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퇴직, 다양한 이별이 닥치는 50대
하나의 의미에만 매달리면 강박이 된다
인생은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다
은퇴 이후 혼란에 빠졌던 임상수 씨(오른쪽)가 정신과 전문의 강은호 원장과 나눈 대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은 과정을 책으로 엮어내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허문명 기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삼성서울병원 임상강사, 임상조교수, 성균관대 의대 교육부학장보로 일했다. 뉴욕 IPTAR 정신분석연구소, 뉴욕 윌리엄 앨런슨 화이트 정신분석연구소 등에서 정신분석을 공부했다.
임상수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연합뉴스에 입사해 34년간 기자로 활동했다. 스포츠부장, 미디어여론독자부장, 산업부장, 경제부장, 마케팅본부장 등을 거친 뒤 정년퇴직하고 현재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3년 전 임원 승진에서 좌절한 임상수 씨는 “하늘이 노래졌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
30년 넘게 언론사에서 일하며 때로 작은 시련이나 좌절은 있었어도 그런대로 순탄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승진에서 탈락하자 더는 올라갈 데가 없으며, 무조건 내려와 은퇴까지 버틸 시간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와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식욕도 떨어져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고 우울감이 밀려왔다. 술을 먹어도, 몸을 혹사하는 운동을 해도 잠 못 이루는 날이 이어지자 지인의 소개로 정신과 의사인 강은호 원장을 만났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된 두 사람은 2년여간의 대면 상담과 e메일 대화를 나누며 교류했다. 최근 이 대화를 묶어 ‘잠 못 드는 오십, 프로이트를 만나다’라는 책을 펴냈다.
책은 퇴직을 코앞에 두고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불안과 걱정을 임 씨가 잔잔하게 털어놓으면 강 원장이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를 설명하면서 조언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노화, 꼰대(의식), 퇴직, 부모, 자식, 자존심, 소외감, 분노, 외로움, 상실 등이 키워드로 구성됐다.
임 씨가 내면 풍경을 솔직하게 토로하면 강 원장이 객관적 진단을 내리는데 읽다 보면 절로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 시기를 겪는 많은 이들이 느낄 법한 50대의 솔직한 내면과 전문의의 분석에 공감하면서 두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다. 폭설이 말 그대로 눈 녹듯 사라진 12월의 일요일 아침, 우리 세 사람은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먼저 임 씨에게 물었다.
삶에서 근본 되는 두 요소, ‘납득’과 ‘의미 부여’
퇴직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일인데 막상 눈앞에 닥치니 당혹스러웠다고 썼더군요.임_나 나름대로 회사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기대했던 승진에서 탈락하니 갑자기 눈앞에 길이 사라진 것 같았어요. 스트레스가 심해지니 고혈압, 고지혈증 수치도 급격하게 올라가고 수시로 식은땀이 속옷을 적셨습니다.
몸이 망가지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퇴직 불안에 노후 불안, 고령으로 누운 아버지, 아픈 아내, 취준생 아들까지 회사 일을 핑계로 심리적 거리를 두었던 일들이 옥죄어 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임상수 씨를 만났을 때 강은호 원장님은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강_“공황과 무기력 상태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처음엔 누가 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인데 ‘임원 승진에서 좌절된 것이 무슨 대단한 실패라고 저렇게까지 낙심을 하나’ 했는데 사실 그건 남이 함부로 할 이야기가 못 되죠.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저는 인간 삶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두 가지 요소를 ‘납득’과 ‘의미 부여’로 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심리적으로 일정 정도 납득이 되면 트라우마로 남는 일이 줄어들어요. 그렇지 않으면 작은 일에도 마음의 상처가 심하지요. 가벼운 차량 접촉 사고에도 심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저는 저는 사람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고, 그걸 ‘미닝풀리스(meaningfuliss)’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움직이는 엔진, 또 다른 예를 들면 고속 주행하는 차량의 적절한 타이어 공기압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미닝풀리스에 과부하가 걸리면 동아줄에 매달리듯 각종 강박이 나타납니다. 일하는 게 유일한 미닝풀리스이면 워커홀릭이 되고, 돈이 유일한 미닝풀리스가 되면 죽기 직전까지 돈에만 매달리게 되죠. 술을 마실 때만 근심 걱정이 없어지면 알코올중독이 되고요. 그러다 이런 대상이 사라지면 공황 상태가 옵니다.
임 선생은 살아오면서 숱한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왜 승진에서 탈락한 것이 트라우마가 됐을까요. 그건 그것이 임 선생 삶에서 의미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죠.”
(임상수 씨를 보며) 정말 그랬나요.
