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간염에 에이즈까지… 구멍 뚫린 혈액관리

‘혈액장사’ 비판받는 적십자사

  • 글: 최영철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04-28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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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십자사 내부 제보자들이 검찰에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적십자사의 ‘혈액 안전 불감증’은 심각한 지경이다. 2년에 걸쳐 4회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의 혈액이 이후 한 차례 음성반응이 나왔다는 이유로 병원에 공급됐다. 또한 B형 C형 간염 양성반응을 보인 ‘헌혈유보군 혈액’도 각 병원과 제약사에 공급됐다.
    간염에 에이즈까지… 구멍 뚫린 혈액관리

    백혈병을 앓고 있는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상덕 감사가 4월1일 대한적십자사 앞에서 불량혈액을 유통시킨 데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3월28일 감사원이 발표한 대한적십자사의 혈액안전 관련 감사 결과는 온 국민을 ‘혈액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당장 적십자사의 ‘도덕적 해이’를 탓하는 사람들은 감사 결과와 아무 관련이 없는 헌혈 자체를 거부하고 나섰고, 자신이 낸 적십자 회비 5000원을 환불해달라며 적십자사를 괴롭히는 ‘열성’ 회원도 줄을 잇고 있다. 한편 적십자사의 혈액 비리를 최초로 고발한 공익제보자들은 이번 감사를 빙산의 한 파편에도 이르지 못한 ‘부실감사’라고 증언한다.

    ‘과거 혈액 검사에서 에이즈 양성반응을 보인 헌혈 부적격자 99명의 혈액 309건이 수혈용과 의약품 원료용으로 각 병원과 제약사에 공급. 예전 혈액검사에서 B형 간염과 C형 간염에 1회 이상 양성 반응을 보인 헌혈 부적격자 혈액 7만6369건이 시중 병원과 제약사로 유출. 이들 혈액을 수혈한 환자 중 실제 9명이 간염에 감염. 에이즈 환자 199명의 신상정보에 오류 발생, 이에 따른 에이즈 감염 혈액 유통 가능성 제기 등….’(감사원 감사 결과 요약)

    때마다 예산지원을 하면서도 정부에 징계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피감사기관인 적십자사는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대해 ‘웬 소란’이냐는 반응이다. “출고된 혈액의 대부분은 전혀 문제가 없다”며 감사 결과를 정면 반박한 적십자사는 “자체 추적 결과 수혈사고로 확인된 B형과 C형 간염 감염자 9명에 대해선 문제를 일으킨 선별 헌혈시스템이 완비됐기 때문에 향후 똑같은 실수란 없다”며 오히려 큰소리치고 있다. 일간지에 낸 사과문과 해명서 어디에도 수혈 사고 피해자에 대한 진지한 사과나 보상에 관한 내용은 없다.

    지난 8개월여 동안 적십자사의 ‘부실한 혈액관리’ 실태와 ‘도덕적 해이’ 현상을 취재해온 기자와 그 취재를 도운 적십자사 내부 제보자들에겐 이번 감사의 내용이나 그에 대한 적십자사의 ‘비양심’적 대응이 전혀 새롭지 않다.

    감사원 감사결과는 빙산의 일각



    그동안 기자와 제보자들은 적십자사의 ‘오염혈액 유출’과 ‘혈액장사’ 실태의 베일을 벗겨나갈 때마다 금세 드러날 거짓말을 해 놓고도 도리어 언론을 ‘협박하는’ 적십자사의 생리를 생생히 경험해 온 터였다. 적십자사는 감사원의 감사결과가 나오자 기자에게 내부 자료를 유출했다는 빌미로 오히려 제보자들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정작 기자가 이번 감사 결과에 별다른 충격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현재 밝혀진 감사 결과보다 앞으로 드러날 더 놀라운 혈액관련 비리가 고구마줄기처럼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캐기만 하면 끝도 없이 올라올 적십자사의 ‘혈액 비리’는 이제 새로운 수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감사원의 이번 감사는 유출되어서는 안 될 혈액이 공급되었다는 사실만 늘어놓았을 뿐 문제의 혈액을 수혈받은 환자나 그 혈액으로 만든 혈액제제를 먹은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는 핵심 결론부분이 빠져 있다. 장전만 하고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꼴이자 뇌관이 터지지 않은 불발 감사였던 셈이다. 적십자사가 ‘그러니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식으로 국가기관의 감사를 무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혈사고로 확인된 10명(적십자 주장 9명)의 간염 감염자도 감사원이 직접 밝혀낸 것이 아니라 언론이 먼저 이를 밝혀내자(‘주간동아’ 424호 단독보도) 적십자사가 어쩔 수 없이 진실을 토해낸 경우다.

