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여권 단일후보로 막판 뒤집기를 꿈꾸는 정동영.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고 당내 경선을 통과했지만, 한나라당 후보와의 격차는 좁혀질 기미가 없다. 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단일화’뿐이다. ‘남남, 남북, 동북아 통합’이라는 3통 정책은 급변하는 대선 현실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과연 그의 마지막 승부수는 통할 것인가.
10월15일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정동영 후보.
대세론에 눌려 변변한 ‘반전’의 기회조차 잡지 못하던 범여권에 ‘이회창 출마 쇼크’는 언뜻 기회로 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 범여권 후보의 지지율까지 동반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해보나마나’라는 패배주의를 더욱 확산시키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다급해진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범여권 통합 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막판 뒤집기’를 시도하고 나섰다. 11월12일 ‘4자 회동’을 통해 신당과 민주당이 당 대 당 통합과 후보단일화에 전격 합의한 것도 대선이 ‘이명박 대 이회창’ 양자 대결구도로 굳어지는 것을 막고, 3자 대결구도로 활로를 뚫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짙다.
“정치생명 걸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 임하는 정동영 후보의 각오는 남다르다. 한마디로 정치생명을 걸었다. 민주당과의 합당 합의를 둘러싸고 신당 내부에서 ‘재협상’ 논란이 일자 정 후보는 “12월 대선에 내 정치인생의 전부를 걸었다. 이번 선거는 내 선거일 뿐 아니라, 당의 선거이고 역사적 책무가 있다. 이번 대선에 모든 것을 걸었다. 대선만이 모든 의미”라고 호소했다.
140석의 원내 제1당 대통령후보가 겨우 8석의 민주당에 5대 5의 지도부 구성 약속을 하면서까지 ‘합당’에 합의한 것만 봐도 이번 대선을 향한 정 후보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한지 짐작할 수 있다.
정 후보의 대선 플랜은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이회창 변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특히 낮은 지지율에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것은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이번 대선을 준비해왔는지를 엿보게 했다.
정동영 후보는 당내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되는 것을 1차 목표로, 경선 이후 조기에 경선 후유증을 수습하고 당내 통합을 이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1대 1 구도를 형성하는 것을 2차 목표로 삼았다. 이어 대선후보 등록 직전까지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통해 지지율을 끌어올려 ‘해볼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3차 목표로 삼았다. 후보 등록 이후엔 TV토론 등을 통해 차기 대통령감으로 비교우위를 인정받아 대선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치밀하게 준비된 후보답게 경선 통과라는 1차 목표는 보란 듯이 달성했다. 그 과정에 대통령 명의도용과 ‘박스 떼기’ 등 몇 차례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쳐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선출된 경선 노하우와 2004년 총선과 2006년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한 경험 등을 살려 슬기롭게 극복했다.
경선 이후 당내 통합작업도 매끄러웠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경선 이후 선대위를 꾸리는 데 두 달이 걸린 반면 정 후보는 1주일 만에 손학규, 이해찬 등 경쟁자들로부터 공동선대위원장 수락을 받아내고 2주 만에 선대위를 출범시켰다. 지지율도 경선 컨벤션 효과에 힘입어 경선 직후 20% 가까이 치솟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후발주자에게 ‘안전 행보’는 毒?
정동영 대선 플랜의 제2단계인 ‘정동영 대 이명박’ 양자 대결구도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경제 전문가 이미지와 청계천 효과 등 서울시장 시절의 성과에 힘입어 지지율 50%를 상회하는 이명박 대세론이 워낙 견고한 데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등 소위 범여권에 실망해 등 돌린 민심이 정동영 후보에게 눈길조차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별 없는 성장’과 ‘가족행복’을 슬로건으로 이명박 후보와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청계천 등 성공 신화를 바탕으로 경제담론을 선점한 이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명박 대세론에 가로막혀 반전의 기회를 찾지 못하는 사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대선 구도가 ‘이명박 대 이회창’ 두 후보의 맞대결 구도로 재편되면서 정 후보는 3순위 후보로 밀리고 말았다.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출마에 범여권이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데는 이명박 후보와의 맞대결 구도가 흐트러지면서 대선판 자체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정동영 후보 선대위 최재천 대변인은 “이미 자신을 심판한 국민을 무시한 극단적 권력욕망은 국민에 대한 모욕이며, 역사의 시곗바늘을 차떼기 시대로 돌리는 철저한 반동”이라고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를 맹비난했다. 청와대도 대변인 논평을 통해 “국민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일”이라고 이회창 후보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꿈쩍도 않던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이회창 변수’에 하락하기 시작했다. 40%대로 내려가더니 11월 중순 조사에서는 30%대로 떨어졌다. 대선전에 뛰어든 이회창 후보가 20%대 지지율을 기록하며 2위로 뛰어오르는 사이 정동영 후보 역시 가까스로 달성한 20%대 지지율을 지켜내지 못하고 10% 중반으로 하락했다. 정 후보의 지지율 하락은 ‘이회창 쇼크’에 유탄을 맞은 면이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맞붙을 후보로 스스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데 더 큰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한귀영 연구실장은 “국민이 대통령후보에게 원하는 것은 매 시기 난관을 뚫고 나가는 돌파력”이라며 “후발주자일수록 안전한 행보는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후보로 선출된 이후 정 후보의 소극적 대선 행보가 지지율 하락의 한 원인이 됐다”고 지적했다. 대선판을 정 후보 중심으로 주도하지 못한 상황에 이회창 돌출변수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한순간에 후순위로 밀렸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정치인으로서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점을 정동영 후보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월30일 ‘정동영 후보의 약점’을 주제로 실시한 KSOI 조사(19세 이상 전국 성인남녀 700명 대상,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7%)에서 응답자의 33.6%는 ‘정치인으로서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점을 정 후보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았다.
