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 흔히 퐁피두센터라고 하는 프랑스 파리의 이 방대한 건축물이 현대 건축사에 남긴 의미는 간단치 않다. 에펠탑, 개선문을 넘어 20세기 현대도시 파리를 상징하는 이 센터는 전통성과 현대성을 한꺼번에 아우르기 위해 고민하는 유서 깊은 도시가 어떤 도시공간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지 보여준 명확한 사례였다. 거대한 철골 트러스 외관에 대담한 이미지와 자유로운 내부 변경이 가능한 설계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도시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았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렌초 피아노와 함께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영국 출신의 리처드 로저스(76) ‘로저스 스터크 하버&파트너스’ 회장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축·도시설계 분야의 세계적 거장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흔한 수식은 2007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바 있다. 런던 도심의 현대성을 새롭게 해석한 로이즈 보험사 건물,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 등으로 20세기말 건축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그는 1991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경’이 됐고, 1998년에는 종신작위를 받았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 이 거창하고도 까다로운 도시공간 재편의 기본 콘셉트는 과연 서울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파리와 런던, 마드리드 같은 역사도시에 현대성의 극한을 보여주는 건축을 일궈온 로저스 경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그가 영국 정부를 위해 수행한 도시재생 프로젝트와 ‘콤팩트 시티’라는 아이디어는 과연 서울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2008년 10월29일 서울국제경제자문단 총회(SIBAC)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로저스 회장과 초청자인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직면한 갖가지 문제와 이를 돌파하기 위한 서울시의 각종 프로젝트가 주제에 올랐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관록의 거장과 젊은 시장의 대화는 시종일관 부드러웠지만, 때로 날카로운 시각 차를 드러내기도 했다.
오세훈 요즘 제가 자주 사용하는 ‘컬처노믹스(Cultur-enomics)’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원래 이 말은 스웨덴의 한 교수가 만든 마케팅 용어입니다. 다국적 기업이 외국에서 신상품을 론칭, 마케팅할 때 먼저 해당 도시의 문화를 정확히 파악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었죠. 저는 올해 초부터 이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의미를 조금 변형시켜봤습니다. 문화예술을 원천으로 도시에 고부가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컬처노믹스로 부르고자 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 문화예술로 경쟁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백하건대 제가 이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에는 나름대로 변명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사실 도시는 문화가 중심이 되어야 할 텐데,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문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니까 거부감을 갖는 분들이 있더군요.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문화 얘기냐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문화를 경제로 풀어 얘기해야 설득력이 있겠다는 판단이 서기도 했습니다. 물론 문화를 경제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만, 21세기 도시 경쟁력은 문화로부터 만들어지는 측면이 분명이 있다, 이제 문화가 돈이고 경제다, 그러한 메시지를 강조하고자 이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저스 한국은 분명 주요한 산업국가 중 하나이고, 서울은 모든 종류의 건물을 찾을 수 있는 도시입니다. 그 가운데 제가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한 것은 청계천 같은 경험입니다. 이로 인해 도시의 풍경이 전혀 달라졌고, 또 시장님이 말씀하신 경제와 문화를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고리의 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청계천이 복원된 이후 주변 땅값도 올랐다고 하니 문화적인 공간이 경제적인 부로 연결되는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서울시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인데요. 이 프로젝트는 문화적으로도 아주 중요하지만 삶의 질을 높이고 경제적인 가치를 창조해내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세훈 디자인과 도시 경쟁력의 상관관계를 보자면 먼저 그 도시의 정체성을 들여다봐야겠죠. 도시의 정체성은 결국 그 나라 고유의 문화로부터 나온다고 믿습니다. 문화와 예술 같은 이른바 ‘문화자본’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그간 우리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지나치게 기능주의적으로, 효율 위주로만 생각하고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오랜 역사로부터 연유하는 문화자본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도시의 문화적 자산을 도시의 외양에 반영해 외국 방문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디자인이 많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있습니다.
