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중공업과 두산중공업이 발전설비 사업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다. ‘빅딜’로 두산에 사업권을 내준 현대는 두산 독점의 부작용을 부각시키며 권토중래를 노리고, 두산은 현대의 계약 파기 시도를 비난하며 수성(守城) 의지를 다잡는다.
“현대중공업이 제 손으로 쓴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의 지지도 상승과 정권 말기의 레임덕 현상에 편승,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약속을 깨려 한다.”
발전설비 독점 사업권을 둘러싸고 현대중공업과 두산중공업이 날 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발전설비산업은 한국중공업,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의 경쟁체제였으나, 1998년 국내 공급과잉을 해소하고 공기업 해외 매각을 통해 외자를 유치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정부가 주도한 ‘빅딜’에 따라 현대와 삼성의 사업권을 공기업인 한중에 넘기는 방식으로 일원화됐다. 그러나 덩치를 ‘키운’ 한국중공업은 2000년 말 해외 매각 대신 두산그룹에 인수되면서 민영화, ‘두산중공업’으로 거듭났다.
두산중공업과 현대중공업의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9월16일 산업자원부 국정감사에서 국회 산자위 소속 안영근 의원(한나라당)이 발전설비 독점의 부작용을 지적하면서부터. 안의원은 “빅딜과 공기업 민영화를 통해 발전설비 분야의 독점기업이 된 두산중공업이 한국전력의 발전설비 납품가격을 2.7배나 올렸다”고 주장했다.
안의원은 또 “두산은 빅딜 당시 맺은 경업금지 조항을 내세워 다른 회사의 발전설비 수출을 가로막고 있다”며 이 조항의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안의원의 문제 제기는 그다지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이번 산자부 국정감사에서 빅딜 정책의 부작용을 파헤치는 데 주력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정유, 석유화학, 항공기, 철도차량 등 빅딜 사업부문 전반의 문제점이 함께 거론되다보니 발전설비 부문이 뚜렷이 부각될 기회가 없었다.
더욱이 같은 날 재정경제부 국정감사에서 전윤철 경제부총리가 “빅딜은 좋은 시책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정책을 고려할 상황이 오면 반대할 것”이라며 고위 당국자로선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빅딜을 부정적으로 평가, 다른 이슈들을 제치고 주요 기사로 다뤄졌다.
안의원도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기가 껄끄러운 처지였던 듯하다. 두산과 현대라는 두 민간기업과 관련된 사안인 만큼, 어느 한 쪽을 문제 삼으면 자칫 다른 한 쪽을 편드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의 대주주가 대선 주자로 급부상한 정몽준 의원이라는 점도 한나라당 의원으로선 꺼림칙하게 여겼을 법하다.
일원화 후 납품가 급등
그러나 현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발전설비사업 빅딜 협상과정의 문제점’이란 제목의 문건과 한전의 발전설비 계약현황 등의 자료가 외부로 유출되면서 업계에서 이 얘기가 다시 거론되자 현대와 두산의 갈등은 본격화했다.
한전 자료에 따르면 발전설비산업 일원화 이전인 1997년 태안 화력발전소 5, 6호기 입찰에는 한중·현대·삼성·대우 등이 참여해 삼성이 보일러, 현대가 터빈발전기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계약금액은 보일러 636억원, 터빈발전기 540억원.
그런데 발전설비를 두산으로 일원화한 후 처음 실시된 올 3월의 당진 5, 6호기 입찰(두산, 일본 히타치 및 미쓰비시 참가)에서 납품업체로 선정된 두산의 계약금액은 보일러가 1708억원, 터빈발전기가 800억원으로 급등했다. 규모가 동일한 태안 5, 6호기의 2.7배, 1.5배에 이르는 수준이다.
안영근 의원은 “국내 독점기업인 한중을 민간기업인 두산에 매각할 때 가장 우려했던 게 가격상승인데,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고 했다.
1990년 정부가 산업합리화조치로 발전설비를 한중에 몰아주면서부터 한중은 독점적 지위를 활용, 공기업으로는 드물게 흑자경영을 지속했다. 한중은 1996년 산업합리화조치가 끝날 때까지 수의계약으로 발전설비 프로젝트를 따냈는데, 이 기간 한중의 계약금액은 보일러가 1600억∼1960억원, 터빈발전기가 900억∼1090억원이다.
