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마다 등장하는 정의와 공정 담론
문재인 정권 전방위적 불공정 행태, ‘능력주의’ 논쟁 촉발
‘정의’ 동원해 정치적 경쟁자 공격하는 한국적 관행
패권적 진영 논리·선악 이분법으로 공화주의 근간 훼손
보편타당한 정의와 공정, 대한민국 구원할 시대정신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는 삶의 현장에서 축적되는 실천 지향의 덕”
사회적 약자 배려한 롤스의 ‘공정’ 개념
운·격차사회 간과한 이준석의 닫힌 능력주의
약자·패자 동행하는 열린 능력주의로 나아가야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는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서양에서 유스티티아는 칼을 휘두르는 존재로 여겨진다. [GettyImage]
도덕적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한 담론 투쟁이 정치권력을 쟁취하려는 권력투쟁과 연결돼 있는 한국에서, 정의와 공정 논쟁은 철학적 쟁론 수준을 넘어 사회정치적 투쟁으로 비화한다. 능력주의(Meritocracy) 논란이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 그 생생한 증거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0선(選)’ 36세 청년 이준석이 제1야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른바 ‘이준석 현상’은 공정 논란의 새로운 기폭제가 됐다.
공정과 정의의 매서운 칼날은 되돌아온다
6월 24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7월 9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기 전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이 의견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을 찬양하는 패권적 논리라는 게 반론의 주된 논지다. 능력주의 비판자들은 “능력주의는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의 죄책감을 내면화해 현대판 계급사회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거대한 불공정과 부(不)정의를 옹호하는 궤변으로 변질된다”고도 강조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보수가 능력주의를 공정하다고 믿는 데 비해 진보는 능력주의의 불공정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공정과 능력주의의 연관성에 대한 논쟁 자체도 흥미롭지만 지금 한국에서 능력주의 담론이 주목받게 된 사회정치적 맥락이 중요하다. 이준석 대표를 둘러싼 능력주의 논쟁은 문재인 정권의 전방위적 불공정 행태를 촉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정권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밑바닥부터 허물어뜨린 ‘조국 사태’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정의롭고 공정한 ‘촛불 정권’을 자처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공정과 정의 담론의 본질을 투명하게 요약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그의 약속은 공정과 정의에 대한 인류의 직관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의와 공정이 완벽하게 실현된 유토피아는 역사상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다. 이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정의와 공정 담론이 살아있는 권력에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적(政敵)을 벤 칼이 되돌아와 언제든지 정권의 정당성을 찌를 수 있다.
‘조국 사태’ 이래 문재인 정권은 “정의와 공정의 이름으로” 치명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정의사회와 공정사회를 외친 전두환·이명박 정권도 권력의 종말과 함께 정의의 칼을 맞고 형사처벌 대상이 됐다. 정의와 공정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서양에서 정의의 여신은 칼을 휘두르는 존재로 그려진다. 한자 ‘의(義)’를 파자(破字)하면 ‘창과 칼로 잡은 희생양을 제사 지낸다’는 뜻이라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의사회 구현’을 강조했다. [동아DB]
2011년 2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공정사회추진회의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개회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文 정권의 선택적 정의관 … 그리스 궤변가와 닮아
정의와 공정의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정권의 문제는 ‘선택적 정의’에서 비롯된다. 행정·입법·사법을 한 손에 장악한 정치권력이 자기 진영의 패권 논리를 정의와 동일시한 결과, 공정이 무너지고 총체적 아노미(anomie·무규범 상태)가 초래됐다. 이른바 ‘LH 사태’가 그 증거다.문재인 정권에서 공직 기강이 붕괴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신들이야말로 정의와 공정의 화신이며 도덕적 집단이라는 정치적 자의식이 민주공화국의 근본을 일그러뜨렸다. 패권적 진영 논리와 결합한 선악 이분법이 정치적 근본주의로 변질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해체하면서 공화정의 근간이 훼손됐다. 정의를 자기편에 유리하게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그건 정의가 아닌 불의다. 동시에 범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으로 타락하는 상황이다.