컬처노믹스, 디자인, 삶의 질
저는 기능과 효율에 중점을 두었던 하드웨어 도시를 문화와 예술의 소프트웨어 도시로 바꾸고자 합니다. 비유하자면 자동차로 다니기 편했던 도시가 자전거나 보행자 중심의 도시로 바뀌어야 경쟁력이 생긴다, 이런 비전을 설정한 겁니다. 그 방법론의 핵심으로 디자인을 선택한 것이고요.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자본을 형상화해 ‘소프트시티’로 만드는 과정에 디자인이라는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죠. 이러한 형상화가 성공할 때 비로소 경쟁도시들과 차별성도 생기고, 독창성도 두드러지고, 정체성도 드러날 것이라 믿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도시민 삶의 질이 향상되고 도시의 경쟁력도 키워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지금 서울시가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는 모두 이러한 목표를 위한 것들입니다. 말씀하신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나 아트남산 프로젝트, 거리 르네상스 프로젝트, 디자인서울 프로젝트 등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디자인서울 프로젝트는 지금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서울의 색을 추출하고 서울의 서체를 만들어내는 기초작업이 끝났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해 서울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다음 단계입니다.
로저스 동의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한 것은 환경이 곧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점인데요. 윈스턴 처칠 전 총리도 이야기했듯 우리가 도시를 만들면 그 도시는 다시 우리의 삶을 형성하게 됩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원하는 곳에 잠시 머물러 비즈니스를 할 뿐 한 곳에 평생 머물러 산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사람들이 머무르고 싶은 곳,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 곳이 바로 삶의 질이 높은 공간이지요. 그런 공간, 그런 도시를 만드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성이 보장되는 곳에서 살고 싶어하고, 디자인이라는 요소는 그러한 공간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면 이러한 디자인적 요소를 적용하는 데 돈이 엄청나게 더 드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지요.
리처드 로저스 경의 대표작인 런던 로이즈 빌딩(왼쪽)과 파리 퐁피두센터.
과거와 현대의 조화
오세훈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자본을 바탕으로 서울의 디자인을 고민할 때, 특히 현대성과 전통성의 조화를 이뤄나간다는 측면에서 보면 고민스러운 주제 가운데 하나가 서울의 고궁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들 옛 건축물이 현대의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게 솔직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도시는 예스러움과 새로움이 공존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조화를 이뤄 서로를 돋보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독일의 예를 들자면 먼저 베를린의 의사당 건물이 떠오릅니다. 대표적인 석조건축물이지만 그 위에 유리 돔을 씌워 현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어냈죠. 파리의 경우에는 유리 피라미드를 채택한 루브르박물관을 예로 들 수 있을 겁니다. 언뜻 몹시 이질적인 소재와 모양 때문에 처음에는 다소 기괴하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도 들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즐겨 방문하는 공간이 됐습니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건축물이 된 거죠.
결국 문제는 얼마나 자신 있게 구사하느냐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만 어느 한쪽이 너무 위축되지 않게 조화롭게 디자인하는 것은 건축가의 몫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 신청사는 기대되는 바가 큽니다. 기존의 형태가 보존되는 앞의 공간은 시민의 활용도가 높은 도서관이 될 것이고, 뒤의 신청사는 유리 건물로 만들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나중에는 과거와 현재가 매우 잘 어우러진 건축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원칙하에서 꾸준히 보완해나가면서 조화로운 형태가 되도록 추진해야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도시는 아무래도 효율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서울처럼 면적이 넓지 않으면서 인구밀도는 높은 도시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개발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도시는 생명체와 같아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발전해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성장과 발전을 인위적으로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어떻게 보면 옛 추억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감성일 뿐입니다. 저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종로의 피맛골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많은 서울시민이 피맛골에 대해 향수를 가지고 있지만, 막상 피맛골을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에 대해서는 또 상당한 불편을 느끼거든요. 지금 그대로 놔둬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게 좋겠다는 견해 사이의 충돌은 도시 발전 단계에서 피해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 베를린 의사당의 유리돔(위)과 서울 동대문 디자인파크& 플라자(DDP) 개념도.
