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유행과 신드롬, 광기의 사회학

“나체에다 허리춤에 모피만 둘렀으니 녀자의 의복은 원시로 가고 있더라”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입력2004-10-27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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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년 ‘동아일보’는 미국 여성들 사이에 다리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지를 입는 게 유행하고 있다며 이를 ‘딱한 소식’이라고 전했다. 이듬해 모피코트에 맨다리를 드러낸 미국 패션모델의 사진에는 ‘이것도 옷이라고’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유행과 신드롬, 광기의 사회학

    1926년 6월10일 순종 임금의 국장(國葬)을 전후해 조선 여성들 사이에서는 무명상복인 ‘깃옷’이 유행했다.

    1926년 3월4일, 동아일보는 그해 봄 패션 경향을 전망하면서, 연분홍색과 연옥색이 유행 컬러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연분홍색 저고리에 연옥색이나 흰색 치마를 맞춰 입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 유행에도 맞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또한 저고리에 자주색 옷고름이나 빨간색 깃을 달아 입는 것이 화류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다시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눈길을 끌기에는 좋지만 자칫하면 천박해보일 수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원래 저고리에 자주 고름을 달아 입는 것은 ‘나는 유부녀’ 또는 ‘나는 여염집 아낙’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그해 봄철 유행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국가적 변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봄이 무르익던 4월26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승하한 것이다.

    그러자 평소에는 왕실에 대해 무심할 수밖에 없던 조선 민중과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사태가 벌어졌다. 순종의 ‘병세 위독’ 소식이 알려진 4월 하순부터 전국적으로 애도와 추모의 분위기가 일더니, 4월27일부터 국장이 치러진 6월까지(국장은 6월10일) 조선 사회는 대단한 신드롬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중은 순종의 죽음을 통해 조선 왕실의 몰락을 보면서 새삼 국가 상실의 회한을 느꼈던 것일까. 국왕에 대한 추모와 민족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는 남녀노소 계급계층을 가리지 않고 크게 번졌다. 언론도 이러한 분위기 확산에 단단히 한몫했다. 각종 매체들은 앞다퉈 왕실과 ‘이왕(李王) 전하’의 사진을 싣고 임종 당시와 임종 후 왕실의 분위기를 상세히 보도했다.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통해 썰물처럼 밀려나가던 ‘봉건’과 밀물처럼 들어오던 ‘근대’가 부딪쳐 해일을 일으켰다. 조선 왕실과 임금은 봉건과 유교적 지배의 마지막 표상이자 망국의 상징이었다. 대다수 민중에게 공화주의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표상은 대단히 민족주의적이며 동시에 대중적이었다.



    순종의 승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서울 북촌 상가들은 모두 철시했고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구(舊)대한제국의 관료들도 서울로 속속 모여들었다. 화류촌과 요정도 모두 ‘근신’에 들어가 일거에 서울이 ‘적적’해졌는데, 유명한 고급 식당이던 ‘식도원’은 계속 영업을 해서 시민들이 ‘열받기도’ 했다고 한다. 기생들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가 자진 휴업을 결정했으나 총독부 당국은 은행의 휴업만큼은 허가하지 않았다. 또한 일반 시민의 망곡(望哭 : 국상을 당하여 대궐 문 앞에서 백성들이 모여서 곡을 함)은 허락했으나, 오후 6시 이후에는 ‘절대 금지’령을 내렸다.

    순종 승하에 화류촌도 ‘근신’

    4월28일에 일어난 국수회(國粹會)의 모독사건은 이러한 분위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국수회는 일본의 낭인이 만든 보수 우익 조직인데, 이들 회원 10여명이 자동차를 몰고 상중인 경복궁 정문으로 돌진하여 모여 있던 궁궐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유도복을 입은 자에 곤봉을 든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경찰의 제지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일본의 자충수로 인해 사건이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더욱 확산된 것이다.

