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영혼으로 만나는 세상

  • 글: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입력2003-01-22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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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길은 가지 않겠다!” 기존의 영화 언어를 뒤엎는 혁명적 발상으로 세계 영화계를 이끌어온 유럽의 네 감독. ‘영화적’인 것과의 대립과 합일, 그 긴장의 줄타기를 거쳐 세상에 나온 걸작들과 네 대가의 유니크한 영화론.
    유세프 이샤그푸르라는 영화학자는 미국영화와 유럽영화를 대비시켜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영화는 스토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이를 통해 시나리오의 스타일을 익힐 수 있다. 반면 유럽영화는 스토리보다 작품 속의 의미나 감정 전달을 더 중시한다. 유럽영화에서는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며, 영상미학은 과연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유럽영화에 대한 아주 깔끔한 설명이다. 하지만 자칫하면 우리를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 속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처럼 유럽영화는 곧 ‘예술영화’라는 식의 동일시 말이다.

    유럽영화가 다른 지역의 영화, 예컨대 미국영화와 비교해 그것만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 나름의 범주에 속할만한 영화들을 만들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럽영화란 그 안에 너무 다양한 영화들을 포괄하고 있기에, 그것을 단번에 정의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가령 유럽의 어떤 영화감독들은 영화사 초창기부터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해온 미국영화에 굉장한 매혹을 느끼며 작업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미국영화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반발감을 갖고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유럽 감독들은 우리의 오해와 달리 예술영화뿐 아니라 대중적인 영화들도 만들며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요컨대 유럽영화는 다양한 빛깔로 채색된 ‘또 다른 어떤 세계’인 것이다.

    유럽영화의 다양한 색깔을 한번에 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에, 이 글에서는 현재까지 활동중인 유럽의 대표적 시네아스트 4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한다. 장 뤽 고다르, 빔 벤더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라스 폰 트리에가 그들이다.



    이들은 어떤 면에서, 각각 19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 영화의 한 경향들을 보여준다. 또 서로 다른 국가 출신으로, 이들의 영화 세계에 대한 탐사는 다채로운 시공간에 걸쳐 있는 유럽영화의 어떤 면모들을 - 그 미학과 역사, 세계영화의 중심으로서 미국과의 관계 등 -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본다.

    장 뤽 고다르

    누벨 바그의 리더, 영화사를 뒤엎다

    영화의 역사는 장 뤽 고다르(1930~)에서 큰 획을 하나 긋는다. 고다르라는 감독이 프랑스 영화사에서, 더 나아가 세계 영화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비록 그의 영화를 거의(혹은 전혀) 보지 않은 이라 해도 한두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서 ~ 60년대 중반까지, 기존의 영화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종의 ‘혁명’이라 부를 만한 사건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전통적 방식의 고루한 영화에 반기를 든 젊은 영화감독들이 아버지 세대의 영화와 전혀 다른, 신선하고 창조적 활력이 넘치는 영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화적 흐름을 ‘새로운 물결’이란 의미의 ‘누벨 바그(Nouvelle Vague)’라 부른다.

    프랑스 영화사에서 고다르는 이 누벨 바그의 ‘앙팡 테리블’이라 불릴만한 인물 중 하나였다. 아니, 그렇게만 얘기하는 건 어딘지 좀 부족하다. 그는 그저 앙팡 테리블이 아니라 멤버들 가운데서 정말로 가장 ‘테리블’했고, 또 마지막까지 ‘테리블’하게 남은 앙팡 테리블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만든 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기존관념을 완전히 뒤엎었고 그런 그의 도전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됐다.

    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고다르(왼쪽)와 그의 대표작 ‘네 멋대로 해라’

    단순하게 설명해보자. 전통 방식의 영화란 우선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영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최대한 감추려 한다. 그러나 고다르는 처음부터 전통적 스토리텔링에는 관심 없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탐구하고 또 그것을 작품 속에서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이를 통해 고다르는 영화 역사의 새 지평을 열게 된다. 고다르에 대한 비평서를 쓴 리처드 라우드라는 비평가는 고다르의 영화사적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다르 이전의 영화가 있고, 고다르 이후의 영화가 있다. 그 사이에 진보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건 분명한 일이다.”

