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호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구성(composition)의 오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3-11-19 17:0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인생에선 많은 집단과 연계를 맺게 된다.
    • 우리가 속한 집단마다 역사가 있으니 그만큼 우리 인생의 역사는 겹겹이 쌓이는 것이다.
    • 이런 중첩성 때문에 역사를 구성할 때 종종 오류가 발생한다.
    나를 둘러싼 역사들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영화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들이 백제 군사들에게 욕을 하고 있다. 쌍방 군사들이 욕을 해서 승부를 겨루는 장면의 일부다. 나는 이럴 수 없었다고 짐작한다. 아마 서로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전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학생이기도 하고,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고, 절이나 교회의 신자이기도 하고, 전라북도 도민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배운 ‘국사’ 속 ‘국민’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복수(複數)의 역사를 산다. 뭔가의 집단에 속한 복수의 역사. 떠오르는 대로 그 집단의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집단 : 공동체, 문명,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공동사회)

    -사회집단 : 환경단체, 인권연대, 게젤샤프트(Gesellschaft·이익사회, 즉 계급, 계층, 카스트 등)

    -정치집단 : 민족, 국가, 왕국, 공화국, 정당, 정파, 의회



    -경제집단 : 회사, 소비조합, 투자집단, 컨소시엄, 상인회, 농장, 플랜테이션

    -종교집단 : 교회, 절, 사원

    -교육집단 :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 학생회, 교수회

    -친족집단 : 가족, 종친회, 부족

    -거주집단 : 동, 면, 군, 도, 시

    -직업집단 : 직업, 길드, 기능

    -군사집단 : 군대, 향군회

    -자발집단 : 촛불집회, 밴드, 클럽, 취미집단

    물론 이는 특정 기준을 가지고 나눈 분류라기보다 필자가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본 분류에 불과하다. 이처럼 잠깐만 훑어봐도 우리 인생은 많은 집단과 연계돼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집단마다 역사가 있으니 그만큼 우리 인생의 역사는 겹겹이 쌓이고, 이런 중첩성 때문에 역사를 구성할 때 종종 구성(composition)의 오류가 발생한다. 각 집단의 성격을 혼동하는가 하면, 중첩성을 단순하게 처리하다가 오류를 내기도 한다. 해당 집단과 그에 속한 개체인 인간을 혼동하기도 한다.

    대구, 마산이 얼마나 다른데!

    요즘 ‘응답하라 1994’라는 TV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사는 부부(경상도 아내+전라도 남편) 집에 빙그레(충북 옥천 출신), 해태(전남 순천 출신), 삼천포(경남 삼천포 출신), 칠봉이(서울 토박이) 등의 별명을 가진 하숙생이 모여 산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각 지역 언어의 맛깔스러움을 전한다. 서로 말을 못 알아듣는 일도 다반사다.

    나도 그랬다. 나는 충남 천안 출신이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정서는 외할머니 댁에서 만들어졌다. 언어도 그렇다. 방학해서 내려가면 곧장 말투가 바뀐다. 동네 어른을 만나면 “진지 잡쉈슈?” 소리가 절로 나오고, “네”라는 대답 대신 “야~”라는 충청도 말이 나온다.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올해 1월 1일 대전에서 홍성군 홍북면 ‘내포 신도시’로 이전한 충남도청 청사. 4개 건물은 한성, 웅진, 사비 등 과거 3개 백제 도읍지와 현재의 도청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공주는 대전에 도청을 ‘빼앗겼다.’ 현재 충남도청은 홍성에 있지만, 대전과 공주의 규모는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와서 부산, 마산 친구들을 만났다. 솔직히 나, 그들 대화 거의 못 알아들었다. 경상도 말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대구, 부산, 마산 말이 똑같다고 하자, 친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처구니없다면서, 예의 그 경상도 억양으로 말했다. “대구 말, 마산 말이 얼매나 다른데~.”

