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장·차관급 대사, 中 국장·부국장급 외교관… 格 논란 지속
“中도 6·25전쟁 피해자”라던 초대 대사 장팅옌
‘말갈족 후예’라 말 가려 하지 못한다던 우다웨이
스파이 된 ‘중국 황제의 소년 칙사’ 리빈
위안스카이 떠올리게 한 8번째 대사 싱하이밍
내정간섭 수준 언행으로 일파만파
[Gettyimage]
6월 8일, 싱하이밍(邢海明) 주한중국대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앞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 외교정책 비판을 넘어 겁박(劫迫)이 담긴 발언은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켰다. 싱하이밍을 ‘외교적 기피인물(PNG)’로 지정해서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싱하이밍의 발언에서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진다. 역대 주한중국대사들의 언행 때문이다. 초대 장팅옌(張庭延)부터 현 8대 싱하이밍까지 역대 주한중국대사는 예외 없이 결례, 내정간섭 논란을 일으켜왔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랑(戰狼·늑대전사) 외교’라 불리는 거친 외교를 전개해 국제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중국은 오래전부터 한국을 ‘테스트 베드’로 삼아 온 셈이다. 이는 현대 중국 외교의 비조(鼻祖)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국무원 총리가 제시한 ‘평화공존 5원칙’에도 위배된다.
중국대사와 관련된 또 다른 논란은 ‘격(格)’ 문제다. 1992년 수교 이후 한국은 장·차관급 대사를 파견하고 있지만, 중국은 국장~부국장급 직업 외교관을 대사로 임명하고 있다. 중국이 ‘혈맹(血盟)’으로 치부하는 북한에는 부부장(차관)급 인사를 대사로 파견한다.
역대 주한중국대사를 보면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떠오른다. ‘MI6’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영국 비밀정보부에 침투한 러시아 스파이 색출 작전을 다룬 스파이 영화의 명작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푸어맨’이라는 ‘코드네임’을 가진 고급 첩보원이 등장한다. 코드네임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는 영국 전래동요에서 유래했다.
수교 후 31년 동안 한국에 부임한 중국대사 8인은 각기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전랑외교 전사(솔저)를 자처한 이도 있고, 스파이 혐의로 기소돼 수인(囚人) 신세가 된 전직 대사도 있다. 이들의 특성에 맞는 별칭을 붙이고 행적과 논란을 추적했다.
‘통역’ 장팅옌 “유감을 표시할 필요도 없다”
장팅옌. [동아DB]
장팅옌은 ‘통역’으로서 마오쩌둥·저우언라이 등 중국 지도부와 김일성 북한 주석 회담 등에 배석했다. 1992년 8월로 예정된 한·중 수교 공식 발표를 앞두고 그해 7월,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이 특사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에게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한·중 수교 관련 구두(口頭) 친서를 전할 때도 통역으로 배석했다.
수교 교섭 과정에서도 장팅옌은 실무 책임자로 참여했다. 대학 동기동창이자 외교부 입부 동기 아내 탄징(譚靜)과 함께였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후 원래 북한대사 하마평에 오르던 장팅옌도 임지를 바꿔 서울 땅을 밟았다.
1992년 10월 9일, 장팅옌은 첫 공식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6·25전쟁 참전 관련해서 그는 “수교 협상에서 6·25전쟁 관련해 중국이 한국에 ‘유감’을 표시했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다. 유감을 표시할 필요도 없다”고 일축했다.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의 발언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다. 수교 다음 날인 1992년 8월 25일, 이상옥 장관은 MBC 대담에서 중국 측의 유감 표명이 있었다고 발언했다.
장팅옌의 6·25전쟁 관련 발언은 수위가 높아졌다. 10월 16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초청 강연에서 “6·25전쟁에 대한 우리 입장은 일관돼 있다. 우리도 피해자라는 사실이다”고 주장했다.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 주장하는 중국의 태도가 반영된 발언이었다. 이는 역대 주한중국대사들이 일으킨 설화(舌禍)의 시초로 기록됐다.