    고다르의 장편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59)는 영화사의 새 페이지가 시작됨을 알린 작품이다. 영화 주인공은 미셸 포와카르란 청년이다. 훔친 자동차를 타고 달리던 그는 경찰의 추적을 받자 쏴 죽이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미셸은 미국인 여대생 패트리샤와 함께 파리를 벗어날 생각을 한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미셸을 경찰에 신고하고, 미셸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이렇게 스토리만 간략히 소개하면 ‘네 멋대로 해라’는 미국식 범죄영화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여기서 잠깐, 고다르와 그의 누벨 바그 동료들의 영화애에 대해 언급해보자. 이들은 공히 시네마테크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그렇게 키운 열렬한 사랑을 영화비평 쓰기 혹은 영화 만들기로 전이시킨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발견해낸 것들 중에 흔히 ‘야만인’ 정도로 치부돼던 할리우드 감독들이 사실 꼭 그런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하면서도 영화 속에 자신만의 비전을 불어넣을 줄 아는 영화감독들을 찾아내 대가로서 흠모했다. 실제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들며 고다르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해온 ‘미국영화 같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원적 사유 펼치는 영상 에세이스트

    그러나 고다르의 기질,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제작 환경은 그가 ‘미국영화’를 만드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네 멋대로 해라’는 스토리 라인만 미국영화를 닮았을 뿐 할리우드적 기준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규칙은 다 무시하고 ‘제 멋대로’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인물들의 행위 동기는 명확지 않고 이야기는 본 궤도에서 벗어나 자주 곁길로 빠진다. 스타일 면에서도, 인위적인 세트,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삼각대, 인공조명 등을 거부함으로써 할리우드 영화의 그것을 거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특히 점프 커트(jump cut; 쇼트와 쇼트의 연결을 이음매 없이 연결하는 편집 방식)의 활용은 큰 논란을 불러온 요소 중 하나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영화제작에 대한 무지의 소치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실상 ‘네 멋대로 해라’에 쓰인 점프 커트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실존적 불안감과 충동적 분위기에 매우 잘 어울렸다. 게다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는 연속 편집이라는 할리우드식 관행, 더 나아가 그를 사용한 미국영화의 위대한 감독들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들을 뛰어넘으려는 예비적 몸짓으로 비치기도 한다.

    ‘네 멋대로 해라’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고다르의 초창기 영화들은 종종 스릴러(‘작은 병정’, 1960), 뮤지컬(‘여자는 여자다’, 1961), 전쟁영화(‘카라비니에’, 1963), SF(‘알파빌’, 1965) 같은 장르에 기대어 만들어졌지만 이는 전통적 의미에서 장르영화가 아니라 ‘고다르식(어찌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장르영화’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다르는 이들에서 전달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전달 구조 혹은 메커니즘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영화를 이루는 기본 요소인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실험하고 탐구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최상의 영화 기호학자라 불릴만하다. 한편으로 고다르는 펜 대신 카메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는 영상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현대 소비사회, 정치, 삶의 조건들,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자유로우면서도 근원적인 사유들로 가득하다. 그런 방식으로 그의 영화는 관객에게 진지한 탐구와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다르의 영화에는 결론 없는 질문이 가득하다. 관객은 그것과 능동적으로 맞닥뜨려야 한다. 고다르는 언젠가 “우리는 관객과 맞붙어 싸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말은 곧 “우리는 고다르(의 영화)와 맞붙어 싸워야 한다”는 것이 된다. 고다르의 영화는 그렇게, ‘싸울’ 준비가 돼 있는 관객에게 수많은 근원적 질문과 가르침, 영감을 선사한다.

