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역사학계 달군 독립운동 사료 발굴
이현희 교수, 보성사 총무였던 장효근 유품에서 찾아내
‘민족대표 33인’ 이종일의 비망록 “3·1운동사 다시 쓰게 할 획기적 내용”
잇따른 발굴로 소장학자에서 독립운동사 권위자로 급부상
독립기념관 소장 ‘장효근일기’와 ‘이현희본’ 대조, 명백한 조작
한 글자를 81글자로 늘리기 “이현희본은 폐기돼야 할 시대적 괴작”
‘묵암비망록’은 만들어진 사료,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1979년 비망록 분실 소동 미스터리, 43년 만에 풀리나
독립기념관 소장 ‘장효근일기’ 1922년 1월 부분. 조선책력 여백에 메모를 하거나 인쇄된 글자 위에 겹쳐 쓰기도 했다. 2018년 ‘항일독립문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조영철 기자]
1979년 7월 27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 ‘독립운동사료 묵암비망록 분실’ 기사가 실렸다. 묵암(默菴)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종일(李鍾一·1858~1925) 선생이 천도교에서 사용하던 도호(道號)이며 호는 옥파(沃坡). 1919년 인쇄소 보성사 사장이었던 이종일은 3·1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를 주도했다. ‘묵암비망록’은 이종일이 1898년 1월부터 1925년 8월 초까지 28년간 일지식으로 쓴 글. 이 비망록을 발굴한 이현희(1937~2010), 당시 성신여사대 교수가 ‘제2독립선언문(또는 자주독립선언문, 자주독립선언서)과 함께 분실했다는 소식이었다.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제2독립선언문’ 등 36권 차 위에 놓고 그대로 달려’ ‘이현희 교수 20일 뒤늦게 신고’ ‘근세사 연구 귀중 자료 다시 못 찾을지도 몰라’ ‘유족-분실 사실 의심스럽다’ 등 주요 내용만 일별해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졌고 분실 경위도 석연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하루 뒤인 7월 28일자 ‘묵암비망록은 어디에’라는 기사에서 묵암이종일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자 학술원 회장인 이병도 박사가 “여러 차례 복사를 부탁했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 근세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복사해두지도 않은 채 잃어버렸다는 것은 학자적 태도로는 믿을 수 없으나 그게 사실이라면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한탄했다고 전했다.
“자료난에 허덕이던 한국 근대사 연구의 활력소” “3·1운동사 다시 쓰게 할 획기적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묵암비망록’은 세상에 알려진 지 1년여 만에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비망록의 비밀, 43년 만에 풀어줄 두 편의 논문
그로부터 43년 뒤 이현희 교수와 ‘묵암비망록’을 둘러싼 역사 스캔들에 마침표를 찍을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최우석(40) 연구원이 쓴 ‘만들어진 자료, 묵암비망록 비판’(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7집, 2월 28일 발간)이다. 최 연구원은 이 논문에서 ‘묵암비망록’의 공개부터 망실(亡失) 과정을 되짚고, 왜곡된 원본 이미지 공개,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인 원문 공개를 확인했다. 더 나아가 여러 자료를 베낀 부분이 확인됐고, 19~20세기 초 당대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 상황에서 실현될 수 없는 거짓들이 기록돼 있음을 근거로, 현재 전해지는 ‘묵암비망록’은 가필을 넘어 창작된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만들어진 자료, 묵암비망록 비판’에 한발 앞서 2021년 11월 이현희 교수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또 다른 논문이 발표됐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6집(2021년 11월 30일)에 실린 ‘이현희본 장효근일기 비판-1916년~1920년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장효근(張孝根·1867~1946) 선생은 3·1운동 당시 보성사 총무로 독립선언서 인쇄의 숨은 주역으로 꼽힌다. 1916년 1월부터 1945년 12월까지 30년간 쓴 ‘장효근일기’(천도교 도호인 東菴을 붙여 ‘동암일기’라고도 함)를 남겼다. 1975년 이현희 교수가 발굴했고, 원본은 1987년 장효근의 장손 장세왕 씨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해 2018년 ‘항일독립문화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논문을 쓴 정욱재(49)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독립기념관 소장 ‘장효근일기’ 원본과 이현희 교수가 탈초(초서로 된 글씨를 읽기 쉬운 필체로 바꿈)하고 정리한 ‘이현희본’을 비교·검토한 결과, 이현희본이 원본보다 적게는 30%, 많게는 50% 이상 가필·조작돼 사실상 폐기돼야 할 시대의 괴작(怪作)이라고 했다. 자료에 대한 가필·조작은 중대한 연구 윤리 위반이다.
