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대통령이 선출됐다. 그의 첫 과제는 취임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을 알차게 활용해 ‘준비된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 이 기간을 승리의 희열에 젖어 허비한다면 국정 공백을 피할 수 없고, 정권의 매끄러운 인수·인계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금쪽 같은 두 달을 요리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 첫회의(1997.12.26)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정권인수팀에 참여한 시어도어 소렌슨의 말이다.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 첫날부터 내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주요 정책을 공백 없이 결정·집행하려면 당선 확정에서 취임까지의 두 달 남짓한 ‘학습기간’을 완벽하게 활용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유력한 후보로 나선 순간부터 정권 인수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 당선자가 짧은 정권 인수 기간에 떠맡아야 할 임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초대 대통령 워싱턴 이래 43대 대통령 부시에 이르기까지 211년 동안 정권이 42차례나 바뀌었다. 평균 5년에 한 번 꼴로 정권이 바뀌다 보니 국정운영과 정책이행의 연속성에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의회는 1963년 ‘대통령직 인수·인계법(Presidential Transition Act)’을 제정했다. 이 법은 1988년 ‘대통령직 인수·인계 효율화법(Presidential Transition Effectiveness Act)’으로 수정·보완되면서 정·부통령 당선자에 대한 사무실·비품·항공기 등의 제공, 사무요원 급여 지급, 전문요원 채용, 공무원 파견 등 국가의 지원내용이 명시됐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는 당선되기 훨씬 전부터 전담팀을 구성해 대통령직 인수 프로그램을 마련한 이가 적지 않다. 39대 카터 대통령과 40대 레이건 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경우. 카터는 선거 6개월 전인 1976년 5월부터 집권대비 계획을 세웠고, 6월10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마자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겨 선거운동과 집권준비 활동을 분리 가동했다.
레이건은 선거를 7개월 앞둔 1980년 4월 집권준비기획단에 ‘레이건 행정부 최초 100일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500명으로 출범한 집권준비기획단은 곧 1000명 규모로 확대되어 정책, 예산, 정부조직 등 국정운영 전반을 검토했다. 레이건도 선거운동본부와 정권인수팀을 각기 다른 도시에 둘 만큼 철저하게 분리 운영했다.
그 결과 레이건은 새 정부 요직 인선, 정책 시행 우선순위 등 집권 초기 구상을 사실상 끝낸 상태에서 백악관에 입성, 정권을 가장 순조롭게 인수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노태우 ‘취임준비위’가 시초
제14대 대통령직인수위 현판식(1993.1.4)
민주 선거를 통한 정상적 정권교체 역사가 겨우 15년 남짓하다 보니 우리나라의 인수위 역사 또한 일천하다. 하물며 선거시즌에 돌입하면 오로지 선거운동에 총력을 쏟아붓는 우리 정당들의 생리상 대통령후보 때부터 정권 인수 준비팀을 운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나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시초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당선자가 구성한 제13대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위원장·이춘구)로 볼 수 있다. 12대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1988년 1월18일 대통령령으로 효력기간 6개월의 대통령취임준비위 설치령을 공포, 대통령직 인수·인계를 위한 근거를 마련했다. 이날 출범한 취임준비위는 이춘구(위원장), 최병렬(정치·공보), 현홍주(안보·대외), 이진(행정일반), 김종인(경제), 김중위(교육·문화), 강용식(총무·의전) 등 위원 7명, 위원급 2명, 전문위원 12명, 행정요원 33명 등 모두 54명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취임준비위는 이름 그대로 국정 파악과 인수보다는 차기 대통령의 취임 준비에만 주력했기에 본격적인 정권 인수조직으로 보기 어렵다. 선거가 한 달이나 지난 뒤에 구성됐기 때문에 활동기간도 짧았다.
더구나 위원장 추천, 위원 임명 등 주요 결정사항에 대해 일일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등 대통령 당선자보다 현직 대통령이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전대통령은 노당선자가 추천한 위원 7명 중 이춘구 위원장 1명에게만 임명장을 줘 갈등을 빚기도 했다. 당선자가 비록 국민의 직접선거로 뽑히긴 했지만, 현직 대통령으로부터 후계자 지명을 받은 탓에 운신의 폭이 좁았던 것.
