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호

함께 늙어가는 옛 선후배들, 해발 4260m에서 우리, 살아있네~

5060 ‘야산회’는 왜 차마고도로 갔나

  • 김종욱 | 자영업자 gayain@nate.com

    입력2013-12-18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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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늙어가는 옛 선후배들, 해발 4260m에서 우리, 살아있네~
    64.5 vs. 53.

    통계청이 발표한 2012년 기준 근로자 평균 은퇴연령은 53세. 하지만 2013년 한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가 성인 남녀 약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성인이 은퇴하기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나이는 64.5세였다. 현실과 이상 사이는 11.5년. 그 안에 50, 60대 중년남성들이 있다. 가정과 직장에서 설 곳을 잃어가는 중년남성 다수는 산을 찾는다. 주말이면 이름난 산마다 중년남성들로 가득하다. 단색의 산을 울긋불긋 아웃도어 룩으로 물들이며 그들은 산에서 위로를 얻는다. 산은 건강도 돌봐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새롭게 도전하라’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힘을 실어준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최근 차마고도(茶馬古道), 백두산, 실크로드 등지로 해외 트레킹을 가는 인구가 급증했다. 여행객 대부분이 은퇴를 전후한 50~60대라고 한다. 그들은 왜 젊은 사람들도 오르기 힘든, 그 멀고도 외딴 차마고도로 가는가. ‘첫 번째 직장’에서 은퇴해 ‘두 번째 업’을 일궈가고 있는 1959년생 중년남성이 차마고도 기행문을 보내왔다.

    2013년 10월 24일 오후 4시. 여덟 남자가 인천국제공항에 모였다. 최고 연령 61세. 50대 중반인 나와 ‘전’이 막내인 이 모임의 이름은 ‘야산회’다. 한 대기업에서 20~30년간 근무하고 퇴직한 사람 중 산을 좋아하는 몇몇이 모여 2007년 만든 모임이다. 회사 이름 중 한 글자인 ‘야’에 ‘산’을 더해 야산회라 이름 지었는데, 여기에는 구성원들의 나이를 생각해 ‘야트막한 산에만 다니자’는 뜻도 담겨 있다.

    우리는 매달 1~2번 서울 근교의 야산을 찾곤 했는데, 모인 지 5년이 넘어가다보니 웬만한 야산은 몇 번씩 반복 등반을 했다. 그러자 멤버들은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생에 남은 시간을 고려할 때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지금 부지런히 설쳐야 한다는 강박감도 있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씩은 외국의 명산에 가자고 결의했고, 지난해 백두산을 거쳐 올해는 중국의 차마고도를 가기로 했다.



    장 전무, 김 상무, 이 이사…. 우리는 서로를 퇴사 전 최종 직책으로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최 판서, 박 군수, 윤 초시 같은 최종 관직으로 평생 불렸듯이. 지금에야 아무 실익도 없는 호칭이지만 우리의 가장 치열하던 삶을 떠오르게 한다.

    봄부터 계획한 차마고도 여행을 드디어 가게 됐다는 설렘도 잠시, 수속 직전에 모임의 ‘공동 막내’인 ‘전’이 결국 사고를 쳤다. 옛날 여권을 가져온 것이다. 현역 시절 러시아 지사에서 오래 근무했던 ‘전’은 남들은 하나뿐인 여권을 여러 개 갖고 있다보니 이 사달이 났다.

    결국 ‘전’의 와이프가 새 여권을 챙겨 수원에서 인천공항까지 택시를 타고 총알같이 달려온 덕분에 마감 2분 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어찌나 걱정을 했던지 이륙 후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친구에게 “우짜겠노, 니도 마눌님도 깜빡깜빡 하는 나이인데. 비행기 탔으니 됐다마”라는 말로 위로했다.

    중국의 끝자락인 윈난(雲南)성 리장(麗江)시로 향하는 직항 전세기에는 등산복 차림의 중·노년층이 가득했다. 한 달만 염색을 걸러도 머리가 새하얘지는 50대 중반의 내가 그중 가장 어린 축에 낄 정도였다.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비행기 탑승 전이나 비행 중에도 시끌시끌해서 동승자들의 관계나 여정 등을 귀동냥하기도 했다. 어느 그룹은 중학교 동창 5명으로 이뤄졌다. 까까머리 10대 때의 인연이 중년까지 이어져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옛 상사와 山친구 되다

    함께 늙어가는 옛 선후배들, 해발 4260m에서 우리, 살아있네~

    호랑이가 사냥꾼에 쫓겨 물속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뛰어넘었다는 ‘호도협’.

