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업이익률 세계 상위, 신흥시장 개척에도 성공한 한국 재벌
- 부채비율은 1996∼97년에만 높았다
- GM과 IBM 같은 거대기업 따돌리는 길은 기업집단체제 유지
- 신자유주의자는 막연한 교과서 추종자, 진보진영은 만성적 재벌 혐오자
- 소액주주운동은 상법 무시한 처사
- 계열사간 내부거래 허용하고 부채비율 200% 기준 철폐해야
지난 7년 동안 재벌개혁 조치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 기업 성장성이 떨어지고 경제성장률도 둔화되고 있다.
이들은 재벌들이 수익성을 무시한 채 무분별하게 과잉투자를 하다가 금융위기가 초래됐다고 주장한다. 금융위기의 원인이 기업 오너들이 다른 주주들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벌은 금융위기의 주범이 됐고, 재벌 비판의 축은 불공정 경쟁에서 비효율성과 비민주성으로 바뀌었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 정부의 정책은 이러한 3자 연대의 주장과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부채비율 200% 이내로 축소, 비주력 계열사 매각,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운영, 결합 재무제표 작성 같은 급진적 개혁조치들이 ‘경제 건전성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집행됐다. 현 노무현 정부도 재벌 소유 금융기관의 의결권 제한, 증권 집단소송제 도입 등 재벌에 대한 공세적 개혁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反재벌 3자 연대’
지난 7년 동안 재벌개혁 조치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난 뒤 한국경제의 성적표를 보자. 재벌이 소수 주주를 무시하던 과거의 관행에는 제동이 걸렸다. 상장기업들의 수익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기업들은 주가 유지와 경영권 방어에 급급해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2001년 이후 상장기업들이 증권시장에서 조달한 자금보다 배당, 자사주 매입으로 증시로 빠져나간 돈이 두 배가 넘는다. 기업의 성장성은 크게 떨어졌고 따라서 전반적인 경제성장률도 크게 둔화되고 있다.
이렇게 부작용이 나타난 원인은 재벌개혁의 기반이던 비효율성과 비민주성에 대한 비판이 재벌의 긍정적인 측면까지 없애버린 데 있다. 비효율성 논의는 국내외 재벌 비판론자들이 자료를 선택적으로 인용하면서 과장된 측면이 크다. 재벌의 공과(功過)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피지 않고 금융위기 당시의 문제만으로 재벌의 실패를 부각시킨 측면도 있다. 비민주성 논의는 정치 민주주의 논리를 상법에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느낌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기업을 그룹식으로 운영할 때 내부자와 외부자 사이에 이해갈등이 상존한다는 사실인데, 이 문제가 기업경영의 민주성 문제로 변질, 정치화했다.
비효율성 문제를 살펴보자. 한국 기업의 효율성 여부는 어떤 이익률 개념을 적용하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를 평가하는 데 국내외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된, 클래슨스(Claessens) 같은 세계은행 연구자가 작성한 보고서는 자산수익률(ROA· Returns On Assets)을 사용했다. 자산수익률을 구할 때 분자로 사용되는 이익은 순이익, 즉 경상이익에서 세금을 뺀 이익이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자산수익률은 46개 표본 국가 중에서 44위다. 세금을 제외하기 이전의 이익률인 경상이익률로 보더라도 한국 기업들의 평균 수익률(2.1%)은 미국(4.2%), 일본(3.3%), 대만(4.5%)에 비해 훨씬 낮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의 실력을 영업이익률로 따져보면 국제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영업이익은 이자, 환차손 등 금융비용을 빼기 전 이익이다. 한국 제조업체들은 1988∼97년 기간에 평균 7%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해 미국(6.6%), 일본(3.3%), 대만(6.5%)보다 높은 수익률을 유지했다. 금융위기 이후 재벌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들은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이 높은 영업이익률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무시한 채 낮은 순이익률이나 경상이익률을 집중 부각시켰다.