1919년 3월 ‘장효근일기’ 원본과 ‘이현희본’ 비교. 굵게 칠한 부분이 원본에 없는 가필된 부분이다. [조영철 기자]
장효근 “(묵암이) 비망록 내게 맡겼다”
‘장효근일기’와 ‘묵암비망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두 자료의 발굴자인 이현희 교수에 따르면 장효근은 1925년 8월 31일 일기에 “비망록을 내게 맡겼다”고 썼다.“묵암 이종일 선생 자택에서 장서(長逝)하다. 향년 68세. 묵암장(黙庵丈)을 곡하노라. 그분이 저술한 비망록은 내 수중에 보관되어 있어서 장차 출판하여 세상에 공개할 생각이다. 이 저술의 기간은 1898년으로부터 금년(1925) 8월까지로 그 분량은 수십 권에 이르는데 묵암이 병환이 든 이후 내게 맡긴 것이다.”(이현희, ‘신자료해제 묵암비망록-그 사상사적 인식’, 1978년 10월 국학자료 30호)
즉 이 교수는 장효근 유족들의 도움으로 ‘장효근일기’를 발굴해 탈초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묵암비망록’의 존재를 인지했고, 나머지 유품 속에서 ‘묵암비망록’을 찾아냈다는 연결고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1916년부터 1945년까지 쓴 ‘장효근일기’ 30책 가운데 하필이면 1925년, 1934년, 1937년 일기가 결실돼, 실제 장효근이 일기에 “내게 맡겼다”고 썼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장효근 선생 유족들이 1978년 이 교수가 일기 28책을 빌려갔다고 증언한 것으로 미루어, 30책 가운데 1934년과 1937년 일기는 처음부터 없었고, 1925년 일기는 이 교수가 빌려가 연구하는 과정에서 분실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장효근일기’의 가필·조작은 ‘묵암비망록’의 창작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현희 교수는 왜 역사적 발굴을 하고도 자료를 오염시키는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 발굴 당시 ‘묵암비망록’은 몇 장이라도 남아 있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실재하지 않은 자료였을까. 43년 전 분실 소동은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이 모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된 사고였을까.
이 교수가 ‘장효근일기’를 발굴한 시기는 1975년. 1976년 12월 ‘한국사논총 1집’에 실린 ‘장효근일기해제’(解題·책의 저자, 내용, 체재, 출판 연월일 등을 대략적으로 설명한 글)에 따르면, 1975년 6월 20일 장효근 선생의 외손녀사위인 최선겸 씨의 도움으로 선생의 셋째 아들 장영환 씨가 거주하는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내리 자택 다락에서 유품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조선민력(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문본으로 발행한 달력)에 한문으로 쓴 일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묵암비망록’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3년 뒤인 1978년. 최초 보도한 경향신문 2월 28일자 기사는 이현희 교수가 장효근 씨의 3남 장영환 씨 집에서 한장본(韓裝本·한지로 된 책을 가리키나 전통 제책 방식으로 제본한 책도 포함) 25권과 조선민력에 일기체 기사로 정리한 15권 등 40권의 비망록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이후 이 교수는 1979년 ‘월간중앙’ 3월호에 ‘묵암비망록의 자료적 가치’라는 글을 발표하고 “‘장효근일기’ 30여 권을 행주에서 챙겨가지고 올 때 먼지가 까맣게 묻어 있는 또 한 뭉치의 비망록도 함께 가져왔다”고 발굴 경위를 밝혔다.