‘말갈족’ 우다웨이 “한-대만 국적기 복항, 중국 승인 받아야”
우다웨이. [동아DB]
1998년 2대 주한중국대사로 부임한 우다웨이(武大偉)는 이 같은 말을 자주 했다. 말갈족의 후예를 자처한 그는 공식 기록상 한족(漢族)이지만 고향은 말갈족의 한 갈래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옛 터전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룬(海倫)이다. 말갈족의 한 갈래인 여진족(女眞族)은 훗날 금(金)과 청(淸)을 개국했다. 이를 두고 말갈·여진족의 침략 전쟁에 시달린 역사가 있는 한국을 경시하고 압박하는 처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우다웨이는 각종 현안에 대해 중국 입장을 강하게 대변해 한국 외교 당국을 불편하게 했다.
‘거친 입’을 자처했던 우다웨이는 내정간섭성 발언도 지속했다. 2000년, 티베트 정교(政敎) 일치 지도자 달라이 라마 방한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우다웨이는 2000년 11월, 한국언론재단 초청 강연에서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달라이 라마가 한국에 온다면 한·중 단교(斷交)까지는 가지 않겠지만 양국 간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주재국 대사가 단교를 언급한 것을 두고 무례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발언 당일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이 초치(招致)해 우려와 경고를 전했다. 2001년 7월 예정된 달라이 라마 방한은 외교통상부의 입국 불허로 무산됐다.
1992년 한·중 수교와 동시에 이뤄진 한-대만 단교 이후 양국 간 현안은 한국-대만 간 국적기 정기항공노선 복항(復航) 문제였다. 우다웨이는 이에 대해서 “중국의 사전 승인을 받을 것”을 요구해서 다시금 내정간섭 논란을 일으켰다.
우다웨이의 언행을 두고서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우다웨이가 적절한 자제심과 겸양의 덕을 갖춘 외교관인지 다시 한번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임기 내내 문제를 일으켰던 우다웨이는 2001년 7월, 주일본대사로 영전했다. 그의 이임을 두고서 한국 언론은 “돌출성 문제 발언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외교관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우다웨이는 전랑외교의 원조인 셈이다.
‘스파이’ 리빈 “대만 총통 취임식 참가 취소하라”
리빈. [동아DB]
리빈과 중국대사관의 행태가 본격적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2004년이다. 그해 3월 대만 대선에서 대만 독립론자 천수이볜(陳水扁)이 재선에 성공했다. 5월 예정된 총통 취임식에 한국 여야 국회의원을 초청했다. 중국대사관은 여야 대표에게 서한을 보내 소속 의원의 대만행을 만류했다. ‘리빈 대사’ 명의로 발송된 서신은 “총통 취임식은 민감한 정치적 행사이며 일부 의원들이 참가할 경우 외부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참가 취소를 권유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사관은 해당 국회의원실에 전화를 걸어 “참석 불가”를 종용하기도 했다. 전화로 압력을 행사한 장본인은 정치참사관 싱하이밍 현 대사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을 우습게 본 처사다. 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었다”는 격앙된 반응이 나왔다.
중국 측의 압력에도 여야 국회의원·당선인들은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에 참석했다. 이에 리루이펑(李瑞峰) 중국대사관 공보관(3등 서기관)은 “대만에 간 국회의원들은 정치적 안목이 없다. 소탐대실한 것이다. 중국을 방문하는 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취임식에 참석한 의원들을 기억해 둘 것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한국 정치권을 상대로 한 압력 행사로 물의를 일으킨 리빈은 2005년 8월, 4년 임기를 마치고 이임했다. 외교부 부국장 겸 북핵전담대사로 전보된 리빈은 이듬해 6월,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 수석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견 공무원을 일선 행정 현장으로 파견해 현장 경험을 쌓게 하는 괘직단련(掛職鍛煉)의 일환이었다.
2007년 2월, 리빈은 웨이하이시 부시장단 명단에서 돌연 삭제됐다. 외교부 부국장 직책도 박탈당하고 부(部) 산하 중국국제문제연구소(CIIS) 연구원으로 발령 났다. 명백한 좌천이었다.