    밤늦은 시간에 참으로 아담한 리장국제공항에 도착, 작은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됐다. 밤은 깊었지만 소쩍새 우는 봄부터 반년을 기다려온 여정이라선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내공이 깊은 듯한 조선족 가이드 ‘영월 엄씨’를 윽박질러 호텔 옆 허름한 꼬치집을 찾아갔다. 메뉴에 있는 여러 꼬치 중 “적어도 이건 먹을 수 있겠다”고 의견을 모은 3종의 꼬치를 골라, 이름 모를 ‘배갈’과 더불어 세 번이나 추가해 먹었다. 싸고 맛있는 야참이었는데 사실 나는 ‘집만 나서면 뭐든지 맛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판단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임을 밝혀둔다.

    둘째 날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됐다. 호도협은 뉴질랜드 밀포드 트렉, 페루 마추피추 잉카 트렉과 더불어 ‘세계 3대 트레킹 코스’로 불린다. 호도협은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옥룡설산(玉龍雪山)과 합파설산(哈巴雪山) 사이, 진사강(金沙江)이 흐르는 협곡을 말한다. 21년 직장생활 끝 무렵에 나는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글귀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는데 그 장강의 상류가 이 금사강이란다.

    호도협(虎跳峽)의 유래도 재밌다. 계곡물이 워낙 세차 사람이 건널 수 없는데, 그 옛날 호랑이(虎)가 사냥꾼에 쫓겨 계곡물속에 있는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뛰어(跳)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첫날부터 빡빡한 ‘678 스케줄(6시 모닝콜, 7시 식사, 8시 출발)’로 아침을 시작했다. 나시족(納西族) 운전기사의 운전 실력은 출중했으나 차가 워낙 낡아 모든 차종에 추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시간 반을 달려 휴게소에 정차한 우리는 일단 화장실을 찾았다. 강렬한 냄새가 이끌었기 때문에 북적이는 속에서도 화장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배설의 즐거움을 위해 무려 1위안을 내고 들어갔는데 맙소사!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그곳은 말로만 듣던 중국 전통 화장실, 앞이 뻥 뚫린 ‘개방형 변소’였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대한남아의 기개를 발휘해 숨은 참고 눈은 부릅뜬 채 배변의 기쁨을 맛보았다.

    다시 버스에 올라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내는 옥련설산을 바라보며 1시간 반쯤을 달렸다. 굽이굽이 물길을 따라가던 버스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냉각수를 보충하는 희한한 장면도 목격했다. 그 틈을 타 노점에서 커다란 대추를 사서 깨물었는데 모양만 대추일 뿐 맛은 도저히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맛이었다.

    교두진에 내려 앞이 빵처럼 생긴 5인승 승합차(일명 ‘빵차’)로 갈아타고 20분가량 꼬불꼬불한 산기슭을 올라가 해발 1950m의 일출소우에 도착했다. 현역 시절 방자했던 내 젊은 혈기를 감당해준 직장 상사였으며 이젠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산에서 함께 보내는 우리 야산회 멤버들은 가벼운 체조를 하면서 결기를 다졌다.

    琴·棋·書·畵·煙·酒·茶

    세계 3대 트레킹의 시발점치고 일출소우의 풍경은 지극히 소박했다. 헛간쯤 되는 벽돌 건물의 벽에 ‘고로, 합파설산(高路, 哈巴雪山)’이라는 낙서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말 두 마리가 전부였다.

    호도협 트레킹은 합파설산 중턱의 한갓진 나시족 마을을 잇는 오솔길을 걷는 코스인데 계곡 건너편에 우뚝 솟은 옥룡설산을 건너다보고, 저 아래 까마득한 계곡물을 내려다보며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하는 멋진 트레킹이었다. 이동하는 데 오래 걸려 이내 점심시간이 됐다.