필자는 순이익률이나 경상이익률보다 영업이익률이 기업의 효율성을 살피는 데 더 나은 지표라고 생각한다. 경상이익률이나 순이익률은 사업의 효율성보다는 자금조달 방식에 따라 크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에 의존해 자본을 조달한 기업들은 이자 지불비용이 적어 경상이익률과 영업이익률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반면 금융기관 차입에 의존해 자본을 조달한 기업들은 이자비용을 지불해야 하므로 영업이익률과 경상이익률의 격차가 크다. 한국 기업들의 경상이익률이나 순이익률이 낮은 것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유지했음에도 금융비용 부담률 또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전 한국 기업들에서 나타난 현상은 영업이익률은 유지되는데 경상이익률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제조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은 1990~95년 평균 7.1%였는데, 1996~97년에는 7.3%로 오히려 소폭 상승했다. 그러나 경상이익률은 1990~95년간 평균 2.3%였는데, 1996년에 1.0%, 1997년엔 마이너스 0.3%로 급락했다. 이자와 같은 금융비용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금융위기 이전 한국 기업들의 수익률 관련 지표를 종합적으로 보면, 한국 기업부문의 핵심 문제는 사업의 효율성이 아니라 차입금 및 금융비용 관리에 있었다. 이는 재벌의 영업에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재벌의 또 다른 구조적 문제라는 고(高)부채비율은 어떤가. 한국 정부와 IMF(국제통화기금)는 높은 부채비율이 구조적 문제라며 금융위기 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재벌에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도록 강요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구조적 문제가 아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한국 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이 유달리 높았다고 하기 어렵다. 세계은행이 1980∼91년 기간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369%), 프랑스 (361%), 이탈리아(307%)의 기업 부채비율은 한국(366%)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스웨덴(555%), 노르웨이(538%), 핀란드(492%)는 한국보다 높은 500% 안팎에 달했다(1970년대 일본의 기업 부채비율은 500% 수준이었다).
1990년대의 추세를 보더라도 한국 기업의 부채비율이 구조적으로 악화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1990~95년 동안의 부채비율은 과거 수준에 머물렀다. 이 때에는 금융위기가 없었다. 그러나 1996~97년에 급격히 높아졌다. 따라서 금융위기의 원인을 구조적 부채비율에 돌리기보다는 1990년대 중반에 부채비율이 왜 과거 평균보다 갑자기 높아졌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세계화의 도전과 그에 대한 국가의 체제적 대응 실패다. 재벌의 비효율성을 강조하는 논자들은 재벌체제의 취약성과 비효율성이 세계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화의 도전은 이보다 훨씬 복잡했다.
소련 정부 설득한 현대그룹 협상력
시장개방에 따라 재벌이 국내시장에서 격화된 경쟁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다른 나라들, 특히 신흥시장에 새로 진입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재벌의 대응은 대우그룹 슬로건으로 유명해진 ‘세계경영’으로 요약된다. 국내시장을 지키기 위해 국내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 기회를 포착하려 해외에도 과감하게 투자해 본격적인 다국적기업으로 부상하려는 것이다. 이 시도는 당연히 재벌의 경영능력에 부담을 줬고 금융 위험도 증대시켰다.
그렇지만 한국의 재벌은 1970~80년대의 성공으로 위험부담을 짊어지고 새로운 투자를 전개하는 데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쌓았다. 재벌이 정부의 보조와 지원을 많이 받아왔음에도 1990년대 들어서 ‘경제자율화’를 강력히 주장하며 정부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도 이러한 자신감의 발로다.