    이번 감사가 서류나 전산상에서 이루어진 ‘앉은뱅이 감사’로 끝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감사원은 문제가 된 혈액이나 혈액제제에 대한 역학조사 권한이나 능력이 없을 뿐더러 역학조사 권한과 인력을 확보한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옛 국립보건원)를 동원할 ‘힘’이 사실상 없다. 힘은커녕 역학조사를 벌일 의지 자체가 없었다.

    감사원은 자신들이 밝혀낸 ‘진실’이 ‘혈액 유통 비리’라는 거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감사원은 혈액비리의 뿌리까지 파헤쳐 발본색원할 경우 공기업 성격을 띤 적십자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국가 혈액유통 체계가 일시에 붕괴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세부 감사를 포기해버렸다.

    내부 제보자들, 검찰에 자료 제출

    감사원의 이번 감사결과는 정식 기자회견을 거친 것이 아니라 적십자사에 통보된 감사결과를 모 기관에서 언론에 흘리면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공개된 것이다. 감사원측은 이후 “감사결과 발표를 두고 일반 국민들이 받을 충격 때문에 고민한 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또 적십자사를 관리·감독해야 할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는 적십자사와 ‘같은 배를 탄 비리의 운명공동체’로서 그들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감사원의 감사가 오히려 적십자사의 조직적 비리구조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에서 가장 힘 있는 두 조직이 적십자의 ‘혈액 비리’ 척결에 나섰다. 바로 지난 2월과 3월 검찰과 국세청이 적십자사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와 세무조사에 각각 들어간 것. 그것도 보건범죄 수사에는 가장 베테랑이라는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부장검사 김병화) 소속 보건담당 검사 3명과 국세청 본청 특별조사팀이 투입됐다. 적십자 10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일단 검찰의 수사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검찰은 최근 감사원의 감사결과를 이첩받은 한편 고소인 조사를 마쳤다. 사실 검찰이 적십자사의 혈액관련 비리에 대한 수사에 나선 이유는 지난해 10월 건강세상네트워크 등 보건의료 관련 시민단체가 적십자사를 혈액관리법과 에이즈 예방법을 위반한 혐의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관망자세를 보이던 검찰은 감사원의 감사가 끝나고 부패방지위원회와 청와대의 강력한 수사 촉구가 이어지자 태도가 급변했다. 지난 2월과 3월 오염혈액 유출과 관련한 고소인 조사를 서둘러 끝마친 데 이어 적십자사 내부 제보자를 불러 적십자사의 혈액사업 비리와 관련된 방대한 증거와 자료 수집에 나선 것. 제보자들은 “검찰이 요구하는 모든 자료를 제출했다. 어떤 자료가 어느 부서에 있는지를 자세히 묻는 것으로 보아 (적십자사) 본사와 혈액사업본부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검찰이 제보자로부터 입수한 자료는 모두 일반인이 보면 기절할 정도의 충격적인 자료들을 담고 있다. 이들 제보자는 각 혈액원에서 헌혈과 혈액관리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다. 인원은 모두 4명이며 혈액의 모집, 검사, 공급과 관련한 비리를 증명할 수 있는 내부문서를 지난해 8월부터 현재까지 기자와 시민단체에 지속적으로 제공해왔다. 다시 말해 이들이 제공한 자료를 보면 적십자사 혈액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의 얼개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내부 제보자가 검찰에 제출한 자료들은 어떤 것일까?

