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호

왜 보수의 유시민‧봉준호는 나타나지 않나

[노정태의 뷰파인더] 아스팔트 우파로는 86‧X세대 못 이긴다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3-03-11 10: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출판계 뛰어든 86세대 운동권

    • 신자유주의 전성기=진보담론 호황기

    • 4‧19, 5‧16에 멈춘 보수 세계관

    • 정치는 86세대, 문화는 X세대

    • 이념 고민 없는 ‘세대포위론’

    2019년 2월 23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무효 집회’. [동아DB]

    2019년 2월 23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무효 집회’. [동아DB]

    2022년 3월 10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치 참여 1년여 만에,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출마한 첫 번째 선거에서 대통령이 됐다. 이변으로 점철된 한국 정치의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경이로운 사례다.

    윤석열의 당선은 문재인 전 대통령, 더 나아가 더불어민주당 집권이 5년 만에 끝났다는 말과 같다. 이 또한 ‘87년 체제’ 하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 전까지 한국 정치는 10년 주기로 움직였다. 치열한 당내 권력 투쟁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10년 단위로 번갈아 집권했다. 노태우-김영삼, 김대중-노무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졌다. 그 주기가 윤석열의 당선으로 깨졌다. 보수와 진보가 5년 만에 자리바꿈했다.

    유시민과 진중권

    유시민 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동아DB]

    유시민 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동아DB]

    보수 지지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불만의 원성이 높다.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사회 전반을 쥐락펴락하는 건 여전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 세력이라고 한다. 그러한 비난의 원성은 문화예술계를 향할 때가 많다.

    얼핏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두 명을 꼽자면 박찬욱과 봉준호다. 두 사람 모두 민주노동당이 출범할 때 당원으로 가입한 바 있는 진보 인사다. 유명한 배우나 가수 중에도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정당, 혹은 민주당 지지 의사를 밝힌 사람이 많다. 반면 그와 짝을 이룰 만한 보수 연예인 혹은 예술가 이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지식인 사회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서점가에서 정치‧사회 분야로 분류되는 책의 베스트셀러 순위는 언제나 진보 혹은 민주당 성향 필자들이 쓴 것이다. 유시민 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정치 평론 은퇴’를 선언했지만 여전히 많은 독자가 그의 책을 기다린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으로 지난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린 정신과 의사 정혜신 역시 진보성향이 짙은 담론을 생산한다. 그의 책이나 글에는 민주당이 주로 제기하는 의제의 흔적이 엿보인다. 이렇듯 ‘빅 네임’뿐 아니라 적당히 인지도 있는 작가까지 범위를 넓혀 보면, 민주당 쪽 책은 잘 팔려도 국민의힘 쪽 책은 안 팔린다는 출판계 속설은 사실에 부합한다.



    보수의 문화적‧지적 자산은 빈약하다 못해 황량하다. 유시민 ‘급’으로 내로라할 보수 지식인은 없다. 그나마 2019년 조국 사태가 불거지고, 2020년 1월 1일 JTBC 신년토론에서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가 유시민과 격돌한 후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국민의힘 편을 들어준 게 최대의 성과였다. 이후 대통령이 바뀌고 윤석열 정부가 노동개혁 등 보수 정권의 정책을 추진하자 진중권 역시 등을 돌렸다. 대형 언론사의 논설위원이나 필진을 제외하고 나면, 묵직한 ‘재야 지식인’은 거의 모두가 민주당 지지자거나, 정권 교체를 원했어도 국민의힘을 지지하지는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필자는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면서 진보 언론인 경향신문에서 고정 칼럼 자리를 잃었다.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에 주로 글을 기고한다. 두 진영 모두에 발을 걸쳐본 필자의 눈에는 세 가지 현상이 도드라진다.

    첫째, 보수는 자신들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가져오지 못하는 이유를 완전히 잘못 파악하고 있다. 둘째, 보수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가져오거나, 적어도 균형을 맞춰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도 못하고 있다. 셋째, 보수는 문화적 헤게모니를 되찾을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해도 고통스러운 환골탈태를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하나씩 살펴보자.