로저스 오래된 도시도 현대로 오면서 진화하게 마련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도시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이상적인 상태가 따로 있어서 그것만을 조화로운 형태라고 하는 것은 아니죠. 여러 가지 건물이 한 가지 형태로 지어진 도시를 조화로운 도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스타일의 건물이 공존하는 도시도 또 다른 형태의 조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대조적인 것이 하모니를 이루는 도시가 더 많고, 이것이 전형적인 도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의 예를 들어봐도, 르네상스의 건물과 중세의 건물은 아주 다르지만, 그렇게 다른 건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울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해 디자인적으로 어떤 접근법을 택해야 하느냐가 중요한 질문으로 떠오릅니다. 제가 서울에 대해 연구를 수행한 적은 없기 때문에 이에 대답하기 어렵기는 합니다만, 최근 서울시가 방향을 잡은 것처럼 한강 인근의 수변지역을 발전시켜나가는 계획 같은 것은 옳은 방향성을 찾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도시와 직접 비교할 문제는 아닌 듯하지만, 런던도 최근 몇 년간 아주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데요. 템스 강변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등의 강변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사람이 다시 런던으로 모여드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바 있습니다. 바르셀로나도 마찬가지 사례였지요. 지난 15년간 이뤄진 공간구조 개선의 결과로 방문객 수가 급증하면서 매력적인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단순히 관광객이 늘어난 것뿐 아니라 먼저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활력 넘치는 삶을 즐기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긍정적인 부분일 겁니다.
도시 르네상스와 지방정부의 리더십
서울은 이러한 다른 도시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을 테고, 또 훌륭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하면 건축물과 공공장소의 질을 한꺼번에 높일 수 있을지 해법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두 가지 예를 더하자면, 최근 파리에서도 어떻게 하면 디자인을 이용해 도시민 삶의 질을 높일 것인지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뉴욕도 유사한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전세계가 공공공간의 질을 높이는 것이 더 나은 삶의 질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의 삶의 질 문제를 말하면서 많은 분이 아파트 문제를 지적하는 것 같더군요. 우선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도시와 비교했을 때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들이 그렇게 보기 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도시의 디자인 혁신이라는 아주 높은 기준을 갖고 보면 분명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 있겠죠. 아파트 단지의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데도 분명 지방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런던에서 제가 관여하고 있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건물 디자인을 개선하기 위한 자문단입니다. 대학 건물의 모양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렇듯 각 공공기관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지방정부가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이렇듯 여러 방식의 도시 르네상스를 경험하고 있는 선진도시들에는 아주 훌륭한 시장님들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방정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합니다.
오세훈 서울시민 주거형태의 약 55%가 아파트로 구성돼 있고 이 비율은 더 올라갈 것입니다. 재건축, 재개발 사업이 예정돼 있는 물량만 다 완공돼도 서울 시내 80% 정도가 아파트로 변하게 됩니다. 단독주택 주거형태가 20%도 채 안 되는 것이죠. 그 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로저스 기본적으로 주거형태는 시민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도시의 집약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지요. 도시가 지나치게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 교통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동거리가 멀어진다는 단점이 있죠. 이렇게 되면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이 불가능합니다. 도시공간의 집적에 대해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런던을 예로 들자면, 최근 들어 이동형태의 95%가 걷기 또는 대중교통 이용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가용이 런던 시내에 진입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도시의 발전도 교통문제와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처럼 인구밀도가 높아질수록 도시의 공공장소는 그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집적이 진행될수록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보행자가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일수록 도시계획이 더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2008년 10월29일 대담을 나눈 오세훈 시장(왼쪽)과 리처드 로저스 경.
오세훈 아파트 증가에 대한 많은 분의 문제의식이나, 이를 디자인 개념이 반영된 도시계획으로 극복해나가는 방안에 대해 서울시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시 디자인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강제로 이뤄질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인센티브 시스템을 활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죠. 특히 미래의 행정은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끌고 가는 방법으로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하고 그 가이드라인을 좇아오는 분들이 어떤 형태로든 이득을 볼 수 있도록 만들 때 자연스럽게 그 방향에 힘이 실린다고 생각합니다.
