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아이에겐 약안(잔 다르크)처럼 되라며 ‘애국부인전’을 쥐어주고, 남자아이에겐 민족의 영웅 이순신 전기를 읽히던 시대. 20세기 초 영웅대망론에 빠진 조선인들은 히틀러 같은 엽기적인 지도자마저 환영했다. 4월호에 이어 ‘20세기 풍미한 영웅대망론’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진다.
문예봉은 인기 상한가를 치던 1936년 잡지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어떤 역을 연기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그 여자의 일생’의 이금봉 역을 해보고 싶다면서 ‘내가 미모와 재주에 있어 이금봉에 미치지 못하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당시 문예봉은 한국적 미와 지성을 겸비한 배우로 꼽혔는데 소설의 주인공 이금봉의 재색은 그보다 더 대단했다는 것이다.
한편, 목포 출신 여가수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과 ‘신계곡산’을 히트시켜 톱가수가 된 것은 1935년이다. 그의 나이도 불과 스물. 이난영은 월간 ‘삼천리’에서 실시한 인기가수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난영의 취미는 독서였고 인터뷰 당시 그녀가 ‘눈물과 감격’으로 읽던 책은 ‘그 여자의 일생’이었다. 이난영 또한 이금봉의 운명에 깊이 감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예봉, 이난영 같은 대스타들을 감격시킨 ‘그 여자의 일생’은 어떤 소설이며 그 주인공 이금봉은 누구인가?
‘그 여자의 일생’은 이광수가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이듬해 단행본으로 발간하여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전형적인 ‘여자의 일생’형 구조를 가진 소설에서 이금봉은 하늘이 내린 미모와 청순함을 타고났다.
그러나 하늘은 서울 계동 출신의 이 미녀에게 미모뿐 아니라 비극적 운명까지도 선사했다. 금봉은 사랑에 실패하고 돈 있는 남자들 사이에서 비싼 값에 팔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가 아들까지 뺏긴 뒤 결국 비구니가 된다. 당시 젊은 여성들은 그저 청순가련하고 수동적이기 그지없던 이런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이금봉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 태어났다. 이금봉의 어린 날 별명이 ‘약안’ ‘라란’이다. 금봉의 집에 드나들던 남자 어른들이 “금봉아, 너는 자라서 라란 부인이나 약안 부인처럼 되어라”고 했던 것이다. 이금봉이 닮고 싶었지만 닮을 수 없었던 라란, 약안 부인은 누구일까.
중국·일본에서 수입된 영웅관
민족적 혹은 한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혀 보면 영웅주의나 영웅대망론은 전쟁과 살육으로 가득 차 있던 당대 세계인의 인식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인들도 영웅주의에 감염되어 있었다고 한다.
영국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이 1841년에 발표한 ‘영웅숭배론’은 전유럽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칼라일은 이 책에서 ‘인간이 이뤄낸 세계사란 근본적으로 영웅들의 역사이며, 세계가 이룬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것은 모두 영웅들의 활동 결과물’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범인(凡人)은 진정한 영웅을 발견하고 그에게 복종할 의무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칼라일의 책은 유럽에 전체주의가 출현하는 지적 배경이 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이상 칼라일 저, 박상익 역, ‘영웅숭배론’, 소나무, 1997년 참조).
칼라일이 내세운 영웅주의는 종교적이며 문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가 분류한 6개의 영웅 중에는 ‘신으로 나타난 영웅(오딘)’ ‘예언자로 나타난 영웅(마호메트)’ ‘성직자로 나타난 영웅(루터)’ ‘제왕으로 나타난 영웅(크롬웰·나폴레옹)’뿐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포함된 ‘시인으로 나타난 영웅’, 루소가 포함된 ‘문인으로 나타난 영웅’도 있다. 칼라일은 도덕적 교화가 영웅이 범인을 설득하여 복종하게 만드는 가장 유력한 매개라 보았고, 그런 점에서 예수야말로 완벽한 세계사적 영웅이라 했다.
