은 “이날 오전 노후보로부터 ‘도와달라’는 전화가 왔었다”고 주장했고 언론에도 그렇게 알려졌다. 하지만 ‘12·12 공조선언’이 있고 나서 얼마 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전화 얘기는 그쪽에서 나온 것으로 아는데, 과연 그럴까요?”라며 노후보가 직접 정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는 언론보도에 의문을 표시했다. 만약 노후보의 전화가 없었다면 정대표를 움직인 결정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12월18일, 정대표는 우여곡절끝에 이룬 노후보 지지를 철회했다. 노후보 진영은 정대표의 막판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정대표의 선택은 어찌보면 예견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손에 들어 왔다 날아가버린 대권에 대한 미련이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이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정대표에게 노후보의 종로 발언은 상처를 후벼파는 고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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