    에이즈 환자 혈액을 병원에 공급

    검찰에 제출된 적십자사 각 혈액원의 자료에 따르면 혈액관리법상 유통이 절대 금지된 ‘부적격 혈액(에이즈 양성 반응 유경험자의 혈액)’, 즉 ‘헌혈 일시 유보군(TI)’ 헌혈자의 혈액이 수혈용과 의약품 제조용으로 전국의 각 병원과 제약사에 공급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98년부터 2003년 최근까지의 혈액 관련 정보를 담은 이 자료에는 5년 간에 걸친 헌혈자의 혈액 상태와 이동경로가 고스란히 정리돼 있으며, 60여명에 달하는 에이즈 양성 반응 유경험자의 혈액이 70여차례나 병원과 제약사에 불법 공급된 것으로 적시돼 있다. 헌혈로 들어온 혈액은 통상 적혈구와 혈소판, 혈장으로 분리돼 적혈구와 혈소판은 환자의 수혈용으로 쓰이고, 혈장은 제약사로 보내져 알부민, 글로불린, 혈우병 치료제제 등으로 만들어진다.

    ‘헌혈 일시유보군’이란 혈액관리법상 적십자사 산하 혈액원 자체 검사(효소면역 검사법)에서 한 번이라도 에이즈 양성 반응을 보인 적이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별도의 해제 절차를 밟지 않는 한 헌혈이 금지돼 있다. 따라서 효소면역 검사 결과 양성 반응이 나온 혈액은 그 즉시 모두 폐기해야 하며, 설사 일시적으로 음성 반응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들의 혈액은 ‘부적격 혈액’으로 묶여 유통이 일절 금지된다. 이중 국립보건원으로부터 에이즈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에이즈 환자)의 혈액은 ‘헌혈 영구유보군’, 즉 ‘PI’로 등록돼 유통이 그 어떤 경우에도 허락되지 않으며, 헌혈 자체도 ‘영원히’ 거부된다.

    하지만 적십자사 혈액원은 검사 결과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경험이 있는 헌혈 일시유보군의 혈액을 일시적으로 음성 판정을 받았다는 이유로 유통시켰다. 불법 유통시킨 혈액에 관한 혈액정보 자료에는 분명히 헌혈유보군 표시란에 유보군에 해당하는 표시 ‘TI’가 명시돼 있으며, 혈액의 상태를 표시하는 란에는 ‘부적격’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씌어져 있다. 이중에는 2년에 걸쳐 4회나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의 혈액이 이후 단 한 차례 음성 반응이 나왔다는 이유로 각 병원에 공급된 사례도 있다. 심지어 검사 결과가 음성, 양성을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음성 판정이 나올 때는 헌혈유보군의 혈액(부적격 혈액)을 유통시켰다.

    부적격 혈액이 병원에 환자 수혈용으로 공급될 뿐만 아니라 혈장 분획을 통해 제약사에 공급된 경우도 부지기수다. 내부 자료를 보면 혈액원 자체 검사 결과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지 6∼7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헌혈유보군 대상자의 혈액을 혈장 분획을 통해 제약사로 내보낸 사례도 있다.

    이에 대해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측은 “자체 재검사를 통해 헌혈유보군에서 해제된 혈액들”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확인 결과 그 중 재검사를 통해 헌혈유보군에서 해제된 헌혈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적십자사가 또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전산관리대장에서 빠진 헌혈영구유보군

    물론 적십자사의 주장처럼 헌혈 일시 유보군 대상자의 혈액이 모두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헌혈한 사람 중 효소면역 검사법에 의해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국립보건원에서 정밀검사를 통해 ‘진(眞) 양성’ 판정을 받아야만 에이즈 환자로 확정되기 때문.