    미국 문화에 매혹된 길 위의 실존주의자

    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빔 벤더스와 최근작 ‘밀리언 달러 호텔’

    1959년 고다르는 “당신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 형편없고 우리가 희망하던 것으로부터 미학적·도덕적으로 너무나 멀리 있음을 본다”며 ‘아버지의 영화’를 힐난하는 글을 썼다. 프랑스의 누벨 바그에 자극받은 독일의 새로운 영화적 흐름 또한 고루한 ‘아버지의 영화’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1962년 26명의 젊은 영화감독들은 오버하우젠 선언에 서명한다. 그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새롭고 창의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며 이른바 ‘뉴 저먼 시네마’라 불리는 운동을 시작한다. 고다르가 누벨 바그의 대표주자라면, 빔 벤더스(1945~ )는 바로 이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 감독 중 하나다.

    벤더스의 영화 세계를 살펴보기 위해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문화에 대한 매혹이다. 확실히 벤더스는 미국영화와 그 문화로부터 영화적 자양분을 섭취한 감독이다. 그는 “미국영화와 미국 록음악이라는 구명대(救命帶)가 없었다면 유년기를 미치지 않고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미국문화에 대한 이렇듯 지나친 탐닉은 단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벤더스에 따르면 자신이 어릴 때, 즉 패전 이후의 독일인들은 대개 어느 정도는 영화와 록, 추잉 검과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포함하는 미국문화에 동화되어 있었으며, 이는 그들이 나치즘의 수치스런 기억을 망각하고자 하는 데서 생긴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벤더스와 미국문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대사가 ‘시간의 흐름 속으로’(1976)에 나오는 “양키들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화했어”라는 대사다. 하지만 이를 미국문화에 깊숙이 침탈당한 독일인의 심성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은 좀 곤란하다. 지금껏 벤더스는 미국적인 것에 대해 얼마간 비판을 가한 적은 있어도, 완전히 등 돌린 적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예컨대, ‘미국인 친구’(1977) 같은 경우는 유럽에 남아 있는 미국인이 과연 어떤 악행을 일삼고 있는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니콜라스 레이와 새뮤얼 퓰러 같은 미국영화의 거장들에 경의를 표하는 미국식 스릴러 영화이기도 하다.

    느리고 아름답고 탐색적인

    또 다른 예로 ‘파리 텍사스’(1984)는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감을 그린 영화지만, 동시에 미국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혹적 정경, 그 황량한 아름다움을 그린 우수 어린 블루스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존 포드의 ‘수색자’(1956)에 바치는 벤더스의 오마주로 볼 수 있다(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고는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로 떠나는 ‘파리 텍사스’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수색자’의 주인공 이산과 닮은꼴이다). 최근 벤더스는 LA에서 ‘폭력의 종말’(1997)이나 ‘밀리언 달러 호텔’(1999) 같은 영화들을 찍기도 했다. 아무래도 벤더스와 미국문화 사이의 관계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또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심지어 그것에 대한 증오를 포용하기까지 하는 관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벤더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영화 중 중요한 하나를 꼽으라면 ‘이지 라이더’(데니스 호퍼, 196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평론을 쓰던 젊은 시절 벤더스는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리뷰를 남겼다. “이것은 아름답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화다. 두 대의 커다란 모터사이클이 지나가는 땅이 아름답고, 우리가 듣는 음악이 아름다우며, 데니스 호퍼가 연기할 뿐 아니라 연출까지 맡은 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벤더스가 이런 글을 썼다 해서 주로 로드 무비를 만들어온 그의 영화경력 자체를 ‘이지 라이더’의 리메이크로 본다면 너무 단순한 도식에 빠지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글에서 벤더스가 옹호하는 영화, 또 그가 지향하는 영화가 어떤 타입의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땅(풍경)이 아름다운(돋보이는) 영화, 그리고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다(벤더스의 영화들을 보면 확실히 그는 스토리텔링보다는 이미지 메이킹 쪽에 더 재능이 있고 또한 음악 사용에 남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더 확대하면, 벤더스의 로드 무비란 우리가 보고 듣는 것, 그것의 ‘묘사’에 치중하는 영화다. 자연히 벤더스의 영화는 서술의 방법론에 의해 구축되는 영화들에 비해 다소 느린 리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페드로 알모도바르(왼쪽)에게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벤더스는 자신의 영화사 이름을 ‘로드 무비’라고 지을 정도로 로드 무비에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 로드 무비의 주인공들은 내면 깊은 곳까지 외로운 사람들이며 현재의 자신이 어디 속해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자신의 뿌리 혹은 미래를 찾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파리 텍사스’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주인공 다미엘의 경우, 천사라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삶의 직접성과 구체성을 경험할 수 없다는 ‘상실감’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어떤 의미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실과 종종 성과 없이 끝나는 탐색의 서사 구조에서 인물들의 공허한 내면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나 음악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벤더스가 보여준 ‘새로운 감성’(Neue Sensibility)이란 황량한 탐색의 내러티브가 대단히 감각적으로 선택된 이미지, 그리고 음악과 만나 빚어진 것이라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경우가 그런 건 아니지만, 여하튼 그 조화가 잘 이뤄졌을 때 벤더스는 ‘파리 텍사스’나 ‘베를린 천사의 시’(1987)처럼 굉장히 아름다운 시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는 반대로, 벤더스가 묘사 혹은 이미지 메이킹에만 과도하게 집착할 경우 우리를 실망시킬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키치적 세계를 원숙의 단계로 끌어올린 거장

