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개발된 가발은 태풍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고 스타일도 세련됐다. 사진은 가발 전문업체 ‘밀란’의 여름 전용 가발 광고.
프랑스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 또한 홍명보보다 세 살 아래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속알머리’가 없다. 물론 축구가 머리숱으로 하는 운동은 아니지만, 그는 ‘대머리 사령관’이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국 프랑스를 월드컵 결승까지 올려놓았다.
지단말고도 서양에는 대머리 스포츠 스타가 수두룩하다. 테니스 스타 앤드리 애거시, 추억의 복서 마빈 해글러,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딕 아드보가트…. 모두 젊어서부터 대머리였다.
서양에선 당사자나 주변 사람이나 대머리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물론 가발 착용 사실이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된 뒤에도 대머리가 아니라고 우기는 존 트라볼타 같은 사람도 있지만.
서양인이 탈모에 비교적 담담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백인 중년남성의 대머리 발생률은 62%로 흑인 25%, 황인종 15%에 비해 크게 높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대머리가 된다는 이야기다. 중년에 머리숱이 성성한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는 백인의 특징을 모른 채 브루스 윌리스의 대머리를 걱정했으니….
이덕화의 고백
백인에 비해 대머리가 적어서 그런지, 우리 사회엔 대머리를 비하하는 풍조가 있다. ‘대머리는 공짜를 좋아한다’ ‘대머리는 색(色)을 밝힌다’ ‘대머리와 동업하면 망한다’는 말에서 보듯 대머리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도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더 심하다. 몇 년 전엔 대머리라고 놀림을 받던 고교생이 자살을 시도한 사건까지 있었다. 환경오염과 늘어난 스트레스가 조기 탈모의 원인이건만, 소수자에 관대하지 못한 우리 사회 분위기가 읽히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탈모가 시작되는 나이가 점점 낮아지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생겼다. 나이 들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취업 면접에서 면접관에게 높임말을 듣거나, 맞선 자리에서 퇴짜를 맞는 것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여인이 머리숱 많은 친구와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건넬 때까지 사랑 고백 한번 하지 못한 심정은 당사자가 아니고선 아무도 모른다.
대머리 관련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는 샤워 할 때마다 욕조 배수구 가득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생전 처음 부모님을 원망했다거나 심지어 자살 충동이 일었다고 고백하는 젊은 탈모자들의 사연이 여럿 올라 있다. 이들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처럼 다가온 게 바로 ‘맞춤형 가발’이다.
역사(驛舍) 주변 뒷골목(특히 서울 영등포역)에 숨어 있던 가발가게들이 대로변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무렵 유명 연예인들의 ‘떳떳한 자수’에 힘입은 바 크다. 자신이 대머리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가발을 쓴 사실에 대해서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던 가수 설운도, 탤런트 이덕화씨가 잇달아 방송에서 자신의 ‘가발 인생’을 고백하자 동병상련을 겪던 전국의 탈모자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덕화씨가 가발 광고 전속 모델로 변신한 것도 이때부터다.
광고에 등장한 이덕화씨의 헤어스타일은 같은 연령대뿐만 아니라 젊은 탈모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디자인 자체가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설운도 식’이 아니고, 20대 젊은이들이나 소화할 만한 ‘삼고’ ‘앞가르마’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완연한 대머리가 아니라 약간의 탈모 증세가 있는 사람들까지 ‘나도 가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발을 쓴 채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자동차 창문을 열고 운전을 했다는 체험자들의 만족스러운 소감들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