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 류정월 지음/샘터/335쪽/1만5000원
대학 1학년 때부터 대학원 전 과정까지 함께한 동기가 있다. 그 친구는 공부하다가 지겨워지면 큰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 좀 재미있고 상큼한 이야기 없냐?”
오늘 아침 1교시 강의실, 졸음에 겨운 학생들은 선하고 맑은 눈으로 아내와 단짝 친구가 내게 강요했던 그 고문을 또 강요한다.
웃기는 인간, 웃고 있는 인간
“유머 전성기이다. 웃기는 연예인이 뜨고, 웃기는 정치가가 표를 모으며, 웃기는 직원이 상사의 사랑을 받고, 웃기는 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저자의 현실 진단에 공감한다. 웃겨야 성공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런데 조금 삐딱하게 보면, ‘성공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웃겨라, 웃기는 재주를 길러라, 인기를 끌려거든 웃겨라’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웃기는 것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순수하지 않은 행위로 비쳐진다. 극으로 가면 웃기는 인간, 즉 실없고 진지하지 못한 인간이 탄생한다.
하지만 조금 더 물러서서 보자.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생각이 바뀐다. 웃고 있는 인간, 아름답다. 웃고 싶어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으로 순수하고 솔직한 인간의 욕망이다.
조선시대에도 웃기는 인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웃기려고 의도하고 웃기는 현자도 있고, 가르침을 주기 위해 웃기는 스승도 있고, 의도하지 않고 웃기는 바보도 있었다. 그들이 오늘날의 연예인, 정치가, 인기 있는 남자 친구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우스개가 오늘날의 그것과 같지 않더라도, 그때도 지금도 웃고 있는 인간은 모두 동일하다. 웃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순수하고 솔직한 ‘우리’들이다.
웃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쉽게 답하기 어렵다. 원래 철학의 본질, 인생의 본질, 사랑의 본질과 같은 것은 고민해왔지만, 웃음과 우스개의 본질은 애써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웃음에 관해, 우스개에 대해 해설하고 싶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저자가 쓴 박사논문의 연장이라고 한다. 여기저기 초학자의 노고가 배어 있다. 저자는 조선시대 우스개를 이야기하기 위해 조선시대에서 근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꽤나 긴 시간대를 아우르는 각종 문헌과 자료를 뒤졌다.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우스개는 대부분 한자로 씌어진 것이다. 그 우스개를 해설하는 데 서구의 이론을 인용·적용하고 있다. 저자는 웃음의 본질, 웃음을 통한 메시지, 그리고 그것을 읽어내는 독법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웃음, 너무나 인간적인
하지만 책 서두에 보면, 저자는 웃음, 우스개의 본질이 관심사가 아니라 웃음이라는 코드를 통해 그 시대, 문화를 보고 싶다고 밝힌다. 오늘날 각종 문화사(cultural history)가 유행하고 있다. 대문자 History에 식상한 사람들은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의문에 답하는 다양한 일상사(소문자 history)에 흥미를 느낀다. ‘음식의 역사’는 아주 점잖은 편이다. ‘흡연의 문화사’ ‘화장실의 역사’, 심지어 ‘오빠’의 탄생과 그 역사를 다룬 책도 있다. 이제 저자는 웃음의 사회·문화사, 웃음의 백과사전, 웃음의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민족지학)를 우리에게 선보였다. 왜 굳이 웃음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사회·문화를 보려는 걸까.
웃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아니 누군가 죽어서 나를 죽도록 힘들게 해도 결국 우리는 웃으면서 살아난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죽을 것같이 서럽게 우시던 어머니와 이모님들…. 하지만 초상집에서도 간간이 웃음은 피어난다. 슬퍼할 힘을 재충전하기 위해서이다. 제대로 슬퍼하기 위해서이다. 프로이트가 대칭으로 놓았던 ‘삶’과 ‘죽음’이 ‘웃음’과 ‘눈물’로 환치되어도 기본 논리는 통하지 않을까? 어쩌면 웃음은 ‘삶’ ‘죽음’과 같은 거창한 테마의 자격을 갖추었는데 그동안 우리가 외면해왔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