임_“만 55세에 임금피크제가 적용되면서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승진에 대한 기대가 한구석에 있었어요. 막상 좌절되니 방아쇠가 돼버린 거죠. 아무런 준비도 없이 퇴직을 맞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급해졌어요. 이제 나도 회사에서 ‘잉여자’가 되는 것인가 하는 마음에 여러 가지에 예민해지고 마음도 외롭고 쓸쓸해졌습니다.”
‘빈 괄호의 문제’를 마주할 시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 원장이 말을 받았다.
강_“프로이트는 사람의 모든 에너지가 어떤 대상에 온통 집중되는 현상을 ‘케텍시스’라고 했어요. ‘꽂힌다’와 비슷한 의미일 거예요. 프로이트는 이런 대상으로 돈, 명예, 권력, 회사, 이념, 국가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 것들이 좌절되면 공황과 무기력 상태가 옵니다. 이런 경험은 위기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 오랫동안 덮어놓은 ‘빈 괄호의 문제’를 인식하는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상실감을 느끼는 50대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삶의 의미를 파고 들어갈 수 있는 때이기도 하죠.”
빈 괄호라고 하면 흔히 말하는 내면의 심층 깊숙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지점에 대한 탐구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강_“그렇습니다. 누구나 마음의 지진, 삶의 지진 같은 일들을 겪지요. 이런 자극 요인을 정신의학에서는 ‘방아쇠 요인’이라고 합니다. 총알이 장전된 상태에서 방아쇠가 당겨지면 총알이 발사되는데 이 발사가 바로 우울증이나 공황 같은 각종 증상으로 나타나죠.
하지만 장전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방아쇠 요인이 자극하는 마음의 지진을 일으키는 진원지를 알아가는 건 각자가 생각하는 미닝풀리스와 각자의 고유한 성격 패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성격은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 성장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일정하고 반복적인 패턴’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1%만 바뀌어도 삶이 많이 달라질 수 있어요. 이걸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것에 의미를 두며 살고 있는지 자신의 내면에 대한 탐구와 집중이 중요합니다.”
매일 이별하고 사는 50대, 상실 받아들여야
임상수 씨의 경험은 한국의 전형적 50대 중년의 마음으로도 보여요. 강 원장님이 보시기에 한국의 50대, 특히 남자들의 정신 상태는 어떤가요.
강_“사실 지금은 어느 세대나 살기가 힘들잖아요. 20대, 30대, 40대마다 각자의 고민이 있고요. 이 가운데 50대는 노화의 시작, 직업의 상실, 부모와의 이별, 자식의 독립 등 온갖 상실이 한 번에 다 몰려오는 시기죠. 이런 시기가 인생에서 별로 없어요. 김광석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하는 게 현실이 되는 나이죠.
저도 30~40대에는 50~60대 선배들을 보면 뭔가 완성했고, 다들 편안한 노후를 준비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상실의 시간을 잘 소화하면서 잘 늙는다는 게 진짜 보통 일이 아니고,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많이 느껴요.
특히 우리나라 50대들은 감정적 반응에 익숙하지 않아요. 우리 부모 세대의 유일한 ‘미닝풀리스’는 ‘생존’이었어요. 먹고사는 것 외에 삶에서 의미 있게 느껴진 것이 별로 없던 그런 세대 밑에서 자라며 우리 역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배운 게 별로 없죠. 한마디로 상실을 어떻게 ‘애도’ 해야 할지 모르고 상실 그 자체에 좀 압도되는 부분이 있어요.”
애도라는 표현이 다가오기도 합니다만 상실감에 붙이려니 언뜻 낯선 용어로 들립니다.
강_“한국의 50대들은 힘들고 어렵고 공허하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이걸 드러내는 자신을 나약하다고 자책해요. 그런 점에서 애도라는 단어를 쓴 겁니다. ‘내가 뭔가를 상실했구나’ 하는 걸 감정적으로 충분히 인식하고 그걸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라는 뜻입니다. 비탈길에 서 있는데 안 내려가겠다고 계속 버티려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게 각종 강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제 주변에 골프장에 거의 프로 선수 수준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력에 좋다고 영양제를 수십 개씩 먹는 사람도 있고요. 여행도 강박적으로 다니는 분들이 있고, 늦바람에 빠진 분들도 있어요(웃음). 너무나 지혜롭고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에 확 빠지면서 통제가 안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굉장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서요.
그런 걸 옆에서 보면 삶의 동아줄을 마지막으로 붙잡는 것처럼 보여요.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으니 엄청난 힘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강박은 감정을 그저 미뤄놓는 겁니다. 나중에는 2배 3배 더 고통스러운 걸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사는 게 이상적인 50대를 보내는 건가요.