    벤더스의 ‘새로운 감성’이 고독한 여정을 차분하고 낭만적인 시선으로 포착한 화면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라면, 1980년대 유럽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유의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영화감독 하나가 등장한다. 감정 표현이나 스타일 등 여러 면에서 과잉이라 생각될 만큼 허구적인 세계를 천연덕스럽게 제시하는 그는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1951~ )다.

    그의 영화 세계에서는 상식을 벗어난 것들이 오히려 정상으로 간주되며 통상적인 것들은 극단적으로 과장되거나 가차없이 버려진다. 알모도바르는 그런 이단적 상상력을 스크린 위에 거침없이 펼쳐보임으로써 어떤 이들을 감동시켰고 또 어떤 이들로부터는 저속하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 독재정권 치하에서 꽤 오랫동안 억눌린 채 살았다. 프랑코 시절 스페인 영화 역시 창작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그 족쇄가 풀어진 후 스페인의 새로운 멘탈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알모도바르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내 영화는 1975년 프랑코가 죽은 이후, 특히 1977년 이후 스페인에서 생겨난 새로운 멘털리티를 재현한다. 사람들은 스페인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 영화에서 그런 변화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이제 내 영화에서 스페인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본다. 왜냐하면 이제 ‘욕망의 법칙’(1987)과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알모도바르(와 그의 영화)에게 새로운 스페인 사회란 무엇보다 욕망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사회다. 알모도바르가 쓴 글의 한 부분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자칭 국제적 포르노스타인 주인공 패티 디푸사는 젊은 청년을 유혹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 잘 들어보세요. 스페인의 민주정치는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어요. 이 말은 당신과 내가 아무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섹스를 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금기에 개의치 않고 쾌락을 두려워하지 않은 인물들은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비밀습관’(1984)은 수녀들에 대한 영화인데, 여기서 수녀들은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하고 창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신부와 사랑에 빠지고 타락한 여성들에 대한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스페인 사회에서 1980년대는 젊은이들이 영화·음악·패션잡지 등 온갖 대중문화에 심취한 시기이기도 하다. 스스로 여러 대중문화 양식들에 열광한 알모도바르는 그 시대 대중문화의 파편들을 모아 영화 속 이곳저곳에 박아넣었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는 그 자체로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인용과 발췌가 가득하다. 그의 영화는 잡종의 영화이며 또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 혹은 문화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가장 확연히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그만의 독특한 원색주의다. 원색주의자라는 명칭이 존재한다면 아무래도 그건 알모도바르를 위한 것일 텐데, 그는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알록달록한 색깔을 통해 삶의 변덕스러움을 고스란히 자기 영화 속에 담아냈다. 그는 이같은 색채 감각이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라 믿는다. 평생 검은 옷에 짓눌려 살았던 어머니의 의지가 자신에게 투사돼 행복한 원색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빔 벤더스·페드로 알모도바르·라스 폰 트리에