실학-동학-개화로 무리한 연결 짓기
정욱재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조영철 기자]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 [조영철 기자]
이종일 재조명 열풍
1975년 ‘장효근일기’에 이어 1978년 ‘묵암비망록’의 발견은 역사학계로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당장 1978년 6월 5일 묵암이종일선생기념사업회 발기총회가 열려 유고문집과 전기 간행, 동상 건립, 묵암언론상 제정 등이 논의됐고, 8월 31일 이종일 선생 탄생 120주년 및 서거 53주기를 기념하는 학술발표회가 열렸다.여기서 ‘민족사상가로 본 묵암’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한 이 교수는 “(묵암은) 천도교인으로서 언론인이며 개화사상가이고 한글학자이며 독립지사였다”면서 “묵암은 3·1운동을 갑오동학운동과 갑진개화운동의 재현으로 평가, 3·1운동의 계획과 맥락성을 민족사 내부에서 찾으려는 사관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그해 10월 4일 KBS 일요사극 ‘맥’에서 ‘어떤 선각자’라는 제목으로 이종일 선생의 일대기를 다루기도 했다.
이듬해 1979년 2월 27일 이 교수는 또 한 번 놀라운 자료를 공개했다. ‘묵암비망록’를 검토하던 중 이종일이 쓴 ‘제2독립선언문’ 이른바 ‘자주독립선언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21×11cm 한지 2장에 757자의 한자로 쓰인 이 선언서는 1922년 이종일이 보성사 직원, 천도교인들과 함께 3·1운동 3주년을 맞아 추진했던 제2의 3·1운동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주독립선언서’는 “3·1운동 이후 국내 항일운동사 체계화에 없어선 안 될 획기적 자료”라는 학계의 평가가 이어졌다. 그해 3월 이종일 선생의 생가가 기존에 알려진 경기도 포천이 아니라 충남 서산군 원북면 반계리 3구 89번지로 정확한 위치까지 밝혀지면서 고택 원형 보존 운동이 벌어졌다.
같은 해 5월에는 이 교수가 ‘장효근일기’ ‘묵암비망록’ ‘자주독립선언서’ 등 자신이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3·1운동사를 새롭게 정리한 ‘3·1운동사론’을 발간했다. 동아일보는 이 책의 발간 소식을 전하면서 “일본 측 자료보다는 개화사상가나 독립지사들의 기록을 통해 새롭고 주체적인 한국사관의 정립을 시도한 점이 특색”이라고 썼다. 1979년 ‘3·1운동사론’ 이후 1996년까지 이 교수가 ‘묵암비망록’을 근거로 발표한 논문과 책은 23편(권)에 이른다. 소장학자였던 이 교수는 단숨에 3·1운동사의 권위자가 됐다.
소송으로 비화된 비망록 분실 사건
이현희 교수가 동아일보에 낸 ‘묵암비망록’ 분실 광고. 현상금 20만 원을 걸었다. [1979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고소장에 따르면 이 교수는 1975년 6월과 1977년 5월에 ‘동암일기(장효근일기)’ 28책과 ‘묵암비망록’ 12책, 기타 10책을 빌려갔으나 ‘동암일기’ 27책과 기타 5책만 반환했을 뿐 나머지는 분실을 이유로 반납하지 않았다. 유족 측은 이 교수의 분실 경위 설명이 모호할 뿐 아니라 그동안 자료 반납 독촉 때마다 이 교수가 엇갈린 해명을 해왔기 때문에 분실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교수의 해명 가운데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있다. 유족 측이 ‘묵암비망록’의 반환을 요청하자 이 교수가 “묵암비망록은 실재(實在)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와 ‘신인간(新人間)’ 등의 자료와 ‘동암일기’ 내용을 꾸며 창작했다”고 설명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후 이 교수가 일요신문 1979년 8월 5일자를 통해 공개한 해명서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자료를 독점해 연구하다가 공개도 안 하고 분실했다고 자신을 비난하는 학계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그렇다면 이 교수의 “묵암비망록 창작” 발언은 일시적으로 분실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였을까. 사실관계가 가려지기도 전에 유족 측이 고소를 취하하면서 이 사건은 단순 분실 사고로 처리됐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쓴 비망록?