    하지만 거꾸로 일시유보군의 혈액이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확증도 전혀 없는 상황이다. 보통 적십자사의 자체 검사(효소면역법) 결과 에이즈 양성으로 나온 사람 중 2∼5%(혈액원 주장 1%)가 국립보건원에서 에이즈 확진자로 판정되는데 이중에는 잠복기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지난해 1월 60대 수술 환자 2명(1명 2004년 3월 사망)에게 공급돼 에이즈를 감염시킨 최모 일병(22)의 혈액도 헌혈 당시 에이즈 검사에서 음성으로 나왔지만 추후 확인 결과 에이즈 바이러스 잠복상태였다.

    간염에 에이즈까지… 구멍 뚫린 혈액관리

    당장 수혈용 혈액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길거리 헌혈을 통한 의약품 원료용 혈장성분 채혈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적십자사.

    검찰에 제공된 자료에는 에이즈 감염 우려자가 아닌 에이즈 확진자, 즉 에이즈 환자의 혈액이 시중에 공급됐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자료도 포함됐다. 적십자사가 2000∼2002년 사이에 에이즈 감염자 10명과 판정 보류자(미결정자) 13명 등 혈액의 유통은 물론 헌혈 자체를 완벽하게 통제해야 할 23명의 헌혈 영구유보군을 전산관리대장에서 누락했다는 자료가 바로 그것. 미결정자는 국립보건원의 에이즈 확진 검사 결과로 보아 감염이 극히 우려되지만 감염자인지 아닌지 정확히 구별되지 않아 판정이 잠정적으로 보류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혈액전산관리대장에서 빠진 에이즈 감염자와 미결정자는 연도별로는 2000년에 양성 판정자(감염자) 3명, 미결정자 1명, 2001년에 양성 판정자 3명, 미결정자 3명, 2002년에는 양성 판정자 4명, 미결정자 9명이었다. 즉 절대 유출이 금지된 헌혈 영구유보군 혈액이 그동안 혈액 유출로 인한 사고가 잇따른 일시유보군으로 잘못 등록된 것. 이번 자료는 단 3년 사이의 자료로, 그 이전과 이후 자료에 대한 확인작업을 벌이면 더욱 많은 자료가 누락된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적십자사 전산관리대장의 영구유보군 명단에서 에이즈 감염자의 정보가 누락되면 실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적십자사측은 “이들이 ‘PI’, 즉 영구유보군으로 등록되지 않아도 보건원측에 최종검사를 의뢰할 당시 이미 일시유보군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혈액이 수혈용이나 혈액성분 제제 원료용으로 제약사에 공급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적십자사가 혈액관리법상에 규정된 부적격 혈액의 유통 금지 조항이나 자체 헌혈유보군 지침을 잘 따랐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과거 에이즈와 간염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인 적이 있는 일시유보군 헌혈자의 혈액 7만6000여건을 무단으로 유출한 적십자사의 이런 변명을 믿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쨌든 적십자사는 지난해 10월에서 올 1월까지 계속된 적십자사 자체 수혈감염 추적조사에서 에이즈 감염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발표했고, 감사원도 적십자사의 자체 조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스스로 수사를 하게 하고 그 결과를 그대로 믿은 셈이다.