1993년 1월4일 출범한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당선자의 제14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위원장·정원식)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우선 명칭부터가 최초의 ‘대통령직인수위’였다. 김당선자는 처음엔 노대통령 정부에 ‘정권인수위원회’라는 명칭을 요구했다. 하지만 노대통령측은 “정권 인수는 혁명적인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며 반대했고, 결국 절충 끝에 대통령직인수위가 되었다.
김당선자는 인수위 활동이 당선자 중심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인수위원 임명권도 당선자가 갖게끔 청와대와 합의했다. 이에 따라 위원 15명, 전문위원 30명 등 총 91명의 멤버로 인수위를 구성했고, 통일·외교·안보, 정무, 경제, 사회·문화 등으로 전문화한 분과 활동을 통해 정부 각 부처의 주요 시책과 현안을 파악, 차기 대통령을 보좌했다.
정원식(14대 인수위원장),이민섭(14대 인수위원 경제1분과),남재희(14대 인수위원 사회·문화분과)(왼쪽부터)
YS는 인수위에 정부 업무현황 파악과 정부 이양에 따른 조율, 취임식 준비 등 새 정부 출범 준비를 위한 보조적인 실무작업만 맡겼다. 새 정부 요직 인선과 안기부·대통령 비서실 인수, 핵심 정책 수립 등 정권의 골간을 이루는 일은 자신이 비선조직을 통해 직접 챙겼다. 전병민씨와 YS 차남 김현철씨가 이끈 ‘동숭동팀’ ‘임팩트코리아’ 등의 비선조직이 그것. 게다가 김종필 대표 등 민자당 지도부도 “인수위보다 당이 우위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인수위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14대 인수위원을 지낸 남재희 전의원은 “YS의 인수위는 본격적인 인수위라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권 인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기구를 원만하게 인수하는 것이다. 최고의 권력기구는 안기부인데, 14대 인수위에선 안기부가 인수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런 의미에서 DJ의 15대 인수위가 실질적인 인수위라고 본다. 15대 인수위원장 이종찬씨는 처음부터 안기부 인수를 책임지고 인수작업에 참여했다. 14대 정원식 위원장은 정권 인수보다는 취임 준비에 중점을 뒀다.”
인수위와 비선조직이 뚜렷한 역할분담 없이 함께 운영되다 보니 혼선은 불가피했다. 14대 인수위 경제1분과에서 활동한 이민섭 전의원은 금융실명제 논란을 그 예로 들었다.
“인수위에선 토론을 거듭한 끝에 ‘금융실명제의 취지는 좋지만 부작용이 클 것으로 예상돼 당장은 실시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리고 정책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YS는 비선조직의 제안을 받아들여 1993년 8월 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그 결과 시중자금의 4분의 1에 달하는 돈이 지하로 잠적하면서 우리 경제가 어려워졌고, 이게 결국 외환위기로 연결됐다고 본다. YS가 집권하기까지는 동숭동팀의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집권한 뒤에는 공식적인 조직과 시스템이 전면에 나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다음 정권의 정책 방향을 정립하는 일은 인수위로 일원화했어야 한다.”
이에 대해 14대 인수위원장을 맡았던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동숭동팀과 인수위는 성격이 다른 조직이라 충돌할 일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동숭동팀은 차기 정부에서 간판으로 내세울 만한 정책을 연구했고, 인수위는 정부 부처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으며 ‘재고 조사(inventory)’와 정책의 연속성 유지에 신경을 썼다. 동숭동팀이 만든 것을 우리가 채택한 경우도 있다”는 것. 또한 안기부 등 권력기관 인수에 참여하지 않은 데 대해서는 “그것은 당선자의 고유 권한으로 봤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인수위냐, 국보위냐”
1997년 12월26일 발족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위원장·이종찬)는 13, 14대 인수위에 비하면 명실공히 ‘실세(實勢) 인수위’였다. 위원은 14대 때보다 11명이 늘어난 26명이었고, 여기에다 전문위원과 행정관, 실무요원을 포함한 전체 인원은 117명이 늘어난 208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당시는 외환위기 상황이었던 만큼 DJ는 가능한 한 인수위를 빨리 출범할 수 있도록 설치령 통과를 서둘렀다. 그래서 15대 인수위는 활동기간도 두 달(1997.12.26∼1998.2. 26)을 꼭 채워 역대 인수위 중 가장 길었다.