    그러자 총독부 경찰은 북촌 일대와 더불어 서울 중심부에 삼엄한 경계망을 펴기 시작했다. 1926년 4월30일자 동아일보 2면의 기사는 매우 고색창연한 문학적 표현을 써서 당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기사의 첫머리에 붙은 제목은 더욱 비장한 분위기를 풍긴다.

    “구중 궁외는 경위로 십중, 창일한 누해에 적등이 휘황, 통곡하는 군중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경계하는 경찰대는 밤을 낮으로 새여, 경찰의 패검은 월색과 쟁광 - 터질 것 같은 긴장과 거의 히스테릭한 슬픔의 전염병이 고조되어갔다. 경남 함안군에 살던 김영규와 최봉한은 4월29일에 기생 몇 명을 데리고 요릿집 ‘공주옥’에서 방탕히 놀다가 망곡장으로 모이던 시민들에게 발견되어 구타를 당했다. 충남 공주에서 유림과 노동자들이 연서(連暑)하여 도평의원이며 변호사인 임창수를 고소했다. 임은 29일 술을 먹다가 동석한 기생 초선이 국복 입은 것을 보고 갖은 모욕적인 발언을 하고 왕실에 대해 불경한 언행을 했던 것이다.”

    5월1일에 성복(成服·초상이 난 후 나흘째 되는 날부터 정식으로 상복을 입음)한 후 전국이 본격적인 봉도(奉悼)에 들어갔다. 5월1일은 마침 토요일에다 노동절(메이데이)이었다. 서울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망곡을 위해 돈화문 일대로 몰려들고 메이데이를 맞은 노동자들도 거리에 나와, 이날 낮 1시경 안국동 부근의 인파는 10만을 넘었다. 기생과 장애인들도 이날 봉도에 참례했다. 추모의 분위기는 식지 않고 5월 내내 이어졌고, 학생들의 동맹휴업과 노동자들의 참여도 여기에 일조했다.

    6월10일 순종 인산(因山)을 계기로 대단한 소요나 돌발적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상됐다. 민중의 민족주의적 열기를 등에 없고 독립운동의 각 세력, 특히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당시의 학생운동과 지하 노동운동 세력이 하나같이 이날을 주시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순종 승하 시점부터 국상과 추모 열기가 민족주의적인 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막고자 총력을 다했으나 결국 만세운동이 폭발하게 된다.

    임금을 잃은 ‘백성’에게는 이 기간이 상중(喪中)이었기 때문에, 연분홍·연옥색 치마저고리는 동아일보의 예상과 달리 전혀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신여성’ 1926년 6월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간 중 여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여성, 즉 귀부인·여염집 아낙·기생·창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제가 입는 무명 상복인 깃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무명 상복도 패션

    물론 표면적인 까닭은 국상을 당해 애도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한편 상복을 입는 것이 사회 분위기를 탄 하나의 패션이 되어버렸던 탓이다. ‘신여성’에 따르면 원래 ‘깃옷이라 하는 것은 부모가 돌아가더라도 성복날에나 입는 것인데 조의만 표하면 되는 국상 때 성복 전날부터 깃옷을 해 입은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라는 것이다. 당시 상복 붐은 예법과 무관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철없는 여학생들이 ‘남들 다 해 입는 깃옷 해달라고’ 가난한 부모를 졸라대고 상복을 입은 채 ‘오색찬란한 파라솔을 들었으니 말세’라고 쓰고 있다.