    헤게모니를 잃다

    보수가 문화계의 헤게모니를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반대로 말하자면, 왜 민주당 지지자들의 구미에 맞는 담론과 문화 예술 생산품이 시장을 지배하는 걸까. 이는 그 자체로 진지하게 따져볼 질문이지만, 보수 지지자들은 쉽고 빠른 해답을 선뜻 내버린다. 문화예술계의 주된 소비층은 86세대에게 세뇌당해 있으며, 생산자들은 ‘페미 사상’에 물들어 있을 뿐 아니라, 비판자와 반대자를 검열하고 쫓아내는 ‘캔슬 컬처’의 힘으로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모두 틀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옳다고 할 수도 없다. 비유하자면 병이 생긴 원인은 보지 못한 채 증상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꼴이다. 2020년대 한국의 문화 소비자들에게 586의 세뇌 작전이 먹혀들었고 페미니즘이 퍼져나갔다면 세상이 그렇게 된 원인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한 해답을 찾을 수도 없다.

    잠시 시계를 돌려 1990년대로 돌아가 보자. 20세기가 끝나던 무렵, 세상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 세기동안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 질서가 종식됐다.

    정치적 변화는 경제적 변동으로 이어졌다. 냉전이 끝나고 10년 후인 2001년 11월 10일,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다. WTO는 미국 중심의 국제 무역 질서를 확립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조직이다. 북한을 제외하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라 할 수 있을 중국이 WTO에 가입했다는 것은,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유명한 말마따나 ‘역사의 종언’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었다.

    중국은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로 ‘전향’했다. 굶주리던 농민들이 공장 노동자가 돼 전 세계에 값싼 공산품을 대량 공급했다. 반면 북한은 그러한 변화에서 완전히 예외였다.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기근 등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도록 몰아갔으며, 김일성 사후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일은 핵 개발에 온 국력을 쏟아 부었다.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아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절박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재래식 전력으로는 한국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있었다. 인터넷이 20세기 말부터 상용화돼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21세기가 되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 세상’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정권은 초고속인터넷 통신망을 전국에 설치했다. 인프라를 확충한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인터넷 강국으로 거듭났다.

    그 위에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더해졌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이,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가 당선하면서 서구와 영미권은 진보가 정치권력을 잡는 시대가 된 반면, 한국의 상황은 반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87년 직선제 개헌 후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다. 이후 민주투사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을 이끌고 3당 합당을 감행해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어버렸다.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보수의 집권은 86세대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겼다. 국민 스스로가 직선제로 다시 권력을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치에 대한 회의와 냉소가 바닥에 깔렸지만, 역설적이게도 선거철마다 정치 담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대학 시절 수배, 구속 등을 당하며 정상적 방식으로 취업이 곤란해졌던, 당시에는 30대였던 86세대는 출판사를 차리거나 출판사에 취업했다. 이는 이른바 민주당 류의 담론이 호황을 맞이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86세대보다 윗세대이긴 하나, 이해찬 전 민주당 당대표가 출판사 돌베게의 창업자라는 점을 상기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탈냉전 분위기의 책과 영화

    냉전의 끝과 세계화의 시작. 빈사 상태에 빠진 북한과 경제 개방을 택한 중국. 팬클럽 문화를 차용한 인터넷 정치. 정치에 대한 냉소와 열광이 결합된 채 인터넷을 타고 뜨겁게 달아오른 담론 시장. 1990년대부터 2020년대 초까지 지속된 세계의 기본 질서는 이와 같았다. 여기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오늘날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진보가 쥐고 있을까. 보수의 담론은 왜 힘을 쓰지 못하는가. 이제 우리는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현재 통용되는 문화, 지식 콘텐츠의 상당수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 질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공조2: 인터내셔날’ 한 장면. [CJ ENM]

    지난해 개봉한 영화 ‘공조2: 인터내셔날’ 한 장면. [CJ ENM]

    가령 영화 ‘공조’ 시리즈를 떠올려볼 수 있다. 한국의 형사와 북한의 특수부대원이 손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는 코믹 액션물이다. 핵무기 개발을 완료한 북한이 하루가 멀다 하고 미사일을 쏘며 무력시위를 하는 현 상황을 놓고 보면 부적절한 것 같지만, 놀랍게도 1편에 이어 2편까지 제작됐고 또 흥행했다. 이런 현상을 ‘좌파의 영화계 점령’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계의 투자자와 제작자뿐 아니라,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이들 모두가, 여전히 1990년대에 시작됐던 냉전 이후 해빙 분위기에 젖어 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합리적이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공동로또구역 육사오’ 등으로 꾸준히 이어지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북한’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를 만들고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북한에 세뇌된 빨갱이여서가 아니다. 다만 그들은 북한이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던 시절 성장했고, 북한의 위협을 목 놓아 외치는 이들을 타도해야 할 ‘수구 꼴통 꼰대’로 여기며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것이다.