정의는 보편적으로 정당화돼야 한다. 정의와 법의 여신 디케(Dike·로마신화에서 Justitia)는 눈을 가린 채 저울과 칼을 들고 정의(Justice)를 구현한다. 선택적 정의는 공평무사(公平無私·공평하며 사사로움이 없음)를 정의와 법의 본질로 삼는 문명사회의 대(大)원칙과 정면충돌한다.
문재인 정권의 선택적 정의는 정의의 보편성과 일관성을 거부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초를 위협한다. 권력을 등에 업은 불의가 정의를 참칭하는 세상에선 상식을 가진 이가 공황상태에 빠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울화증과 무력감이 널리 퍼진 배경이다.
선택적 정의는 지식인의 균형감각도 무너뜨린다. 지식인이 정파성을 띤 채 검은 걸 희다고 하고 흰 걸 검다고 할 정도로 타락할 때 성찰적 지성은 죽음을 맞는다. 어용 지식인과 어용 언론의 선택적 정의가 사회적 흉기가 돼 법과 정의를 난자(亂刺)할 때 민주공화정은 최악의 위기에 빠진다.
고대 아테네의 궤변가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며 정의와 권력의 결탁을 옹호했다. 그는 법률도 강자의 편익을 관철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봤다. 정치권력이 자기들 이익을 정의로 공표한 후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로 처벌한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문재인 정권의 선택적 정의관의 효시라 할 만하다.
철학사에서 트라시마코스의 억설(臆說)은 법과 정의가 보편적으로 옳은 것임을 논증한 소크라테스의 정론(正論)에 패했다. 현실은 딴판이다. 피 튀기는 권력정치의 현장에서 트라시마코스의 정치적 후예들은 건재하다.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대결은 철학책에서만 종료됐을 뿐 현실에선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인류가 정의를 농단하는 권력정치의 아수라장에 머물러 있다면 역사 발전은 불가능하다. 약육강식의 포로인 짐승과 달리 인간은 보편타당한 정의를 이루려는 갈망으로 역사를 만들고 민주공화정을 향해 전진하는 정치적 존재이기도 하다. 세계사는 자유와 정의를 쟁취해 온 피와 땀의 기록이다. 역동적인 한국 현대사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민주공화정을 선포했다. “힘이 곧 정의”인 제국주의 논리에 우리 선조들은 온몸으로 저항했다. 1919년 제정된 최초의 헌법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이라고 규정한다(제3조). 나라의 주춧돌이 된 이 위대한 선언을 계승한 현대 국가가 대한민국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과 2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대한민국은 일체의 특권계급을 부정하는 법치국가다. 불법을 저지른 역대 대통령과 재벌 총수가 법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 이유다. 살아 있는 권력이 선택적 정의를 내세워 보편적 정의를 희롱할 때 민주법치국가는 지속될 수 없다. 보편타당한 정의와 공정이야말로 21세기 대한민국을 구원할 시대정신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2700년 전 등장한 능력주의
다시 능력주의로 돌아가 보자. ‘조국 사태’와 ‘LH 사태’에 절망한 시민들은 능력주의를 문재인 정권이 조장한 ‘특권세습사회’와 ‘도둑정치(Kleptocracy)’의 대안으로 여기는 듯하다. 20대 청년들은 자신의 노력만으론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격차사회에 산다. 그들은 경쟁의 출발선과 최종 결과는 차치하고 경쟁 과정의 규칙만이라도 공정하게 지켜지기를 갈망한다. 능력주의가 문재인 정권의 ‘부족주의적 네포티즘(Nepotism·정실 인사)’에 저항하는 비판 담론으로 승격된 맥락이다.능력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일군 업적과 실력에 비례해 보상받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라고 역설한다. 신분이나 연줄 대신 자유로운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중시하는 자유경쟁 시대에 직관적 호소력이 큰 주장이다.