    예전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삼국시대를 묘사할 때, 고구려에 간 신라 사신이 외교 담판을 벌이면서 통역자를 대동하는 장면이 있었다. 난 그게 그 당시 현실이었다고 믿는다. 매스컴이 없고 표준어 개념도 없었기에 지금보다 서로의 언어를 훨씬 접하기 어려웠을 그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사신이 오갈 때 통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충청도 양반’의 오류

    친구들 말이 옳았다. 부산, 마산이 다르고 순천, 광주가 다르다. 경상도, 전라도에 속해 있다고 다 같을 순 없다. 나는 경상도 지역의 언어가 모두 같다고 오해했다. 경상도를 하나의 동일성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집단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를 가지고 그 집단의 성원 역시 그럴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을 ‘배분(할당)의 오류’라고 한다. 역으로 어떤 집단의 일부분 또는 개체가 갖는 속성을 가지고 집단 전체의 속성을 추론하는 오류를 ‘구성의 오류’라고 한다.

    필자의 고향이 충청도라고 밝혔으니 충청도 양반 얘기를 해보겠다. 충청도엔 양반이란 말이 따라다닌다. 점잖다는 의미도, 느리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충청도라고 다 같은 충청도가 아니다. 천안은 직산, 평택으로 이어지는 육로 교통의 요지다. 임금이 온양 온천에 갈 때도 천안을 거쳤다. 반면 아산은 해안지역과 교섭한다. 당진, 안면도와 가깝다. 예산, 홍성 등의 내포 지역은 해안 지역과 연계되기도 하지만, 독립적인 경제권,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서천, 한산은 또 어떤가. 여기는 장항을 거쳐 전북 군산과 연계되던 지역이다.

    뜨는 해, 지는 해

    같은 충청도(충청남도)지만 정말 다른 곳이 공주와 대전이다. 본래 대전은 대전천(大田川)이 자주 범람해 취락지가 별로 없던 곳이었다. 1904년 경부철도가 부설되면서 대전은 신흥 상업도시의 면모를 띠게 됐다. 반면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지 않던 공주와 강경은 도시의 모습을 급속히 상실해갔다.

    이는 화물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전역에 입하된 화물의 대종은 신탄진, 옥천, 논산, 무주, 보은, 공주, 문의 등지에서 들어온 미곡이었지만, 미곡 이외에 마포, 생선, 소금 등도 소달구지나 지게에 실려 무수히 들어왔다. 예전엔 금강 수계를 통해 공주나 강경으로 모이던 화물이 철도를 통해 대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밀집지역에 특별히 설치했던 면(面)으로 대전면을 신설했다. 또한 대규모 치수 공사를 전개해 1912년 목척교, 1922년 대전교를 완성했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한 천안, 논산 등의 성장에 따라 공주는 중심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갔다. 1915년 대전면과 공주면의 인구를 보면 공주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1932년 무렵 대전 인구는 공주의 세 배를 넘어섰다. ‘백제 고도(古都)’만이 공주의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치열한 유치 경쟁 끝에 1932년 10월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옮겨지면서 대전과 공주의 승부는 완전히 갈렸다. 대전 거주 일본인들은 요로에 진정하고 로비 활동을 벌였다. 일본인들은 유지 단체를 구성했는데, 호남선기성회, 중학교설치기성회, 금강수력전기기성회, 대전번영회, 대전도시계획위원회, 도청이전촉진회 등이 그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무슨 일을 했을지 짐작되는 이들 유지 조직을 통해 대전은 중부권 중심 도시로 거듭났다(지수걸,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들’, 공주문화원, 1999, 116~124쪽).

    ‘그쪽 사람들 다 그렇지 않나?’

    이것과 형제쯤 되는 오류가 있다. 그 집단의 일반적 성격을 쏙 빼놓고 어떤 특별한 성격만 가지고 해당 집단을 개념화하는 경향이다. 만일 앞서 필자가 공주와 대전의 차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충청도라는 유(類) 개념이 갖는 ‘어떤 일반성’을 무시했다면 ‘구별 불능의 오류(the fallacy of difference)’ A형에 속한다.