15대 인수위는 6개 분과로 구성됐는데, 정책의 총괄·기획·입안 및 긴급현안 처리는 정책분과에 전담시켰다. 인수 대상으로는 정부 전 부처를 망라했다. 안기부(통일·외교·안보분과)와 대통령 비서실(정무분과)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데다, 외환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에 15대 인수위는 가위 패전국 정부를 접수하러 나선 ‘점령군’의 위세였다. 정부 관계자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선 호통과 고성이 끊이지 않아 국회 국정감사장을 방불케 했다. 공무원들 사이엔 “우리가 업무 인계하러 온 거냐, 조사받으러 나온 거냐”는 불만이 터지면서 인수위의 월권(越權) 시비가 일었고, 홍사덕 당시 정무1장관은 “인수위 활동이 1980년 전두환 장군이 이끌던 국보위를 연상시킨다”며 가시돋친 비난을 퍼부었다. 이 때문에 DJ는 “인수는 제대로 하되, 자세는 최대한 낮추라”고 인수위에 당부했지만, ‘간’을 맞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임복진(15대 인수위원(통일·외교·안보분과),조부영(15대 인수위원 경제1분과),최명헌(15대 인수위원 경제2분과)(왼쪽부터)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효율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김대중 당선자 진영에선 인수위 외에도 외환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당정협의체인 비상경제대책위(비대위), 국민회의가 주도하는 노·사·정협의회, 정부조직 개편 등을 추진할 행정개혁위 등을 운영했는데, 이들 기구 간에 업무 분담이 명확하지 않았다. 경제부처 관리들이 인수위와 비대위에 이중으로 나가서 비슷한 내용의 업무협의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인수위와 비대위는 주도권 다툼까지 벌였다. 인수위 이종찬 위원장은 “비대위는 외환·금융분야를 주로 다룰 뿐이며, 재정·예산 등 경제 전반을 총괄하는 인수위가 비대위의 안을 통합해 경제정책의 방향을 설정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비대위의 김당선자측 대표인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는 “새 정부 경제정책의 방향을 잡는 것은 비대위가 할 일이며, 인수위의 기능은 실무 차원에서 업무를 인수하는 것일 뿐”이라고 맞섰다. 결국 DJ가 직접 ‘교통정리’에 나서야 했다.
비록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지만, 15대 인수위는 정부 전 부처의 업무를 인수했고, 새 정부가 추진해야 할 국정지표와 100대 과제, 긴급 현안과제와 주요 정책 등을 추려냈으며,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부 인수·인계활동 과정을 상술한 ‘인수위 백서’를 펴냈다는 점에서 대통령직인수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법적 근거’ 시급
인수위에 참여했던 몇몇 인사들에게 차기 인수위에 대한 조언을 청하자 “인수위 설치 및 활동을 위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인수위가 상설법에 근거해 정권교체 때마다 자동적으로 설치·운영되는 게 아니라 한시적인(6개월) 대통령령으로 그때그때 가동되기 때문에 직무 범위, 권한, 예산 등에서 논란의 여지를 낳는다는 것.
앞서 15대 인수위와 비대위의 갈등에서 보듯 인수위가 단지 정부로부터 업무를 이양받는 데 그치는 기구인지, 여기에 더해 새 정부의 집권 청사진까지 마련하는 곳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15대 인수위 경제1분과 간사였던 조부영 국회 부의장은 “인수위의 업무 범위를 법제화해야 인수위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면서 체험담을 들려줬다.
“경제1분과 위원 5명이 재정경제원, 통상산업부, 건설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철도청, 관세청, 조달청, 한국은행 등등을 다 커버했다. 통산부나 건교부 같은 곳은 산하기관들도 좀 많은가. 그래서 현황 보고를 받는 데만 20일 이상 걸렸다.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어디에서 어디까지 보고해야 한다는 게 정해져 있지 않으니 보고의 범위도 자연 방대해졌다. 새만금사업의 경제성이 어떠니, 경부고속철 특정 구간의 지반이 무르니 안 무르니 하는 것까지 논의했다.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 대충 넘길 수도 없어 꼬치꼬치 캐묻다 보면 시간은 자꾸 흐르고…. 이런저런 준비기간을 빼면 인수위의 실제 활동기간은 6주 정도에 불과하다. 이렇듯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일의 범위부터 명시해야 한다.”
