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문학관’이라는 사건
신의 한 수가 된 콘크리트 옹벽
주변 자연환경과 어우러지는 건축물
숲속 책 쉼터, 도시농업지원센터 등 소규모 공공건축 사업에서 주목할 성과를 내고 있는 이소진 건축사사무소 리옹 소장은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공의 장소에서 진정한 휴식을 취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조영철 기자]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복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공공청사는 물론 도서관이나 둘레길 등 지역사회 시민들을 위한 공공건축물이 눈에 많이 띈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기는커녕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미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건축물들을 볼 때는 세금 내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불편하지만 공원이나 숲에 잘 조성된 쉼터나 도서관을 보면 세금 낸 보람이 느껴지기도 한다.
미국 작가 제니 오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란 책에서 잘 만들어진 공공공간이야말로 시민들에게 진정한 치유와 재충전, 회복의 에너지를 준다고 말한다. 돈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공적 마인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시내 여러 지역 자연 공간에 책 쉼터나 도서관 등 공공건축물을 짓는 이소진 건축사사무소 리옹 소장도 “불특정 다수의 시민에게 치유와 회복의 공간을 짓고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첫 프로젝트, 한강변 나들목 사업
그동안 작업한 공간을 보여주는 이소진 소장. [조영철 기자]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에서 10년간 건축가로 활동하며 파리에서 다양한 공공건축 프로젝트를 해오던 그는 2006년 귀국해 건축계 신인상으로 통하는 ‘젊은 건축가상’을 시작으로 서울시 건축상 대상, 건축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석주미술상을 받기도 했다.
2023년 11월에는 서울 관악구 강감찬 도시농업센터와 구로구 천왕근린공원 내 책 쉼터, 캠핑시설, 스마트 팜 설계로 국토해양부가 주는 ‘올해의 공공건축 우수상’을 받았다.
이 소장이 하는 일은 많은 경우 수명이 끝나 버려진 공간을 재탄생시킨다는 점에서 환경친화적이며 자연 친화적이다. 그의 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공원 내 도서관, 관리사무소, 카페, 육아방, 화장실 등 남들이 주목하지 않거나 사소하게 생각하는 작은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처음 맡은 작업은 2008년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한강변 나들목 사업이었다. 시민들이 한강변으로 들어설 때 만나는 콘크리트 하수구 터널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작업이었다. 이 소장의 말이다.
“한강으로 들어가는 40개가 넘는 나들목 중 20여 개를 건축가 신혜원을 주축으로 다섯 팀이 개선 사업을 했는데 저의 첫 번째 공공 프로젝트였습니다. 콘크리트 터널 구조물로 방치된 것들을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호응이 너무 좋아서 당시 오세훈 시장이 사업비 250억 원을 추가로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토목 엔지니어링 영역이던 나들목 사업에 건축과 디자인의 힘이 보태지면서 이후 사업은 토목과 건축이 한 팀이 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그의 건축가 인생의 분기점이자 공공건축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윤동주문학관’ 프로젝트와 만나게 된다.
“나들목 사업을 시작으로 작은 공공 문화공간을 리모델링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인사동 공예문화진흥원 리모델링 작업도 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종로구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너무 작은 프로젝트라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윤동주문학관 리모델링 작업을 해달라’는 거였죠. 사업 난이도에 비해 설계비가 너무 적어 고민하다가 현장을 가보고는 주변 경관에 매료돼 시작하게 됐습니다.”
자연환경과 어울린 공공건축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윤동주 문학관. [동아DB]
윤동주 시선으로 무에서 유 창조
윤동주문학관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 북악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북악 스카이웨이를 따라 조성된 청운공원과 시인 윤동주가 시심(詩心)을 가다듬으며 자주 오르내렸다고 해 이름 붙여진 ‘윤동주 시인의 언덕’ 입구 사이에 있다.작은 박스 형태의 하얀색 1층 건물로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청운동 일대에 수돗물을 공급한 수도가압장 건물이었다가 수명이 끝나 방치된 상태였는데 이걸 문학관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었다. 건축계에서는 소규모 공공건축물의 재생 가능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선례로 회자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종로구청은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서촌에서 영감을 얻어 이 일대를 윤 시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하겠다고 결정하면서 문학관도 만들자고 한 거죠. 어떻게 보면 시인과는 직접적인 인연도, 전시품도 없고 단지 그가 잠시 서촌에 살았다는 사실 하나만 갖고 작업을 해야 했어요. 윤 시인이 인왕산을 다니면서 시의 영감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웃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었습니다.
주어진 공간 전체가 약 99m2(30평)가량으로 너무 작아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막막했습니다. 그러다 현장 방문 때 가압장 뒤에 있던 콘크리트 옹벽을 눈여겨봤었는데, 이 옹벽의 정체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됐습니다.”
현재 윤동주문학관을 상징하는 물탱크 활용 공간 2개는 그때만 해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하늘이 도왔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우연의 연속이 많았어요. 물탱크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설계 마무리 단계에 불행히도 우면산 산사태가 났는데 그 사고를 계기로 현장에 있던 옹벽에 대한 정밀조사가 있었고, 그 바람에 거대한 콘크리트 물탱크 2개를 발견하면서 건물 뒤 옹벽이 물탱크 벽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옹벽이란 게 뭔가요.
“산사태 방지나 산이 무너지지 않게 지지하는 구조벽입니다. 대개 옹벽 밑에는 물 빠지는 홈통이 있는데 당시 현장에는 옹벽만 있고 홈통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옹벽 상부에 작은 덮개 2개가 있어서 열고 내려가 보니 커다란 콘크리트 물탱크 두 개가 나온 거죠.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물탱크의 특성상 단열도 안 돼 있고 울림도 있고 습하고. 일반적인 실내 전시실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죠.
