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호

[에세이] 각자의 걸음

  •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연출가

    입력2024-11-13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Gettyimage]

    [Gettyimage]

    요즘 규칙적 수면과 식사가 어려울 만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밥 한 끼 거르는 것이 큰일도 아니고 잠이야 좀 몰아서 자면 될 일이라며 마음속 주름을 털다가도 아무도 없는 새벽길을 걷다 보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몸부림치며 살고 있나’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도심의 소음이 사라지는 고요한 시간에야 비로소 나를 돌아보게 되니 괜히 스스로에게 미안함이 생긴다.

    현관문을 향해 오르는 계단이 오늘따라 많게 느껴질 때쯤 계단 창문을 통해 나를 훔쳐보는 달빛이 느껴진다. 고작 태양의 반대에 서서 남의 빛으로 주인 행세하는 달이 남의 속도 모르고 속절없이 밝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올려 그 자리에서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요하다. 밖은 고요하다. 네모난 밤하늘을 더듬어 잘 보이지도 않는 구름에 이름을 지어보기도 하고 별을 이어 그림을 그려보기도 한다. 별스러운 내 모습에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온다.

    답답하다. ‘인생이 뭘까?’ ‘인생에 정의가 있던가?’ ‘나의 인생은 어딜 향해 가는가?’ 답이 없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 애쓰는 스스로가 답답하다. ‘후우’ 긴 한숨으로 속을 비워보지만 애꿎은 ‘애’가 뒤틀린다.

    걷는 소리가 다르다

    양 볼에 묻은 달빛을 털고 고개를 돌리는데 아까 뱉어버린 한숨이 유리창에 새겨져 있다.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우연을 도화지 삼아 유리창에 글씨를 썼다. 검지를 ‘쭈욱’ 펴서 무의식적으로 ‘인생’이라고 썼다.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대를 위한 나의 역사를 쓰고 싶었나? 아니면 오늘의 나를 잊고 싶지 않았나? 선사시대의 벽화처럼 나의 존재를 전하고 싶었나? 무의식적으로 행한 무의미한 행동에 의미를 더해 자아도취에 빠진다.

    그것도 잠시, 더러워진 검지가 마음에 걸려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닦는다. 고상한 척은 하고 싶고 제 손이 더러워지는 건 싫은가 보다. 고작 유리창 먼지에도 몸서리치며 그동안 손에 묻었던 것은 더럽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나 보다.

    나는 기어코 어두운 계단을 그루터기 삼아 무릎을 굽힌다. 쉬지도 않고 참 부지런히 움직인 무릎을 주무른다.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서는 계단을 오를 수 없듯이 이 자리까지 무던히도 버텨준 두 무릎이 대견하다.

    정상이 어디인지,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호기롭게도 살았다. 마치 자신의 뛰어난 지혜를 믿고 신들을 속여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처럼. 가만, 어쩌면 언덕 끝을 알고 있는, 그것이 형벌인 줄 알고 있는 시시포스가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삶의 바위를 어디로 굴리고 있는 걸까?

    ‘뚜벅뚜벅’ 걷는 소리가 난다. 무엇을 샀는지 모르지만 비닐봉지가 다리를 스치는 소리도 들린다. 무릎을 펴서 창밖을 보니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걷고 있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비닐봉지가 다리에 부딪히며 ‘빙그르르’ 돈다. 컵라면? 김밥? 배가 고팠나? 손에 든 비닐봉지와 달리 참 곱고도 곧게 걷는다.

    [Gettyimage]

    [Gettyimage]

    ‌잠시 시간이 흐르자 ‘터벅터벅’ 또 다른 발소리가 들린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슬리퍼를 끌며 걷고 있다. 힘없이 땅에 끌리는 슬리퍼가 여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혼자 사시나? 이 시간에 어딜 가시지? 길을 잃었나?

    ‘또각또각’ 여자의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굽이굽이 길 따라 점점 커진다. 직장인인가? 잘 차려입은 투피스에 어울리지 않는 큰 가방을 메고 있다.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거래처 계약서? 사업계획안? 작은 구두 굽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리드미컬하다.

    ‘덜덜덜덜’ 모자를 눌러쓴 아주머니가 작은 카트를 끌며 폐지를 줍는다. 카트의 몇 배나 되는 폐지의 양이 버거울 만도 한데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거뜬한 모양이다. 저 정도 양이면 고물상에서 얼마를 쳐줄까?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자녀들은 알고 있을까? 자녀가 없나?

    ‘터덜터덜’ 거하게 술에 취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앞으로 한 걸음을 걷고 뒤로 두 걸음을 걷는다. 저 정도면 뒤로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안쓰러운 웃음이 ‘삐죽’ 튀어나온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아니면 좋은 일이 있었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까? 집은 찾아갈 수 있겠지? 걸음이 느려질지언정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우다다다다’ 트럭이 길가에 서서 입을 벌리면 택배 기사가 입속으로 들어가 양손 가득 상자를 들고 뛰어내린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걸음은 거침이 없다. 특히 시간이 쫓아올 때는 더욱이 그러하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현관문에 다다를까? 월급은 얼마나 될까? 여름에는 얼마나 힘들까? 삭막한 거리를 뜨겁게 달리는 그의 신발 밑창이 궁금하다.

    나를 이끄는 것

    창문에 희미해져 가는 인생이란 글씨 너머로 사람들의 걸음이 또렷하게 보인다. 어두운 길 위에 저마다 인생을 새기며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오만한 내 생각이 그들의 삶을 몰래 논해도 개의치 않고 참 힘차게도 나아간다.

    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고요가 몰려온다. 그리고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마치 그들의 걸음처럼 힘차게도 나아간다. 내 삶에 관한 타인의 생각에도, 심지어 나의 생각에도 개의치 않고 항상 뛰고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치스러운 푸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규칙적으로 살아 있다고 외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 삶에 값을 매기는 것은 누구인가?

    남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무릎을 펴는데 창문을 통해 나를 훔쳐보는 달빛이 느껴진다. 가로등 불빛보다도 못한 것이 남의 속도 모르고 여전히 속절없다. 희미하게 얼룩져 있는 인생이라는 글씨가 부끄러워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더러워질 것을 감수할 용기도 없어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불빛이 계단 위로 내려앉는다.

    달빛인가 하여 깨끗한 손으로 달을 가려보니 여전히 눈은 부시고, 가로등 불빛이 나지막하게 어깨를 토닥인다. 계단을 오르는데 등이 따뜻하다. 언제든 주저앉으면 온 세상을 그루터기 삼을 수 있다며 무릎은 내 머리보다 앞서 나를 이끈다.

    김현규
    ● 1983년 대구 출생
    ● 계명대 성악과·연극예술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재학 중
    ● 現 극단 헛짓 대표 겸 ‘한국희곡’ 편집장
    ● 연극 ‘혜영에게’ ‘춘분’ ‘반향’ 외 다수 연출






    에세이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