    해발 2100m 산봉우리 중턱에 자리 잡은 나시객잔은 전혀 상업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나시족 남자들은 금기서화연주차(琴棋書畵煙酒茶), 이 일곱 가지에만 능하면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잘살 수 있다는데, 그래서인지 남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나시족 여인과 10대 후반의 딸이 내 입맛에 딱 맞는 점심을 내놓았다. 아니, 고도의 중심 잡기 능력이 요구되는 널빤지 의자에 앉아 맨눈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먹은 점심이라 더더욱 맛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배를 든든히 채우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28밴드로 향했다. 28굽이 길이라 이름이 그렇단다. 아무튼 풍경에 취하고 오랜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기분에 취해 타박타박 길을 걷는데, 언제부터인지 노린내가 폴폴 나면서 은근한 방울소리가 들려온다. 뒤돌아보니 말 몇 마리와 40대로 보이는 남녀가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 이것이 바로 돈 내고 탄다는 그 말이구나.

    몇 밴드나 올랐나 서로 물으며 가쁜 숨을 몰아 쉴 즈음에 나귀는 “쯧쯧…얼른 타시오, 얼른 타…”라는 듯이 방울을 더 딸랑이는 듯했고, “이래도 안 탈 거야?”라는 듯이 노린내를 더 진하게 풍기며 우리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우리 팀은 아무도 그 나귀를 타지 않았다. 미안하게도.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그 먼 길을 따라온 그들의 무심한 눈길에서 세상사를 초월한 기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허망하게 돌아간 마부만큼이나 마음 아픈 일이 있었다. 전망 좋은 산모퉁이에는 으레 오이, 호두, 사과 등을 판매하는 ‘농상공’(‘농민공’에 빗대어 농작물 판매도 간간이 하는 노파들에게 내가 붙인 이름이다)이 있었는데, 그들의 다정한 인사에도 물건을 하나도 사주지 못했다. 그들의 살가운 몸짓이 너무 정겨워 웬만하면 한번 사 먹어보자고 마음먹다가도, 벌여놓은 물건들을 보는 순간 사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셔버리곤 했다. 저 아래 집에서 한참을 올라와 한나절은 족히 쪼그리고 앉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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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고도에서 보이는 히말라야 자락.

    함께 늙어간다는 것

    28밴드의 끝자락은 다소 허무했다. 그저 갑자기 천길 낭떠러지가 펼쳐졌다. 저 밑에 길게 이어진 호도협 계곡을 내려다보며 우리는 “저 계곡이 그 옛날 제갈공명이 위연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려다 실패한 바로 그 계곡인가” “저 계곡이야말로 화공(火攻)의 적지(適地)다” “저 산 너머 살았을 맹획의 부인 이름은 뭐였지?” 등등 삼국지를 중구난방으로 휘적거리는 질문을 주고받았다.

    갑자기 거적때기와 싸리나무로 지붕을 엮은 노점상에서 인민해방군 상의를 입은 사나이가 튀어나왔다. “한국인은 5위안입니다”라는 한글 알림판을 들고서. 말인즉,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중국인은 8위안을 받는데 한국인은 특별 할인을 해준단다. 그것 참, 봉이 김선달보다 심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정성스레 위치를 잡아 사진을 찍어주는 센스는 만점이었다. 또한 그 아름다운 풍경은 아무리 싸게 잡아도 5위안 이상이어서 그의 귀여운 꼼수에 즐거이 속아 넘어갔다.

    28밴드를 넘어서자 숲길과 절벽길이 뒤섞이며 계곡 건너의 설산을 즐길 수 있는 길고 긴 길이 이어지고, 마치 우리나라의 절집처럼 단아하고 여유로운 규모의 산골 농가가 산자락에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어쩌다 눈에 띄는 그들의 살림살이는 남루한 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잘 정돈돼 있었다. 우리는 조금 어이없어하며 “이것이 사회적 약자 보호책, 소수민족 우대책인가?” 하는 의견도 나눴다. 그런 한편, 이 적막강산에,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저들은 누구든 만나면 반갑고, 나누는 것이 행복한 삶일 것이니 삶이 곧 수행인 구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함께 늙어가는 옛 선후배들, 해발 4260m에서 우리, 살아있네~

    패기 넘치던 신입사원, 서슬 퍼렇던 호랑이 상사 모두 세월이 흘러 친구가 됐다.