실내 공간으로 무리하게 만드는 걸 포기하고 나니 모든 고민이 해결되더군요. 물탱크 하나는 뚜껑을 열어 하늘을 볼 수 있게 하고 하나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서 영상을 보여주는 공간을 만들었더니 이전에는 없던 이색적 공간이 나왔습니다. 탱크 안에는 전시품이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 반응이 윤시인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을 연상하기도 하고, 시인이 있었던 감옥을 연상하기도 해서 보람이 컸습니다.”
약간 다른 질문인데, 그런 공간을 설계하실 때 따로 공부를 하시나요. 예를 들어 윤 시인에 대한 공부랄지.
“물론 시도 많이 읽고 공부도 하면서 영감을 얻으려 하지요.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한다고 공간이 다 잘 나오는 건 아니더라고요(웃음). 앞서도 말했지만 윤동주문학관은 프로젝트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는데 사전에 계획해서 된 것이 거의 없습니다. 결정적이었던 건 윤 시인의 조카이신 윤인석 교수님께서 처음에는 이 프로젝트를 반대하셨다가 공사 직전에 뵙고 설계 의도를 설명드리니 저희들의 진정성을 이해해 주셔서 연세대학에 기증하려고 준비 중이셨던 친필 원고 및 사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겁니다.”
그는 윤동주문학관으로 젊은 건축가상, 서울시 건축상, 석주미술상을 잇따라 받는다.
“건축가 입장에서는 유지 보존이 중요한데 문학관이 이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돼 건축물을 바꿀 경우 건축가와도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 작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소규모 공공건축물이 어떻게 시민들의 자랑거리가 되는지 체험한 사례였죠. 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시심(詩心)을 발견하는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말에서 공간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저 역시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정든 풍경을 살리고 싶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가 극찬한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소진 ]
건축 설계에서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면.
“언뜻 처음 마주쳤을 때는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려 합니다. 이미 바꾸기 전 풍경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는데 확 바꿔서 낯설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문학관 공사할 때도 주민들이 흉물이 들어올까 봐 걱정을 많이 하셨대요. 나중에는 ‘지켜줘서 고맙다’고 하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비록 작은 건축물이라도 정든 풍경을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는 2012년 윤동주문학관에 이어 이듬해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사업도 하게 된다.
“문학관에 이어 종로구청에서 바로 의뢰가 온 프로젝트였는데 문학관이 생각보다 너무 관심을 받아서 부담이 컸습니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신축이다 보니 자유로움도 있었지만 그런 자유가 오히려 부담이 됐어요. 그러다 나무가 울창한 현장을 가보고 ‘뽐내지 말고 항상 여기 있었던 건물처럼 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삼청공원은 우리나라 도시계획 공원 1호로 그 자체로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라 숲속의 오두막처럼 편안한 느낌으로 가자는 생각에 목(木)구조로 설계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소규모 공공건축물 중 한옥을 빼고는 목구조 설계가 없던 시절이어서 신선함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5년 뒤에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책을 쓴 저자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색스가 서울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왔다가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 건물을 우연히 보고 뉴욕타임스에 ‘최고의 공공장소인 공원과 도서관이 만난 시너지 효과를 만든 아름다운 사례’라며 ‘해독제 역할을 하는 건축물’이라는 칭찬을 하면서 주목받았죠. 이후 공원 내 책 쉼터 사업을 꾸준하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기획 단계부터 자문도 하면서 규모나 장소를 정하는 일도 하고 있어서 작업에 한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듣는 건축 인생에서 솔깃했던 것은 작은 점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들이 이후 점점 커져서 선과 면으로 이어진다는 대목이었다.
“프랑스에서도 튀는 건물이 아니라 주변과 어우러지는 것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면서 작업했습니다. 지도 교수님이자 파트너였던 스승 이브 리옹(Yves Lion)의 가르침이기도 했고요. 주변과의 어울림을 중시하면 작은 작업을 해도 큰 안목을 갖고 할 수 있습니다. 규모에 주목하기보다 가치에 주목하니까요.”
공원 내 공공시설물 설계를 10여 년 이어오니 화장실, 작은 매점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들이 도서관, 도시농업센터, 온실 등 큰 작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중에 기억나는 공간은 노원구청에서 의뢰한 불암산 정원지원센터였다.
“식물이 사는 공간과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을 고민하게 한 프로젝트였어요. 온실은 태생적으로 식물 중심 공간인데 이걸 인간이 사용하려면 냉난방이 바뀌어야 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식물에게는 좋지 않잖아요. 고민 끝에 인간이 조금 불편한 식물 중심의 공간을 만들었는데 뜻밖에 시민 호응이 너무 좋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이어서 관악구 강감찬 도시농업센터에서는 식물중심 온실과 인간 중심 온실을 시각적으로 하나가 되게 만들 수 있도록 진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는 요즘 민간 그룹인 SK디스커버리가 재원을 마련하고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가 기획한 ‘지관서가’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관서가’는 지자체와 SK가 협력해 지역 내 버려지거나 쉬는 공간을 발굴해 책카페라는 인문 공간을 만들어 제공하는 사회공헌사업이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본다’는 ‘지관’의 의미 그대로 시민에게 안식과 독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지관서가는 대기업의 사회공헌사업으로 공간 사업의 새로운 실험을 한다는 점에서 주민들에게도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2021년 4월 울산대공원점을 시작으로 장생포 문화창고, 선암호수공원, 유니스트(울산과기대)까지 모두 7곳에 생겼고 울진과 안동에서도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