특히 신흥시장을 개척하는 데에는 재벌 구조가 유리한 측면이 있다. 단일 품목을 생산하는 독립 기업이 신흥시장에 투자하기는 매우 어렵다. 현지에 전후방 연관산업이 발전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재벌은 신흥시장의 정부나 기업들과 다양한 ‘패키지 거래’를 할 수 있다. 가령 자동차 공장을 지을 때 전방산업인 기계사업과 제철사업 관련 계열사를 함께 진출시킬 수 있다. 또 제품을 많이 팔기 위해 계열금융사를 활용해 소비자금융을 제공할 수도 있다. 재벌의 다각화된 구조는 개발도상국에 시장을 창출하면서 진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개별 기업보다 더 많은 이점을 갖고 있다.
필자는 1989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한·소 경제협력사절단의 일원으로 구소련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소련에 대한 현대그룹의 협상력이 제너럴 모터스(GM)나 IBM 같은 세계 유수의 대기업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느꼈다. 당시 소련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소비재였다. 그러나 소비재를 수입할 외화가 없었다. 현대그룹은 현대종합상사를 통해 소련에 소비재를 공급해주고, 외화를 받는 대신 현대건설을 통해 소련의 건설공사를 따내거나 현대종합상사가 소련의 천연자원개발에 참여하는 협상을 진행했다. 그룹 구조를 갖고 있기에 가능한 거래였다. GM과 같은 기업은 아무리 규모가 커도 단일기업이라는 단점 때문에 그런 거래를 할 수 없었다.
이런 강점 덕분에 한국은 199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뿐 아니라 전세계의 여러 개발도상국과 체제이행국(인도네시아, 베트남,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큰 투자국이었다. 한국 기업의 대(對)선진국 투자는 매출증가에도 저수익률 혹은 순손실을 보인 반면 신흥시장 투자는 괜찮은 수익률을 유지하면서 매출도 급증했다. 그러나 1997년 초부터 시작된 동남아 금융위기는 한국 재벌이 신흥시장에서 과감하게 벌인 사업들이 쉽게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인식을 투자자들에게 심어줌으로써 한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게 만들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5대 그룹 구조조정에서 빅딜대상으로 확정된 삼성자동차 직원의 표정이 어둡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재벌은 금융 세계화의 어두운 면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했다. 국제금융시장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것은 언제든지 돈을 빼내갈 용의가 있는 외국투자자들을 상대해야 함을 의미했다. 1997년 초 태국이 외환위기 조짐을 보이기 전까지는 전세계에 세계화의 긍정적인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남아가 금융위기에 휩싸이면서 세계화 투자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졌다. 한국 재벌의 공격적 투자 또한 회의적인 시각에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은 확장의 기회와 금융위험 증대가 뒤섞인 혼합된 축복의 시기였다. 하지만 재벌은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고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금융위험이 뒤따를 가능성에 대비하는 데 실패했다.
실체 없는 ‘주주 민주주의’ 논자들
금융위기가 불거지면 재벌식의 기업집단 구조는 더 큰 위험에 휩싸일 수 있다. 계열사들이 지급보증, 순환출자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일부 계열사가 위험에 처하면 그들과 얽혀 있는 다른 우량 계열사까지 금융위험에 함께 노출된다. 금융위기 이후 재벌개혁은 이러한 금융위험의 고리를 단절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계열사 지급보증 금지, 부당 내부거래 제재 강화 조치는 이러한 목적으로 도입됐다.