그러나 자유경쟁체제로 접어든 이후인 1997년 6월, 한중은 경쟁입찰을 통해 영흥 1, 2호기 납품업체로 선정됐는데, 계약금액은 보일러 1225억원, 터빈발전기 832억원이었다. 현대, 삼성 등과 경쟁하게 됨에 따라 입찰가를 크게 낮춘 것이다. 더구나 영흥 1, 2호기는 800MW×2급 발전소로, 그 이전의 500MW×2급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한 달 후인 그해 7월에는 현대와 삼성이 태안 5, 6호기(500MW×2) 보일러와 터빈발전기를 각각 636억원, 540억원에 계약해 가격을 더 떨어뜨렸다. 그후 다시 국내 독점체제가 되면서 두산의 당진 5, 6호기(500MW×2) 납품가가 급상승한 것이다.
발전설비 국내 독점 기업인 한국중공업은 2000년 12월 두산그룹에 인수돼 민영화했다.
두산중공업 재무관리부문 최영천 상무는 “내년 태안 7, 8호기 입찰을 앞두고 입찰정보가 노출될까봐 추가설비 비용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한전 직원들이 두산에 주재하며 제작공정을 감독하고, 일본 업체들과 함께 입찰에 참가한 마당에 어떻게 폭리를 취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가격이 오른 것은 폭리가 아니라 ‘가격 현실화’였다는 설명이다. 두산과 당진 5, 6호기 계약을 한 한전 직원들이 회사에서 표창을 받았을 만큼 ‘짠’ 계약이었다고 한다.
한전이 두산의 협조를 받아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당진 5, 6호기 보일러의 추가설비 및 운송비용, 환율 상승분(1997년 7월 1달러당 881원→2002년 3월 1300원)과 물가 상승분(13.6%) 등을 감안해 태안 5, 6호기와 동일한 기준으로 환산하면 당진 5, 6호기 보일러의 계약금액은 약 12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삼성의 태안 5, 6호기 보일러 계약금액 636억원은 ‘시장 진입용 실적 쌓기’를 겨냥한 원가 이하의 덤핑 입찰가격이기 때문에 한중, 즉 지금의 두산이 삼성 발전설비를 인수한 후 원가와의 차액을 삼성으로부터 보전받았다고 한다. 이를 포함하면 태안 5, 6호기 보일러의 실제 가격은 1370억원에 달한다는 것. 따라서 당진 5, 6호기가 태안 5, 6호기보다 오히려 170억원 싸게 먹혔다는 논리다.
그러나 현대측은 “당진 5, 6호기 보일러의 경우 추가설비 비용을 뺀 순수한 주기기 가격만도 1500억원이 넘는 다”며 두산의 주장을 반박했다. 납품가 급등의 원인을 환율과 물가 상승, 경쟁업체의 덤핑 수주 때문으로 돌리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는 반응이다. 현대중공업 플랜트영업부 이춘호 이사의 말.
“한중이 수의계약으로 수주하던 1990∼95년 환율이 1달러당 700∼800원이다. 우리가 태안 5, 6호기를 수주할 때보다 더 낮았다. 그런데도 그 기간에 한중의 납품가는 태안 5, 6호기의 2∼3배나 됐다. 1달러에 1300원 하던 당진 5, 6호기 납품가 수준이다. 환율이 올라 납품가가 올랐다는 두산의 설명대로라면 한중은 독점 시절 환율과 상관없이 줄곧 폭리를 취했다는 얘기 아닌가.”
태안 5, 6호기 보일러의 경우 원가에 못미치는 덤핑입찰이라는 두산의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당시 한중이 써낸 입찰가도 960억원에 불과해 두산이 실가격이라고 주장하는 1370억원과는 차이가 크다는 것.
뿐만 아니라 공개경쟁으로 치러진 영흥 1, 2호기 입찰에서 한중은 보일러 1225억원, 터빈발전기 832억원을 써내 낙찰받았는데, 이 발전소는 800MW×2급이다. 따라서 1kw당 단가를 뽑아 태안·당진 5, 6호기 규모인 500MW×2급으로 환산하면 각각 766억원, 520억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두산 관계자는 “영흥 1, 2호기는 국내 최초의 800MW×2급이라 외국 업체에 뺏겨선 안된다는 생각에 희생을 각오하고 들어갔다”며 저가 수주 사실을 시인했다.
