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다 보니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다 타보네. 거봐. 운전하니까 얼마나 좋아. 아름다운 한강 일출도 가까이 볼 수 있고.”
그랬다. 환갑이 지나도록 운전대를 단 한 번도 잡은 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운전할 생각조차 없었다. 출판 편집자 생활만 30여 년을 했고, 게다가 시인이니 그럴 만도 했다. 출판 편집자와 시인은 길바닥에 널린 소재들을 주워 먹고 사는 직업이다 보니 책의 제목, 광고 한 줄을 쓸 때도 깊이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됐다.
‘운전도 못 하는 불구자’
[Gettyimage]
“출판 편집자고 술을 말술로 마시는 글쟁이라서 만약 운전하게 되면 필시, 음주운전을 밥 먹듯이 하게 될 것 같아서!”
이런 핑계는 지인은 물론 아내에게도 통했다. 그런 나를 보고 동창 스님은 ‘운전도 하지 못하는 불구자’라고 놀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뚜벅이 인생도 꽤 재미가 있다. 길이 험한 절과 암자에 갈 때는 미리 스님에게 연락하면 차가 터미널이나 역전 근처까지 왔기에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일로 출장 갈 때도 지인이나 직원들에게 부탁하면 그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민폐를 끼쳤는지 반성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그런 나의 행동에 반기를 들었다. 아내는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장롱 면허에 불과했고 눈이 아주 나쁜 탓으로 운전을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 그런 아내가 백내장 수술을 받고 난 뒤 사물이 잘 보인다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아내는 사진 동호회에 가입하고 난 뒤로 시도 때도 없이 산천을 유람하면서 사진을 찍었고 어떤 때는 외박까지 했다. 급기야 ‘다른 놈과 연애질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상상까지 했다. 웃지 마시라. 그 당시 나는 상당히 심각했다.
별수 없었다. 아내의 바람기(?)를 붙잡아 두는 방법은 내가 직접 운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운전면허증을 따는 일은 생각한 만큼 쉽지 않았다. 막상 시작하려니 겁부터 났고 여건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평소에 전구 하나 갈지 못하고, 못 하나도 박지 못하는 내가 저토록 무서운 차를 운전한다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급기야 그것은 공포로 밀려왔다. 운전면허증을 따겠다는 결심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그런 어느 날 아침, 기어이 아내가 사고를 쳤다.
“당신,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했으니 열심히 연습하고 면허증 따요, 명령이에요.”
아내의 결심은 의외로 단호했다. 목소리에는 날 선 쇳가루가 잔득 묻어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났다.
“도대체 뭔 소리야, 다들 운전면허증 반납할 나이에 나보고 운전면허증을 따라고.”
“나도 남편이 운전하는 자동차 타고 전국을 쏘다니고 싶다잖아. 평생 뚜벅이로 늙어 죽을 거야? 아이들도 집 나가고 우리 둘만 사는데 이젠 제대로 여행하면서 살아보자.”
아내의 결심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만큼 확고했고 지독했다. 아내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문제집’을 방바닥에 ‘훽’ 던지고 나가버렸다. 난감했다. 이미 거금의 학원비도 결제한 상태였다. 나는 별수 없이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아내가 그토록 소원이라는데 한번 해보자.’
한번 슬쩍 훑어보고, 치른 필기시험과 기능시험에 다행스럽게도 단 한 방에 합격했다. 나는 마치 국가고시에 합격한 것처럼 기뻤지만 다음 날 치른 도로 주행 시험에는 출발하자마자 ‘신호 위반’으로 불합격했다. 겨우 4시간 연습한 뒤 치른 시험이니 당연했다. 그 이후로 연거푸 세 번이나 더 떨어졌다. 포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감독관이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은 운행은 잘하시는데 자꾸 깜빡깜빡하고 성격이 급하신 것 같아요. 남들 운전면허증 반납하는 나이에 그냥 편하게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기가 찼다.
‘무슨 말을 이렇게 하지.’
감독관은 한술 더 떴다.
“나이 앞 숫자만큼 떨어져야 합격할 수 있어요.”
아내가 의탁할 수 있는 베스트 드라이버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청소년 보호구역 속도위반’ ‘신호위반’ ‘깜빡이 위반’ ‘중립위반’이 불합격 이유였다. 감독관의 말에 오기가 더 생겼다. 다음은 분명히 합격할 것 같았다.그런데 아뿔싸! 심각한 일이 생겼다. 내가 출근하다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길 위에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것이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가슴에서 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자기공명영상(MRI)을 촬영한 뒤 관상동맥이 막힌 것을 보고 즉시 시술에 들어갔고 철심 두 개를 가슴에 박은 뒤에야 깨어났다.
죽음이라는 것이 잠시 내 곁에 와 있었다. 그동안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일과 술, 담배에 찌든 탓일 게다. 아내는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담담했다. 그 후로 아내는 운전면허증을 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나도 포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날 무렵, 운전면허학원에서 ‘기능시험 합격한 지 1년이 지나면 도로 주행 자격이 소멸되니 도로 주행 시험을 보라’는 문자가 휴대폰으로 날아왔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시험을 봤고 당당히 합격했다. 나는 아내에게 가장 먼저 전화했다.
“거봐요. 오늘은 틀림없이 합격한다고 했잖아요.”
하여튼 그날만은 기분이 최고였다. 며칠 후 아내와 아들놈이 덜컥 차를 몰고 왔다. 그것도 3000cc 대형으로 말이다. 나는 차를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놈아, 그냥 소형차로 사지.”
“안 돼요. 큰 차가 오히려 익숙해지면 몰기가 더 편하고 안전해요,”
하지만 차를 모는 것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한 달 동안 아파트 주차장에 처박아 두었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다. 무조건 끌어보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운전 경력이 많은 후배를 불러 며칠간 연수받았더니 그런대로 도로 주행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1년 6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아내가 지금은 여행 중에 잠을 잘 정도로 편안해한다.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베스트 드라이버의 요건은 빨리 달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동승자가 기꺼이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신뢰성을 가진 운전자가 진정한 베스트 드라이버다.”
예순에 운전면허를 딴 운전자에게 들려주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는다. 하긴 지금까지 내 옆에 탄 동승자는 아내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해는 하지 마시라. 예순의 초보자가 모는 차에 누가 동승하겠는가.
지금은 서울과 부산을 세 번이나 왕복할 정도로 운전 실력도 날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사이 아내와 가고 싶은 곳에 여행 다니면서 아이들의 장래 문제 등 한동안 닫아두었던 속마음을 나누는 등 금실도 무척 좋아졌다. 무엇보다 내 손으로 운전하면서부터 술을 완전히 끊게 된 것이 흡족하다. 물론 심혈관질환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가고 싶은 곳을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즐겁다.
남이 보면 우습겠지만, 60년을 뚜벅이로 산 나에겐 이것도 하나의 행복이다. 그동안 아내의 사진 찍는 실력도 많이 늘었다. 조만간 아내의 사진과 내가 쓴 시를 모아 아담한 디카 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기대하시라.
정성욱
● 1963년 경남 진주 출생
● 부산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시조가 당선돼 등단
● 現 천호희망재단 이사, 공사상연구소 이사장
● 경허 스님의 ‘무심’ 등 불교 도서 30여 권 기획, 출간
● 저서: 시집 ‘남도행’, 산문집 ‘편지’ ‘얼굴’ ‘스님의 생각’ ‘산사에서 부친 편지’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