그러나 계열사간 연결고리를 끊어 놓으면 기업집단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기능도 함께 없어진다. 기업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것은 이러한 연결고리를 이용하면 사업 확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단 같은 돈을 갖고 새로운 기업을 만드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 독립기업을 세운다면 설립자금을 완전히 별도로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집단의 계열사로 설립하면 현물출자, 은행차입 등을 통해 초기 투자자본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또 새로운 회사가 발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자원을 훨씬 쉽게 공급할 수 있다. 이 계열사가 만약 독립기업이라면 필요한 자원을 시장에서 구입해야 한다. 신생기업이기 때문에 높은 가격을 지불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필요한 자원을 아예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룹의 계열사라면 그룹으로부터 직접 보조(현금지급, 추가출자, 제품고가매입, 생산요소 저가공급), 대출, 차입보증 같은 금융지원을 받을 수 있다. 계열사에서 개발된 기술, 숙련 엔지니어, 영업능력 등도 값싸게 사용할 수 있다. 경영능력도 지원받을 수 있다. 새로운 경영자를 구할 필요 없이 계열사 사장을 보내거나 회장실에서 신규사업을 총괄할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이 경제 기적을 이루는 데에는 이러한 그룹구조 활용이 큰 몫을 해냈다. 세계 최대 메모리업체 삼성전자의 사례를 보자. 삼성반도체통신의 누적적자는 1982년 출범부터 1986년까지 약 2000억원이었다. 1986년 삼성그룹 전체의 경상이익 1200억원을 훨씬 상회하는 액수다. 현재 국내에서 적용되는 기준으로 본다면 벌써 부도 처리됐어야 한다.
그렇지만 당시 국내 금융기관이건 해외 투자자건 삼성반도체가 부도날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성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건설이 공장을 계속 헐값으로 지어주고, 삼성물산이 장비공급을 대행할 뿐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삼성전자 가전사업부에서 지속적으로 기술 및 금융지원을 해줬다. 이 같은 계열사 지원에 힘입어 삼성반도체는 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1980년대에 줄곧 매출액의 50% 이상을 투자했다.
소액주주들은 이질적인 집단
금융위기 이후에는 재벌구조가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거나 경제 확장을 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해온 사실은 무시됐다. 재벌구조로 인해 금융위기가 확대됐다는 측면만 강조되면서 재벌의 선단식 경영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시행됐다. 과거에도 선단식 경영의 부정적인 측면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이를 아예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도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금융위기 이후에는 비효율성 논의가 집중 부각되고 여기에 비민주성 논의까지 가세하면서 재벌 구조개혁이 급진전됐다.
비효율성 논의의 경제적 기반이 약하다면 재벌 비판론자들이 내세운 ‘경제민주화’ 혹은 ‘주주 민주주의’는 실체가 없다. 이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사용된 측면이 많다.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개인에게 주권이 있다는 전제 아래 개인의 의사가 정치활동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1인1표 원칙이 공정한 민주주의 규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주식회사는 개인의 동등한 주권이라는 개념 위에 만들어져 있지 않다. 1인1표가 아니라 ‘1주(株)1표’의 원칙이 적용될 뿐이다. 또 주식을 보유하는 주체로는 개인(자연인)뿐만 아니라 법인도 포함된다. 그러나 주주 민주주의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상법과 주식회사 제도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다.
국내 소액주주운동의 대표주자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총수 개인의 지분은 소량에 불과하고 절대지분을 일반 소액주주들이 소유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총수들은 계열사간의 상호출자를 이용하여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소액주주들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나 절대다수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어 바로 기업의 주인이다.” (‘한국재벌개혁론’에서)
공정거래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2004년 4월 현재 36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의 주식은 총수 및 가족 지분 4.61%, 계열사 및 관련 지분 44.47%, 소액주주 지분 50.91%로 구성되어 있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오너가족 지분 5%, 계열사 지분 45%, 소액주주 지분 50%라고 가정하자. 소액주주 운동가들은 기업집단이 계열사간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개별 계열사들의 지분을 다시 개인 지분과 법인 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순수법인이 갖고 있는 지분은 실질적인 소유권을 따질 때 제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주장에 따를 경우 45%의 계열사 지분은 ‘의제자본’ 혹은 ‘가공자본’이 된다. 따라서 소액주주들이 50%의 절대다수 지분을 보유하는 주인인데도 소수 주주인 오너가족들이 5% 지분만으로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구조를 구축한 것이 된다.
