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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가 빚은 조상의 숨결

판소리 명창 조상현의 신선로

인간문화재가 빚은 조상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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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턴트 음식이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우리에겐 맛깔스런 전통음식이 적지 않다.
  • 산해진미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신선로도 그 중 하나다. 조선 중기 문인 정희량이 속세를 떠나 산중 은둔생활을 하면서 화로에 야채를 끓여먹는 모습이 마치 신선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임금의 수라상에 올려져 대표적인 궁중음식이 됐다.
인간문화재가 빚은 조상의 숨결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조상현 명창(호 청랑(靑浪)·64). 훤칠한 체구에 호탕한 웃음, 걸쭉한 입담이 영락없는 판소리꾼이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판소리를 시작해 올해로 만 53년째. 소리는 그의 삶, 그의 인생 전부다.

어린 시절 조상현의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다. 너나할것없이 어렵던 그 시절 집에 유성기가 있었던 것만 봐도 짐작키 어렵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건축사업가. 덕분에 집안은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로 항상 가득했다.

그 소리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를 흥분시켰고, 자연스레 판소리의 길로 이끌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예정된 운명처럼.

1951년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조상현은 박유전(강산제 창제자·강산제는 전남 보성 지명을 따 ‘보성소리’로도 불림)의 수제자이자 당시 남도 제일의 명창이었던 정응민(호 송계) 선생을 찾아갔다. 그 길이 판소리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7년 동안 선생의 집에 기거하면서 소리를 배웠다. 하루에 꼬박 10시간 이상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학교에 다녀오는 시간을 빼면 하루 2∼3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기나긴 수련을 거쳐 그는 춘향가와 수궁가, 심청가 등 보성 소리 ‘세 마당’을 완성했다. 그리고 스무 살 때 호남국악원 조교로 들어가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사사했다.

그를 명창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마지막 스승 박녹주 명창이다. 박녹주는 아직은 설익은 그를 수양아들로 삼고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문밖 출입이나 사람 만나는 일도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피 마른 목청과 소리를 향한 절규의 시간들이었다. ‘득음(得音)’. 결국 그에게 하늘이 열렸다. 하늘 아래 그만의 소리를 얻은 것이다.



소설가이자 전 언론인 이세기씨(62)는 조상현의 소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오음과 육률을 임의로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평성으로 하다가 위로 튀는 목이며 목청을 좌우로 헤쳐가며 힘차게 내는 걸쭉한 수리성은 중상성을 낼 때도 세성을 내지 않는다.… ‘춘향가’중 ‘어사출도’ 장면은 ‘만장의 폭포가 쏟아지듯 웅건 장대한 자진모리’로 현란하게 말을 엇붙이고 장단을 가지고 놀면서 시원한 통성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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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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