    라스 폰 트리에(왼쪽)에게 “도그마선언은 유효하냐”는 질문을 던지게 한 영화 ‘어둠 속의 댄서’302

    여하튼 알모도바르의 이 탁월한 색채 감각에 우연성과 작위성으로 가득한 종잡을 수 없는 스토리, 그리고 과도한 장식성이 더해지면서 지극히 알모도바르적인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 세계에서 알모도바르는 언제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타인에 대한 뒷얘기를 다루는 패션 잡지의 그것과 같다. 그는 사랑·쾌락·고통·진실·자유·죽음 등 평범한 주제들을 복잡하게 얽어 재미난 농담 같은 이야기로 풀어낸다.

    알모도바르 영화 세계의 모든 특징이 집약적으로 펼쳐진 영화는 아마도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들’(1988)일 것이다. 주인공인 페파는 이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격분한다. 영화는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에 놓인 이 여자의 아파트에 그녀의 동생, 그녀의 애인 이반, 이반의 전처와 이반의 새 애인, 거기다 경찰과 전화수리공까지 순차적으로 집결시켜 광란적인 앙상블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작위적 우연들로 가득한 이 원색의 세계는 다른 범용한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중심을 잃고 헤매는 영화가 돼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모도바르의 손을 거치면서 우울함과 특별한 유쾌함이 뒤섞인 독특한 코미디가 되었다.

    이렇게 ‘쾌활한 과잉의 세계’를 탁월한 감각으로 소화해낸 알모도바르는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원숙의 단계에 접어든 듯하다. 그렇다 해서 이전의 영화 세계를 깡그리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최근의 걸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은 알모도바르적이라 불리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여기에는 일종의 평정(平靜)의 미학이 덧씌워져 있다.

    특유의 원색에는 온색의 느낌이 가미됐고, 신경쇠약 직전까지 간 여인들의 시끌벅적한 수다에는 삶의 결이 새겨졌으며, 우연으로 점철된 혼잡한 소동에는 운명의 힘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알모도바르는 키치적이고 과잉으로 점철된 가볍고 유치한 세계를 통찰력 가득한 원숙의 단계로 끌어올린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

    ‘순결한 영화’와 ‘오염된 영화’사이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의 유럽 영화사를 훑어볼 때 누벨 바그보다 더 중요한 영화사적 사건을 꼽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난 40여 년 동안 유럽의 많은 영화감독들은 그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와 그 유산을 깡그리 부정하려는 이(들)가 있다.

    “도그마 95는 구제 행위다!” ‘도그마 95 선언’ 참가 감독들은 이렇게 외치며 매우 도발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도그마 95는 1995년 봄 코펜하겐에서 결성된 영화감독 집단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늘날 영화에서의 어떤 경향에 대항하는 것’이다. 작가(auteur)라는 낭만주의적 개념에 기댄 1960년대의 반(反)부르주아 영화는 그 자체로 부르주아적인 것이 되었고, 누벨 바그라는 것도 잔물결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도그마 95는 그 정의상 퇴폐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주의 영화에 대항하고 또한 자신들의 영화에 일종의 ‘유니폼’을 입힐 것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더는 ‘예술가’가 아니며 더는 ‘작품’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운 열 가지 ‘순결 서약(‘촬영은 현지에서 행해져야 한다’ ‘촬영은 카메라 들고 찍어야 한다’ ‘인위적인 행위를 담지 않는다’ 등)’은 그런 맹세의 증거다. 도그마 집단에게 이는 환영(幻影)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기법들을 대체로 거부한, 즉 도그마 원칙에 충실한 영화 ‘백치들’(1998)을 발표한 이래 라스 폰 트리에(1956~ )는, 어떤 식으로든 도그마 원칙과 관련해 자신의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돼버렸다. 예컨대, 2000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뮤지컬 영화 ‘어둠 속의 댄서’는 과연 ‘도그마 영화’인가 하는 질문들이다. 이건 아마도 많은 이들이 기존 영화의 철저한 전복을 기도한 도그마 95가 실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호의의 눈길이든 아니면 의혹의 눈초리든). 게다가 폰 트리에는 도그마 집단의 선봉장이라 불릴만한 인물이 아닌가. 집단적 선언이라고는 하지만 도그마가 그토록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건 무엇보다 폰 트리에의 명성과 재능 덕분이다. 그는 과연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영화’를 지키는 성인이 될 것인가.

