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쥬에신이 가출하여 상하이로 가듯, 바진은 19세(1923년)에 집을 떠나 상하이로 간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나키스트 저작을 탐독하고 아나키즘의 주요 글들을 번역한다. “나는 모든 사람의 자유 속에서 나의 자유를 찾고, 모든 사람의 행복 속에서 나의 행복을 구하겠다”고 삶의 좌표를 세우고는, 일체의 국가와 정부에 반대하며 자본계급이 없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간다. 아나키스트로서 바진은 자신의 삶의 원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나의 주의를 판 적이 없으며, 어떠한 사람, 어떠한 당과도 타협한 적이 없다. 8년 전 아나키스트가 된 이래 나는 죽을 때까지 한 시각 한 초도 아나키스트가 아닌 적이 없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한 시각 한 초도 아나키스트가 아닌 적이 없을 것이다”는 그의 다짐은 국민당 정부의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아나키스트로서 평생을 살겠다는 그의 다짐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바진은 흡사 예언처럼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의 우두머리가 나폴레옹이나 위안스카이(袁世凱)로 변하지 않으리라 누가 보장하겠는가? 사회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된다. 그는 우파 독초로 지목당해 갖은 굴욕과 고초를 당한다. 그런 광기의 시대에 더없이 사랑했던 분신인 아내마저 잃는다. 병사(病死)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사인(死因)은 문혁(文革)이다.
문혁, 절대 잊지 말아야
바진의 ‘매의 노래’는 그렇게 10년 동안 온갖 굴욕과 폭력을 겪은 뒤 문혁 시기를 되돌아보면서 피로 쓴 회상의 기록이다. 이 책은 바진이 ‘수상록’이라 이름붙여 쓴 문혁 시기 회상록 중에서 대표적인 글들을 가려 뽑은 것인데, 20세기 중국의 양심으로서 바진의 인격이 글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지금까지 문혁 때 수난 당한 지식인들의 문혁 체험이 담긴 글이 여러 편 나왔지만, 그중에서도 바진의 문혁 수상록은 단연 돋보인다. 바진의 문혁 기억에는 인간이 짐승이 되어 저지르던 광기와 폭력에 대한 고발과 더불어 그러한 시대가 초래된 데 대한 아픈 자성이 들어 있어서 그렇다. 바진은 “내가 온갖 모욕을 받고 실컷 시달림을 받았다고 하지만, 나는 왜 머리를 써서 사고하지 않았는지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으로서 나의 지식은 어디에 표현되었던가?”라고 자문하면서, “4인방이 나를 ‘반동적인 학술 권위자’라고 부르자 나는 고분고분 따르며 ‘학술’을 머리 뒤로 던져버렸다”고 자성한다. 비록 “그 누구도 맑게 깬 두뇌를 유지할 수 없던 시대”였지만 짐승의 시대를 노예로 산 자신에 대한 자성, 그리고 “아마 내가 (혁명세력에) 중용되었다면 나 역시 나쁜 일을 서슴지 않고 했을 것이다”는 아픈 자기 해부가 들어 있다. 가해자였던 사실은 숨기고 희생만 부각하는 뻔뻔한 문혁 기억, 중공당과 중국 정부의 통제에 따라 각색된 문혁 기억이 난무한 현실에서 바진의 문혁 기억이 더없이 소중한 이유이다.
바진은 문혁이란 ‘좌(左)’라는 외투를 걸친 종교적 열정이었고, 사람과 짐승이 뒤바뀐 과정 역시 혁명이라는 외투를 걸친 봉건주의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비극이 재연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바진은 사람과 짐승이 뒤바뀌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그 피비린내 나던 10년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고, 맑게 깨어 있고, 독립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중국인에게 요청한다. 바진의 이 요청이 어디 문혁을 겪은 중국인에게만 해당할 것인가. 야만의 독재 시대를 산 경험이 있고, 이념적 열정이 종교적 맹신이 되어 인간을 억압하던 역사를 가진 사람 모두에게 바진의 요청은 더없이 절절한 비수이자 삶의 좌표이다. 문혁이 발발한 지 4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가 바진을 기릴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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