15대 인수위 통일·외교·안보분과에서 활동한 임복진 전의원도 “상당수 인수위원들은 인수위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저 국정감사를 하듯 다그치기만 했다”고 털어놨다. 15대 인수위원장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이번 대선이 끝나는 대로 국회를 소집, 인수위법을 통과시켜 인수위가 정상적으로 출범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15대 인수위는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인수위 설치법 제정의 필요성을 논의했으나, 자민련 소속 일부 위원들이 “내각제 개헌이 이뤄지면 대통령 선거도 없어질 텐데 대통령직인수위 설치법이 왜 필요한가” “내각제 개헌 합의를 깨겠다는 소리냐”며 반발해 법률 제정이 무산됐다.
인수위가 이처럼 법적 근거 없이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의 합의에 따라 유동적인 여건에서 설치되다보니 준비도 소홀할 수밖에 없다. 인수위 설치에 합의하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사무실을 구하고, 집기를 들여놓고, 전화선을 깔고, 인수위에 파견할 전문위원과 행정관 등을 뽑느라 1주일이 그냥 지나간다.
인수위원도 미리 정해놓는 게 아니다. 15대 인수위의 한 위원은 “1997년 12월25일 밤 바깥에서 저녁을 먹다가 TV를 보니 내 이름이 뜬금없이 인수위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집에 갔더니 ‘내일 아침 10시까지 인수위로 출근해달라’는 이종찬 위원장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며 “다음 인수위에선 이런 식의 준비 없는 인선이 이뤄지지 않기 바란다”고 희망했다.
당시 인수위원으로 내정된 사실을 미리 알았다거나 어떤 기준과 절차에 따라 인수위원이 선정됐는지 알았다는 위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김당선자는 12월25일 정오경 성탄 예배를 보던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위원장 임명을 통보했다. 두 사람은 이날 오후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국회수첩을 보며 인수위원들을 골랐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음날인 12월26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인수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줬다.
한호선(15대 인수위원 경제2분과),정우택(15대 인수위원 경제1분과),김정길(15대 인수위원 정무분과)(왼쪽부터)
따라서 정치인을 뽑을 경우 전문성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외부 전문가에게도 인수위원직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것.
15대 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였던 최명헌 의원(민주당)은 “인수위원들 중 정부에서 일해본 사람이 드물어 정부의 생리를 너무 몰랐기 때문에 무(無)에서 출발하느라 힘이 몇 배나 더 들었다. 또한 자기 지역구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국회의원들로 인수위를 채우다보니 업무 처리의 공정성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풍부한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인사들로 건실한 자문기구를 구성해 인수위가 적절한 판단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15대 인수위 정무분과 간사로 일한 김정길 전의원도 “선거에 기여한 공로를 기준으로, 혹은 지역 안배나 나눠먹기식으로 인수위를 구성하면 절대 안 된다”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전문성이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야 할 일의 양을 생각하면 인수위가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턱없이 짧다. 하지만 기간을 더 늘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길어야 대통령 당선 확정 당일에서 취임일 전날까지가 전부다. 그렇다고 취임일을 미룬다면 국정 공백기가 그만큼 길어져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인원을 늘리면 다소 도움이 되겠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인수위의 짧은 활동기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그 결과물을 차기 정부가 바로 건네받아 국정을 공백 없이 운영토록 하려면 차기 내각에 기용할 인사들을 인수위에 참여시키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많다. 다시 말해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을 인수위에 들여 앉혀 인수위를 사실상의 ‘초대 내각’으로 삼자는 얘기다. 이렇게 할 경우 시간을 아끼는 것은 물론, 새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인수위에서 설정한 정책 방향이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14대 인수위의 경우 15명의 인수위원 중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입각한 사람은 이민섭 문화체육부 장관 1명뿐이고, 15대 인수위에서도 25명 중 4명(이종찬 안기부장, 이해찬 교육부 장관, 박태영 산자부 장관, 최재욱 환경부 장관)만이 중용됐다. 이후 DJ 정부의 2, 3차 개각에서도 3명이 더 기용됐을 뿐이다.