    당시에는 추모 분위기 자체가 일종의 유행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장은 유행을 창조해낸 매개가 되었다. 국장은 일종의 비극적인 카니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해 봄 경성에는 때 이르게 백구두가 유행했다. 어느 해 여름이건 조선 사람들은 흰 구두, 흰 고무신을 즐겨 신었지만 유독 그해에 흰 신발이 빨리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도 국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젊은 아가씨들이 태극기로 민소매 원피스를 해 입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좌익이 되세(Be the Reds!)”라는 구호가 적힌 빨간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휘젓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패션계에도 붉은색 열풍이 불어닥치지 않았던가. 월드컵이야 세계적인 축제였으니까 그런 ‘방정맞은’ 일도 가능했겠지만, 나라의 아비가 죽은 국상은 경우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시대적 유행의 소재로 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1920년대부터 우리 사회가 유행이 지배하는 대중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행은 대중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지표이고, 신드롬은 그것이 지나쳐 병적 징후를 보이는 사회현상이다. 물론 유행과 신드롬은 근대 이전 사회에도 존재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저, 푸른역사, 2003)을 펼치니, 별감(別監)이라는 하위 관료가 평양망건, 외점박이 대모관자 같은 패션의 유행을 선도했고, 숙종 13년 9월11일자 ‘승정원 일기’는 김만중이 조정을 풍자하여 쓴 소설이 세간의 인기를 끌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며 ‘유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일상화된 유행과 신드롬은 어디까지나 20세기의 산물이다. 한국은 1920년대 들어 대중사회로 진입한다. 대중사회의 성립에 필요한 제반 요건이 이 시기에 이르러 갖춰진 때문이다. 조선 스스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일본과 구미로부터 전해진 공산품은 이미 1900년대부터 조선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문 매체와 출판물이 가히 홍수를 이루고 라디오와 유성기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영화 관객도 급증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만 있는 미디어 소비의 특징적 양상이 모두 나타난 것이다.

    ‘삼대칠’ 머리에 털실목도리

    미디어가 취향과 이데올로기 면에서 평균화된 대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통적 생활조건과 촌락공동체를 벗어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학교교육이 널리 보급되고 경향 각지에 도서관이 개설되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 같은 대중적인 투쟁도 조선이 대중사회로 진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행과 신드롬, 광기의 사회학

    순종의 인산일을 앞두고는 여학생들이 상복의 일종인 깃옷을 해달라며 부모를 조르는 일까지 생겨났다.

    옷입고 머리하는 모양인 ‘패션’은 이 유행의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형태이다. 유행은 덧없이 흘러가고 경우에 따라 반복되기도 하지만, 엄연한 사회 문화적인 사실로서 그 사회의 변동과 가치체계, 표상 양식의 변화를 드러낸다. 유행은 모든 사회성원에게 압력을 행사하기에 중요한 이슈가 된다.

    1920년대 동아일보는 계절마다, 해마다 변해가는 패션 경향을 싣고 있다. 1921년 신춘에는 국사, 관사(官紗), 순인 저고리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소담한 검은색 양산, 기생들 사이에서는 화려한 수가 놓여진 양산이 유행했다. 남자 넥타이는 짙은 유록(풳綠)과 밝은 빛에 무늬가 넓은 것이 인기였다. 1922년 여름에는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일본산 왜사나 중국산 당항라로 지은 옷이 아니라, 한산모시나 공주 춘포 같은 소재로 지은 옷이 유행했다. 개량된 한복 소재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1923년 겨울에는 긴 저고리, 짧은 치마에 삼칠(三七)로 가른 머리를 하고 털실목도리를 두른 여학생이 패션을 선도했다. 1923년 12월9일자 동아일보는 ‘창조성의 마비’라는 기사를 싣고 이전까지 조선 사회의 유행 중심은 화류계여서 기생이 조바위를 쓰면 여염집 부녀도 조바위를 쓰는 식이었으나 언젠가부터 유행의 헤게모니가 여학생에게 옮겨가서 이제 기생이 여학생을 모방하는 추세라고 썼다. 목도리 유행은 좀더 심해졌다. 1924년 겨울에는 3~8원이나 하는 고가 목도리를 두르고 다니는 사치스런 여학생이 많아 기성세대가 눈살을 찌푸렸다.