칼라일은 도덕적이며 문화적인 면의 ‘교화력’까지 영웅의 요건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영웅주의가 전체주의의 밑바탕이 됐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전체주의는 항상 엄숙하고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중의 교화, 즉 자발적 복종을 필수적인 요소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서양사의 영웅과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잔 다르크 등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이 유럽에서 독자적으로 수입한 것이 아니었다. 지적 문물의 대다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
한국에서 씌어진 잔 다르크 전기 ‘애국부인전’의 표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충신을 생각한다 하였으니 한국은 충신을 생각하는 시대요, 비상한 인물이 있은 연후에 비상한 사업을 성취한다 했으니 한국은 비상한 인물을 요구하는 시대로다. 슬프다. 우리 이천만 동포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아! 무슨 연고로 오늘날까지 황제의 은혜를 갚고 백성을 구하는 영웅이 나지 아니하느뇨.(최석하, ‘한국이 희망하는 인물’,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4일 논설)
우리가 꼽는 한국사와 세계사상의 영웅·위인들이 이때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았고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와 동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웅을 부르짖는 윗글은 “미국의 독립은 워싱턴을 기다려서 그 목적을 달성했고 독일의 통일은 비스마르크를 기다려 그 뜻을 성취하지 않았던가?”라는 구절과 잇대어 있다.
참으로 괴이하다. 저와 같은 생각의 구조란, 혹은 말하기(담론)의 방법이란 무엇인가. 당장의 상황이 너무나 급한데 만리 바깥에 있는 나라의 죽은 영웅을 불러내는 것이 제대로 된 지식인의 임무랄 수 있는가, 가진 것은 입밖에 없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인가. 아니면 전거(典據)에 기대어 생각하는 전통적 지식인의 습관인가.
애국에는 남녀가 없다
나폴레옹 외에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는 화성돈(워싱턴), ‘철혈’로 근대 독일을 만든 비사맥(비스마르크)이 일부 조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영웅이 됐다. 이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근대 국가의 국부(國父)였기 때문이다. 그 수단이나 후과(後果)야 어떠했든 간에 일단 단결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가리발디나 마치니, 미국의 링컨도 조선 사람이 기억하는 서양 이름이 되었다.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은 여성 영웅이다. 20세기 초 계몽주의자들은 나라를 구하거나 새로 세우는 일을 거들 존재를 찾아냈다. 바로 여성이다. 여성은 ‘애국’의 필요성 때문에 남성들에 의해 호출됐다. 그리하여 이 시기 한국사상 처음으로 여성 계몽과 양성 평등의 문제가 제기됐다.
이러한 새로운 생각을 구체화하고 대중적으로 선전하려면 적당한 대상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외국의 예를 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 역사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선 여성은 없었거나, 아직 보이지 않았다.
마침 프랑스에 적당한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중세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를 구한 소녀 잔 다르크이고, 또 한 사람은 프랑스 대혁명기 지롱드당 지도자였던 잔 마리 롤랑(1754~93)이다. 잔 다르크는 약안(若安)이라는 이름으로, 잔 마리 롤랑은 라란(羅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한동안 애국자와 여학생들의 필독서였던 두 책의 주인공이 되었다. 바로 ‘애국부인전’(1908)과 ‘나란부인전’(1907)이다. 그래서 문예봉이 닮고 싶었던 ‘그 여자의 일생’의 여주인공 이금봉에게 동네 어른들은 커서 약안이나 라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했던 것이다.
특히 잔 다르크가 중요했던 듯하다. 알다시피 잔 다르크는 프랑스의 국가 영웅이다. 그녀는 1429년 이팔청춘 처녀의 몸으로 신의 부름을 듣고 프랑스를 침범한 영국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2년 뒤 신성모독, 우상숭배, 이단, 유혈선동, 남장 등의 혐의로 종교재판에 회부됐고 주교가 주재한 종교재판에서 ‘마녀’ 판정을 받아 결국 화형장의 재로 사라졌다.
잔 다르크는 그저 전설과 동화의 신비한 주인공이었다가 19세기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러 국가적 영웅이 됐다. 이 시대에 잔 다르크는 못된 봉건군주와 귀족, 타락한 성직자 등에 대항한 공화주의적이며 민중적인 영웅으로 해석되었다. 수없이 많은 논쟁과 아전인수의 역사를 거친 잔 다르크는 오늘날 프랑스의 좌우파가 다 이용하고 싶어하는 ‘애국’의 상징이다(성백용, ‘잔 다르크-프랑스의 열정과 기억의 전투’, 역사비평 2004년 봄호 참고).