개별 아파트 등 건물의 디자인 문제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품격 디자인으로 건물을 짓는 분들에게는 충분한 용적률 인센티브가 주어질 것이고, 과밀개발로 집적도가 높아지는 경우 건물주가 공공공간을 스스로 내놓는다면 시는 그에 상응해 용적률을 상향조정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유도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최근 서울시의 정책 방향이 그렇습니다. 기왕에 발표된 여러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충족시키는, 그래서 서울시가 그리는 미래도시의 비전 체계에 맞춰 좇아오는 건축물의 경우에는 앞으로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용적률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경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에너지 절약형 건물인가 즉, 에너지 절약을 많이 하고 신재생에너지를 많이 활용할수록 용적률을 높여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친환경 건물인가. 마지막으로 디자인이 우수해서 시민들이 문화적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요소가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는 고려 요인입니다. 많게는 20% 정도의 용적률을 추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로저스 집적도 문제와 관련해 도시계획을 고려할 때, 디자인과 함께 반드시 고민해야 할 요소가 교통문제일 겁니다. 사실 이 부분은 뉴욕을 비롯해 전세계의 모든 대도시가 어려움을 겪는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런던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가 교통혼잡비 제도인데요, 방금 경제적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교통혼잡비를 걷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통혼잡비를 걷어 이를 대중교통 분야에 다시 투자하는 것이지요. 런던은 지난 몇십년간 아예 주차장을 짓지 않고 있습니다. 주차장을 짓지 않으니 당연히 차가 도심에 들어올 수 없지요. 하지 말아야 할 또 한 가지 사업이 도로를 닦는 것입니다. 도로를 더 건설하게 되면 당연히 차가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오세훈 교통 분야에 관한 철학 자체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서울시도 런던의 혼잡통행료 정책을 검토했지만 현실적으로 좀 어려운 측면이 있어서 시행을 보류했습니다. 서울이 런던과 다른 점은 시민들 가운데 자영업자의 비율이 높다는 겁니다. 도심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면서 장을 보는 등 영업에 필수적인 일을 자동차로 처리하는 분의 숫자가 만만치 않습니다. 동대문운동장 근처에는 소규모 의류봉제로 먹고사는 가게가 3만개 정도 있는데, 이분들 대부분이 조그마한 차량 하나는 있어야 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서울시가 사대문 안에서 혼잡통행료 제도를 시행하면 이분들이 굉장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처럼 런던과는 다른 특성이 있기 때문에 혼잡통행료 제도를 도입하면 엄청난 저항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 대신에 백화점 같은 곳에 드나드는 차량의 숫자를 줄이는 방안을 추진했던 것인데 그에 대해서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어요. 더 많은 토론과 시민 설득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로저스 어느 도시에나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해결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겠죠. 서울과 런던의 경우가 다르다는 점을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영세 자영업자들이 겪는 불편 역시 어느 도시에나 있게 마련이지요. 제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과 이탈리아 로마에서 조사를 해보니 도시에서 자동차 수가 줄어들면 보행자, 유동인구의 수가 오히려 늘어난다는 겁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가게에 드나드는 사람도 늘어날 것이고, 매출도 늘겠죠. 도시가 한층 보행자 친화적인 도시가 되었을 때 영세업자들의 매출도 나아질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양면성을 가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highrise와 內四山
오세훈 디자인과 도시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랜드마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최근 이와 관련해서도 서울시가 많은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랜드마크는 크게 나눠 자연적인 랜드마크와 인공적인 랜드마크가 있을 겁니다. 서울은 자연환경이 무척 독창적인 도시입니다. 도심 한가운데에 남산이라는 멋진 녹지공간이 있고, 또 도심 한가운데 한강이라는 엄청나게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남산과 한강이 서울을 다른 도시와 구별짓는 자연적인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 개성을 부여하고 이용을 극대화하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인공적인 랜드마크에 관해서는 전세계가 지금 ‘하이라이즈(highrise) 빌딩’ 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거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심에 굳이 ‘하이라이즈’를 올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특히 서울의 도심은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이라는 내사산(內四山)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굳이 이 내사산의 높이를 넘는 ‘하이라이즈’를 엄청난 면적을 희생해가며 도심 한복판에 만들 이유는 없는 거죠.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필요하다면 잠실이나 상암, 용산 정도에 만들어도 충분히 랜드마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랜드마크가 돼야 하느냐, 우선 그 모양이 특이해야죠. 그리고 용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한 용도의, 그러한 형태의 건물이 이 도시에서 어떤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도시민 삶의 질 향상에 왜 필요한지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건물만이 랜드마크로서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시가 최근 진행하고 있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사업은 그런 뜻에 부합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외국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면 남산 N타워를 랜드마크로 꼽는 외국인이 많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로저스 역시 방문객 자격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당장 이 자리에서 봐도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랜드마크는 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네요. 제 생각으로는 랜드마크가 반드시 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작은 건축물도 얼마든지 랜드마크가 될 수 있어요. 뉴욕에도 작은 공원들이 랜드마크 역할을 합니다. 랜드마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람들이 도심 속에서 얼마나 그것을 즐기느냐, 얼마나 특별한 것으로 인정하느냐가 아닐까요. 어쩌면 적절한 장소에 심은 나무 한 그루도 랜드마크가 될 수 있지요. 결국 도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