추상적 대립구도의 한계
정동영 후보측은 한때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에 맞서 ‘개성 동영 대 운하명박’의 대립구도를 제시한 바 있다. 개성공단을 만든 추진력을 앞세워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공약을 압도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명박 후보의 공약을 매개로 일부러 대척점을 찾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명박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후보가 ‘국민성공’을 들고 나오자, 이번에는 ‘가족행복’으로 맞장구를 쳤다. ‘행복동영이 성공명박을 이긴다’는 구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추상적 대립구도는 작위적일 뿐 아니라 국민 실생활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위 KSOI 조사에서 정 후보의 두 번째 약점으로 ‘정치적 성향과 정책노선이 불분명하다’는 응답이 24.8%로 뒤를 이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만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기보다는 이명박 후보와의 맞대결 구도를 만드는 데 지나치게 치중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세 번째 약점으로는 ‘국정에 실패한 범여권 후보라는 점’(22.5%)이 꼽혔다. 정 후보가 ‘뚜렷한 성과가 없고, 정책노선도 불분명한, 국정에 실패한 범여권 후보’라는 인식을 깨지 못하고 있는 사이 대선 국면은 ‘이명박 대 이회창’의 양자 대결구도로 재편됐다. 정 후보는 비록 원내 제1당의 대선후보지만, 지지율 3위 후보로 뒤처지면서 대선 주도권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이명박 후보와의 1대 1 구도를 만들려던 목표가 차질을 빚으면서 정동영 후보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패색’이 짙어가는 대선판을 흔들기 위해선 승부수가 필요했다. 정 후보는 고육책으로 민주당과 50대 50의 당 대 당 통합과 후보단일화 카드를 꺼내 들었다. 민주개혁세력의 적자(嫡子)로서 범여권 단일후보로서 ‘이명박 대 이회창’의 양자 대결구도로 굳어가는 대선판을 3자 대결구도로 바꾸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원내 140석의 대통합민주신당과 원내 8석의 민주당이 당 대 당 통합을 하는 것은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정 후보측은 “전통적 지지층 복원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항변한다. 한 핵심참모는 11월12일 양당 합당 선언 직후 “모양과 격식을 따질 겨를이 없다. 이제 범여권을 한데 묶어 총력체제를 구축하지 못하면 대선은 해보나마나라는 인식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4인 회동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은 11월19일까지 ‘합당 절차’를 마무리하고, 두 차례 TV토론을 거쳐 11월23~24일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 단일화를 하기로 합의했다.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치열한 경선을 거쳐 후보로 선출됐지만, 정 후보에게는 범여권 최종 단일 후보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원내 8석의 이인제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논의해야 하고, 이 관문을 통과한다 해도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와의 제2차 후보 단일화 여정이 남아 있다.
정동영 후보는 본선에서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정 후보는 두 가지 전선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
첫 번째는 평화전선이다. 정 후보를 비롯해 범여권 인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화개혁세력’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과거에 즐겨 사용하던 ‘민주개혁세력’에서 ‘민주’를 빼고 ‘평화’를 넣은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1997년 정권교체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서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구도가 해소됐다는 정치사회적 변화가 반영된 면이 있다.
더욱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맥을 이어 제3기 ‘통합의 정부’ 창출을 꿈꾸는 정 후보에게 평화전선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핵심전략이다. 1953년 7월27일, 휴전 협정일에 태어난 정 후보는 스스로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을 ‘정치인 정동영’의 소명으로 삼고 있다.