하지만 능력주의 담론의 기원은 자본주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됐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Suum Cuique)!”이라는 명제는 기원전 700년 경 호머가 쓴 서사시 ‘오디세이’에 등장한다. 이는 능력주의가 시대를 넘어 보편적 호소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라”는 명제를 보편적 분배 정의론으로 발전시켰다. “동등한 사람이 동등한 몫을 받는 것이 정의이며, 동등하지 못한 사람이 동등한 몫을 받을 때 불평과 불만이 싹튼다”는 그의 통찰은 예리하다. 봉건적 계급 차별과 포퓰리즘적 평등주의를 두루 극복한 능력주의 정의론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의는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불확실한 삶의 현장에서 축적되는 실천 지향의 덕(arete·영어로 virtue)이다. 분배 정의는 ‘좋은 삶의 실현’이라는 전체적 목표와 접맥돼야 한다는 그의 성찰은 오늘날에도 유의미하다. 민중은 자유를, 부자는 재산을, 귀족은 미덕을 정의의 준거로 삼아 자기 계층만의 정의를 보편타당한 정의라고 강변할 때 “그러한 불균형은 국가를 파괴하고 만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 또한 21세기에 큰 울림을 갖는다. 한 국가 안에서 상호배타적 정의관이 난폭하게 충돌할 때 정치공동체는 붕괴 위기를 맞는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 철학자 롤스는 성숙한 시민이 정의 원리를 자발적으로 도출하고 실천해야 정체(政體)의 성숙함과 안정성이 확보된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복지국가 기초 만든 롤스의 정의론
존 롤스는 현대 정의론의 철학적 기초를 만들었다. [하버드대 출판부]
정의의 제1원리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롤스는 이를 “각 개인은 다른 사람의 유사한 자유와 양립될 수 있는 한도에서 가장 큰 기본적 자유에 대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본적 자유란 대부분의 현대 국가에서 모든 시민에게 보장하는 시민적·정치적 자유를 가리킨다.
정의의 제2원리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차등의 원칙’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 즉 사회적 약자에게 최대로 이득이 되는 조건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는 명제다. 둘째는 ‘기회균등의 원칙’이다. 모든 사람에게 직책과 직위를 공평하게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롤스는 이처럼 철학과 현대 사회과학의 성과를 통합해 정의 이념의 핵심인 ‘분배적 정의의 정당성’에 대한 정교한 설명 틀을 구축했다. 롤스의 정의론에서 사회는 공정한 협동 체제이고, 시민은 정의감과 선(善)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개인의 자율과 책임을 기본으로 삼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롤스의 ‘공정’ 개념은 현대 복지국가의 사상적 기초로 자리 잡았다.
능력주의를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경쟁 과정이라는 전제가 충족돼야 정의로운 결과가 담보된다”는 명제로 수정하면, 롤스의 정의론과 능력주의는 접점이 생긴다. 능력주의가 중시하는 △경쟁의 출발점에서의 평등한 기회 △경쟁 과정의 투명성은 각각 롤스 정의론의 △평등한 자유의 원칙 △기회균등의 원칙에 상응한다. 롤스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정의론이 강력한 진보적 함의를 갖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롤스 정의론과 결합한 능력주의는 보수적 한계를 넘어 개혁적 성격을 띤다.
차등 원칙 수용한 열린 능력주의
기존 능력주의 담론은 우리가 경쟁 상황에서 만나는 우연적 요소를 소홀히 다뤘다. 반면 롤스 정의론은 운(運)의 요소를 중립화하고자 전력을 기울인다. 세습 격차가 커진 사회일수록 롤스 정의론의 평등 지향성이 강력한 울림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는 롤스적 차등의 원칙이 천명하는 약자 보호 원칙을 열린 자세로 수용하고 업적에 따른 보상 결과의 차이를 한국 사회가 인륜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순화해야만 설득력을 갖게 된다.아리스토텔레스와 롤스의 정의론을 성찰해 보면 이준석 대표가 제기한 능력주의의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이 대표는 자신이 중학생 시절 ‘완벽한 공정 경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학생의 실력과 지능이 가정환경이라는 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간과한 의견이다. 이 대표 주장과 달리 최근 한국은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사회가 돼가고 있다. 사회 격차가 공고해지고 신분 상승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에서는 운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여야 최소한의 공정이나마 담보할 수 있다.