    말라리아 감염 수혈사고 숨겨

    에이즈만이 아니다. 검찰에 제출된 문건들 중에는 B형 간염과 C형 간염, 말라리아, 심지어 성병인 매독에 대한 검사에서 1차 양성 반응을 보인 헌혈유보군 혈액, 즉 유통 부적격 혈액 수만 건이 각 병원과 제약사에 공급됐다는 자료도 포함됐다. 적십자사는 이중 자체 추적결과 10명이나 B형과 C형 간염에 감염된 사실을 밝혀냈지만 말라리아의 경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추적조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적십자사는 지난해까지 말라리아에 대해서는 “한 건의 수혈사고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 검찰에 제출된 자료에는 적십자사에서 유출한 부적격 혈액을 제공받고 지금껏 10명의 환자에게 수혈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밝힌 대한수혈학회의 논문이 포함돼 있다. 적십자사는 혈액안전관리 부장이 대한수혈학회 총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이런 사실을 숨겼다. 수혈로 인한 말라리아 감염자는 생후 4개월짜리 영아 등 3명이 만 1세 미만 유아였고, 68세 노인도 끼여 있었다. 지역별로는 서울 3명, 경기 울산 각 2명, 부산 경남 대구 각 1명이었다. 수혈감염의 원인이 된 헌혈자는 모두 9명으로, 그 중 현역군인이 4명, 제대군인이 3명 등 전방 군부대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된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나머지 두 명은 당시 말라리아 유행 지역이던 경기도 고양시 주민과 파주시를 2박3일 동안 여행한 사람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적십자사가 수혈 감염자를 찾아내고서도 이에 대해 제대로 보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취재 결과 적십자사는 10명의 감염자 중 4명에게만 보상을 하고 나머지 6명에게는 치료비는커녕 위자료 한푼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적십자사의 헌혈 및 수혈사고 보상위자료 지급 시행규칙에는 수혈 감염자에게 ‘상병보상위자료’를 지급토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를 무시한 것이다.

    검찰 수사가 주로 수혈사고에 집중돼 있다면 국세청 세무조사는 적십자사의 방만한 혈액사업 경영, 특히 적십자사로부터 의약품의 원료를 공급받는 제약사의 비자금 조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적십자사와 제약사간의 비자금 커넥션에 대해서는 국세청과 검찰이 공조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사실이 알려지자 일반인들은 구호, 봉사 시민단체인 적십자사에 대해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할 게 무엇이 있냐고 의아해한다. 하지만 이는 동전의 한쪽 면만을 보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적십자사는 정식으로 사업자 등록증을 받은 제약업체다. 그것도 대체 의약품이 전혀 없는 혈액이라는 ‘완전 의약품’ 시장을 98%나 장악한 독과점 업체. 한마디로 적십자사는 공짜로 피를 뽑아 이문을 챙기는 혈액사업계의 ‘봉이 김선달’이다.

    헌혈을 통해 적십자사에 들어온 1명분의 혈액(전혈, 400㎖ 기준)은 3만5390원에 각 의료기관에 팔려나간다. 의료기관은 이를 환자에게 공급한 뒤 구입가격에 5180원을 붙인 4만570원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보험수가 명목으로 받아낸다. 물론 이는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로 지불된다. 만약 이 혈액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 적혈구농축액(2만3380원), 신설동결혈장(2만4910원), 혈소판농축액(2만8230원)으로 분리하면 가격은 2배가 넘는 7만6520원으로 훌쩍 뛴다.

    군인 단체헌혈의 비밀

    이뿐 아니다. 적십자사는 혈액 중 혈장만을 따로 뽑아 만든 혈액성분 제제의 원료를 제약사에 공급하면서 4만5500원(1명분)을 따로 벌어들인다. 적십자사 혈액사업본부 산하 혈장분획센터에서 만들어진 혈액성분 제제 반(半)제품은 국내 2개 제약사에 공급돼 엄청난 이윤이 붙은 뒤 환자들에게 공급된다. 심지어 외국에서 들여오는 혈장성분 제제의 수입판매권도 모두 적십자사에 있으며 적십자사는 여기서 5%의 수익금을 뗀 뒤 각 제약사로 이를 공급한다.