좌천 이유는 업무상 기밀 누설이었다. 북한 유학파이자 주북한대사관에 장기간 근무한 리빈은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고위층과도 친분이 있었다. 한국 근무 시 향응·접대에 노출됐던 리빈은 스파이로 포섭됐고, 한국 측에 북한 관련 기밀을 지속 제공해 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리빈은 한국 인사들의 정보원이었다. 그들은 김정일과 폐쇄적인 북한에 관한 리빈의 깊숙한 내부 정보를 활용했다. 리빈은 2001~2005년 주한대사로 근무하는 동안 한국 인사들에게 김정일, 북한, 북·중관계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제공한 이중 스파이였다”고 보도했다.
리빈은 기소돼 7년형을 선고받았다. 혐의는 기밀 누설이었지만, 뇌물수수·향응접대에 초점이 맞춰졌다. 혐의에 비해 선고 형량도 가벼운 편이었다. 중국 정부 체면 문제, 다이빙궈(戴秉國) 전 외교담당 국무위원의 구명 노력이 복합 작용했다.
사건을 두고서 중국 저명 군사전략가 진이난(金一南) 장군은 한 강연에서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외교부 대사가 주재국 간첩이 되나? 그런 예는 지금껏 없었다. 사건은 너무도 치욕스럽고 손해 막심한 것이었다”고 성토하기도 했다.
‘피소’ 닝푸쿠이 ‘대만·티베트 문제에 강경 발언’
닝푸쿠이. [동아DB]
닝푸쿠이 재임 중 가장 결정적 사건은 2008년 발생했다. 그해 8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4월 27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성화 봉송 행사가 열렸다. 6500명 이상의 중국인이 몰려들었다. 재한중국인 유학생이 주축이었다. 티베트 독립을 주장하고 중국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한국 시민단체 회원 180여 명도 있었다. 이들을 보자 중국인 참석자들은 돌, 스패너, 미개봉 음료수 캔, 국기대 등을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개입했지만 무차별 구타와 폭행을 지속했다. 민간인, 기자, 경찰이 부상을 당했다. 주한중국대사관이 전화, 인터넷 등을 통해 중국유학생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사건 현장에는 현역 인민해방군 장교 차이융(蔡勇) 국방무관을 비롯한 대사관 관계자들의 모습도 포착되기도 했다.
닝푸쿠이는 “일부 중국 청년들이 과격 행동을 하여 한국 경찰과 기자 등이 부상한 것에 대한 위로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사건은 ‘유감’ 표명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현장에서 부상당한 한 시민단체 대표는 닝푸쿠이를 경찰청에 고소했고, 닝푸쿠이는 대사로서 ‘피소’ 당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먹튀’ 청융화 ‘쌍용자동차 인수에 조력하는 척’
청융화. [동아DB]
2008년 10월 부임한 청융화는 그해 12월, 경기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을 방문했다. 장하이타오(張海濤) 대표이사, 저우랑후이(周郎輝) 상하이자동차그룹 부회장 등과 함께였다. 방문 시에는 대사 관용 차량으로 구입한 쌍용자동차 ‘체어맨 리무진’을 이용했다.
2004년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자동차 경영권을 인수했다. 추후 4년간 신차 개발 비용 등 1조2000억 원 투자, 차량 30만 대 생산을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투자는커녕 직원 2000명 이상을 해고해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공장을 시찰한 청융화는 “쌍용자동차는 중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한 가장 큰 기업으로 중국 정부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중국 정부는 쌍용자동차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한국 정부와 쌍용자동차가 발전할 수 있도록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청융화의 발언은 공언(空言)이 됐다. 2009년 상하이자동차는 쌍용차 매각을 발표했고, 2010년 한국 시장에서 완전 철수했다. 인수 시 약속 불이행, 기술 탈취 등 이른바 ‘먹튀’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먹튀’ 논란에 휘말렸지만 청융화는 2010년 승진해 일본대사가 됐다.
‘노쇼’ 장신썬 ‘북한 연평도 포격 이후 한 달 휴가’
장신썬. [동아DB]
5월 4일, 장신썬은 부임 인사차 현인택(현 고려대 명예교수) 통일부 장관을 예방했다. 현 장관은 천안함 사건을 거론하며 “중국의 책임 있는 역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배석했던 중국대사관 공사참사관이 “너무하는 것 아니냐? 녹음되는 것 아니냐?”라며 끼어들었다. 외교부 과장급 인사가 한국 각료를 들이받은 것이다. 당시 끼어든 공사참사관이 지금의 싱하이밍 대사다.