    미국·영국·프랑스 같은 서구 선진국과 일본의 유행 풍조에도 관심이 많았다. 1926년 2월10일자 신문에 따르면 한때 미국 여배우들 사이에 짧은 단발이 극도로 유행하더니 이제 긴머리가 다시 득세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 남자배우들은 턱수염 기르기를 즐겼다. 긴머리 유행은 미국 여성들 사이에 좀 오래갔다. 1927년 6월12일과 18일자 동아일보에도 여전히 긴머리가 유행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맨다리’의 충격

    한편 같은 해 런던의 여름 유행 컬러는 오렌지색이었고, 그해 8월 도쿄에는 ‘붉은 다리’가 유행이었다. 도쿄(東京) 긴자의 모던 걸들이 양장 치마 아래에 양말을 신지 않고 맨다리를 드러내놓고 다녀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서양이나 일본 ‘모던 걸’들의 패션이 일으킨 작은 소란들은 조선인들에게 늘 지대한 관심사가 됐다. 그들이 입은 새롭고도 쇼킹한 옷은 아직 치마 저고리로 온몸을 다 가린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던 조선 사회에는 센세이셔널한 좋은 기삿감이기도 했다.

    1928년 10월24일자 동아일보는 ‘딱한 소식’이라며 미국 여성들 사이에 치마를 입지 않고 다리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지를 입는 것이 ‘대류행’이라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실었다. 1929년 3월4일자는 ‘이것도 옷이라고’ 하는 제목 아래 긴 모피코트만 입고 맨다리를 다 드러낸 미국 패션모델의 사진을 싣고는 “나체에다 허리 근처에 모피를 둘렀을 뿐”이라며 “여자의 의복은 ‘원시(原始)’로 변해가고 있다”고 썼다.

    화가이자 문필가, 영화감독이던 안석영이 쓴 ‘모-던뽀이의 산보’(조선일보 1928년 2월7일)라는 글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여러 가지 유행에는 활동사진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영화는 ‘학교의 수신(修身-오늘날의 윤리) 과목이나 목사의 설교, 부모의 회초리보다도 젊은이들에게 감화력이 큰 것’이었다.

    인기 배우 해럴드 로이드가 쓴 대모테 안경이 조선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유행이 되었고, 루돌프 발렌티노가 구레나룻 수염을 기르자 조선 청년들의 턱에 염소털 같은 수염이 달렸다. 버스터 키턴이라는 배우가 쓴 모자 때문에 조선 청년의 머리 위에도 ‘쇠똥’처럼 생긴 모자가 올라앉았으며 미국 서부활극에 나오는 카우보이의 가죽바지가 조선 청년에게 나팔바지를 입혀주었다. 각국의 수도와 대도시를 거점으로 유행의 세계성과 동시성이 구현되고 있었고 조선의 경성도 거기에 한 자리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 총아인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산보할 때에 그는 외국의 풍정인 듯이 느낄” 수 있었지만 실제로 조선의 거리에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있”었다. 영화나 매스미디어만이 그 초가집 거리와 마천루가 이미 즐비하던 뉴욕 거리를 ‘모던’의 거점으로 연결하는 그물망을 짜놓고 있었다.

    당시 신문에 특히 미국 뉴욕과 할리우드의 유행 패션에 대한 기사가 많았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미국 영화가 새로운 문명과 유행을 전해주는 메신저로서 조선의 일반 대중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이를 바탕으로 미국으로부터 기삿거리가 될 만한 사진과 자료가 풍부하게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도쿄 패션의 영향을 많이 받고, 한국 패션업계가 뉴욕이나 파리의 유행을 직수입해 들여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의 보통 젊은이들은 20세기 초반처럼 서양 배우의 패션을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는다. 주체성이랄까 소화력과 같은 힘이 나름대로 생긴 까닭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국의 연예산업이나 스타산업의 수준은 일천했다. 오늘날에야 한국의 스타와 연예인이 세계무대로 진출하기도 하고 한국적인 감성과 풍토에 맞게 독자적인 패션을 창조해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성유리 시계, 김정은 헤어스타일, 김희선(국회의원이 아니다) 칠부바지, 김남주(시인이 아니다) 목걸이, 박신양 정장, 김래원 ‘츄리닝’, 서태지 고글 등등등. 이제 ‘스타 따라잡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

