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핵심 주장에 대해 논평하기 전 말해둘 것이 있다. 그 형식상의 특징에 대해서다. 우선 이 책의 주(註) 달기 형식은 좀 독특하다. 전문 학술서의 일반적인 주 달기 형식을 이 책은 따르지 않는다. 각 면 한 쪽 가장자리를 할애하여 주를 붙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동시에 학술전문용어들에 익숙지 않은 평균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전문용어들을 해제하는 친절을 베푼다. 그리고 최소한으로 밝힌 참고문헌도 별도로 정리하지 않았다. 이런 형식상 특징은 일반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하려는 편집의도를 반영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책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론의 위기, 실천의 위기
책에 담긴 논술 내용은 진지하고 곧으며, 논쟁적이다. 이 책은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차원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 하나는 한국사회가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태도에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사회가 민주주의를 실천해 가는 방법이 위태롭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자가 이론의 위기를 말한다면, 후자는 실천의 위기를 겨냥한다. 단순하게 읽으면, 이 책은 후자에 대해 주로 논의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저자는 한국사회가 그다지 민주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민주적이라고 단순히 믿고 있는 이론들을 비판하려는 게 분명하다. 이 책의 주제는 뚜렷하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이론과 실천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를 발생시키는 것은 그가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의 한 특징이다. 그는 보수성의 강화가 포스트권위주의시대라 불리는 우리 시대의 특징이라 진단한다. 보수성은 우리 시대의 모든 영역에 확산되고, 심화·침전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진단과 함께(제1부 문제, 제3부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 한국의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그동안 일관되게 연구해온 성과들을 이해하기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했다(제2부 보수적 민주주의의 기원과 갈등). 이러한 구성은, 물론 작금의 보수성 문제를 단편적·시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야 한다는 저자의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 역시 장기적인 현대 한국정치사의 맥락 속에서 분석되고 이해돼야 한다.
이 책에서 최교수는 위기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보수적인 것을 비판한다. 보수적인 것을 생산·유통·소비하는 것들(예컨대 정당·언론·지식사회·재벌 등)에 대해 그는 비판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최교수에게 그것은, 정치이론사에서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그 보수주의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정치이념으로서 보수주의는 진리의 궁극적 원천에 대해 회의하는 가운데 전통을 존중하는 것, 권위를 인정하는 것,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것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최교수가 말하는 보수성은 이와는 다른 것을 함의할 때가 적지 않다. 주로 냉전반공주의와 그 지속을 말하는 것 같지만(그의 판단 속에서), 개혁돼야 할 모든 것들을 지칭할 때도 있다. 바로 이 모호성은, 보수적인 것과 대비되는 ‘진보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을 그가 이 책에서 명시적이고 구체적으로 개진하지 않은 한 명쾌히 해명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이 시의적절한 책에서 최교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사상적 자원으로부터 도움받는 것을 거부하지 말’(230쪽)것을 요청하며 끝말을 맺는데, 이 조심스러운 요청은 아마도 그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이에서만 머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만으로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해온 그가 한국민주주의 발전의 한 방향으로 종래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226쪽) 까닭도 이 맥락에 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심대한 이념적 혼란을 겨냥하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이 혼란은 리버럴리즘을 자유주의로 번역해온 그동안의 습관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 지식사회의 책임 회피
흔히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규정할 때, 그 말이 자유주의(liberalism)의 형용사적 표현인 ‘자유적’(liberal)과 민주주의의 합성어를 의미하지 않아야 함은 분명하다. 그것은 리버럴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free democracy)이다. 그 어의를 정확하고 정당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리버럴 민주주의일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자유주의만이 자유를 주장하고, 사회주의는 평등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모두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다. 단지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과 주체 등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이 책의 논술은 위기론이다. 위기를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는 이러한 논술방식은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대개 위기론은 위기를 부정하는 진단과 위기에 대해 침묵하는 논술과의 논쟁을 통해 논지를 전개한다.
저자는 오늘의 한국 지식사회 일반이 비판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권위주의 시대 이후 한국사회의 중심 문제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거의 없으며, 진지한 논쟁은 발견하기 어렵고, 지식사회는 저널리즘의 시사적 글쓰기에 매몰돼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매우 팽팽한 긴장감을 곳곳에서 보인다. 그럼에도 논쟁 및 논박의 세밀한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점이 이 책의 품위를 손상하는 건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늘 민주화의 문제다. 민주주의는 그 본질상 과정이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이 책 역시 민주화의 길에 동행하는 목소리이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