한국적 여인상에 꿰맞춘 잔 다르크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특히 ‘애국부인전’이 많이 읽힌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나타난 잔 다르크의 면모는 자못 흥미롭다. 프랑스 처녀 잔 다르크가 한국화된 것이다. 비록 ‘약안’이라는 이름은 중국어 음차 그대로 두었지만, ‘애국부인전’의 저자는 능란하게 잔 다르크를 한국적인 여인으로 컨버전했다. 그래서 이 소설 또한 나폴레옹의 예처럼 대중적 상식이 창출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약안은 “점점 자라매 부모께 효순(孝順)하며 한번 가르치면 모를 것이 없으며 또한 상제(上帝: 하느님)를 믿어 성경을 항상 읽으며 학문에 능통”했다. 그리고 17세가 되자 “화용월태(花容月態)를 규중(閨中)에 길러 봉용한 태도와 선연한 풍채 진시 경성경국의 미인이” 됐다. 이는 “길동이 점점 자라 팔세 되매 총명이 과인(過人)하여 하나를 들으면 백(百)을 통하니”로 시작되는 ‘홍길동전’을 비롯한 한국 고전소설이 취하는 전형적인 인물 수사법이다. 당시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필법을 구사하여, 경국지색이고 효녀에다 머리까지 좋은 완벽한 여인으로 여주인공의 면모를 그려낸 것이다.
그런데 약안, 즉 잔 다르크는 전통적인 가인(佳人)이자 효녀일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여성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특별히 약안을 ‘정덕(貞德)’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한탄했다. “아깝도다, 정덕이 만약 남자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나라를 위하여 큰 사업을 이룰 것이어늘 불행히 여자가 되다니!”
그러자 약안은 “남녀가 평등하거늘 어찌 남자만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고 여자는 능히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지 못할까?” 하고 반박한다. 애국에 남녀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약안은 프랑스군의 원수(元帥) 자리에까지 오른다.
‘애국부인전’은 당대 역사 전기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영국군이 프랑스 아리안성을 침범한 사실을 그리면서 “이때 아리안성은 도마 위의 살점이오, 가마 안의 고기라 어찌 위태하지 아니하리오. 옛적 우리나라 고구려 시대에 당 태종의 백만 군병을 안시성 태수 양만춘이 능히 항거하여 100여일을 굳게 지키다가 마침내 당병(唐兵)을 물리치고 평양성을 보전하였으며”라 썼다. 프랑스사를 한국사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다음과 같은 말에 이어진다. “고려 강감찬은 수천 병(兵)으로 거란 소손녕의 30만 병을 물리치고 송격을 보전하였으니 법국은 이때에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 같은 충의 영웅이 뉘 있는고?”
흥미롭지 않은가. 당대의 저술가, 지식인들이 외국의 영웅을 소개하고 나선 것은 ‘한국의 나파륜’이나 ‘한국의 비사맥’을 찾기 위함인데 ‘애국부인전’은 역으로 한국사의 사실을 내세워 ‘프랑스의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에 잔 다르크를 비유하고 있다. 이렇게 뒤집어진 수사는 영웅 출현의 절실함을 한층 강조한다.
유관순과 추 다르크
유관순
유관순과 잔 다르크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각각 대중을 이끌고 이웃 나라의 원수들과 싸워 공을 세웠지만 결국 패배한다. 고문을 받고 잔인하게 처형당한다. ‘10대의 순결한 처녀’였다는 점은, 그녀들이 지닌 비극적 영웅의 면모를 악의 무리와 더욱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그리고 순결성이라는 10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기대어 한민족은 모두 유관순 누나의 순진한 남동생이 됐다. 순진한 자만이 민족의 순수를 위해 앞뒤 재지 않고 적과 싸울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추미애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이 왜 ‘추 다르크’라 불리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추미애 의원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처럼 법적으로 처녀도 아니거니와, 유관순 누나처럼 외세에 대항해 나라를 구한 적이 전혀 없다(아직은 그렇다. 구하려 나선 것이 탄핵 찬성이나 호남 중진 배제 공천이었던가). 그러나 ‘추 다르크’라는 별명 또한 대중적 앎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단지 뭔가(민주당 혹은 자기 자신)를 구하려 앞에 나서는 여성이 있다면, 일단 ‘잔 다르크’와 연결시키는 게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앞으로 박근혜 대표가 박 다르크가 될 수도 있고 정 다르크, 강 다르크, 최 다르크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은 워싱턴이나 비스마르크 같은 만리타국의 건국영웅을 불러오는 데 만족할 수 없었다. 대신 을지문덕·강감찬·이순신 같은 민족적 전쟁영웅을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이순신전’은 1908년 일제히 단행본으로 출간되거나 신문에 연재됐다. 민족영웅을 찾고 따라 배우기가 본격화한 것이다. 이 세 영웅전 서론에 나타난 집필의도는 한결같다. 누란의 위기에 직면하여 나라를 구할 제2의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02년 열린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팀의 승리를 기원하며 광화문 이순신 동상 부근에 내건 대형 현수막.