최우석 연구원이 40여 년 만에 다시 ‘묵암비망록’을 들여다보게 된 계기는 2018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외부의 여러 자문 요청으로 다시금 자료를 살펴보던 과정에서였다.
“‘묵암비망록’은 원본이 사라진 안타까운 자료라고만 생각했지 변형되거나 창작됐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다. 당대를 구체적으로 전해 주는 중요 자료라 정밀하게 살펴보았는데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중 하나가 전지적 시점에서 독립운동을 서술했다는 점이다. 3·1운동 후 감옥에 갇혀 있던 이종일이 어떻게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이 정재용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한성임시정부나 의열단이 조직되는 날짜는 어떻게 알았을까. 출옥 후 나중에 정리했다고 쳐도 그것을 어떻게 날짜별로 정리했을까. 천도교인인 이종일이 어떻게 유관순, 김마리아 같은 기독교계 젊은 여성들과 교류하고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들여다볼수록 자료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정욱재 연구위원은 ‘장효근일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기 자료가 발굴되거나 연구에 활용되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독립기념관 소장 ‘장효근일기’가 제대로 간행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일기는 1916년 1월부터 1945년 12월까지 30년간인데, 발굴자인 이현희 교수가 탈초·활자화해 공개한 것(이현희본)은 1916년부터 1930년까지 15년간에 그쳤다. 이 교수가 처음부터 1930년까지만 탈초했는지 아니면 1945년까지 탈초하고도 공개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지금까지 연구가 원본 ‘장효근일기’가 아니라 ‘이현희본’을 근거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정 연구위원은 원본이 행서나 초서로 돼 있고 인쇄된 글자 위에 겹쳐 쓴 부분까지 있어 해독하기 쉽지 않다 보니 연구자들이 잘 정리된 이현희본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한국 근대사 연구 1세대인 이현희 교수의 연구 성과와 학문적 권위를 믿었던 탓도 있다.
‘장효근일기’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려면 이현희본의 문제점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 정 연구위원은 1916년 1월 일기를 펼치자마자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시대 상황과 전혀 맞지 않거나 나올 수 없는 표현들이 나오고, 1970년대 연구 성과를 반영한 기록이 아닐까 의심되는 내용도 있었다.”
유학사상사 전공인 정 연구위원은 한문 자료에 강점이 있었고, 3·1운동사를 전공한 최 연구원은 그 시대 상황과 연구 동향에 강했다. 학자로서 공통된 문제의식을 가진 두 사람은 정 연구위원이 ‘장효근일기’를, 최 연구원이 ‘묵암비망록’을 맡아 재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이현희본 장효근일기 비판’과 ‘만들어진 자료 묵암비망록 비판’이다. 두 편의 논문과 저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현희본 ‘장효근일기’와 ‘묵암비망록’이 어떻게 재창조 또는 창조됐는지 살펴보자.
서울 종로구 조계사 맞은편 옛 보성사 터에 세워진 이종일 선생 동상.
시대의 괴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19년은 3·1운동이라는 거사가 있었던 해여서 다른 시기보다 주목할 부분이 많다. ‘장효근일기’ 1919년 1월 1일 원본은 ‘進拜聖師主道主丈’ 8글자. ‘성사(당시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를 가리킴)에게 나아가 절을 했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현희본은 ‘乘此機會 消滅日帝侵略之輩 擄忿雪恥 以伸大義勝利於天下 則豈不爲公私之最又大幸也 我天道敎人合心協力 與共大事 幸甚且幸甚 果爲實現乎’로 60글자가 더해졌다. 이 기회에 일제 침략 무리를 소멸시키는 데 천도교인이 합심하자는 의미가 추가됐다.1919년 1월 6일 일기는 ‘寒’ 한 글자로 날씨만 적었다. 그러나 이현희본은 ‘在日韓國留學生 決議韓國獨立 卽作各種請願書 送于各大臣各國大公使言論機關 連於國內 選實行委員十一名 卽崔八鏞李光洙金度演崔謹愚金尙德李琮根白寬洙田榮澤尹昌錫宋繼白徐椿也’ 무려 80글자가 가필됐다. 재일 한국 유학생들이 독립을 결의하고 청원서를 작성해 각국 대·공사, 언론기관에 보냈다는 기사로 11명의 이름까지 적었지만 원본에는 없는 내용이다.