안영근 의원도 두산의 해명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당진 5, 6호기의 경우 해외에서 수입해 쓰는 부품 비율이 낮아 환율의 영향이 크지 않다고 한다. 또한 두산의 설명처럼 국내에서 조달하는 부품가가 많이 올라 물가 상승분을 반영했다면 부품별 가격인상 자료를 제시해 이해를 구하면 될 텐데, 두산은 이것도 ‘입찰정보 해외노출’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 발주처인 한전으로서도 가격자료를 공개해 향후 해외 업체들이 이를 근거로 더 낮은 입찰가를 써내도록 유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1999년 11월 현대와 한중이 체결한 사업 양수도 계약서에는 “양도인은 계약 체결일부터, 수행중인 공사를 종료한 후 10년이 되는 시점까지 국내에서 발전설비의 제작 또는 판매(유지·보수 포함)와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조항이 담겨 있다. 이른바 ‘경업(競業)금지’ 조항이다.
이를 위반했을 때는 양수인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는 것은 물론, 이와 별도로 위반행위 금액(입찰금액, 수주금액, 제공되는 자산금액 등)의 1.5배에 해당하는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또한 추가합의서에는 입찰 참가 전이나 견적서 제출 전에 한중으로부터 사전 동의를 얻어야만 발전소용 보일러 부품을 수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경업금지 조항을 만든 것은 삼성중공업은 사업부문 전체를 한중에 양도했는데 현대는 사업권만 한중에 내놓고 설비와 인력은 그대로 보유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울산 현대중공업에는 발전설비 라인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이렇듯 기묘한 형태로 사업 양수도 계약이 체결된 것은 한중과 현대의 빅딜 협상이 두 회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난항을 거듭한 결과다.
1998년 12월 두 회사가 처음으로 작성한 합의서에는 일반적인 기업 양수도 조건처럼 현대가 사업권, 설비, 인력을 일괄 양도하기로 돼 있다. 현대는 사업양도 대가를 한중의 주식으로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현대 발전설비 부문의 사업가치를 평가하는 과정에 얘기가 달라졌다.
현대측에 따르면 당시 한중은 40여명의 실사단을 현대로 보내 한 달 가까이 현대의 자산과 부채, 사업현황 등을 실사했으나, 인수 희망가격을 제시하지 않은 채 협의를 지연시켰다고 한다. 두산은 두산대로 “당시 현대가 자료제출을 계속 늦추는 등 평가작업에 비협조적이어서 제대로 실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산자부는 이듬해 3월 제3의 평가기관에 사업가치를 평가하게 했으나, 현대가 선정한 평가기관과 한중이 선정한 평가기관의 가치평가금액 차이가 너무 커 합의하지 못했다. 그러자 산자부는 5인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이들이 두 평가기관의 실사자료에 근거해 평가금액을 산출하도록 일임했고, 그 결과 현대의 사업가치는 1500억원으로 평가됐다.
이는 당초 현대가 제시한 장부가의 43% 수준. 현대로선 불만이 없을 수 없었지만, 정부의 압력이 워낙 강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현대와 한중은 계약서 작성을 위한 협상과정에도 거듭 마찰을 빚었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현대 관계자는 “한중은 4000억원에 가까운 최신 설비를 1500억원이라는 헐값에 일괄 인수하면서도 갖가지 보증을 요구하며 무리하게 값을 깎으려 들었다”고 털어놨다.
“한중은 우리가 외환위기 전에 수주해 진행하던 태안 5, 6호기 공사가 환율급등으로 손실을 내게 되자 손실 예상액을 인수가에서 제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현대의 기술 도입선인 미국 웨스팅하우스사(社)의 라이선스까지 보장하라고 했다. 한중은 웨스팅하우스의 라이벌 업체인 GE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있어 현대가 손을 떼면 웨스팅하우스 라이선스 승계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에 따른 손실 예상분까지 물어내라고 떼를 썼다.”