공정 경쟁의 외형을 중시하는 이 대표의 ‘닫힌 능력주의’는 기회 평등을 토대로 정의를 추구하는 ‘열린 능력주의’로 대체돼야 한다. 이때 롤스의 통찰처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차등의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인권 선진국에서 약자 우대 정책을 장기간 시행해 온 데는 철학적·현실적 이유가 엄존한다. 이준석 대표의 비판과 달리 여성할당제·청년할당제는 정당한 차등 원칙의 구체적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공정 경쟁의 형식만 강조하면 가진 자에게 유리한 닫힌 능력주의로 퇴행할 우려가 있다. 공정 경쟁의 결과를 인정함과 동시에 패자부활전을 도입하고 약자를 존중해야 열린 능력주의가 탄생한다. 진정한 능력주의는 문재인 정권의 선택적 정의가 망쳐버린 한국 사회의 기강과 가치 규범을 되살릴 수 있는 강력한 치료제라고 할 수 있다.
정의와 공정을 열망하는 오늘의 시대정신은 열린 능력주의에 친화적이다. 약자를 살리고 패자와 동행하는 성숙한 능력주의야말로 정의와 공정의 이상에 부합한다. 열린 능력주의는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경쟁 과정’이라는 전제가 충족돼야 비로소 ‘정의로운 결과’가 도출된다고 논변한다.
1994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와 여성특별위원회(현 여성가족위원회) 위원들 간의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할당제 폐지를 주장한 뒤 여성·청년 할당제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동아DB]
정의와 공정 앞에 겸손해야
대한민국에선 정의와 공정의 레토릭(Rhetoric)이 주기적으로 분출된다. 그만큼 우리는 정의에 목말라 있다. 원칙적으로 보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시민적 감수성이 약동하는 사회야말로 희망이 살아 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를 정(正), 옳을 의(義)’의 합성어인 정의가 항상 바르고 옳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진영의 파당(派黨) 논리를 정의와 동일시하거나, 정의의 수사(修辭)를 동원해 정치적 경쟁자를 적대시하는 한국 사회의 관행은 정의와 공정을 권력투쟁 도구로 전락시킨다. 철학적 성격이 강한 공정 담론이 정적(政敵)을 공격하는 정치투쟁의 비수로 악용된다. 문재인 정권은 이런 정의와 권력의 상호 침투 현상을 가장 명징하고도 악성(惡性) 형태로 보여줬다.정의와 현실 권력의 합체(合體)는 공정을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의를 훼손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의롭다는 자의식이 권력의 오만과 폭주를 부추기고 오판과 실정(失政)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정 담론이 폭정을 정당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는 사태는 최악의 악몽일 것이다. 하지만 정의와 공정 개념 안에 내재한 보편타당성을 적극 발굴하면 정의 담론이 악용될 여지를 자체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정의와 공정 담론의 정치적 오용(誤用)을 줄이면서 그 보편적 특성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권의 선택적 정의관을 강력히 비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준석 대표가 증폭시킨 능력주의 논쟁을 아리스토텔레스와 롤스 정의론과 대면해 분석한 것도 정의와 공정의 보편타당성과 일관성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누구도 개인의 양심이나 주관적 확신을 내세워 정의를 독점할 수 없다. 정의는 주관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공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진영이 스스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의 객관적 사실성과 규범적 정당성을 공론 영역에서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자기성찰을 거부하는 정의는 주관적 망상이거나 정치적 선전·선동일 가능성이 크다. 검증되지 않은 정의는 ‘정의’라는 이름의 테러를 동반한다. 정의의 여신 디케가 세상을 벨 칼을 휘두르고, 한자 의(義)를 해체하면 ‘희생양을 바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정의로 가는 길은 불의로 전락하는 길과 겹쳐 있다.
정의의 레토릭은 역사의 피바람과 야만을 정당화하기 일쑤였다. 우리가 정의와 공정을 진중하면서도 겸허하게 다뤄야 하는 이유다. 이명박·문재인 정권이 증명하듯 정의와 공정을 정치공학적으로 악용한 권력은 반드시 정의와 공정의 역습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정의 앞에 더 겸손해져야 한다. 정의와 공정으로 가는 첫걸음은 정의를 참칭하는 자를 경계하는 데서 시작된다. 정의와 공정을 호명하는 정치의 계절일수록 통절하게 새겨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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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 1956년 출생
● 고려대 철학과 졸업, 미국 서던일리노이 주립대 철학박사
● 前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민간위원
● 現 한신대 철학과 교수
● 저서: ‘국가의 철학’ ‘시장의 철학’ ‘급진자유주의 정치철학’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