이런 연유로 오늘날에도 이순신을 다룬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계속 만들어진다.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쉬는 동안 이순신을 다룬 소설을 읽겠노라 공언하는가 하면, 공영방송에서는 35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100부작짜리 대하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열도가 태평양 아래로 영영 가라앉지 않는 한, 이순신은 한민족 최대의 영웅이다.
단재 신채호가 쓴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1908)은 민족영웅 찾기의 첫머리에 놓인다. 신채호의 서문은 용서가 없다. 곧장 일본을 ‘섬나라 별종’ ‘왜구’라 지칭하며, 한일 사이의 오랜 철천지원수 관계를 강조한다. 잠시 직접 감상해보자.
“아! 섬나라 별종이 대대로 한국의 혈적(血敵)이 되어 서로 아주 가까운 데서 마주보고 독하게 쏘아보며, 아홉 대가 흘러도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가 뼈에 사무쳐, 한국 4천년 역사에 외국 침략자를 헤아려보면 ‘왜구’ 두 글자가 거의 십에 팔구를 차지하여, 변방 봉홧불의 경보와 해안의 소란으로 백년 동안에 태평한 시절이 드물었다.”
이순신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란 1908년 상황이 1592년 상황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해탄 건너의 원수는 강성할 대로 강성해졌는데 우리나라는 썩었다.
“피비린내 나는 먼지가 팔도에 넘치고, 악한 기운이 동해를 뒤덮어 병화가 칠팔년에 이르니, 이같이 부패한 국정과 이같이 흩어져버린 인심에 무엇을 기대어 국가를 부흥하였는가? 아! 우리 이순신의 공적을 여기에서 상상할 수 있겠도다.”
그래서 책을 읽는 선남선녀는 ‘20세기의 태평양에 제2의 이순신이 되어 가시밭길을 걷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철저한 태도를 보여준다. 위급한 정황에 이르러 고전의 전거나 들먹이고 외국의 사례나 공부하자는 ‘먹물’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순신 또한 과거의 인물일 뿐이다. 닥친 현실에 대해 ‘비분강개’할 훌륭한 소재를 주지만 ‘실질적 감발(감동하여 떨쳐 일어남)’과는 거리가 있다.
당시 삼남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서는 실제 대일 무장투쟁, 유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적 지식인이 서구와 상대(上代)의 전쟁영웅을 열심히 찾아내고 있는 동안, 최익현· 유인석·신돌석은 목숨을 버려 싸웠다.
대부분의 개명한 지식층은 그것을 정당한 투쟁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저 ‘동학잔당’이거나 시대착오적 수구세력의 봉기, 심지어 ‘강도떼’라 생각했다. 실제로 의병이 일본의 신식군대에 맞설 만한 힘과 군사적 합리성 및 세련된 근대화의 이념을 갖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울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계층적 한계나 불철저함 때문에 그 의의를 보지도, 또 활용하지도 못했다. 만약 의병장 중 누군가가 영웅으로 부각될 수 있었다면 나라가 망해가던 1900년대 초반의 상황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편 일제 강점 후 ‘동아일보’ 등 문화기관들이 나서서 이순신을 민족영웅으로 띄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 동북아 정세가 크게 요동 친 1931년은 가히 이순신의 해라 할 만하다. 이윤재는 1930년 10월에서 12월 사이 ‘성웅 이순신’이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연재한 후 1931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마침 1931년 5월 좋은 계기가 생겼다. 이순신의 후손들이 빚을 져 아산의 이순신 묘역이 경매처분될 처지가 된 것. 이 일을 계기로 이순신을 재조명하고 유적을 영구보존하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일어났다. 모금운동이 일어나고 1931년 5월24일에 ‘충무공 유적보존회가 재창립된다.