하지만 두산측은 “현대는 태안 5, 6호기 원가가 계약금액의 132%라고 시인하는 등 발전설비 부문이 적자사업인데도 미래 수익가치를 4700억원으로 제시하는 등 상식 밖의 태도로 일관해 협상이 지지부진했다”고 해명했다. 그래서 숨은 ‘거품’을 찾아내는 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현대는 설비를 헐값에 내주는 것은 물론, 한중의 보증 및 손실 보전 요구를 들어줄 경우 1500억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내줘야 할지도 모를 처지가 되자 “사업권만 내주고 설비와 인력은 그대로 갖겠다”고 제안했다. 한중이 원하는 발전설비산업 전용설비는 양도하되 나머지 범용설비와 인력은 선박엔진사업 등에 활용하겠다는 것.
‘수출 방해’ 논란
대신 10년간 발전설비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중이 이 제의를 수용, 현대로부터 13점의 전용설비를 인수했고, 문제의 경업금지 조항이 마련됐다.
현대는 두산이 바로 이 경업금지 조항을 내세워 수출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가 지난해 5월부터 10건의 해외 발전소 공사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두산에 동의를 구했으나, 두산은 “수출을 위해서는 국내에서 발전설비를 제작해야 하는데 이는 명백한 경업금지 조항 위반”이라며 현대의 해외 입찰 참가를 가로막았다는 것. 두산은 자사가 입찰에 참가하지 않는 해외 공사에 대해서도 현대의 참여를 봉쇄했다고 한다.
현대중공업 유정철 해외영업부장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간 하향세를 보이던 세계 발전설비 시장이 1997∼98년에 바닥을 찍고 1999년을 기점으로 ‘U’자를 그리며 상승세로 돌아섰다고 한다. 덕분에 최근 3년 동안 발전설비 시장은 ‘구매자 시장(Buyer’s market)에서 ‘판매자 시장(Seller’s market)’으로 급변했다는 것.
현대의 기술도입사인 웨스팅하우스에도 물량이 밀려들고 있는데, 경업금지 조항 때문에 현대가 이것을 못 가져옴에 따라 웨스팅하우스의 일본 라이선스 업체인 미쓰비시 등으로 일감을 뺏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가 해외시장을 겨냥, 3000억원 이상을 들여 구축한 울산공장 발전설비 라인이 일부 범용설비 외에는 먼지를 쓴 채 방치돼 있다고 한다.
가동을 중단한 현대중공업 울산공장 발전설비 라인이 비닐이 씌워진 채 방치돼있다.
안영근 의원도 “항공우주산업 빅딜로 국내 사업에서 배제된 대한항공이 수출에서 돌파구를 마련, 2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사례가 말해주듯 국내 업체의 수출을 막는 경업금지 조항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두산은 “경업금지 조항이 현대의 수출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현대가 해외 공사를 턴키방식으로 수주한 뒤 국·내외 업체로부터 기기를 납품받는 형태로 아웃소싱을 하면 경업금지 조항과 관계없이(국내에서 제작하지 않으므로) 얼마든지 수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가 요구하는 것처럼 수출용 발전설비의 국내 제작을 허용할 경우 해외시장에서 국내 업체 간 출혈경쟁과 과잉·중복투자, 중복 기술도입을 초래해 외화를 낭비하고 국내 발전설비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게 분명하다는 것. 현대의 요구는 수출을 빌미로 발전설비 빅딜을 파기하려는 ‘모럴 해저드’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다.
또한 두산은 현대의 주장과 달리 현대가 참여하려 한 10건의 해외 프로젝트 입찰에 모두 참여했거나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대는 지난해 7월 두산이 참여하고 있던 브라질의 서모노르테 발전 프로젝트에 참여하려고 시도하다 두산이 항의서한을 보내고 일부 언론에서 문제화하자 서둘러 철회했다고 한다.
해외 발전설비 프로젝트의 경우 발주처별로 하청, 재하청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데다 많은 업체가 복수의 컨소시엄을 형성하기 때문에 입찰참여 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시장 전망도 정반대
한쪽은 어떻게든 사업 재개를 바라고, 다른 한쪽은 기를 쓰고 이를 막는 상황이다보니 두 회사가 내놓는 국제 발전설비시장 전망도 정반대로 나타난다.