    서양사에서는 퓨리턴(Puritans)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이 A형 오류가 보인다. 퓨리턴 신학의 작은 부분인 캘비니즘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퓨리턴’이다. 그러나 퓨리턴의 대부분은 일반적 의미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도들을 말한다. 그런데도 퓨리터니즘이라는 말은 종종 특별한 의미의 퓨리턴으로만 쓰이곤 한다.

    ‘구별 불능의 오류’ B형도 있다. 어떤 집단에 대해 판단할 때, 그 집단에만 특별한 것이 아닌데도, 그 집단의 성질이라 판단하고 탓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남성 중심적이거나 권위적인 어떤 남자 탓에 경상도 남자들은 다 그런 취급을 당한다. 주먹질하는 어떤 사람 탓에 전라도 사람들은 조직폭력배로 오해받는다. TV에 가정부로 자주 등장하는 탓에 충청도 처녀들은 가정부로 오해받는다. 통상 이런 잘못은 경멸적인 판단에서 자주 나타난다.

    남도 나 같겠지!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땅을 팔라는 프랭클린 미 대통령의 요구에 ‘하느님의 답변’으로 대신한 시애틀 추장.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그 시애틀이 된 추장. 미국 정부가 인디언을 보호구역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과연 둘 중 누가 인류의 미래로 남을까.

    ‘종족 동일시의 오류(the fallacy of ethnomorphism)’와 ‘자민족중심(自民族中心)의 오류(the fallacy of ethnocentrism)’는 동전의 양면 같은 오류다. 사해동포주의의 오류는 ‘모두 나 같겠지’라는 선입관에 기초한다. 역사 서술에서 자신의 잣대로 다른 세계나 사태를 판단하는 오류는 도덕적 판단만이 아니라 행위를 이해하는 데도 나타난다.

    나 어릴 때 ‘주말의 명화’에서는 백인 기병대가 잔악한 인디언을 용감하게 무찔러 이겼다. 그러나 이젠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누가 선한 사람들이고 침략자였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세상이 됐다. 아메리카에 에스파냐와 앵글로색슨이 도착한 이래 살육의 역사라는 말마저 식상할 정도로 인디언들은 도륙당하고 추방됐다. 미국이 세워진 뒤 미국 정부와 인디언 사이에 맺은 조약 400여 건 중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가운데 오늘의 주제에 해당되는 사례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1854년 무렵, 추장 시애틀이 이끄는 인디언은 쫓기다 못해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때 ‘미국 추장’이던 14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인디언들에게 땅을 팔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시애틀 추장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백인 대추장은 우리 땅을 사고 싶다고 제의하며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형제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들은 우리 형제들이다. 바위산, 풀잎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이 편지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해제된 고문서 중에서 발견됐다. 지금은 인터넷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고, 21세기 초입에서 아슬아슬한 근대문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통찰과 비전을 주고 있다.

    백인 추장 프랭클린 대통령은 자기들 방식대로 땅을 팔라고 요구했다. 땅은 재화, 상품이고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유와 생활양식에서 나온 요구였다. 그러나 인디언은 달랐다. ‘신대륙’을 차지하려고 온 이방인들에게 인디언은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大地)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 뜻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다. 프랭클린은 다 자기들 방식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내가 중심이다?

    프랭클린에게 자본주의가 모델이었다면, 랑케에겐 프로이센 왕정이 모델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앵글로-아메리칸, 서유럽의 문화가 문화 규범이다. 마이클 잭슨마저 흰 얼굴을 갖고 싶게 했고, 한국의 처자들은 성형외과에서 코를 세우고 턱을 깎는다.

    ‘자민족중심의 오류’는 종종 ‘동일시의 오류’가 갖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자기 집단이 다른 집단에 끼치는 작용을 과장한다. 원래 인간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니까, 이런 현상은 오류 이전에 자연스러운 상태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런 오류를 유지할 수 있는 군사력이나 선교의 명분 등을 가지고 있을 때는 더욱 자연스럽게 보일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 오류는 절묘하게 엘리트주의와 결합한다. 엘리트주의는 인간 집단을 상위 계층이나 그들의 사상을 통해 개념화하는 데서 출발해, 사회들을 대표 사회로(대문자 사회, 즉 Society), 문화들을 대표 문화로, 윤리들을 대표 윤리로 대체한다. 너희들의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우리들의 문화가 진정한 문화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엘리트주의의 오류라고 봐야 한다.

