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와 ‘민심’을 몰랐다…월드컵 스페인전 중간에 나가
- 오이·러브호텔·TV 토론…더 깊이 빠져든 ‘귀족의 늪’
- 말이 씨가 된 2005년 강재섭의 ‘만우절 농담’
- 2005년 이사 후 건강 회복, 정계 복귀 조건 만개
- 2006년 정초 세배객 앞에서 대구 서문시장 화재 걱정만
- 유연한 昌, 따뜻한 昌의 파괴력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11월9일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단암빌딩 선거캠프 사무실에서 구두를 신은채 책상위에 올라 “발로 뛰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11월 초순에서 중순으로 가면서 이 전 총재의 여론조사상 지지율은 다소 정체 기미도 보였다(11월 1일 MBC-코리아리서치 22.4%→11월7일 KBS-미디어리서치 21.5%→11월10일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 20.6%).
그러나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여권의 공세, 검찰의 김경준 사건 수사 결과, 영남·충청·호남 민심 동향, 보수층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서는 이회창 전 총재가 ‘대안적 보수 후보’로서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이 전 총재 캠프의 시각이다.
‘대세론’ ‘제왕적 총재’ 등 여러 정치 유행어를 낳으면서 10년 야당사(史)의 최고 주역이었던 만큼 이 전 총재는 언론의 중요한 취재 대상이었다. 2002년 12월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후에도 그랬다. 2003년 1월1일부터 2006년 12월31일까지 한국언론재단 기사검색시스템(KINDS)의 9개 종합일간지에서 검색되는 ‘이회창’ 기사는 무려 5468건에 이른다.
최근 그의 출마 후 서랍 속에서 ‘이회장 취재수첩’을 다시 펴 들었다. 여론은 “이회창을 너무 잘 안다. 더 알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익숙한 대상의 변신과 재발견이 원래 더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경기장 나와 TV 보며 응원”
2002년 대선 이전 이회창 전 총재는 ‘근엄한 아버지’의 이미지였고 그를 둘러싼 측근들은 실제로 그렇게 우상화했다. 2001년 10월6일 토요일 오후 서울 강남구 포스코 사옥 내 중식당 휘닉스에서 이 전 총재와 한나라당 의원 10여 명이 식사를 함께 했다. 의원들의 골프 모임 뒤풀이 자리에 이 전 총재가 들른 것이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돈 뒤 의원들은 이 전 총재에게 “사비를 5000만원씩 털어 내년 대선을 돕겠다”면서 앞다퉈 충성맹세를 했다. 몇몇 의원들은 실제로 ‘충성!’ 구호와 함께 경례를 붙이기도 했다. 이 전 총재도 이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전 총재의 ‘대세론’은 2002년 초 호화빌라-원정출산-설훈 의원 폭로-김대업 병풍(兵風)-기양건설 의혹 등 연이은 공격을 받으면서 위기를 맞았다. 한나라당 측은 네거티브 때문에 대선에서 패했다고 억울해 하지만 이 전 총재의 ‘귀족적, 제왕적 이미지’가 네거티브의 공격 재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전 총재와 그 측근들은 대선 중, 후반 ‘이회창 이미지’를 ‘서민적인 것’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2002년 6월22일 토요일 오후 이 전 총재는 광주월드컵경기장 일반석에서 월드컵 한국-스페인 8강전을 관전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후반전이 끝나도 스코어가 0대 0이어서 연장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됐다. 이 전 총재 일행은 슬며시 자리를 떴다. 비행기 시간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전 총재 측은 “광주공항에서 TV를 보면서 계속 응원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당시 기자의 느낌은 ‘이 전 총재 측은 축구와 민심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였다.
‘이회창의 서민 따라하기’는 곁에서 보기에도 어색했고 썰렁하기까지 했다. 이 전 총재는 시장에서 오이를 씻지 않고 즉석에서 먹었다. 여고생 오빠부대를 ‘빠순이’라고 지칭하기도 했고, 서민적 풍모를 보인다면서 러브호텔을 이용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측근들은 “이 전 총재가 비속어를 몰라서 적어준 대로 말한 것이다. 오이는 바지에 닦아서 먹었다. 러브호텔이 아니라 깨끗한 장급 여관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여권의 ‘위장서민’ 공세는 먹혔다. 이 전 총재는 ‘귀족 이미지의 늪’에서 헤어 나오려 하면 할수록 더 빠져 들었다.
