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고산지대에서 들쭉 열매를 따는 북한 처녀들.
생전에 역도산은 말술을 마셨다. 술맛을 즐겼다기보다는 마음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한량없이 마신다. 맛을 모르니 자기 주량도 가늠하지 못한 채 마셔댄다. 역도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고 누구 말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에 청개구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매니저는 부러 “다른 곳에서 한잔 더 하시죠”라고 청했고, 그러면 역도산은 “아냐, 난 갈 거야” 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도 술 때문이다.
역도산은 도쿄의 뉴라틴쿼터 나이트클럽에서 만취한 상태로 화장실에 가다가 한 야쿠자와 마주쳐 사소한 말다툼을 벌였다. 몸싸움으로 번진 끝에 그는 등산용 칼에 복부를 찔렸고, 그 후유증으로 1주일 만에 숨지고 만다. 무절제한 음주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세월이 지나니 그의 일생은 술과 함께 추억된다.
그런데 역도산을 기리는 술로 치자면 북한이 훨씬 먼저다. ‘력도산술’은 평양소주공장에서 만들고, 남한에도 수입된다. 황금빛이 도는 투명한 알코올 도수 40%의 소주다. 원료로 멥쌀, 찹쌀, 수수, 강냉이, 사과, 배, 결명자, 벌꿀이 들어간다. 한 모금 마셔보니 코끝에 스치는 향은 순한데 혀가 소금에 절인 듯 짜릿하고, 목에 넘긴 술맛은 쓰면서도 단맛이 돈다. 한 잔을 제대로 들이켜니 역도산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독하다. 북한에서 멥쌀과 찹쌀을 썼으니 고급술에 속할 터이고, 우리네 전통 소주에서 감미료와 향신료로 곧잘 들어가는 배와 벌꿀을 넣었으니 잘 다듬어진 술이라 할 만하다.
력도산술을 수입하는 대동주류의 김영미 전무는 이 술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을 소개했다. 이 술을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이 다름아닌 일본의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였다는 것. 역도산의 제자인 이노키는 스승을 기리기 위해 평양소주공장에 ‘력도산술’을 제안했고 술 빚기에 필요한 시설장비를 댔다. 투자조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땅에서 한 사람을 기려서 새로운 술이 탄생하기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남쪽에는 ‘김삿갓’과 ‘황진이’ 상표의 술이 있지만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이미지를 차용한 수준이라 ‘력도산술’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북한술 안 팔리는 두 가지 이유
현재 수입되는 북한 상품은 건강보조식품, 술, 농수산물, 자수나 그림을 포함한 문화예술품 등이 대종을 이룬다. 그 중에서 북한술이 가장 다양하면서도 널리 유통된다. 수입업체도 한때 30개에 육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숫자가 10개 안팎으로 줄었고, 등록된 수입업체라 해도 들여온 물량을 소화해내느라 교역이 뜸한 상태다.
북한술이 남한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주)백두산들쭉술의 김기창 대표는 그 첫 번째 이유로 유통구조상의 문제점을 꼽는다. 북한술은 수입주류로 분류되기 때문에 수입주류대리점을 거쳐서 유통돼야 효율적이다. 그런데 대형 수입주류상들은 북한술을 아예 받으려 하질 않는다. 수입주류로 대표되는 위스키나 와인은 수요가 있고 광고 지원도 잘 되지만, 북한술은 시장부터 개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속주나 특산주를 취급하는 중소 규모의 주류대리점에서 팔면 알맞을 텐데, 그곳에서는 수입주류를 취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북한술은 가자주류백화점의 한 귀퉁이나 임진각 또는 통일전망대의 기념품점에 간신히 얹혀 있는 정도다. 결국 수입업체에서 직접 대리점을 만들어 파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또 다른 사업이라 엄두를 내기 어렵다.
김 대표는 “북한 농수산물에 관세를 매기지 않는 것처럼, 북한술을 ‘우리술’의 범주에 넣어 민속주를 유통시키는 주류대리점에서 취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술이 남한에서 잘 팔리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술병 디자인에 있다. 북한술도 명색 수입품이지만 위스키나 와인처럼 화려한 외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경제수준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북한에서는 술이 경쟁상품이 아니다. 국가가 직접 관장해 각 지역의 식료공장에서 제조, 각 지역별로 일정량씩 할당해 팔도록 한다. 술 빚는 사업장이나 술 품종별로 경쟁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광고도 없다. 그러다 보니 5000원짜리 술이든 5만원짜리 술이든 같은 병에 비슷한 디자인으로 출시된다. 오로지 내용물이 문제일 뿐 형식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