11월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관련 보도에 주의하고 있으며 사태 전개에 우려를 표시한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외교장관 회담이 예정됐던 양제츠(楊潔篪) 외교부장도 방한 취소를 일방 통보했다. 또 다른 당사자 장신썬은 12월 6일부터 한 달간 휴가를 명목으로 한국을 비워 ‘책임 회피’ ‘노쇼’ 논란을 일으켰다.
‘사드’ 추궈훙 “사드 배치, 양국 관계 큰 장애”
추궈훙. [동아DB]
2016년 1월, 북한이 제4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2월에는 장거리 로켓 광명성 4호를 발사했다. 발사 직후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한국과 미국은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에 관해 공식 협의를 시작한다”고 밝혀 사드 배치를 시사했다.
2월 23일, 추궈훙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를 예방했다. 그는 “사드 한국 배치로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이 순식간에 파괴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발언 다음 날,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사드 배치는 우리의 자위권 차원의 조치로서 안보와 국익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경북 성주군에 사드 배치된 후에도 추궈훙의 사드 관련 발언은 이어졌다. 2017년 8월, 성균관대에서 개최된 한·중 수교 25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사드 배치가 양국 관계 발전에 가장 큰 장애이자 어려운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임기 내내 사드, 홍콩, 신장위구르 등 중국의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강경 발언을 일삼던 추궈훙은 2019년 12월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 5년 10개월, 주한중국대사 중 최장기 재임 기록을 썼다.
이듬해인 2020년 12월, 한국 정부는 추궈훙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대사 재임 중 한·중 관계 발전과 양국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로’가 명분이었다. 이를 두고 한국 언론은 “한국 무시 발언을 한 전직 대사에게 최고등급 훈장을 줬다”고 비판했다.
제8대 대사 싱하이밍(邢海明)은 북한 사리원농업대에서 유학했다. 남북한을 번갈아가며 근무했고,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 주몽골대사를 거쳐 2020년 1월 서울에 부임했다.
싱하이밍. [동아DB]
‘솔저’ 싱하이밍 “천하의 대세는 따라야 창성하다”
싱하이밍이 차기 대사로 내정되자 한국 조야(朝野)에서는 찬반 목소리가 엇갈렸다.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보유한 지한파라는 점에서 환영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날 거친 언행으로 물의를 빚은 전력(前歷)을 거론하며 조선 말 ‘감국대신(監國大臣)’을 자칭하며 전횡을 일삼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겹쳐진다는 시각도 교차했다.대사 부임 후 싱하이밍은 한국을 종횡무진했다. 각종 행사 참석, 언론 기고문을 통해 ‘중국 국익’을 적극 대변했다. 언론을 적극 활용하던 싱하이밍은 김치 종주국 논란과 관련해서는 ‘언론 탓’을 하기도 했다. “중국 쓰촨 ‘파오차이’와 한국의 김치는 다른 것인데 언론이 번역을 통해서 중국 것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싱하이밍의 거침없는 언행은 내정간섭 논란을 일으켰다. 2021년 7월 15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중국이 사드 배치 철회를 주장하려면 자국 국경 인근에 배치한 장거리 레이더를 먼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날인 싱하이밍은 기명 기고문을 통해 “한국 사드 배치는 중국 안보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천하의 대세는 따라야 창성하다는 말이 있다”며 한국이 중국을 따라야 한다고 압박했다. 올해 6월 8일 발언의 ‘예고편’인 셈이다.
날로 수위가 높아지는 싱하이밍의 발언을 두고 전랑외교를 본격화하는 본국 외교부에 대한 충성 경쟁의 산물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한국 정부·여당으로부터 교체 압력을 받고 있는 싱하이밍의 후임으로는 천하이(陳海) 미얀마 대사, 장청강(張承剛) 광주총영사 등이 거론된다. 이를 두고서 외교가에서는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들의 전적(前績)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천하이는 외교부 부국장 시절 방한해 사드 배치를 비판하며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장청강은 5·18기념재단이 2023년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홍콩 인권변호사 초우항텅(鄒幸彤)을 선정하자 재단을 직접 방문해 ‘선정 취소’를 종용하기도 했다.
신동아 8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