이회창 전 총재가 11월14일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한 장애인 재활원을 방문해 원생과 포옹하는 장면.(좌) 11월13일 오후 대구 서문 시장에서 이회창 전 총재가 30대 시민이 던진 계란을 이마에 맞자 경호원들이 이 전 총재를 에워싸고 있다.(우)
TV토론에서도 이 전 총재의 말은 어색했다. 한 TV토론에서 “상품에 일괄적으로 붙는 부가세를 저소득층만 어떻게 면제해줄 수 있느냐”고 패널이 묻자 이 전 총재는 “그런데 이제 저희 전문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올라왔는데요. 그건 뭐 가능하다고 보고를 받았고요. 그리고 그 범위를 저소득층으로 국한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돈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고를 들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보고를 받았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들어가 있었다. TV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공약을 설명할 때는 저소득층과 눈높이를 맞추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전해줄 필요가 있었지만, 이 전 총재의 답변에는 ‘인간미’가 없었다. ‘본인 공약 숙지 의문’ ‘답변 태도의 오만함’ 등 이미지 감점 요인이 다분했다.
신문, TV, 잡지 등 미디어를 통한 선거운동이 더욱 힘을 발휘한 2002년 대선에서 대선 후보는 언론을 통해 유권자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알릴 수밖에 없다. 언론은 후보자를 대신해 유권자에게 후보자를 ‘브리핑’한다. 후보자가 언론인에게 일부러 잘 보일 필요는 없지만 언론인에게 불필요하게 부정적 인상을 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회창 전 총재 측의 경우 언론과의 관계가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한 기자는 당시 이 전 총재를 단독 인터뷰한 뒤 불만을 터뜨렸다.
“이 전 총재 측에 질문 내용을 서면으로 미리 다 줘야했다. 대면해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질문은 5개로만 제한하더라. 인터뷰를 위해 집무실에 들어가서는, 먼저 멀찍이서 이 전 총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해야 했다. 기사 거리도 안 주고 절만 시키고…. 김대중 대통령 인터뷰보다 더 까다롭다.”
이를 두고 이 전 총재만 탓할 수는 없었다. 한나라당의 선거 캠페인은 도처에서 모순투성이였다.
“표독하지도, 제왕적이지도 않은”
이 전 총재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뒤 어느 날 기자는 이 전 총재가 ‘국회 시 사랑회’라는 단체에 보낸 그의 애창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를 읽어 보게 됐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흐르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을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이 전 총재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그는 표독하지 않으며 제왕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법관 시절 소수의견을 많이 낸 것도 그런 성품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전 총재가 내면에 이러한 서정성, 인간애, 포용을 품고 있다면 본인은 2002년 대선에서 그것을 잘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해 회한을 갖고 있을 것이다.
대선 패배에 따른 이 전 총재 부부의 상심은 꽤 컸을 것이다. 거기다 한인옥 여사의 건강도 나빠졌다고 한다. 한인옥 여사는 다리를 수술했다. 2005년 초, 보다 못한 둘째며느리(이 전 총재의 차남 수연씨의 부인)가 김태균 수원과학대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님의 건강이 안 좋으신데 혹시 집터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알아봐 달라”는 얘기였다. 수연씨 부인의 친정어머니가 풍수지리로 이름이 난 김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이 전 총재 부부는 2002년 초 호화 빌라 파문이 터지자 수 년 째 살던 종로구 가회동 빌라에서 나와 수소문 끝에 2002년 4월 서울 종로구 옥인동 단독주택을 6억5000만원에 매입해 2005년 초까지 3년여 동안 살고 있었다. 당초 이 전 총재는 용산구 동부이촌동 신동아아파트 56평짜리를 월세로 계약하려 했으나 월세가 500만원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서민정서’와 또 충돌할 수 있다고 보고 포기했었다.