사설과 기획기사 등으로 이순신 추모열에 앞장서던 ‘동아일보’는 당대 최고 인기작가 이광수에게 1931년 7월25일부터 역사소설 ‘이순신’을 연재하게 했다. 사장 송진우가 직접 나서 이광수를 설득했다. 이윤재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1922)을 써서 민족의 부정적 형성, 즉 한민족의 부정적인 자기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놈은 안 돼’라는 ‘엽전의식’을 체계적인 수준에서 논한 글이 바로 ‘민족개조론’이다. 이광수는 열등하기 그지없는 민족성을 치유하지 않으면 민족의 미래가 없다고 주장했다. 상당히 유치한 발상이지만 당시로서는 먹힐 만한 이야기였다.
‘이순신’은 바로 이러한 발상에서 씌어진 작품이었다. 이광수는 소설 ‘이순신’이 ‘우리 민족의 단점’을 보여준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리하여 소설 속에는 시기와 질투, 무능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가 처벌하는 변덕을 부린 ‘이조(李朝)’의 간신배들과 경상우수사로서 원래는 이순신보다 더 잘나가던 군인 원균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광수의 머릿속에서 조선인의 전형적 기질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야심과 시기에 찬 조정 간신의 성격이 보다 더 다수(多數)한 조선인의 성격적 전형이었다고 나는 보아요.”
결국 이순신은 이러한 민족의 성격적 열등과 정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로 디자인됐다. 이순신은 보통의 조선인들과 달리 투철한 애국심과 애민정신, 고매한 인품과 지략, 희생정신과 성실함을 모두 가진 완전한 인간이다. 이런 경로로 이광수는 이순신을 대중적·민족적 성웅(聖雄)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엄하기 짝이 없으나, 공평하기도 그러하고, 사졸이 힘든 일을 할 때에는 자기 먼저 힘든 일을 하였다. 새 수사 이순신은 술을 좋아하나 밤이 아니면 먹지 아니하고, 풍류를 좋아하나 국가에 경절이 아니면 기악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였다”(‘이순신’ 이광수 전집12, 삼중당, 182쪽).
영웅은 코가 크고 높다?
1920년에도 한국에 대중시대가 시작됐다. 1910년대의 헌병 무단통치가 완화되고, 이전 시대에 비해 교육이 널리 보급되고 대중문화의 영향력도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무엇보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대중화됐으며, 정치와 사회운동이 대중화·일상화됐다.
1920년대 초 좌에서 우에 이르는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가 결성됐다. 당시 사람들에게 정치와 사회운동은 일상사의 하나였다. 사회운동 단체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신문·잡지에서 늘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일제의 감시와 제한이 여전히 뒤따르기는 했지만. 여기에 더하여 문학·스포츠·영화·가요의 무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새로운 문화의 장은 곧 영웅이 태어나고 자라는 기름진 밭이다.
그래서 이러한 환경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대중의 정치적 문화적 영웅과 반영웅들이 나타나고 사라짐을 거듭했다. 매스미디어는 영웅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가장 중요한 장이 됐다. 대중 스타로서의 영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매스미디어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영웅을 만들어내느라 바빴다.
1920년대의 신청년들도 영웅에 관심이 많았다. 1920년 7월 군산 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토론회 주제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였고(1920년 7월18일자 ‘동아일보’) 1921년 10월20일 목포 수양회에서 개최한 토론회도, 1925년 8월 하순 황해도 사리원에서 열린 학우 토론회도 주제가 똑같았다. 1923년 3월에 진주 천주교 청년회가 주최한 토론회의 주제는 ‘사회개조의 요구가 영웅을 부르고 단합을 요청한다’였다(‘동아일보’ 1921.10.22, 1925.8.26, 1923.3.15일자).
영웅보다는 대중이나 민중의 힘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가 풍미하던 시대였기에 영웅론의 구도는 이전과는 약간 달라졌다. 영웅이 필요하다는 여전한 대중적 기대와 함께, 영웅과 민중의 변증법이 역사를 창조해갈 것이라는 보다 진전된 사고가 청년들의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이다.