정 연구위원은 “1919년 1월 한 달 일기만 계량적으로 비교해도 원본은 302자, 이현희본은 671자로 사실상 50% 이상 분량이 많다. 1916년부터 1930년까지 정리된 이현희본은 원본보다 적게는 30%, 많게는 50% 이상 가필·조작된 자료”라고 했다.
3·1운동 당시 상황을 묘사한 1919년 2월 27일 일기와 3월 1일 일기에도 교묘한 가필이 있다. 2월 27일 일기 원본은 ‘밤에 조선독립선언서 2만1000매를 인쇄해 각도 교인에게 반포했다’는 내용이 전부이나 이현희본은 밑줄 친 부분을 추가해 ‘夜朝鮮獨立宣言書二萬一千枚印刷於普成社 頒布各道主要地敎人及有志 逼近絶叫萬歲運動之日 期於參與 擄忿雪恥’로 늘어났다.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을 강조하기 위해 ‘보성사’를 추가하고 역사적 현장감을 표현하는 문장을 삽입했다.
3월 1일 일기에는 ‘보성사에서 피착(被捉), 매달 1일 성내 철시, 천도교·기독교·불교 33인, 협동선언’이나 이현희본은 협동선언 뒤에 ‘태화관에서’를, 피착 앞에 ‘자현(自顯)’을 추가했다. 피착은 단순히 체포됐다는 것이고 ‘자현피착’은 스스로 나타나 체포됐다는 의미여서 차이가 있다. 후자는 당당한 항일독립운동가의 면모가 강조돼 있다. 이현희 교수는 2006년 출간한 역사 에세이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에서 자신이 추가한 부분을 인용하며 “자현피착 되어간 눈물겨운 비경이 아닐 수 없다”고 쓰기도 했다.
1970년대 연구 성과가 1910년대 사료에 등장
이현희본의 더 큰 문제는 단순히 사료 몇 글자를 바꾼 게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담아 사료 내용 자체를 조작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실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이다.“1916년 1월 1일 일기에 ‘이때는 반드시 조선말의 실학을 일으켜야 한다’, 1월 19일에는 ‘문득 깨달은 일은 반드시 실학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니’라는 서술이 나온다. 오늘날 학계는 ‘실학’이란 개념이 1930년대 정인보, 안재홍 등이 전개한 조선학운동에 의해 ‘발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1916년 장효근이 어떻게 ‘조선말의 실학’이라는 서술을 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당대의 실학은 말 그대로 허학(虛學)의 반대말로서 성리학을 의미했다. 이현희본에서 1916년에는 단편적으로 언급되던 실학인 1926년 9월 5일에는 그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어 상당한 분량으로 등장한다. ‘민주주의적 성격’ ‘주체적 세계관’ ‘민권존중사상’ ‘북학파’ 등 현대 학술 용어에 가까운 표현을 쓰는데 이는 1920년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장효근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이 기록은 1970년대 실학 연구 성과를 반영해 이현희 교수가 창작한 내용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정욱재)
정 위원에 따르면 이현희본에는 장효근 자신의 가족사 외에, 원본에 없는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다양한 사건과 독립운동가들의 체포와 사망 소식 및 감회, 당대 인물들에 대한 평가, 조선총독부의 인사 및 각종 법령·제도의 시행·개정, 시대 인식 등이 추가됐다. 정 위원은 이를 당대에 확실하게 발생한 역사적 사건 등을 해당 날짜에 기록하고, 상황에 따라 장효근 자신의 감상이나 평가 등을 덧붙여서, 독자가 의심 없이 당시 장효근이 견문한 사실을 기록했다고 믿게끔 유도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정 위원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1966년부터 1978년까지 13권으로 완간) 같은 1차 사료를 참고하고, 장효근이 기록하지 않은 언행과 생각, 평가 등을 더해 이현희본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는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과 전반적 동향을 정리한 자료집으로, 1910년 8월에서 1945년 8월 15일까지 그날그날 주요 사건을 일지(日誌)식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엉터리 이미지 공개, 권수와 형태도 달라져
