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이우정
‘사기열전’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와 반고의 ‘한서’에 수록된 ‘사마천전’을 읽으면서 나는 글쟁이의 운명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독하게 글 쓰는 이들을 얘기하면서, 그 독함은 바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이라는 말도 오갔다. 비록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했으나, 가난과 슬픔, 고통 속에서 진주 같은 작품을 쓰는 시인이 많다.
글쟁이의 진정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문화에 통한다는 한(恨)이 아닌가. 세상에 남은 고전은 작가들이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어둠과 고통 속에서 기어이 하늘로 띄운 별이 아니던가.

사마천의 ‘사기열전’.
죽음보다 더한 치욕
간혹 죽음이 자비로울 때가 있다. 극심한 고통에 처한 사람은 죽음을 간절히 원하기도 한다. T 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에 등장하는 항아리 속 할머니에겐 죽음이 자비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남근을 거세하는 궁형(宮刑)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문장을 위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집필했다. 그는 누구인가?
사마천은 한 경제의 중원 5년(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이 다섯 살 때에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태사령은 사관(史官)을 의미하며 아들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세습직이다. 사마천은 20세에 전국을 여행했으니, 그의 문장은 당시 온 세상이나 다름없던 중국을 유람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22세에 벼슬을 처음 했고, 38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됐다. 42세에 ‘사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저술활동은 하지 못했다. 공사다망했기 때문이다. 48세에 이릉(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다가 포로가 된 장군)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하고, 50세 무렵 출옥해서야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55세에 ‘사기’를 완성하고, 62세에 세상을 떴다.
궁형을 당한 선비들은 으레 자결했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한 무제는 궁형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사마천에게 중책을 맡기고, 곁에 머물러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 사마천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쓰는지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까?
‘사기열전’의 맨 마지막인 70번째 열전이 ‘태사공자서’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 자신의 출생배경과 학문적 배경, 경력 등을 소상히 밝혀놓았고, ‘사기’의 구성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해,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마천은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살아 있음을 말하고, 따라서 정신과 육체를 잘 운용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이 고갈되고 육신이 피폐해져, 결국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면 죽는다는 얘기다. 사마천은 정신이야말로 사람의 근본이며, 육신은 삶의 도구라고 했다. 이 삶의 도구, 그중에서도 남성의 상징이자 중심을 앗아간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사마천은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이러한 불행을 겪게 한 이릉 장군은 누구인가? 왜 사마천은 조정의 대세를 따르지 않고 무서운 군주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이릉 장군을 변호했을까?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