    7시간의 트레킹을 마치고, 해발 2500m의 ‘중다오객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스며든 뒤였다. 입구에서 ‘Half Way Guest House’라는 간판을 보며 ‘참 실속 있게 지은 영어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군상이 둘러앉아 식사와 반주를 겸하는 식사시간은 참 기분 좋은 피곤을 나누는 순간이다. 신입사원 때부터 은퇴 후까지, 20년 넘게 함께한 우리 야산 멤버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인연이 얼마나 질기고 감사한지 생각하기도 했다. 늘 그렇듯이 먹성이 좋은 나와 ‘전’은 다른 멤버들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오골계 요리를 양껏 먹었다.

    중다오객잔의 명물은 열 살 남짓한 주인집 아들내미였다. 다양한 제스처를 보여주는 그 아이는 ‘소동(小童)’이라는 우리식 한자음으로 불러도 즉시 달려올 정도로 눈치가 빨랐다. 이 아이라면 20년 후쯤 중다오객잔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스트하우스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원래는 밤에 별이 비처럼 쏟아진다고 하던데, 오늘따라 짙어진 구름으로 별 구경을 못해 아쉬웠다.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새벽녘 중다오객잔의 우뚝 솟은 앞산 그림자는 신령함마저 느끼게 했다. 오늘도 ‘678 스케줄’에 따라 바쁘게 트레킹을 시작했다. 어제에 비하면 길은 ‘대로(大路)’라 할 만큼 넓고 편해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정도 길이라면 아내와 같이 한 번 더 올 수도 있겠다”면서 발걸음을 이었다.

    산은 크고 넓었지만 길도 많고 정교했다. 넓은 산자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집들을 저 아래 찻길은 정확히 연결했고, 집을 지난 길은 오솔길로 바뀌어 밭으로, 초지로, 수풀로 실핏줄처럼 연결됐다. 마을 규모나 거주 인원을 고려하면 분명 경제성이 없을 길일 텐데 의아했다.

    참 이상한 뇌물

    굽이굽이 열렸다 닫히며 이어지는 길은 오랜만에 시원한 물줄기의 관음폭포를 지나 또다시 끝도 없이 이어졌다. 산봉우리 중턱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더니 차마고도 저 밑에 보이는 찻길을 건너 ‘장선생 별장’으로 연결됐다.

    그곳에서 행장을 간추린 후, 저 아래 호도협의 급류를 찾아 내려갔다. 이곳은 ‘중호도협’으로, 장선생 별장에서 1시간 이상을 수직 직하하는 코스인데 그 깊이가 어찌나 대단한지 내려가면서 올라올 것을 걱정해야 했다. 어제의 피곤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여서 더욱 힘든 걸음이었다. 하나 탁한 물줄기가 뿜어내는 장쾌한 물소리는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주기에 충분했고, 물가에서 고개를 한껏 젖혀 올려다본 양쪽 설산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간 쌓인 피로를 급류에 띄워 보내고 힘내서 올라온 장선생 별장의 화장실은 이전과 비교해보면 거의 7성 호텔급이었다. 역시 개방형이었지만 나뭇결 무늬 바닥과 타일로 된 칸막이, 깨끗한 뒤처리용 물통과 바가지, 깨끗한 청소 상태 등 전반적으로 최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기념으로’ 이 화장실을 이용했다.

    장족 민속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고 트레킹 종료를 대견해하며 ‘빵차’를 타고 교두진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운전수가 어디서 본 양반이었다. 바로 어제 28밴드까지 우리를 쫓아왔던 바로 그 마부 아닌가. 마부(馬夫)가 차부(車夫)도 하는 나라다.