한편 1926년 7월16일자 ‘동아일보’의 부인란에도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이는 상당히 엉뚱한 영웅론이다. 제목이 ‘영웅과 코’로 ‘문명인일수록 코가 크고 높다’가 부제다.
글은 “인류의 역사를 통괄하여 보건대 고래로 일세(一世)를 놀라게 한 영웅치고 코가 납작한 사람이 없습니다”하는 영웅 외모론으로 시작한다.
이 글의 필자는 황인종이면서도 백인우월주의에 깊이 빠진 모양이다. 미국의 ‘우드 박사’라는 사람의 유전론을 근거로 문명인일수록 코가 높으며 아프리카나 호주에 사는 ‘야만인들의 코 높이가 거의 원숭이’ 수준이라 했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여자 코가 높으면 팔자가 세다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말이고,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역사상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코가 높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서 체 게바라까지
영웅은 현실의 지도자와 연결돼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았다. 실제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은 모두 해외에 떠돌면서 간혹 풍문만 들려올 뿐이었다. 김구, 김일성, 이승만, 신채호, 이동휘 등등이 그들이다.
이 인물들은 가끔씩 모호하게 그 행적이 국내에 알려져 영웅다운 신비감을 불러일으켰으나, 조선 내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항일투쟁이나 일상적인 삶의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일상을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는 여운형, 허헌, 안재홍, 안창호, 김성수, 이광수 같은 인물들이 중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근접거리에 있었기에 많은 흠이 보였고 라이벌도 많았다.
1920~30년대는 해외든 국내든 영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시기다. 그러나 이 시기 해외 영웅들에 대한 관심은 1900년대와 차원이 다르다. ‘조선의 나폴레옹, 잔 다르크가 필요하다’는 식의 담론에서 한 발짝 나아가 이들의 사상과 행적이 구체적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회주의는 1920년대 청년들의 시대정신 같은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 종결 이후 민족개량주의는 청년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이러한 청년들의 관심은 당시 언론과 책읽기에 그대로 반영됐다. ‘개벽’ ‘조선지광’ ‘신생활’ ‘신천지’ 등은 모두 사회주의 색채의 잡지였고 현재 한국 극우의 총사령 기지처럼 되어버린 ‘조선일보’도 창간 초기인 1920년대에는 중도좌익적 색채가 짙었다.
또한 사회주의에 관한 책들도 허다하게 읽혔다. 1920~23년에는 무정부주의를 비롯한 범(凡)사회주의 계통의 서적들과 사회주의를 대중적으로 해설한 정연규의 ‘과격파 운동과 반과격파 운동’을 비롯해 김명식의 ‘노국(露國) 혁명과 레닌’ ‘사회주의 학설대요’ 등이 많이 읽혔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 및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본을 거쳐 건너온 스탈린, 부하린 등의 원전도 읽혔다.
특히 1928년 전후의 ‘동아일보’를 펴보면 사회주의가 당시 한국사회에 이렇게까지 친근한 것이었나 할 정도다. 1면, 3면(당시의 사회면)을 가리지 않고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부하린 등의 한글 혹은 일본어 서적 광고가 크게 실려 있다. 그 와중에 두 종류의 일본판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이 수입돼 치열한 광고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사회주의 사상의 주창자이자 러시아 혁명의 아버지인 마르크스와 레닌은 당연히 위인으로 꼽혔다.
어린이들에게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4월호에서도 이 지면을 통해 1925년 1월의 ‘동아일보’ 어린이면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다른 나라 잘난 이’로 소개했음을 밝힌 바 있다.
“독일 어느 법률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는데 재주가 있어서 그 부모 되는 분에게 귀염을 받고 동리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열성으로 기어이 성공해서 많은 공부를 쌓아나가 우리에게 큰 유익을 끼친 훌륭한 책을 많이 지어냈습니다.”
“세상에는 부자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만이 삽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 레닌이란 어른은 가난한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과 권세에 눌려서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크나큰 일을 하셨습니다.”
‘조선의 히틀러’ 대원군
흥선대원군과 히틀러는 어떤 공통점을 지녔을까. 1930년대 조선인들은 히틀러에 대단한 매력을 느꼈고 ‘조선의 히틀러 대원군’이라는 등식도 유행했다.
