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 방문객은 3층 이상 못 올라간다. 재판관 9명의 집무실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 이곳의 요즘 분위기를 취재했다. 기자를 만난 헌재 관계자는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변수들이 등장할 수 있다. 탄핵심판은 격랑을 예고한다”고 말했다. 헌재의 입장에서 ‘대통령 탄핵심판’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상법을 소개한다.
3월30일 대통령 탄핵심판 첫 공개변론이 열린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이게 뭡니까.”(주 재판관) “인터넷에 떠 있는 글입니다.”(헌재 관계자) 주 재판관이 농담을 던졌다. “내가 ‘컴맹’인 거 잘 아시면서.” 복사본을 읽어본 뒤 주 재판관은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지”라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주 재판관이 말했듯,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는 헌재 재판관들도 아직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탄핵심판의 변수로 여론을 꼽는 사람이 많다. “여론조사에서 국민 70% 이상이 탄핵을 반대하므로 주권자인 국민 의사에 반해 탄핵 결정돼선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헌재 관계자는 “헌법은 최종적으로 탄핵을 사법적 판단에 맡기고 있다. 사법적 판단을 함에 있어 여론조사 결과를 참고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총선결과도 탄핵심판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허영 헌재 자문위원(명지대 법대 초빙교수)은 “노 대통령에겐 경고, 탄핵은 기각”을 공론화했다. 일부 언론은 ‘헌재 자문위원’의 주장이라는 점에 무게를 뒀다. 이에 대해서도 헌재 관계자는 “자문위원의 견해는 헌재의 제도적 절차 문제에 국한될 뿐 개별적 헌재 심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헌법재판관 9인의 성향은 일반의 큰 관심사다. 헌재 일각에선 재판관 뿐 아니라 연구관들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통령 탄핵심판의 경우 4~5명의 전담 연구관이 배치되어 있고 그밖에도 일부 연구관들이 수시로 참여한다.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관들은 탄핵심판 심리에 필요한 자료수집-정리, 사법적 판단을 담은 보고서를 9명의 재판관 전원에게 수시로 제출하는 등 재판관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준다. 연구관들이 올리는 자료는 모두 김승대 연구부장을 거쳐 재판관들에게 전달된다. 김 연구부장은 경남고-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2000년 서울지검 남부지청 형사6부 부장검사로 검찰에서 퇴직한 뒤 2001년부터 헌재에서 일하고 있다.
헌재가 노 대통령 측근비리 관련 혐의자들인 최도술, 안희정, 여택수, 신동인씨를 증인으로 채택한 것도 주목을 끈다. 탄핵심판 대상은 ‘직무와 관련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때’로 규정되어 있다. 소추위원 대리인인 한나라당 김용균 의원은 기자에게 “대통령이 비록 검찰에 기소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통령의 형사법률 위반 여부를 자체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추위원측은 4명의 증인 중 특히 최도술씨를 주목한다. 다른 3명이 “노 대통령은 측근비리에 직접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최씨는 2004년 1월15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 공판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기 때문이다. “2003년 2월 노 대통령 고교 선배인 이영로씨에게서 (불법자금) 10억원을 받아 이중 5억원을 (노무현 대통령 개인 채무 변제용으로) 선모씨에게 줬다. 이 역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알았다’고 말했다.”
최도술씨 진술을 헌재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가 일차적 관심 대상이 될 듯하다. 그러나 헌재 관계자는 소추위원측 기대와는 사뭇 다른 설명을 했다. “‘선거법 위반’ ‘측근비리’ ‘경제파탄’ 등 청구인이 주장한 탄핵사유에 대해 사실관계를 먼저 수집하겠다는 기술적 차원에서 증인들을 채택한 것으로 안다. ‘측근비리도 탄핵심판 대상이 됐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해석이다.”
탄핵심판의 변수는 17대 국회에서도 나올 수 있다. 탄핵심판의 정식 명칭은 ‘2004헌41 대통령(노무현) 탄핵’이다. 청구인은 ‘국회 소추위원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되어 있다. 피청구인은 ‘대통령’이다.
헌법재판소는 1년에 1000여건을 처리한다. 그런데 ‘헌법소원 심판청구’ 등 일반적인 헌재 심판의 경우 심리 도중 청구인이 청구를 철회함으로써 심판이 취하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 탄핵심판도 철회될 수 있을까.
대통령 탄핵안의 청구인은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되어 있다. 우선 ‘현 청구인인 김기춘 법사위원장(한나라당)이 17대 국회에서 법사위원장이 되지 못할 경우에도 청구인 자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헌재측은 “답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의원이 법사위원장이 될 경우, 그가 바뀐 청구인이 되어 탄핵심판청구 철회를 요청하면 헌재는 받아들이겠는가”라는 질문을 이어서 던져봤다. 헌재 관계자는 “대통령 탄핵은 선례가 없다. 난감한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헌재 내부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헌재 관계자는 “주선회 주심에게 17대 국회 들어서 국회 법사위원장이 바뀌는 상황에 대해 질의한 바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주 주심은 “그때가 되어봐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일”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17대 국회는 6월1일 개원 직후 의장선출 및 상임위 구성에 들어간다. 헌재 관계자는 “향후 증거 채부(採否), 변론종결, 평의, 결정문 작성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5월 말쯤 대통령 탄핵심판이 종결될 수도 있지만 훨씬 길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비밀이 지켜질까
통상적인 헌법재판소 절차에 따른다면 ‘법정’에 해당되는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탄핵여부가 공표된다. 9인 재판관 중 6인 이상이 탄핵안에 찬성하면 대통령은 파면되나 그렇지 않을 경우 탄핵안은 기각된다. 이 자리에서 헌재의 최종 선고와 그 사유를 담은 결정문이 공식적으로 나온다. 결정문엔 찬성 이유와 반대 이유가 각각 들어간다.
그러나 대심판정에서의 공표 이전에 재판관들은 대통령 탄핵 여부를 이미 결정해놓은 상태다. 여기서 탄핵 심판의 또 다른 변수인 ‘시차’ 문제가 발생한다. 통상 헌법재판소는 9인 재판관의 마지막 평의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평의는 격주로 목요일에 회의실에서 비공개로 열린다. 한편 대심판정의 선고일은 매월 마지막 목요일이다. 따라서 대통령 탄핵 여부를 최종 결정해놓고도 선고까지 길게는 수 주일이 걸릴 수도 있다. 그 사이 재판관들은 선고 이유를 담은 결정문을 작성하게 된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1995년 11월 발생한 한 사례를 상기시켰다. 검찰의 5·18 관련 피의자 불기소사건에 대한 헌법소원이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평의에서 “5·18 관련 피의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결정문 내용이 언론에 유출돼 보도되는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이를 접한 청구인들이 청구를 취소해버렸고 헌법소원 심판청구는 취하됐다. 심판결과가 외부에 새나가면서 최종 결정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헌재 관계자는 “결정이 내려진 이후 여건 변화로 헌재 스스로 그 결정을 번복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헌재측은 이번 대통령 탄핵심판의 경우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있다. 대통령 탄핵여부를 최종 결정한 날로부터 실제 선고일까지 비밀이 유지될 수 있느냐가 관건. “청와대, 정부, 국회, 법조 및 각계의 관심이 워낙 높고 언론의 취재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비밀유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선고 전 헌재 결정이 유출될 경우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이 일지는 예측불허다. 헌재 관계자는 “특수한 상황인 만큼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