15대 인수위원(경제1분과)을 지낸 정우택 의원(자민련)은 “섀도 캐비닛을 인수위에 참여시키지 않으면 인수위는 인수위대로 돌아가고, 나중에 장관이 된 사람은 업무 파악을 처음부터 따로 하느라 시간을 곱으로 낭비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장관에 앉힐 사람을 인수위에서 충실하게 준비시킨다면 나름의 정책 토대를 마련한 상태에서 장관 부임 후 곧바로 실무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인수위 각 분과에 소속된 4∼5명의 위원이 여러 부처를 공동으로 인수하는 현행 방식보다, 장관으로 갈 사람을 중심으로 해당 부처 인수팀을 만들어 운영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예컨대 산자부 장관에 내정된 사람을 중심으로 ‘산자부팀’을 구성해 산자부에 대해 풀 스터디를 하게 하는 방식이다.
인수위 따로, 장관 따로
“15대 인수위 통일·외교·안보분과에서는 군 싱크탱크들을 동원, 새 정부가 추진할 국방분야 5개년 계획을 세워 DJ의 결재를 받았는데, 뒤에 국방부 장관은 인수위 안을 무시하고 새로운 국방 개혁안을 만들었다. 인수위에서 활동한 사람이 차기 정권에서 해당 부처의 초대 장관이 되지 못하니까 대통령 공약 따로, 인수위 안(案) 따로, 새 정부 안 따로가 돼 혼선을 빚는다.”
임복진 전의원의 말이다.
최명헌 의원은 “인수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새 정부 출범 후 단 몇 달 동안이라도 정부에 동참하면서 인수위가 제안한 정책들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모니터링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게 안 되니 과제만 덜렁 던져놓고 끝난 느낌이다. 인수위 해체 후 전문위원들이라도 해당 부처로 돌아가서 정책의 연속성을 체크해 봐야 한다. 그런데 전문위원들은 인수위에서 일한 내용과 전혀 무관한 부처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지금 어느 부처에든 가서 인수위 100대 국정과제에 대해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없다. 인수위가 제안한 게 다 옳다는 것이 아니다. 꼼꼼한 사후 분석과 업데이트 작업을 통해 정책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정해 가자는 얘기다.”
15대 인수위 초기에도 드러났듯이 국정감사를 떠올리게 하는 질타와 비판 위주의 고압적인 인수 자세도 지양해야 될 부분으로 지적됐다. 정우택 의원은 “실정(失政)의 원인을 찾아내 반면교사로 삼으려면 과거 정부의 잘못과 비리를 캐내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겠지만, 굳이 비율로 치면 6대 4 정도로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집권 후 1∼2년간의 정책 기조와 비전을 마련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조언했다.
정원식 14대 인수위원장도 “인수위가 전 정권에 대한 심판자가 되려 해서는 스무스한 권력 이전이 어렵다”며 “국가의 정책에는 당시의 시대정신과 나름의 동기, 배경이 반영돼 있으므로 이들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현재의 잣대로 비판만 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했다.
미국의 대통령직인수위는 정부 인수 조직과 정책 개발 조직으로 이원화해 있다. 그래서 우리처럼 두 기능이 중첩되거나 단절되는 바람에 인수위가 국정감사장이 되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한다. 또한 미국 인수위는 공무원을 파견받을 수도 있으나 대개는 인수위 요원을 정부 각 부처에 파견해 인수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정부의 기능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배려한다. 미국 헤리티지재단이 펴낸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The Keys to a Successful Presidency)’은 레이건 대통령의 인수위가 정부와 공무원들에게 취한 태도를 레이건의 고문 에드윈 미스의 말을 빌려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정부 부서에 인수팀원들을 파견하면서 ‘절대 점령군처럼 행동하거나 공무원들을 괴롭히지 말고 오직 정보 수집가처럼 조용히 행동하라’고 주문했다. 우리처럼 연방정부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로서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공무원들에게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부처 이기주의가 그것이다. 인수위는 정부 조직 개편 및 산하기관 통·폐합이나 새 정부가 추진할 사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관료들의 집요한 로비에 직면한다. 심지어는 정부에서 인수위에 파견된 공무원들마저 부처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로비스트로 돌변하기도 한다.