    유행을 추종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거나 자의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행이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개인에게 심리적인 압력기제가 됨으로써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심히 유행을 따라다니는 일이 오히려 개성을 지키고 꽃 피우는 일이라 생각하는 젊은이도 많다. 유행은 개성과 모순적인 관계에 놓일 수도 있지만 끝없는 개성 추구와 이노베이션이 유행을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행의 주체이자 대상인 대중은 참으로 신비한 존재이다. 그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명민한 주인이면서도, 대단히 멍청하고 광기에 쉽게 감염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보루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는 대중의 명민함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성립한다. 동시에 대중은 독재와 파시즘의 온상이다. 역사적으로 독재와 파시즘도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립됐다. 히틀러가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정권을 잡았고, 전두환조차 (비록 체육관에서였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이렇듯 명민함과 아둔함, 냉철함과 맹목, 이성과 광기의 모순적인 결합체가 대중이다. 그 모순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성격 전체를 규정한다. 어떻게 그들의 이성이나 광기, 냉철함과 맹목이 움직이도록 할 것인가? 학자들은 그 모순을 규명하는 데 온 힘을 바쳐왔고, 그 변덕 심한 취향과 예측 불가능한 가치 지향을 읽는 데에 기업과 여론조사기관과 마케팅회사가 무수한 돈을 지출하고 있다.

    ‘유행’이나 ‘신드롬’은 대중의 양면 중 멍청하고 조작가능한 상태를 드러낸다. 유행과 신드롬은 다분히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성 이상의 것, 혹은 이성 이하의 사회심리가 작용하여 맹목적인 유행과 신드롬이 일어난다. 유행 가운데에서도 병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신드롬이다. 신드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신드롬에는 이유가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공포와 불안이다. 공포와 불안은 이성 너머의 영역에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이 불안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아니, 오히려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야기한 또 다른 불안이 비이성의 영역을 끝없이 재생시킨다.

    과학입국과 ‘족보 입국’

    20세기를 식민지 상태에서 맞은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한국인들도 ‘과학 입국’을 부르짖었다. 과학기술만이 돈과 힘을 만들어준다는 생각은 하루 이틀의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다. ‘과학’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생각, 봉건적이며 미신적인 모든 사고방식과 행태는 문명과 민족의 적으로 간주돼왔다.

    과학은 모두 서양이나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사고체계와 개념 및 용어들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지식과 민속과 민간의 경험에 근거한 전통적 지식은 죄다 ‘미신’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과학주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되어 사람들의 행위양식을 표면적으로 장악해갔다. 그러나 과학주의 자체가 또 다른 미신이 된다. 서양 근대과학이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변할 수 없는 진리도 아니다).

    1920년대에는 과학과 미신 사이의 갈등과 투쟁도 대단했다. 그러나 과학에 반하는 신드롬도 많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과학이 인간의 불안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10~30년대의 유행이자 신드롬 중 대표적인 것은 족보 편찬과 발간 붐이다. 족보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펴낼 수 있었던 식민지 시대의 출판물 가운데에서 가장 많이 찍힌 책이다. 1920~30년대 내내 거의 한 해도 빠짐없이, 소설이나 어린이용 서적보다 족보가 더 많이 출판되었다. 기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중 족보는 대부분 이 시기에 편찬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족보 출판 붐은 1910년대에 시작되어 1920년대 후반 절정에 이르렀다. 비용이 많이 들고, 발간 과정에서 친척들 사이에 계보의 ‘정부(正否)’를 다투거나 자신의 위치를 족보에 좀더 유리하게 올리기 위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붐은 그칠 줄 몰랐다.

    당시 조선의 신세대는 사회주의와 여성주의 같은 급진사상에 물들고 감성적으로는 할리우드 키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기성세대의 일부는 여전히 유교적 습속과 의식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족보 발간 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족보 발간 붐은 근대사회에 맞지 않는 유교적 구도덕을 온존시켜 자유로운 ‘개인’의 형성을 저해하는 일이었고, ‘양반-상놈’ 계급이 변형·재생산되는 ‘병리적’ 사회현상의 지표였다.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도 족보 발간 열풍을 싫어했다. 문벌과 촌수를 따지는 족벌주의가 족보 발간 붐에 내재해 있었던 바, 그것은 민족적 단결을 저해하고 민중적 전진을 가로막는 퇴행이라는 관점에서였다.