김 교수는 옥인동 집을 둘러본 뒤 “이런 집에서 어떻게 선거를 치렀나. 지세(地勢)가 이 전 총재 가족과는 안 맞다. 여기 계속 살면 큰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전 총재 측은 이사할 만한 집들을 알아보고는 그 리스트를 김 교수에게 건넸다. 김 교수는 그 중 용산구 동부이촌동 신동아아파트를 찍어주었다고 한다. “단지의 위치, 동과 세대의 방향이 이 전 총재 측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 이 전 총재 측은 옥인동 집이 안 팔리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내어, 2005년 4월28일 비어 있던 신동아아파트 56평형에 전세로 들어갔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사할 뻔 했던 이 아파트에 3년 만에 들어오게 된 셈이다.
이사한 뒤 벌어진 일들
2002년 12월 서울 종로구 옥인동 자택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맨손체조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4월1일 “이회창 전 총재가 정계에 복귀하기로 했다”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만우절 농담’을 했다. 이것이 보도되면서 우연찮게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어 이 전 총재의 지지자 모임인 ‘창사랑’이 5월7일 대구에서 전국대표자대회를 열며 본격적으로 세력화하기 시작했다. 이틀 뒤인 5월9일에는 2002년 대선에서 이 전 총재 측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했던 김대업씨와 모 언론매체에 대해 “1억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나왔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 전 총재에 대한 아쉬움과 동정론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잡히자 강재섭 대표의 농담을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실제 여론조사로 돌렸다. 한나라당 지지층의 40.8%가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복귀를 희망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상당한 뉴스거리’였기에 일제히 언론에 보도됐다. 거기에다 열리우리당 의원(안영근)이 국회에서 불법대선자금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 전 총재 핵심 측근에 대해 ‘사면론’을 펴는 일이 벌어졌다. 이 전 총재가 안 의원에게 고맙다고 전화한 것까지 기사화됐다. 불법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된 이 전 총재의 측근 서정우 변호사, 김영일 전 한나라당 의원은 5월21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러자 당사자인 이 전 총재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데 주요 언론에서는 ‘이회창의 정계 복귀는 안 된다’는 논평까지 실리기 시작했다.
2005년 4~5월 ‘이회창을 부활시키는’ 여러 사건이 우연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하나의 사회여론의 흐름을 형성해 놓은 것이 2007년 11월 이 전 총재의 정계 복귀 및 대선 출마를 부른 추동력이 된 것이다.
2006년 1월1일 기자는 이회창 전 총재의 신동아아파트 자택에 새해 인사를 갔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혈색이 좋았고 기운이 넘쳐 보였다. 며느리들도 깍듯하게 손님들을 맞았다. 무엇보다 이 전 총재는 말과 인상에서 주는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은 4~5명의 손님 앞에서 얼마 전인 연말에 발생한 대구 서문시장 화재 걱정만 했다. 이 전 총재는 정치권에 있을 때 서문시장을 즐겨 찾고는 했다. 2002년 대선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때 한인옥 여사가 눈물의 유세를 한 곳도 이곳이었다. 이 날 이 전 총재의 말과 인상에서 처음으로 진정성, 인간미가 느껴졌다.
예전의 昌이 아니었다
2007년 11월 불의(不意)의 출마를 한 이 전 총재는 그 명분과 정당성을 떠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에서 ‘예전의 창(昌)’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질문지를 달라고 기자들에게 요구할 것 같지 않아 보였고, 글이 아닌 말로 자신의 얘기를 하는 법을 배운 듯했다.
2002년 대선에서 이 전 총재는 자택 정원에서 맨손체조하는 모습을 담아 공개한 바 있다. 당시 한나라당이 내보낸 몇 안 되는 훌륭한 선거 캠페인 중 하나였다.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이회창의 콤플렉스’인 ‘서민 이미지’는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2007년 11월, 이제는 그가 점퍼 차림으로 선대위 사무실 책상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는 광경도 전혀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더 유연해지고 더 따뜻해져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