이러한 주장은 상법에 규정된 법인의 주식소유권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오로지 개인들의 주식소유권만이 ‘궁극적으로’ 정당하고 법인의 지분은 개인지분으로 환원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민주주의에서 투표권이 개인에게만 있다는 논리를 은연중에 원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인의 주식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법인의 투자활동에 큰 제약이 생긴다. 지주회사도 만들 수 없다. 금융기관들이 고객의 돈을 투자할 수도 없다. 그동안 주식회사 제도가 발전해온 기반을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
주주 민주주의론자들은 또 소액주주들이 마치 동질적인 집단인 것처럼 취급한다. 그래서 소액주주 지분을 단순히 더해서 실질적으로는 소액주주가 최대주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액주주들은 이질적인 집단이다. 여기에는 거대 기관투자가들도 포함된다. 계열사가 아닌 다른 회사들이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취득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개인들도 있다. 재벌 계열사의 주식 보유를 ‘가공자본’으로 취급하고 지배권을 개인 지분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주 민주주의론자들의 계산 방식이 일반적인 원리로 채택되려면 소액주주들 중 법인 보유 지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개인들의 궁극적 지분을 계산해야 한다.
예를 들어 50%의 소액주주 지분 중 30%가 펀드A의 지분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펀드에 투자한 개인이 10명이라고 할 때 각 개인이 3%씩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기관투자자의 투자방식을 살펴보면 이러한 계산방식이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기관들이 원금만 갖고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금융기법을 사용해서 원금 이상의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헤지펀드들은 1만% 이상의 높은 레버리지(부채비율)를 사용해서 투자하기도 한다.
敵의 敵은 친구?
만약 펀드A가 10% 지분은 원금을 이용해서 매입했고, 20% 지분은 빌린 돈으로 매입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펀드A가 소유하고 있는 ‘궁극적인’ 지분은 개인들의 실질 지분에 해당하는 1%로 줄어들어야 한다. 부채는 개인 이름으로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펀드 이름으로 조달해 펀드가 파산한다 하더라도 개인투자자는 부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부채로 획득한 투자지분에 대해 개인이 궁극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개인의 궁극적인 지분에만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를 적용하면 기관들의 레버리지 활용도에 따라 기업의 지배권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해야 한다. 상법은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개인과 법인의 소유권을 똑같이 인정한다. 부채를 활용했건 상호출자를 활용했건 해당기업의 주식을 소유한 개인과 법인을 동등한 주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상법에 개인의 주권(主權)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는 없다. 상법에 맞게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을 놓고 ‘비민주적’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재벌의 ‘비민주성’을 둘러싼 논쟁은 실질적으로는 기업집단에서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에 벌어지는 경제 갈등이 정치적 용어를 통해 발현된 것이다. 내부인과 외부인은 주식을 보유하는 목표가 서로 다르다. 외부인은 기업집단 전체의 성장이나 수익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보유한 회사만이 관심대상이다. 반면 내부인은 기업집단 전체에 관심을 둔다. 사업을 확장하려고 할 때 현재 수익성 높은 기업을 통해 신규 사업을 보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기업에 투자한 외부인들이 반대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재벌 비판론자들은 재벌이 이렇게 계열사 보조를 통해 잘나가는 기업의 수익률을 떨어뜨리는 것을 ‘비합리적’ 경영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내부인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기업집단의 평균수익률을 떨어뜨릴 유인이 있다. 따라서 기업집단 운영에서 나타나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갈등은 서로 다른 합리성의 대결로 인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에는 ‘외국인 투자자-국내 신자유주의자-진보세력’의 3자연대가 형성되면서 외부인의 목소리가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돌이켜보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재벌을 대폭적으로 구조조정할 경우 자산을 헐값에 매입하거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각종 이권을 챙길 수 있으리라는 상업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에 비해 국내의 반(反)재벌 진영은 자신들에게 떨어질 경제적 이득이 무엇이 될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재벌개혁을 밀어붙인 듯하다. 신자유주의 진영은 개별기업 단위로 사업을 하도록 만드는 교과서적인 개혁이 경제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 것으로 막연히 기대한 것 같다.
