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br> 세 시간<br>F. 스콧 피츠제럴드, 싱글에디션3 , 김욱동 옮김, 민음사, 990원
비행기가 착륙하자 그는 중서부의 한여름 밤 속으로 걸어나와 낡고 붉은 ‘철도역’처럼 판에 박은 듯한 푸에블로 인디언 집 같은 공항 건물로 향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지, 아직 이 읍에 살고 있는지, 또는 그녀의 이름이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점점 흥분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는 전화번호부에서 (…) 이름을 찾아보았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나는 왜 거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속절없이 서 있었을까.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파리 시내 곳곳에서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가 분(扮)한 개츠비와 마주치곤 했다. 1920년대 뉴욕을 현장에서 호흡해보는 것. 부지불식간에 개츠비는 파리보다는 뉴욕에서 봐야 제격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은 대부분 시간을 내어 개봉관에서 보아온 터였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The reader)’,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소장하며 가끔 꺼내보곤 했다.
‘위대한 개츠비’
특히 개츠비는 3년 전 이 지면(2010년 4월호)에 쓴 바 있다. 글의 지향점은 주식과 밀주 매매로 벼락부자가 된 개츠비라는 사내의 이름에 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지에 있었다. 작가의 의도(주제)와는 상관없이 독자가 부여하고, 나아가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는데, 대부분 첫사랑의 신화가 그러하다.
이 작품을 쓸 당시 피츠제럴드가 롱아일랜드의 그레이트 네크에 정착했다는 사실까지 독자가 알 수는 없다. 더욱이 한때 작가는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황금모자를 쓴 개츠비’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으로 붙일 생각을 했다는 후일담까지 일반 독자가 알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개츠비라는, 황금 소나기를 맞은 기막히게 운 좋은 사내의 모든 것이 오직 데이지라는 한 여인만을 향하고 있는 데에서 위대함을 찾기도 한다.
사실, ‘위대한 개츠비’는 첫사랑을 다룬 수많은 작품 가운데 단연 손꼽히는 소설이다. 이런저런 맥락을 짚어보자면, 피츠제럴드의 열렬한 추종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서사 골격 또한 첫사랑에 대한 후일담인 셈이다. 내가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기 위해 맨해튼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읽은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역시 첫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굽은 차도 끝에 검은 머리에 몸집이 작은 미녀 한 사람이 손에 술잔을 들고 서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모습이 나타나자 놀란 도널드는 택시에서 내리며 말을 걸었다.
“기포드 부인인가요?”
그녀는 현관의 불을 켜고 눈을 크게 뜨며 주저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도널드, 바로 너로군. 우린 너무 변했어. 아, 정말이지 믿어지지가 않아!”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들은 “그동안 지나가버린 세월” 하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고, 도널드는 가슴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
누구나 가슴 한 켠에 첫사랑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른 뒤, 첫사랑이 지척에 있을 경우 만날 것인가. 대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경험한다. 만나보고 싶은 호기심과, 만난 후의 실망감이 두려워 그대로 묻어두려는 마음.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은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세 시간 동안 화자인 도널드 플랜트라는 서른두 살의 사내가 경유지이자 고향인 미 중서부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첫사랑 낸시 홈스를 20년 만에 집으로 찾아가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위대한 개츠비’가 경장편의 분량(호흡)으로 집요하게 첫사랑의 내막과 첫사랑과의 재회를 전하고 있다면, 단편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세 시간’은 저마다 가슴 한 켠에 간직한 첫사랑의 실체와 허상을 마치 시트콤을 보듯 속도감 있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