두산측은 “세계 경제의 동반 악화로 시장 규모가 줄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세계 유수의 업체들도 사업을 철수하고 있다”고 시장상황을 설명한다.
1990년대 이후 세계적인 규제완화 추세에 따라 환경친화적인 복합화력발전을 중심으로 민자 발전 프로젝트(IPP·Independent Power Project) 개발이 활발해졌으나, 지난해 이후 엔론, 월드컴 등의 부도 및 분식회계 사태, 남미 경제 불안에 따른 투자손실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IPP 붐이 크게 위축됐다고 한다. GE는 복합화력시장이 지난해를 정점으로 2005년까지 50%이상 줄어들 것으로 보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는 것.
석탄화력시장에서도 환경문제 등의 영향으로 최근 3∼4년 간 중국과 인도를 제외하고는 발주가 없는데 그 와중에 포스터휠러, 뱁콕 앤드 윌콕스 같은 업체가 부도를 맞았고, 프랑스 굴지의 알스톰도 보일러사업 부문을 매각대상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의 발전설비 시장인 중국과 가까워 유리할 듯해도 중국은 물량 대부분을 국내에서 소화하고 있어 시장 진입이 쉽지 않은 형편이며, 발전소가 들어설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은 동남아 시장도 최근 지역경제의 침체로 발주가 뜸한 실정이라고 한다. 그나마 동남아 국가에선 일본이 차관공여를 미끼로 던져가며 프로젝트를 따내고 있다는 것.
이처럼 시장 여건이 좋지 않은 마당에 현대가 굳이 사업을 재개하려는 까닭을 알 수 없다는 게 두산의 반응이다.
하지만 현대의 시장분석은 두산과 딴판이다. 1999년부터 3년간 계속돼온 발전설비 호황이 올들어 다소 주춤거리고는 있지만, 시장전망은 여전히 밝다는 것. 지난 20년간 세계 발전설비 시장은 연평균 80GW 규모였는데, 2000년엔 140GW, 지난해엔 175GW 규모로 확대됐다고 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앞으로도 세계시장 규모가 연 150GW선에서 안정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관계자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흡수·합병을 통한 기업 대형화 추세가 가속화하고 있지만, 현대가 파고들 만한 틈새시장은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턴키방식 프로젝트, 가스터빈발전기 제작, 부품 개보수 등이 그것.
현대는 특히 턴키방식 프로젝트 시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데, 턴키방식으로 공사를 수주하면 발전설비 주기기는 물론 각종 전자설비 제작과 건설, 토목공사까지 현대그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두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에라도 그야말로 ‘열쇠만 돌리면(turn-key)’ 바로 가동되는 발전소를 지어올릴 수 있다는 것.
현대는 중국시장도 노려볼 만하다고 자신한다. 국영 전력회사의 비효율이 확대되고 있어 조만간 중국도 IPP 시대로 진입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이 송·배전 전문회사인 한전과 6개 발전 자회사로 나눠지고 발전 자회사들이 민영화를 앞둔 것처럼 중국도 발전회사들이 민영화하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외국 기업에도 적극 문을 열게 되리라는 것이다.
양보없는 공방전 끝에 두 회사는 피차 예민한 부분까지 건드렸다. 상대방의 기술수준을 깎아내리고 나선 것. 현대 관계자의 주장이다.
“가스 터빈발전기를 직접 만들면 세계적으로 기술수준을 인정받는데, 우리는 창업 3년 만에 가스 터빈발전기 완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 웨스팅하우스에 9대를 납품한 바 있다. 하지만 두산은 1대도 못 만들었다. GE로부터 하청받아 엔진 커버, 윤활유 펌프, 호스 등 몇몇 부품이나 만들어 파는 수준이다. 완제품 생산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두산의 기술도입사인 GE는 기술 이전에 극히 인색해 완제품 어셈블리는 좀체 하청업체에 주지 않는다.”
이에 대해 두산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자기들도 가스 터빈발전기를 통째로 만들고 있으나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
“GE는 하청업체가 발전기를 OEM(주문자 상표 부착방식)으로 납품했다는 사실이 고객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얼마전 두산의 발전기 제작공정 사진을 신문에 냈다가 GE로부터 항의를 받았을 정도다. 일본의 히타치도 GE에 발전기를 납품하지만, 그런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기술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누가 발전설비 설계능력을 갖고 있는가다. 우리는 자체 설계기술로 제작하지만, 현대는 남의 도면을 보고 깎아 만드는 수준이다.”