    진보 사상을 담은 책, 특히 페미니즘 서적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하는 이유 또한 거시적 설명이 가능하다. 미국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책세상, 2021)을 통해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이어진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진보 담론의 호황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진보적인 인정 프로젝트들까지 포함하는 서로 다른, 심지어 서로 경쟁하는 인정 프로젝트들과 조응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경제 프로젝트입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세계가 단일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포섭되면서, 페미니즘이나 성 정치처럼 이전의 거대 담론에 포섭되지 않았던 진보적 의제가 담론 시장에서 주류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한 흐름을 한국의 상황에 대입해 보자. 냉전 이후 북한이 재래식 전력으로 한국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한국의 담론 시장 역시 ‘다양성의 정치’에 탑승했다. 당시 기자였던 전여옥이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어라’를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시기는 1995년이다. 현재 출판 시장에서는 페미니즘이 판매량을 보장하는 하위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이 현상을 놓고 2017년 이후에나 등장한 메갈리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근시안적 해석이라는 소리다.

    오늘날 출판계와 담론 시장에서 소구력을 발휘하는 콘텐츠의 대부분이 그렇다. 인문, 정치, 사회 분야에서 잘 팔리는 책은 크게 둘 중 하나다. 탈냉전 시대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않은 진보 신자유주의 담론이거나, 1987년 직선제 개헌과 노태우 당선 이후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선거와 정치에 과몰입하는 내용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좌파의 문화계 점령’의 실상은 그러하다. 냉전이 끝날 무렵 성인으로서 사회에 첫 발을 디뎠거나 청년으로서 한창때를 경험했던 86세대와 X세대가 여전히 그 무렵의 세계관에 따라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이 혀를 찰 문장

    보수의 문화와 세계관은 1960년대의 4‧19와 5‧16에 연원을 두고 있다. 6‧25전쟁의 여파와 냉전,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전제로 한 세계관이다. 이는 이미 1990년대의 시대와도 맞지 않았고, 그래서 1990년대의 청춘들은 ‘신세대’로서 ‘쉰세대’를 몰아내는 문화적 십자군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반공 보수 물러가라! 아스팔트 우파, 가스통 할배들을 요양원으로!

    1990년대의 청춘들이 모르던, 혹은 애써 무시하고 싶어 하는 사실이 있다. 시간의 흐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점이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는 세계화의 끝을 알리는 불길한 전조와도 같았다.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불과 10년, 아니 5년 전만 해도 농담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2022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모습을 본 후로는 아무도 그 말을 농담이라고 치부하지 못한다.

    미국이라는 1극의 슈퍼파워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 어떤 전쟁이나 대규모 무력 충돌도 벌어지지 않는 세상, 미국이건 한국이건 중국이건 대만이건 길게 늘어진 국제 분업 체계 속의 공급 사슬망을 만들고 돈벌이에만 골몰하던 그런 세상은, 이제 끝났다. 바야흐로 국제정치학과 지정학의 시대가 귀환했다.
    한국의 문화계와 담론계를 보며 걱정이 드는 이유는 이 대목 때문이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 원고에서는 국내 상황에 집중해보자.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은 문화 지체를 겪고 있다. 급변하는 대내외적 환경과 맞지 않는 1990년대식 담론과 문화 생산물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사례로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사계절, 2023)만큼 딱 맞아떨어지는 책을 찾기란 어려울 듯하다. 이해영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미국의 부추김에 넘어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무리하게 가입하려 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자극했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거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건 2022년 3월이 아니라 그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명명백백한 사안이다.