“저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향후 5년이 우리나라의 100년을 좌우할 시기라고 봅니다.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5년 뒤에는 또 다르죠. 기회의 문이 열렸는데, 이것을 잘못 관리하거나 낭비하면….”
‘반부패 vs 부패’ 대결구도로
정 후보는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직후인 10월17일 개성공단을 방문하는 길에 가진 인터뷰에서 “올 대선의 의미는 단순히 정동영의 승리냐 패배냐, 당의 승리냐 패배냐를 넘어서는 것이다. 대선 패배는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왔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 근본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한반도 질서 자체가 흐트러진다”고 우려했다.
정 후보는 통일부 장관이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 2005년 9·19 공동성명 제4항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 정착을 위해 당사국간 논의를 시작한다’는 결정문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그해 6월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담판해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이끌어내고,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의 산파 역을 했던 경험을 가장 큰 자산으로 여긴다.
“(9·19 공동성명이라는) 설계도를 가지고 시공해보고 싶습니다. 전문가들은 5년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앞당기겠습니다. 적어도 (차기 정부) 임기 중반까지 한반도 평화협정체제를 만들어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바꾸겠습니다. 이산가족의 한을 풀겠습니다. 그게 차기 대통령의 역사적 소명입니다. 그 소명은 새로운 철학과 추진력에 의해 가능합니다.”
그는 이번 대선을 평화전선과 아울러 ‘반부패와 부패’의 대결구도로 치르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이회창 후보의 경우 2002년 대선 당시 ‘차떼기’의 주역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켜 ‘정치부패’의 원조로 몰아붙인다는 전략이다. 이명박 후보에 대해서는 BBK 사건과 도곡동 땅 차명보유 의혹, 최근 불거진 두 자녀의 ‘위장취업’ 논란 등 ‘경제부패’의 전형이라는 점을 집중 부각시킬 계획이다.
삼성 비자금 특검법 제출 등과 같이 ‘부패와 반부패 전선’은 자연스레 비(非)한나라 진영을 한데 묶는 촉매제 구실을 하고 있다. 정 후보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선거부패, 정치부패, 경제부패 등 일생동안 축적한 재산에 대해 설명해야 할 내용이 많은 후보가 2007년에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은 상식이 될 수 없다”며 “대한민국 국민은 상식에 비추어 법을 어기지 않고, 병역필도 했고, 애국심을 가지고 이 나라의 선진화를 꿈꾸고 노력한 사람을 선택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지율 3위 후보. 후보 단일화를 앞둔 범여권 후보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면서 정동영 후보는 자신의 꿈과 비전을 국민에게 맘껏 펼쳐 보일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직후에도 그에게 주로 쏟아진 질문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거냐” “후보 단일화 방침은 무엇이냐”였다. 저조한 지지율 극복이 지상과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현실적 여건에 떠밀려 “왜 대통령이 되려 하는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일을 할 계획인가”라는 미래지향적 질문은 좀처럼 정 후보에게 던져지지 않는다.
가슴에 묻은 ‘3통의 정치’
비록 원내 제1당의 대통령후보지만 대통령후보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통령후보로서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포부 역시 맘껏 펼쳐 보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앞으로 5년 동안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운전대로 잡고 갈 수 있느냐, 아니면 미국과 북한이 어떻게 보는가를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존재가 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 후보는 대선후보로 선출된 직후 미국·중국·일본·러시아 4대국을 차례로 방문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2·13 합의 이후 북미관계 개선 움직임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등 한반도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 후보의 4개국 순방은 무산됐다. 무산됐다기보다 연기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10월초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부시 대통령 면담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무산돼 여론의 뭇매를 맞은 마당에 자칫 4개국 순방 추진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연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연기된 4개국 순방은 대선 일정에 밀려 다시 추진되지 못한 채 계획에 그쳐야 했다.
자신이 집권하면 차기 정부를 ‘통합의 정부’로 명명하겠다는 정 후보. 그는 ‘3통의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다. ‘3통’이란 ‘남남·남북·동북아 통합’이다. 역사학도로서 ‘동북아 통합을 이루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은 온갖 역경에도 그를 ‘대통령 당선’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고단한 발걸음을 떼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3통의 정치’에 대한 포부는 급변하는 대선 현실에 가로막혀 있다. 정 후보는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지금까지 이를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그에게는 “문국현 후보와의 단일화는 언제, 어떻게 할 것이냐”는 현실적 질문만이 쏟아지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