    적십자사가 수혈용 채혈이 일절 금지된 말라리아 감염 우려 지역인 전방부대 군인에 대해 단체헌혈을 강행하는 이유도 성분제제를 만들 혈장을 따로 뽑아(성분채혈) 제약사에 팔기 위해서다. 적십자사는 수혈용과 달리 성분채혈로 뽑아낸 혈장이 약품 제작과정에서 불활성화 처리에 의해 말라리아균이 모두 죽는다는 이유로 전방 군인에 대한 단체헌혈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배경을 두고 온갖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적십자사에서 혈장성분 제제를 반제품 상태로 제약사에 공급하면서 손실률을 감안해 10% 정도를 더 얹어주는데 제약사로서는 이를 굳이 장부에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약사가 이를 완제품으로 만들어 팔면 그야말로 ‘합법적인’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제약사 사장은 이것을 가지고 골프장을 짓기도 하고, 적십자사에 대한 로비 자금으로도 사용했죠. 적십자사가 단체헌혈에 매달리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D제약 전 대표 김모씨)

    김씨의 이야기는 실제 2000년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으나 당시 검찰의 보강수사 지시로 기소가 미뤄진 상태다. 김씨는 이를 민사소송으로 돌려 비자금 부분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중이다. 국세청과 검찰은 이번에 이 부분을 집중 추궁할 것으로 보인다.

    적십자사가 지난해 이렇게 국민에게서 혈액을 ‘공짜’로 뽑아 벌어들인 수입은 무려 2238억원. 적십자사 전체 수입의 70%를 차지한다. 하지만 적십자사는 지난해 혈액사업에서 36억원 가량의 적자를 기록했다. 도대체 적십자사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을까. 적십자사가 헌혈자에게 주는 것이라곤 음료수와 빵, 과자 부스러기뿐. 적십자사는 이를 구입하기 위해 헌혈자 1인당 3000원의 헌혈 장려금을 비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적십자사의 내부 제보자들과 적십자사 출신 의사들은 한결같이 헌혈 장려금이 다른 곳으로 새고 있다고 증언한다.

    “제약사로 보낼 혈장을 단체 채혈하기 위해 군부대 장교식당에 에어컨과 냉장고를 사주고, 국민의 피로 벌어들인 돈으로 술접대를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렇게 접대를 받은 군 장교들은 헌혈한 병사들 중에서 에이즈 환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어 자세한 검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아요. 할 수 없이 제가 사비를 들여 군부대에 가서 해당 장병의 혈액 샘플을 받아오곤 했죠.”(인천혈액원 의무실장 출신 전문의 김명희씨)

    爲人設官에 문어발식 경영

    국민의 피를 뽑아 마련한 적십자사의 살림살이가 이렇듯 적자를 면하지 못하는 데는 적십자사의 방만한 경영도 일조를 한다. 적십자사는 국민의 공적부조(혈액과 성금)로 운영되면서도 2002년 4월 적십자사 산하 혈액관리국에 혈액사업본부를 따로 만들고 그 운영을 위해 16개 혈액원에서 혈액 수익금의 15%를 갹출하도록 했다. 거기다 재정적 권한도 없는 2년 계약직 혈액사업본부장(의사) 밑에 부본부장을 둔 위인설관(爲人設官)식 조직구조를 만들어 또 하나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실질적으로 일은 행정직인 부본부장이 다 하는데도 본부장에게 판공비와 고급 승용차, 비서까지 제공한다.

    적십자사 내부 고발자 김모씨는“1990년대 전국의 혈액원이 16개로 늘어난 것도 모두 혈액원장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문어발식 확장이었다”며 “실질적으로 혈액원은 전국에 6∼7개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혈액원장은 영업용 차량이라는 명목으로 자가용을 제공받고 비서도 두고 있다. 그뿐인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6개월이나 유급 공로휴가를 주고 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혈액 유출사고의 책임을 지고 3월15일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서울 남부혈액원장은 12월이 정년이지만 징계가 결정된 이후 3개월간 병가를 내고 벌써부터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

    과연 검찰과 국세청은 적십자사 ‘혈액 비리’의 터지지 않는 뇌관을 건드릴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번에도 감사원의 감사처럼 ‘죄’는 있는데 ‘처벌’은 없는 결과가 벌어진다면 수혈용 혈액과 혈액 관련 의약품을 모두 외국에서 수입해서 써야 하는 ‘혈액 대란’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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