    이해영의 주장은 완강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무기를 팔아먹으며 웃고 있는 미국의 잘못이지 러시아를 탓할 일이 아니다. 소설가 장정일 역시 서평을 통해 이해영의 주장에 동의했다.

    “미국은 독일 통일을 놓고 소비에트와 협상하면서 ‘동쪽으로는 1인치도 가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았다. 나토는 1999년 폴란드·헝가리·체코를, 2004년에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루마니아·불가리아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2008년에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가입시키려다가 조지아가 러시아로부터 침공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지 오웰이 읽었다면 혀를 찰 문장이다. 장정일은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한’ 사건을 조지아가 러시아로부터 침공을 ‘당했다’고, 능동태를 수동태로 바꾸는 정치적 수사의 기교를 부리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평화로운 냉전 이후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당장 그 옆 나라인 폴란드만 해도 한국제 전차와 자주포를 대량 구입했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이해영이나 장정일 같은, 여전히 머릿속에 끝나지 않는 1990년대를 살고 있는 변방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을 전지전능한 악마처럼 보고 있다. 러시아가 조지아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게 아니라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1991년 걸프전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어버린, 미국의 힘 앞에 세상의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냉전 직후의 세계관을 바탕에 둔 음모론이다.

    보수가 문화권력 되찾는 길

    앞서도 말했듯 이러한 관점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와 같은 문화 지체를 겪고 있는 이들이, 적어도 현 시점을 놓고 볼 때, 한국의 문화 예술 담론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영의 책은 출간 이후 베스트셀러가 됐다. 북한 특수 요원 등을 다소 거칠고 투박하지만 순수한 ‘우리 편’으로 다루는 작품은 ‘공조’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당분간 계속 등장할 것이다. 정치의 영역은 86세대가, 문화의 영역은 X세대가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이러한 분위기가 쉽게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86세대의 지배에 반감을 품고 있는 보수 세력이 문화와 예술, 담론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하며 언급했듯 ‘86세대 이데올로기’에 불만을 품거나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대체 왜 86세대와 X세대가 하나의 문화적 연속체가 돼 이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86세대 이데올로기’가 어떤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그 시대가 끝났다는 전제 하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보편적인 사상과 문화를 개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보수의 문화 담론은 유튜브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만나면서 한층 더 빠른 속도로 퇴행하고 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내가 봤던 영상’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영상’을 제시한다. 나와 비슷한 생각, 유사한 취향을 담은 영상을 더 많이 보게 하는 구조다. 한번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에코 챔버(Echo Chamber)라고 할 수 있다. 보수 쪽 관계자들은 많은 경우 유튜브를 화제로 삼는다. 대통령실에서 극우 유튜버들에게 추석 선물을 보낸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런 보수가, 진보가 김어준의 선동에 휩쓸려 망했다는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일처럼 늘어놓곤 하는 것이다.

    정치 유튜브에 빠진 산업화 세대는 지난날의 추억과 향수를 탐닉하며 종종 아스팔트 우파가 돼 ‘실천’하지만 그들의 세계관은 이미 반세기도 더 지난 1960년대에 세팅돼 있다. 그 영향력과 발전 가능성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당대표로 상징되는 ‘젊은 우파’들은 60대 이상과 20~30대가 손을 맞잡고 86세대와 X세대를 제압하는 ‘세대포위론’을 주장한다. 겉보기엔 그럴싸하지만, 후진국에서 태어나 고도성장기를 겪은 세대와 선진국에서 태어나 저성장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이념을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은 없다.

    청년이건 노년이건 보수는 책을 읽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만들지도 않는다. 각자의 유튜브 화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반면 ‘86‧X세대 연속체’는 동일한 세대 경험에 판을 깔고 문화 예술 담론의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과연 상대가 되는 싸움일까. 진지하게 싸우려는 마음이 있긴 한 걸까.

    보수가 문화권력을 되찾으려면, 아니 최소한의 균형이라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처럼 남자 청년들은 여성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콘텐츠에 열광하고, 노년층은 이승만‧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담론에만 몰두하고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게 될 2020년대 이후의 시대를 조망하고, 그러한 거시적 전망 위에서 현 시대에 필요한 문화‧철학‧사상‧담론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