강_“답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정확하게 본인이 무엇을 상실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대개는 그다음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아요. 혼자 하기 어렵다면 상담이든 아니면 주위의 친한 관계 속에서 자기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객관화하면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임상수 씨는 그런 과정을 거친 건가요.
임_“강 원장님과의 작업을 통해 저를 많이 객관화해 바라보게 됐죠. ‘아, 내가 이런 데 문제가 있는 거였구나’ ‘그러면 뭘 해야 되지’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데, 예전하고는 좀 다르게 하게 돼요.”
어떻게요.
“예전에는 나 자신보다는 주변에 대한 생각이 많았는데 조금씩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알아가면서 더 편안해졌어요. 시간도 약이 됐습니다. 책을 쓸 때는 50대였는데, 지금 퇴직한 지 한 달이 넘고 환갑이 되니 여러 가지 것에 대한 집착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부족한 나,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받아들이기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책까지 낸 것은 왜일까요.
“창피하고 민망한 일인데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나 비슷한 감정 상태라는 걸 알게 됐어요. 퇴직 후 뭘 할까에 대한 고민도 그렇고, 부모와의 이별도 누구나 다 겪는 거잖아요. 제 주변을 돌아보면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분이 한 3분의 1가량 되는데 제가 겪은 고통을 그분들도 똑같이 겪더라고요. 가족 중에 아픈 사람들도 있고.
원장님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깜짝 놀란 게 제가 인생을 너무 경쟁적으로 살아왔다는 거였어요. 앞으로의 인생은 경제적 풍족함과 사회적 지위를 무조건 추종하기보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서 내면이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됐어요. 무엇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기로 했고요.
돌이켜 보면 지난 30여 년 간 유지해 온 직업을 갖기 위해 청소년기 10년을 준비하잖아요. 남은 인생을 좌우할 지금 시기도 너무 조급해하지 않고 신중하게, 충실하게 준비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예전보다 좀 많이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는 그러면서 인생 후반기를 ‘리셋’이란 표현보다 ‘리페어(repair)’한다는 표현이 더 다가온다고도 했다.
“어떤 일이 매듭지어졌다고 해서 그걸로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죠. 또다시 새로운 시작이 펼쳐지고, 새로운 걸 찾아낼 수 있어요. 그걸 정년이라든지 퇴직이라든지 하는 걸로 묶지 말자는 거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있는데 다 끝내고 리셋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인생이란 게 고쳐서 사는 건데 사람들 상당 부분은 그걸 리셋으로 생각한다는 거죠. 하지만 삶은 연속선상에서 계속 새로운 장면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리셋’이란 표현은 완벽주의랑 관련돼 있는 거 아닐까요. 모범생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 같은 거. 삶이라는 게 굉장히 다층적이고 복잡하고 풍성한데 우리는 어떤 하나만 보면서 그게 없어지면 다 무너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 의미에서 미닝풀리스라는 말이 다가왔습니다. 사실 삶에서 의미를 찾자면 의미가 없는 것이 없잖아요.
강_“50대에 새로운 것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고기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그물을 던지듯이 맹목적으로 찾는 건 지양해야 해요. 이게 도대체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고, 내가 무엇을 정말 좋아하는지를 찾는 것이 중요하죠.
각자한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그거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할 수도 없고 누가 정해 줄 수도 없어요. 그냥 본능적으로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들을 찾는 데 집중했으면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은 허우적거리다 죽잖아요. 그냥 힘을 빼고 있으면 저절로 뜰 것이고, 일단 떠서 수영할 줄 안다면 헤엄쳐 나오면 되는 거고, 못 하는 사람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유일한 생존 방법이잖아요. 그런데 허우적거리다 모든 에너지가 소진돼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태가 되면 극단적으로 가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이직을 시도한다든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식으로 환경을 바꾸는 경우가 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는 시도는 합리적으로 판단한 경우가 되기 어렵습니다.”
마음 지진 일어날 땐 진원지 찾고 받아들이기
강 원장은 그런 점에서 50대에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원지를 찾아나가는 탐색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누구나 삶의 지진, 마음의 지진이 일어날 때 지표면과 진원지 사이에 완충제를 설치하면 심한 진동이 와도 지표면 위에서는 덜 느끼거나 아예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완충제가 정신과 약물 치료가 될 수도 있고, 운동·취미·독서·명상·요가가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건 전체 구조를 바꿀 수는 없어요. 그런 점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마음의 진원지를 분석해서 자신만이 갖고 있는 내면의 어려운, 취약한 부분이 무언지 알아가는 정신분석이 도움이 됩니다.
중년에서 노년기로 넘어가는 50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타자들, 다시 말해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거나 제거하고 싶었던 나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기입니다.
이런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부족할 수도 있고 불완전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런 내 안의 ‘타자’들이 결국 나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실의 시간인 50대를 지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