기업집단은 세계적인 현상
노사갈등을 한국사회의 가장 큰 갈등구조로 보는 사회주의적 시각이 강한 진보진영은 재벌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한 과거의 관성에 따라 재벌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 같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이 현단계 개혁의 선결과제”라는 말이 진보진영 인사들의 입을 통해 나올 정도로 신자유주의세력과 보조를 같이했다. 일부 노동세력은 재벌을 해체할 경우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더 줄어든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재벌 해체를 금융위기 타개책으로 내걸었다. 공통의 이해관계는 없지만 ‘적(敵)의 적(敵)은 친구’라는 국제정치의 고전적 명제가 반(反)재벌연대 형성에 적용됐다.
그러나 재벌문제는 어느 한 편에 서기보다 재벌구조의 장점을 어떻게 살리고 단점을 어떻게 보완하며 이해당사간 갈등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 정치적인 고려를 떠나 경제적으로 접근할 때 재벌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법을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한다.
우선 기업집단의 확장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갈등은 내부거래를 금지하기보다 내부거래를 허용하되 주주들이 합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쪽으로 푸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부거래는 개별기업의 수익률은 일부 희생하더라도 새로운 유망 산업을 키우고 그룹의 전반적인 확장을 통해 경제성장 속도를 높이는 순기능을 갖고 있다. 정부가 경제성장률 높이기를 바라면서 이를 정책적으로 막아야 할 이유는 없다.
외국의 경쟁사들도 이 기능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기업집단은 경제활동의 핵심적인 조직이다. 국내기업에만 개별기업단위로 영업하라고 질곡을 씌우는 것은 공정한 일이 아니다. 또 모든 내부거래가 소액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계열사간 거래를 통해 주가가 더 빨리 올라갈 것이 기대될 때 소액주주들이 내부거래를 찬성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정부가 내부거래를 금지하면 오히려 소액주주의 권리를 침해하게 된다.
한 가지 해결방안은 투명성 확보 및 감사기능 강화를 통한 방식이다. 기업집단은 그룹식으로 운영함에 따라 외부 주주들에게 손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명확히 하고 내부거래의 기준·한도 등을 미리 밝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외부 투자자들은 처음부터 그 위험을 확인하고 주식을 살 수 있다. 또 처음에 공표했던 내부거래 한도보다 더 큰 규모의 내부거래가 필요할 경우에는 이사회의 승인을 거치게 하는 규제를 도입할 수 있다. 물론 내부인들이 그룹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사리사욕이나 다른 목적을 위해 거래하면 징벌할 수 있도록 투명성과 감사기능이 확보돼야 한다. 이러한 투명성 및 감사기능은 기업집단이건 개별기업이건 중요한 일이다.
금융위기 이후 재벌의 ‘비효율성’에 대한 편향된 논리가 지배하면서 도입된 지나친 규제들에 대해서는 손질을 해야 한다. 특히 부채비율에 대한 금융규제는 대폭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것이 좋다. 고부채비율이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는 논리적, 실증적 근거는 매우 빈약하고 특히 현재 국내에서 집행되고 있는 부채비율 200% 기준은 처음 도입할 당시부터 정부가 합리화하지 못한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중소기업과의 불공정경쟁 문제는 재벌과 중소기업의 관계를 단순히 경쟁관계로 이해하는 한 해결하기 어렵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긴밀하게 협동하기도 한다. 중소기업의 사업은 대개 재벌 계열사인 대기업의 하청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계적으로 경쟁이 격화되고 재벌은 자사 제품의 질을 향상시켜야 하기 때문에 좋은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능력 있는 중소기업이 광범하게 존재해야 한다. 중소기업 관련 정책은 재벌의 확장능력을 억제하기보다 재벌기업과 중소기업의 연계를 강화하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