    그런데 이 양반, 엄청 속도를 냈다. 그 위험하고 좁은 길을! 걸어서 1시간 이상 내려가는 높이의 산 중턱에 난 길인데. 뒤에 앉아 있던 내 겁 많은 친구 ‘전’은 “어제 우리가 말을 안 타서 화가 나 이러는 거 아니냐? 천천히 가라고 팁 좀 줘라”고 했다. 세상에 이 친구 그저께 인천공항에서는 와이프한테 “여권 챙겨 택시기사한테 팁 듬뿍 주더라도 빨리 달려 오라”고 그렇게 닦달을 하더니, 중국 와서는 천천히 가자고 돈 주자네? 친구 구박을 할까 하다가, 이러다 사고 나면 다 죽겠다 싶어 차부에게 10위안을 건넸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중국어를 외치면서. “만만(慢慢), 어이, 차부. 만만”. 그러나 빵차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엄청난 속도에 자포자기 심정이 된 우리는 “차마고도로 걸어가고 자전거로 되돌아오는 여행 상품 사업은 어떨까” “차마고도를 말을 타고 가면 안 될까” “저 거친 물살에서 래프팅 사업을 하면 돈 좀 될라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중구난방으로 떠들면서 트레킹의 여운을 즐겼다.

    교두진에서 얼굴이 거무스레한, 맘씨 좋아 보이는 나시족 청년이 모는 그 버스를 다시 타고 리장으로 되돌아오는 길. 버스 맨 뒷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강물과 산들과 마을들을 감상하며 참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옌볜 마을에서 흔히 보이는 ‘혁명 열사탑’과 오성홍기는 별로 보이지 않고, 마을 자체가 자연에 안긴 듯한 느낌이었다.

    도중에 간이 휴게소에 들렀는데, 귀퉁이에 노인 여러 명이 한 줄로 늘어서 각종 과일을 팔고 있었다. 그중 배의 모양이 정말 특이했지만 어제의 대추가 떠올라 사기를 포기하고 가장 일반적인 과일인 사과를 샀다. 우리 인원수대로 8개 달라니까 추가 있는 저울을 들이밀며 ‘사과는 개수가 아니라 무게로 판다’고 말한다.

    함께 늙어가는 옛 선후배들, 해발 4260m에서 우리, 살아있네~

    자연의 품에 안긴 차마고도는 여유, 그 자체다.



    세 시간을 달려 리장의 그 호텔에 도착해 이틀간 쌓인 먼지를 씻어내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고장난 시계’라는 식당에 갔다. 입구에서 피어나는 낯익은 냄새, 바로 삼겹살이었다. 아아, 이국에서 만나는 삼겹살이여. 우리는 출발할 때 준비해간 소주를 탈탈 털어 마시면서 삼겹살과 된장국으로 배를 든든히 채웠다.

    그리고 리장고성을 구경했다. 언젠가 유선방송에서 나시족에 대한 드라마를 본 적 있다. 리장고성은 왕의 성씨인 ‘목(木)’자에 성벽을 만들면 ‘곤(困)’자가 된다는 이유로, 성곽을 만들지 않았단다. 800년 전에 만들어진 정교한 수로와 번화한 상가를 구경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춤판에도 기웃거렸다.

    샹그릴라에서 맛본 지옥

    마지막 날 역시 ‘678 스케줄’로 바쁘게 시작됐다. 오늘은 옥룡설산을 오르는 날. 차로 두어 시간을 달려 모우평삭도(耗牛坪索道)에 도착,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3500m 모우평에 내려 ‘옥룡설산 샹그릴라 루트’ 산행을 시작했다.

    샹그릴라란 신비롭고 평화로운 계곡,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외부로부터 단절된 유토피아를 뜻한다. 중국은 2001년 윈난성의 중점을 ‘샹그릴라’라 개명했다고 한다. 과연 ‘비단장사 왕서방’을 배출한 나라다운 상술이다.

    샹그릴라 루트의 트레킹은 산야목장, 운삼원시림을 거쳐 통나무집인 설산소옥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여신동을 지나 해발 4260m까지 가는 코스다. 한라산의 두 배 이상 높이 올라가는 코스이다보니 트레킹이라기보다는 ‘등정’이 더 어울린다. 체력이 허락되는 우리나라 산꾼들은 샹그릴라 루트 종점을 지나 해발 4310m 설련대협곡까지 간다고 하니 극성맞기도 하다.