‘장효근일기’는 다행히 원본이 있기에 대조가 가능하지만, ‘묵암비망록’은 원본이 사라져 비판적 검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명백한 조작의 흔적은 남아 있다.최 연구원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비망록의 권수와 형태 문제를 지적한다. 이현희 교수는 1978년 2월 28일 경향신문 최초 보도에서 “기사본말체로 기술한 한장본 25권과 조선민력에 일기체 기사로 정리한 15권 등 40권”이라고 밝혔으나, 다른 인터뷰에서는 “초서체와 반초서체로 씌어진 30여 권 규모” “27년간의 일기체적인 기록집”이라 했다가 월간중앙 1979년 3월호에 기고한 ‘묵암비망록의 자료적 가치’에서는 한장본과 조선민력 외에 마분지, 노트, 원고지, 달력 등 다양한 형태로 자료가 구성됐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분실 소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12책 36권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지금까지 공개된 ‘묵암비망록’의 이미지도 엉터리다. 1978년 2월 28일 경향신문에 실린 두 개의 이미지 중 하나는 ‘묵암비망록’이 아니라 ‘장효근일기’ 1917년 1월 사진이고, 이종일이 만년에 전국을 다니며 산천경개의 아름다움과 망국의 슬픔을 담은 칠언절구시집이라고 소개된 사진은 장효근의 칠언절구시집 ‘한집(閑集)’이었다. 1978년 ‘국학자료’ 30호와 월간중앙 1979년 3월호에 실린 이미지는 동일한 자료로 추정되나, 초점이 흐릿해 전체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판독 가능한 天馬來天國迃于生平厭世份便○의 글자는 현재 전해지는 ‘묵암비망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명시적으로 ‘묵암비망록’임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월간중앙 1979년 3월호에 실린 것이 유일하다. 매우 흐릿하지만 한자로 ‘묵암비망록’ ‘이종일 저’ ‘연도’ ‘1월 1일’이라 적고 일기 기사 순으로 구성된 한장본임을 알 수 있다.
최 연구원은 “이것이 진짜 ‘묵암비망록’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최초 보도에서 한장본은 기사본말체, 조선민력은 일기체로 서술했다고 했는데, 이 이미지는 한장본임에도 일기체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 연구원은 유일하게 ‘묵암비망록’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는 이 이미지조차 ‘만들어진 자료’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있다.
일기 속 날씨 ‘속음청사’ 베껴
비망록의 원문 공개도 의문투성이다. 이 교수는 1978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사상’, 월간중앙, ‘옥파이종일선생 논설집’ ‘이종일 생애와 민족운동’에 9차례에 걸쳐 원문을 공개했다. 초기 자료(1898~1902)는 한문으로 공개한 뒤 번역했고, 1910년 이후 자료는 한글로 번역된 내용만 공개했다. 분량 면에서도 1898년 1월 1일부터 1899년 5월 31일까지 1년 반의 일기는 88쪽에 이르는데 정작 이종일 선생이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인 1910년 9월 30일부터 1922년 2월 27일까지 12년간 일기는 53쪽에 불과해 대조적이다. 또한 원본을 분실한 뒤에도 창작과 가필이 계속됐는데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작업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묵암비망록’이 창작됐다는 증거 중 하나가 ‘다른 자료 베끼기’다. 통상적인 일기에는 날씨를 기록하는데 ‘묵암비망록’의 날씨 기록이 김윤식의 ‘속음청사’를 베낀 정황이 포착됐다. 1898년 1월 날씨 31건 중 25건이 일치하거나 변형된 형태의 유사성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종일과 김윤식의 날씨 기록이 일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시기 이종일은 서울에서 활동했고, 김윤식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효근일기’ 가필 후 다시 ‘묵암비망록’에서 재탕
또 ‘묵암비망록’ 분실 후 공개된 내용에는 ‘장효근일기’를 그대로 옮겨오거나 그 자료를 토대로 가공 첨가한 대목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장효근일기’ 1919년 6월 9일은 한문으로 ‘聖師(성사), 患候(환후), 小差度(소차도)’라고 썼는데 ‘묵암비망록’은 같은 날짜에 “손의암(손병희)의 환후는 여전하다. 작년에 비하면 조금 차도는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 한글로 공개됐다. 손병희의 병환을 기록한 일기가 네 차례 나오는데 동일한 날짜에 유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이 우연일까. 한문과 한글이라는 차이만 있다.심지어 ‘장효근일기’ 원본에는 없는 내용을 이현희본에 가필한 뒤 이를 ‘묵암비망록’에 재수록하는 자기 표절이 발견되기도 한다. 1920년 1월 27일 ‘묵암비망록’의 “천교도 50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마음껏 높이 외쳤다고 한다. 태극기는 즉시 빼앗겼으나 사상자는 없었다니 천만다행이다”는 이현희본 ‘장효근일기’에는 있고 원본에는 없다.