    오류의 타락

    엘리트주의의 오류까지 가고나면 오류 차원이 아니라 타락의 수준으로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독일 나치는 아리안 족의 순혈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인종의 절멸을 꾀했다. 거기엔 아리안 족의 ‘우수성’이라는 절대적 전제가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 ‘우수성’을 결정한다는 말인가. 뉘른베르크 재판 이래 이를 인종주의라고 불러 경계해왔다. 인종주의는 대중적 환상이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경향을 띤다. 인종주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인종주의의 오류를 구성하기엔 충분하다.

    ① 사람을 고정된 생물학적 집단으로 잘못 분류하는 것

    ② 문화적으로 학습된 행위를 생물학적, 심리학적, 유전적 원인으로 잘못 설명하는 것

    ③ 어떤 유전(遺傳) 계층이나 인종 집단에 대해 잘못된 선입관을 갖는 것

    나치 인종주의의 극단이었던 아우슈비츠를 봤을 때도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참상을 겪은 뒤임에도, 아우슈비츠의 충격은 세계대전을 압도했다. 아마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늘 있었다고 생각한 ‘전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종 학살은 달랐다. 해석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많은 학자는 과거로 숨었다. ‘전근대적(pre-modern) 참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치의 인종주의는 해부학 등 근대 의학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이데올로기였다(데틀레프 포이케르트, 김학이 옮김, ‘나치시대의 일상사-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 2003).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인종주의는 위험하다. 그러나 인종은 있다. 다양한 인종을 보고 내가 가진 관념이 증거에 기초한 것인지 아닌지 묻는 것만으로도 인종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다시 합리적 사유로

    논쟁이 남아 있긴 하지만 20세기 유전학의 혁명적 발달은 몇 가지 매우 분명한 사실을 알려줬다. 인종이란 유전자 풀(gene pools), 교배집단(breeding population)의 측면에서 공통의 유전적 유산, 모종의 통계적 규칙성을 보여주는 집단을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교배집단을 단순하게 정의할 분류법은 없다. 더욱이 역사를 봐도 여러 가지 이유로 교배집단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잘못된 추론을 피하기 위한 가이드라인 정도는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유전 패턴이란 원래 통계적이다. 유전인자의 조합과 점멸이 갖는 우연성엔 법칙이 없다. 일란성 쌍둥이는 서로 거울을 보면서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데, 왜 사람들은 똑같다고 하는 거야?”

    둘째, 교배집단이 어떤 점에서 선명하다고 해서 항상 선명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앞서 말한 불안정성이다.

    셋째, 모든 인종 분류의 자의성(恣意性)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유전적 분류가 고정된 것으로 잘못 이용돼선 안 된다.

    넷째, 유전집단을 사회·문화집단과 혼동해선 안 된다. 미국 앵글로색슨의 상류사회와 하층민의 차이는 유전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이가 결정적이다.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오항녕

    전주대학교 인문대학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국가기록원 팀장으로 기록관리도 공부했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기록한다는 것’(너머학교),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고대 민연) 등 10여 편의 저·역서가 있으며, 그 외 논문 50여 편이 있다.


    끝으로, 역사가들은 반(反)인종주의의 오류도 염두에 둬야 한다. 요즘 ‘인종주의자’는 경멸하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다보니 종종 모든 유전적 성격을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인종을 마치 위험한 미신인 듯 제쳐놓는 경우도 생긴다. 인종주의는 위험하다. 그러나 유전학은 과학으로 남아 있다. 인종은 실재(reality)다.

    이런 오류를 피하는 방법? 하나밖에 없다. 조사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다른 학문들도 부정확하고 비합리적인 통념이나 관념을 수정하도록 도움을 주지만, 역사 공부 또한 경험에 대한 탐구와 이해를 통해 우리가 가진 오류를 바로잡아준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