15대 인수위에서도 막판에 소속 부처 복귀를 앞둔 전문위원들이 부처 이기주의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다. 폐지되는 것으로 거의 확정됐던 해양수산부가 극적으로 되살아났는가 하면, 당초 1급으로 하향 조정됐던 조달청, 병무청, 농진청, 산림청 등 외청장들의 직급은 다시 차관급으로 환원됐다. 지방자치경찰제 도입과 관련, 인수위에서 제기됐던 경찰 수사권 독립 방안이 검찰의 로비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종찬 15대 인수위원장은 “인수위 파견 공무원들이 자기 부처의 이익을 옹호할 수도 있지만, 인수위 밖에서 로비가 들어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인수위가 구성되면 정부 부처의 행정은 인수위의 눈치를 보게 된다. 인사조치도 시급한 것 외에는 일단 중지된다. 대형 프로젝트도 계속사업 이외에는 중지된다. 그런 경우에 로비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인수위의 눈을 피해 미리 손을 써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길 전의원의 말.
“15대 인수위는 구성되고 나서 뒤늦게 청와대에 새로운 정책사업이나 인사조치 등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인수위를 가동하고 보니 새 정권이 집행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몇몇 정책사업 예산이나 인사에 대통령 당선 직후 이미 손을 댄 사례가 발견됐다. 일부 공무원들에 대한 승진 인사와 발령, 전보 조치가 조급하게 취해져 있었다. 공무원들의 임금 인상도 추진되고 있었다. 외환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급여가 깎이는 마당에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수위가 늦게나마 이를 찾아내 막을 수 있었다. 16대 대통령 당선자도 당선이 확정되면 즉시 청와대에 이런 조치를 중지하라고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시급한 사안인데도 정권 이양기라는 미묘한 시기다 보니 정부가 정치권의 눈치를 보느라 손을 놓고 있는 부분은 인수위가 적극 나서서 해결해 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조부영 국회 부의장에 따르면 15대 인수위 당시 중소기업들의 연쇄 부도를 막기 위해 세금 납부를 유예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소관 부처인 국세청은 민감한 시기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봐 직접 나서지 못하고 인수위에 사정을 털어놨다는 것. 인수위는 이것이 서민 경제에 단비가 될 수 있다고 판단, 국세청에 세금 유예와 분납 등 긴급조치를 건의해 즉각 시행토록 했다.
조부의장은 차기 인수위가 고민해야 할 현안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경제정책 기조를 성장 위주로 할 것인가, 분배 위주로 할 것인가가 우선 논의될 텐데, 복지도 중요하지만 성장에 기반을 두지 않은 복지는 허구라고 생각한다. 지금 경제위기론이 나라 안팎에 팽배해 있다. 펀더멘털은 좋다지만 실물경제는 흔들리고 있다. 저축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건 간과할 수 없는 팩트다. 저축률이 떨어지면 투자심리도 위축된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투자 진흥책을 찾으면서 성장 기반 구축에 역점을 두고 정책 방향을 잡아야 한다.”
‘교만에 빠질 수 있는 70일’
한편 이종찬 15대 인수위원장은 차기 인수위 운영과 관련, 극히 실무적인 차원의 충고를 들려줬다.
“언론대책을 처음부터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인수위원들이 정치인이다 보니 언론에 약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통령 당선자에게 미처 보고도 되기 전에 큼직큼직한 이슈가 언론에 보도돼 혼란을 빚기도 했다. 인수위원 25명에 보좌요원까지 합치면 약 150명이 언론에 노출돼 있다. 그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한 마디만 잘못 말하면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 그러므로 맨먼저 대변인부터 임명해 대(對) 언론 창구를 대변인으로 일원화해야 한다. 언론과는 신사협정을 맺어서 인수위가 배포하는 보도자료 내용 외에는 추측 보도가 없도록 대처해야 한다.”
2002년 12월20일 새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새 정부는 이미 닻을 올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항구를 빠져나가 망망대해로 접어들기까지의 두 달을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순항(順航)의 열쇠다. 자만에 젖어 소모적 논쟁이나 실적 경쟁으로 허비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시간이다.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남의 나라 얘기로 흘려들을 대목이 아니다.
“당선과 취임선서 사이의 70일간은 대통령 당선자나 그의 팀 모두에게 매우 흥분된 나날일 수 있다. 그래서 이 기간을 극도의 무질서 속에 흘려보낼 수도 있다. 길고 오랜 선거운동이 끝나면 싸움에 지친 노병들은 승리에 따른 행복감과 탈진을 동시에 경험한다. 자신이 지금 성취해 낸 것에 비하면 앞으로 벌어질 어떤 일도 어려울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교만에 빠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