이 밖에도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한 사례도 적지 않다. 1919년 3월 7일 ‘묵암비망록’에서 3·1운동에 대해 “창세기 이래 최초의 맨손혁명운동”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온 표현이다. 더욱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920년 12월 상하이에서 발행돼 시기적으로 이현희 교수가 ‘묵암비망록’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박은식의 글을 표절했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1월 31일 비망록에 “반도 3천리가 모두 감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1972년 출간된 박화성 ‘타오르는 별-유관순의 일생’에서 유관순이 한 말로 나온다.
‘묵암비망록’에는 역사적 실상과 불일치하는 내용도 나온다. 1912년 10월 14일 일기를 보자.
“나(이종일)는 중앙포교당으로 한용운, 백용성, 이능화, 정운복 등 불교계 인사를 찾아갔다. 천도교 측과 합동으로 민족문화 수호의 유지를 위한 범국민운동의 추진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한용운은 즉석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민족문화의 수호 추진보다는 민생 안정이 더 중요하오’ 하면서 얼른 협조하지 않아 천도교 단독으로 우선 이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세부 계획을 짰다.”
그러나 한용운은 이때 서울에 없었다. 만주 지역 독립운동 동향을 살피러 갔다가 일본 밀정으로 의심받아 총상을 입고 통화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1913년 1월 즈음에야 서울에 돌아왔다.
사료 비판은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위한 첫걸음
‘묵암비망록’이 만들어진 자료임을 밝힌 최우석 연구원은 “현재의 상태에서 ‘묵암비망록’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사료”라며 “다만 “왜 이현희는 ‘장효근일기’를 가필하고 ‘묵암비망록’을 창작했느냐의 문제가 남는데 그 답을 들려줄 당사자가 없어 해답을 얻기 힘들지만 향후 이러한 자료 조작 및 창조로 어떤 연구 내용들을 생산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일부 해명될 것”이라고 기대했다.정욱재 연구위원 역시 “이현희본 ‘장효근일기’는 원본과 완전히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조작된 자료”라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현희본의 출현으로 ‘장효근일기’ 원본이 연구자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점도 지적했다.
“이현희본에 대해 얼마든지 합리적인 의심이 나올 만한 상황임에도 지금까지 간과됐다는 것은 당대 학계가 기본적으로 사료 비판을 소홀히 했음을 의미한다. 1970년대 근대화 열기가 강했던 시대 상황과 그것에 부응하기 위한 역사적 근대성을 ‘실학’에서 찾으려는 학계의 분위기가 이현희본 같은 시대적 괴작을 탄생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최우석 연구원도 “근본적인 사료 비판이 40년 넘게 지체됐음을 학계 전체가 반성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면서 “다시는 한 연구자가 자료를 독점하고 다른 연구자와 공유하지 않는 행태를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며, 상호 간의 견제와 비판으로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이 작동할 수 있도록 역사학계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