    몰락양반의 밥벌이 수단

    그런데 족보 발간 붐에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몰락한 양반 중의 일부, 또는 양반 행세를 하고 싶었던 ‘상놈’이 족보 발간을 돈벌이에 이용했다. ‘개벽’에 실린 한 풍자시에 의하면 양반들은 “시골 동성同姓 모아서 / 족보한다 돈 뺏고” 상놈들은 “양반 본을 꼭 떠서 / 밑도 없는 족보를 / 천연天然 꾸며놓고서 / 제 조상의 자랑”에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던 것이다. 또한 원래 이전 시대의 무능한 양반이 하는 일이라는 게 “무릎 꿇고 앉아서 / 가승세보家乘世譜나 외우는” 것이었는데, “무슨 벼락 나려져” 일거에 세상이 바뀐 까닭에 갑작스럽게 “목구녁은 포도청 / 입에 풀칠할 길 업”게 되자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물건들을 내팔아 “한끼 한끼 하다가”(한별, ‘새상놈, 새량반’, “개벽” 제5호, 1920년 11월) 택한 수단이 바로 족보라는 것이다.

    족보 발간 붐에는 사회적인 혼란과 가치관의 혼돈도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족보 편찬에 여념이 없던 사람들은 당시 사회를 극히 혼란스럽다고 진단하고, 족보 발간을 이러한 혼란에 대한 나름의 대응으로 생각했다.

    [지금 세상은 아무리 보아도 혼란 시대가 앞으로 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니까 이 시대에 있어 우리 부형父兄 된 자가 조선祖先의 계통을 편집하여 후대 자손에게 그 가계를 알게 함이 우리의 금일 큰 의무라- 배성룡, ‘인격발전의 도정에 대한 사견’, “개벽”, 1922년 6월]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경제적인 불안정과 급격한 가치체계의 변동과 교란 앞에서 퇴행적인 심리가 작용하여 ‘영원한 것’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유교적 퇴행에 의지할 수 없었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정감록’과 신흥종교가 유행했다. 족보 열풍은 ‘정감록’ 열풍이나 신흥종교 붐과 사회적 맥락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300명 넘게 살해한 백백교주

    조선의 통치질서가 붕괴하면서 기독교, 불교, 천도교가 각각 세(勢)를 키워나갔다. 종말론도 횡행했으며 여러 종류의 비(非)근대적인 유토피아 사상도 사람들을 이끌었다. 무수하게 생겨난 신흥종교 가운데에는 매우 위험한 것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이 백백교 사건이다. 백백교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의 가난한 농민이자 동학교도였던 전정운(全廷雲)이 창도한 종교로서, 머지않아 종말이 온다는 예언을 믿었다고 한다. 1923년 7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 포교 허가를 얻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범죄집단화되어, 전해룡이 교주가 되었을 때에는 많은 여신도를 첩으로 삼고 교주에게 복종하지 않는 신자들을 살해했다. 결국 1935년에 범죄사실이 발각되어 진상이 밝혀졌을 때는 무려 340명이 넘는 희생자가 생겨난 뒤였다.



    종교나 신비주의, 오컬트 문화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대단한 기세를 떨치고 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타로카드점, 별자리점이 인기를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가 곳곳에 사주카페가 성업중이다. 공중파 TV에선 귀신 내려 무병을 앓는 젊은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버젓이 방영되고 있다. 이런 정도만 해도 병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불안감이 대중문화라는 옷을 걸친 현상이라고 봐줄 만하다. 하지만 대선에서 두 번이나 낙선한 야당 후보가 부친의 묘소를 이장하는 걸 보면 입으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른바 IT, BT, NT를 부르짖어도 조상의 음덕은 여전히 중요한 모양이다.

    불안이 있는 곳에 선동이 판치고 대중은 막무가내로 어디론가 뛰게 되어 있다. 광화문에 10만명이나 되는 보수단체 회원과 종교단체 신도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뛰었다는 것도 비이성적인 불안의 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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