지금에야 남북한 양쪽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은 현실의 영웅이 아니라 몇 가지 고전물의 저자에 불과하지만 당시 상황은 달랐다. 2000년대 한국 대학생들은 마르크스, 레닌 대신 체 게바라의 전기를 읽는다. 사회주의나 게릴라리즘을 알고 좋아해서라기보다 그냥 체 게바라가 멋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조선 사람들은 최근 세계사를 객관적으로 회고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1880년대와 1890년대 격동기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래서 김옥균과 대원군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그들의 개혁정책과 풍모가 한국 근대사의 전개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가 중대한 논란거리로 떠올랐던 것이다.
김옥균과 대원군에 대한 단행본이 속속 출간됐고, ‘신동아’ ‘삼천리’ 같은 주요 잡지에도 그들을 재조명하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1934년 10월호 ‘신동아’는 갑신정변과 대원군 특집을 마련했다.
그 중에서 이선근이 쓴 글의 제목이 ‘조선의 히틀러 대원군 인물론’이다. 대원군이 수많은 가톨릭 신자의 목을 베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류사 최대의 살인마 히틀러와 대원군을 연결시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알고 보니 히틀러는 1930년대 초중반부터 세계 최고의 뉴스메이커였다. 그래서 대원군과 히틀러는 별 공통점 없이도 연결될 수 있다.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실체가 완연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의 경력과 나치즘 사상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만했다.
그는 독재자가 된 현대의 많은 영웅들이 그러하다듯이 엘리트계층 출신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며 문화적으로 저급한 환경에서 독학하다시피 했다. 일개 병사로 경력을 시작했고 독일 국적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1932년 독일 대선에서 36.8%를 득표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나치의 힘을 무서워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1933년 수상이 됐다.
히틀러에 의해 피비린내 나는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견이 1930년대 초부터 나오고 있었고, 근대화 초기부터 독일의 영향을 받아온 일본인들도 히틀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조선인들도 히틀러 등장 초기부터 그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광수는 1930년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부분 번역해 출판했다. 히틀러가 점점 유명해지자, 동아일보는 1931년 12월6일부터 9일 사이에 독일 유학생 김재원을 시켜 현지 통신기사를 쓰게 했다. 김재원은 ‘유대인 절대 입장금지’ ‘실업자 입장무료’ 표지가 붙어 있던 나치당 강연장에 가서 직접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경험을 기록했다.
1934년 11월호 ‘신동아’는 ‘현대 위걸(現代偉傑)’을 기획으로 다뤘다. 미국의 루스벨트,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파샤와 더불어 무솔리니, 히틀러가 ‘위걸’에 뽑혔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장제스나 무솔리니에 비해 그들의 친구 혹은 원수였던 마오쩌둥, 처칠, 루스벨트 등에게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약했다. 베를린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이 히틀러 총통과 악수하던 그 순간이 조선인들의 머릿속에 새겨졌던 것이다.
수백만 명을 학살하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한때나마 영웅시 됐다는 것은 세계사와 정치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이성과 합리가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였던 적은 물론 한번도 없지만). 제국주의 국가간 무한경쟁 끝에 후발 자본주의국이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킨다. 강대국들에게 일방적으로 뭇매를 맞고 패한 독일은 일방적으로 1차대전 패배의 가혹한 책임을 져야 했다.
엽기적 카리스마 숭배
대악(大惡)이 자신은 악이 아닌 척하며 소악(小惡)을 징벌하자, 소악 속에서 대악에 복수할 초대형 괴물이 나타났다. 그가 히틀러다. 나치는 기꺼이 또 한번 전쟁을 수단으로 택했다. 독일의 힘은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인플레와 실업률을 토양으로 해서 암세포처럼 자라났다. 밑바닥에서 자라난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영웅이자 전쟁 추축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선인들이 히틀러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은 본의 아니게 ‘미영귀축(美英鬼畜: 미국과 영국이라는 아귀와 짐승)’을 원수로 삼는 추축국의 테두리 속에 포함된 탓도 컸으리라. 하지만 그보다는 다분히 엽기적인 성격의 카리스마를 가진 악당 두목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민주주의적 합리성은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을 만들어내는 데는 적절치 못한 밭이다. 신비와 광기, 지배욕과 피지배욕,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작동하는 곳에서 영웅은 만들어진다. 일이 합리적 메커니즘에 의해 잘 돌아간다면 개인을 우상화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흘러다니는 사회라면 한 개인이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갖기가 쉽지 않다.
