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에 편찬된 ‘보인부신총수’에 나오는 왕실의 인장과 도장을 찍은 단면.
‘고종 황제가 남긴 진짜 국새’를 둘러싼 사건을 담은 영화 ‘한반도’에는 ‘옥새는 옥으로 만들어서 옥새라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문화재 도굴꾼인 유식은 이렇게 말한다.
“음! 국새는 나라에서 쓰는 도장이네. 옥새라고 그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재질이 옥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거고. 대한제국이 생기고 나서 만든 국새들은 순금 재질이니까, 배운 사람들은 옥새가 아니라 국새라고 해야 되는 걸세.”
유식은 제법 유식한 척하지만 그의 설명엔 허점이 한둘이 아니다. 옥으로 만들어서 옥새라 불렀다고 한 것도, 대한제국 후 만들어진 국새가 순금 재질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에도 옥새는 옥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금속 재질로 만들어졌다. 물론 순금 재질이 아니라 금, 아연, 주석, 구리 등 여러 가지 금속의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흔히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서 교수도 ‘옥새는 옥으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는 인터뷰에서 “세종대왕은 명나라로부터 받은 옥새를 쓰지 않고 남양옥으로 독자적 옥새를 제작케 했으며,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고 했다.
서 교수는 여기서 세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첫째는 세종이 명(明)으로부터 받은 옥새를 쓰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었다는 점, 셋째는 그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 점이다.
당초 옥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 옥새로 불렸지만 금속으로 만들어도 황제의 도장은 모두 옥새라 불렀다. 재료개념에서 상징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625∼705) 때 ‘새(璽)’를 ‘보(寶)’로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당서여복지(唐書輿服志)’의 기록에 따르면, 측천무후는 ‘새(璽)’와 ‘사(死)’의 음이 비슷한 것에 불만을 갖고 ‘보(寶)’로 바꾸라고 영을 내렸다. 하지만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원래의 명칭인 ‘새(璽)’로 회복시켰다고 한다. 황제의 인장은 재료에 상관없이 모두 옥새라 불렀던 것이다. ‘새(璽)’는 원래 ‘鉢’로 표시했는데, 글자로도 알 수 있듯이 쇠(金)를 나무(木)로 불을 때 녹여 주물한 옥새나 금·동인이라는 의미이다.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
우리나라에서도 1895년 고종이 반포한 포달 제1호 궁내부관제에 따라 ‘임금과 나라의 도장’을 옥새라 했다. 이때 만들어진 옥새들은 모두 재질이 금속이다. 즉 재질에 관계없이 황제의 도장은 ‘옥새’라 한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때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명나라에서 받은 옥새를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마찬가지다. 당시엔 남양옥으로 옥새를 만들지 않았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옥새를 사용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