    사실 폰 트리에의 이전 영화들은 대부분 도그마 원칙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들이다. 이른바 ‘전후 유럽 3부작’으로 불리는 그의 초기 대표작들, 즉 ‘범죄의 요소’(1984), ‘전염병’(1987), ‘유로파’(1991) 등은 모두 형식주의와 스타일의 과잉 차원을 넘어 ‘포화 상태’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유로파’를 예로 들자면, 여기에는 독일 표현주의부터 필름 느와르에 이르는 영화사적 지식들이 두루 나열돼 있으며 독창적이면서도 때론 유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온갖 테크닉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영화들로 폰 트리에는 매우 대담하고 독창적이며 황홀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스타일리스트라는 찬사와 더불어 ‘스크린의 마스터베이터(masturbator)’라는 비아냥마저 듣게 됐다.

    그러던 폰 트리에가 다분히 나르시시즘적인 테크니션의 면모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킹덤’(1994), 그리고 무엇보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를 내놓으면서부터다. 흔들리는 핸드 헬드(들고 찍기) 카메라의 현장성에 의존하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마치 도그마 영화의 발아기(發芽期)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폰 트리에는 이후 ‘백치들’에 와서 본격적인 도그마 영화를 선보이게 된다.

    도그마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영화란 외형상으로는 현장성을 중시해 만들어진 누벨 바그 영화와 유사하지만 그 기본 개념에서는 누벨 바그 영화의 정반대에 위치한 것이다. 예컨대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해 “이것은 규칙 없이 만들어진 영화이고 이 영화에 어떤 규칙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규칙이거나 잘못 적용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고다르의 경우는 규칙이란 걸 무시함으로써 창조적 자유를 얻으려 한 것이다. 반면 도그마 영화는 스스로 오히려 규칙을 부과함으로써 그 자유를 획득하려 한다. 폰 트리에는 “창조성이란 속박되지 않은 자유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명확하게 정의된 과제, 그리고 명백히 정의된 제한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이 전혀 그럴 듯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사실 어떤 규칙을 계속 염두에 두고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사건의 자발성과 현장성을 포착한다는 것은 올바른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 심하게 말해 결과보다는 룰 준수에 더 집착하는 일종의 ‘게임’에 골몰하는 태도처럼 비치기도 한다.



    폰 트리에의 도그마 영화 ‘백치들’은 백치야말로 미래의 인간이라며 지체아임을 ‘가장’하는 부르주아들에 대한 영화인데, 영화 속의 그 상황은 고스란히 폰 트리에의 작업 태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일부러 헐벗은 체하는 도그마 영화가 미래의 영화라며 인위성이 배제된 영화 만들기를 애써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듯 ‘순결한 영화’를 만들다가 또 금방 ‘어둠 속의 댄서’처럼 교리에서 이탈한 ‘오염된 영화’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도그마 선언에 입각한 영화 만들기란 더 이상의 영화적 ‘모험’이 불가능한 유럽영화계에서 어떻게든 모험을 해보이려는 수고로운 시도 혹은 해프닝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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