히틀러가 보여준 음습하고도 극적인 행보와 광기는 곧 현대 대중의 광기와 비합리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소재가 되어 카네티, 아도르노, 라이히 같은 철학자와 정신의학자들이 평생을 여기에 매달려 공부했다.
유럽대륙에서 2차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0년에 ‘삼천리’는 ‘내가 생각하는(我觀) 히틀러 총통’이라는 설문조사를 했다. 사회지도층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히틀러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혔는데, 요약하면 그가 인간으로서 결함이 있거나 광인스러운 면이 있으나 대단한 천재이자 영웅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내보인 광기는 이미 추축국 식민지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1940년 조선의 사회지도층은 히틀러를 미국과 영국의 세계지배 구도를 허물 위인으로 여겼다. 이는 곧 일본제국주의의 생각을 답습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현충사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걸어가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1968. 4.28).
이러한 점은 조선일보 편집국장 함상훈의 답변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함상훈은 히틀러가 “일개 병사에서 총통의 지위에 올랐으니 영웅임에 틀림없으며 그가 앵글로 색슨족의 세계제패를 거꾸러뜨리는 날을 기대한다”고 했다.
만선일보 편집국장 홍양명도 “히틀러씨의 금일 획시대적 성공은 일대 통쾌사! 그의 광신적인 열정과 스피디한 돌진력은 천재 중의 천재임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독일 의학박사라는 정석태는 “세계의 빈난국인 일본, 독일, 이태리와 인도, 중국, 남미 등의 피압박국이 활로를 찾게끔 할 명랑한 세계개조를 보게 하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저지른 죄악에 벌을 주게 할 역사상 근대의 드문 통쾌한 위인”이라 했다. 조선의 일부 사람들도 히틀러가 앞에 나서고 일본이 따라 내달린 광기의 행진에 적극 참여했던 것이다.
히틀러, 이순신, 다시 박정희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장녀가 부모의 지극한 음덕 때문에 야당 당수가 되고 그나마 선전하고 있는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다시 박정희 이야기로 ‘영웅론’을 마무리해야겠다. 박정희는 이순신도 히틀러도 존경했다.
출간되자마자 유럽에서 1000만부가 팔렸다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1930년 처음 조선어로 번역되자 박정희도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 이 또한 나폴레옹 숭배와 비슷하다. 박정희가 히틀러의 악행을 배우기 위해 그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가 가진 출세지향성이나 뭔가 음습한 개성으로 인해 히틀러로부터 남보다 더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존경하며 민중을 구하겠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수두룩했을 텐데 박정희는 굳이 나폴레옹과 이순신, 히틀러 같은 군인들을 존경의 대상으로 택했다.
해방 이후 이순신을 국가 영웅으로 만드는 데 가장 공로가 큰 이도 박정희였다. 이승만도 이순신에 관심이 많았고, 1948년에 한국 해군이 최초로 건조한 경비정 이름 또한 ‘충무공호’였지만 박정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광화문을 내려다보는 이순신 동상을 세운 것도 박정희고 현충사를 거창하게 중건한 것도 박정희다.
박정희는 나폴레옹에게 그랬듯이 자신을 이순신과 동일화하고자 했다. 군인의 길과 영웅의 도에 조숙했던 어린 박정희는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 이광수의 ‘이순신’을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직후 혁명최고회의 의장 시절부터 충무공 탄신일 행사에 직접 참석했다. 알다시피 운명의 궁정동 만찬에 참석하기 전, 1979년 10월26일 대통령 공식 일정은 삽교 방조제 준공식 참석이었다. 이순신의 본고장 아산이 지척인 곳이다. 조갑제씨의 홈페이지에 있는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예의일 듯하다.
“대통령이 탄 공군 1호기가 도고호텔을 이륙한 것은 오후 1시50분쯤이었다. 박정희는 기장에게 아산만 상공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현충사 상공을 한번 돌게 하였다. 그는 현충사 근방에서 행사가 있으면 이곳에 들러 충무공(이순신)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죽은 자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다니. 과연 박정희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