이에 대해 현대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두산이 만들었다고 하는 발전기는 50MW 미만의 소형 GE 구모델을 그대로 본뜬 것인데, 팔리지 않아 오랫 동안 창고에서 잠재웠다. 발전기 제작은 그걸로 끝이고, 그후엔 폐열 보일러 정도나 만들었다.
두산에 자체 설계능력이 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가령 국내에서 발전설비 입찰이 있으면 여러 조건에 맞는 설계를 들고 들어가 한전으로부터 기술평가를 받는데, 두산은 한전이 그때그때 요구하는 설계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 GE의 자문을 얻은 후 다음날에야 설계를 들고 왔다.”
밸런싱 테스터(balancing tester)라는 장비가 있다. 무게가 200t에 이르는 발전기가 1분당 3600회전을 하려면 정확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중심이 어긋나 이게 튕겨나가기라도 하면 6m 두께의 콘크리트 벽을 뚫고 나가는 대형 사고가 터진다. 밸런싱은 자동차로 치면 휠 얼라인먼트에 해당하는 작업인데, 두산은 1996년 국내 최초로 밸런싱 테스터를 설치한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얘기는 다르다. “두산은 우리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밸런싱 테스터를 도입한다고 하자 그제서야 부리나케 서두른 끝에 우리보다 몇 달 먼저 설치했다. 그 전까지는 창원공장에서 만든 발전기를 미국까지 싣고 가서 중심을 잡아왔다. 이렇게 하는 데는 석 달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 때문에 납기가 지연되는 것은 물론, 비용상승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두산이 밸런싱 테스터 살 돈 300억원이 없어 그 짓을 했겠나. 그때껏 무경쟁 공기업이다보니 그만큼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했다는 얘기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
현대는 발전설비사업 복귀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부의 강압에 밀려 부당하게 빼앗긴 것인만큼 반드시 되찾고 말겠다”는 것.
1998년 당시 금융기관 차입 규모가 컸던 현대중공업은 정부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만기가 도래한 차입금의 연장 중단 및 상환조치 등의 금융제재를 받을 것이 뻔해 빅딜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발전설비가 일원화 대상업종으로 선정된 후 협상 초기부터 최종 계약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협상을 주도했으며, 심지어 양수도 계약서까지 직접 기안할 정도로 간섭하고 압력을 가했다는 게 현대측의 주장이다.
현대는 “아직 최고경영진이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면 법적 조치도 불사해 사업을 되찾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더욱이 두산중공업은 현대와 무관한 회사가 아니다. 두산중공업의 전신은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인 정인영(鄭仁永) 한라그룹 명예회장이 1962년 현대에서 독립해 세운 현대양행. 정인영 회장은 1976년 ‘중공업 입국’의 기치를 내걸고 무역회사이던 현대양행의 사업을 중공업으로 확장하기 위해 창원에 대규모 기계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1979년 현대양행은 현대그룹으로 넘어갔고, 1980년 신군부의 중화학투자조정조치에 의해 현대양행 창원공장은 대우의 옥포기계공단과 합병돼 대우그룹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이 공장이 적자를 면치 못하자 11월에는 산업은행이 경영권을 인수해 한국중공업으로 변신했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양행을 강탈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세상을 뜰 때까지도 한국중공업을 ‘창원중공업’이라 불렀고, 1998년 한중과 현대의 발전설비 빅딜이 결정되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울산공장에 한중 깃발이 나뿌끼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아직도 현대에는 현대양행에 이어 현대중공업 발전설비도 빼앗겼다고 여기는 정서가 강하다. ‘복귀 의지’의 배경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두산은 “현대가 빅딜 당시 LG반도체, 기아자동차, 한화정유 등을 인수하고, 석유화학과 철도차량 부문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비주력사업인 발전설비를 포기해놓고 이제 와서 ‘강제로 뺏겼으니 되찾겠다’고 하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다. 계약 파기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며 수성(守城) 의지를 다지고 있다.
‘울창대전(蔚昌大戰)’ 제1막은 이렇게 올랐다. 시장(市場)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