    그런데 현지인 산악 가이드는 흰색 운동화에 ‘기지 바지’를 입고 컵라면 4개를 넣은 비닐 봉투를 달랑이며, 동네 이장님 걸음걸이로 산행을 시작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이런저런 동네 일을 다 간섭하고 다닐 듯한 걸음걸이였다. 나중에야 우리는 이 보법(步法)이 이족 특유의 비밀 보법으로, 높은 산을 오르는 데 매우 효과적임을 알았다. 우리 일행은 즉각 이 비전 보법의 수련에 들어갔지만 제대로 터득한 자는 물론 없었다. 따라서 설산소옥에 도착, 산악 가이드가 우리말로 “생강차, 생강차”를 연발할 때 우리는 거의 초주검 상태였다.

    남보다 먼저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이드 뒤를 바짝 따라나섰지만, 머리는 어질어질했고 숨결은 가빠왔다. 고산증 증세인지 자문하면서 무거운 걸음걸이를 옮기는데 자꾸만 나를 추월하는 일행들이 얄밉기만 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족, 만만!” “중지(中止)!” “출발(出發)”하고 한자어를 음 그대로 연신 외쳐댔다. 가이드는 처음에는 알아듣고 반응해주더니 나중에는 반응이 없었다.

    결국 나와 ‘전’이 뒤처졌다. 작은 키에 몸무게는 나만큼 나가는 이 친구와 걸으며 “우리, 한국 가면 꼭 20킬로 빼자”고 다짐도 했고, 그동안 잘못 살아온 내 몸뚱이를 혼내기도 했다. ‘몸이 곧 하늘(身乃天)’임을 대오각성하고 삼보일배가 아니라 일보삼흡(一步三吸)의 자세로 간신히 4260m, 샹그릴라 루트 종점에 다다랐다.

    4260m! 내 인생 최고의 높이다. 지난 5월, 칠순에 가까운 연배이면서도 당당히 그곳에 도착, 후배들에게 자랑스레 ‘인증샷’을 쏘아준 선배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곳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나 아직 살아 있다’는 환희의 가쁜 숨을 고르기 위해, 큰대자로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면서 옅은 안개와 약한 눈발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저멀리 옥련설산 끝자락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다. 이내 우리는 다양한 포즈의 ‘인증샷’을 찍었는데 내 인생에서 결혼식 말고는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다시, 일상으로

    많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길에 올랐다. 케이블카까지 오는 길이 아침보다 훨씬 길어진 듯했다. 어지럼증과 두통, 다리 근육통 등 여러 가지 아픔을 견디자니 주위는 점점 어두워가고 추위가 스멀스멀 파고들었다. 약간 굵어진 빗방울이 버스 차창을 때릴 즈음 일행 대부분이 잠에 취해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잘 다듬어진 농촌 풍경을 감상하다 어둠이 짙어질 즈음 잠을 청했다.

    리장 시내 식당 앞에 정차했을 때에도 두통은 가라앉지 않아 저녁식사는 거의 하지 못했다. ‘족생당(足生堂)’이란 발마사지 업체에서 한 시간가량 나시족 아가씨의 마사지를 받고서야 두통이 약간 완화되는 듯했다. ‘족생’이 아니라 ‘인생’을 느끼며 나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중국 경제를 감안할 때 조만간 우리 아가씨들이 중국 사람들을 마사지해야 할 것 같다’는 얄궂은 생각도 했다.

    리장공항에서 전세기를 기다리는 중에 인천공항에서 본 낯설지 않은 얼굴이 몇몇 눈에 띄었다. 약간은 상기되고 약간은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비행기 타기 전, 우리 일행은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의논했다. 누군가 “다음에는 아들 녀석들을 데리고 백두산에 가보는 건 어떤가?”라고 했다. 대학 3학년, 한집에 살면서 명절과 용돈 줄 때 빼고는 얼굴 마주하기도 힘든 우리 아들이 함께 간다고 나설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 역시 좋은 여행일 것이다. 아니, 아들 녀석들 없이 늙은 우리끼리면 뭐 어떤가. 또, 백두산 말고 그냥 야트막한 동네 산이면 어떤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고민을 나누며 인생을 동반하는 이 야산회 선후배들이 있는데.

    밤 12시쯤 출발한 전세기는 새벽 5시가 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 순간, 나는 옆자리에 앉은 ‘전’에게 말했다.

    “우리 이참에 중국어나 한번 배워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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