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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우울하고 초조해요

괜히 우울하고 초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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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우울하고 초조해요
Q 45세 가장입니다. 중견 기업에 다니고 있고 아이들도 잘 커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인생에 뭔가 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살려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불안합니다. 멋모르고 잘난 척하면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어디에라도 숨고 싶습니다. 잘못한 일도 남에게 상처 준 일도 많습니다. 내 삶이 실패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듭니다. 아무런 의욕이 없고 자꾸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데, 왜 이럴까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어졌는데, 앞으로 중늙은이로, 그리고 늙은이로 처량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초조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중년기가 지나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자신의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게 피부에 와 닿는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드는 동창 녀석들의 부고, 혹은 큰 병에 걸렸다는 비보에 새삼 자신도 정말 늙어가고 있구나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어느덧 부모님을 모신 영안실에서 동창회 소모임이 이루어지고, 친구들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보면서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40~50년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이젠 웬만한 것엔 놀라지도 않을 만큼 감정이 무뎌진 줄만 알았는데, 가슴 밑바닥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점점 거세져 그동안 이루어놓은 것이 무엇이며,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루어놓은 것은 별로 없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는데 몸과 마음은 나이 들어가니, 허송세월한 것만 같아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이 사무치고 더 많은 능력과 책임을 요구하는 남은 세월의 무게가 벅차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더 무력하게 느껴지고 땅속으로 숨고만 싶어진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남은 것이라곤 노쇠의 길로 들어서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그리고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초라한 몸뚱이뿐인 것 같아 인생의 가을은 쓸쓸하기만 하다.

이 시기에 사람들 마음에는 인생의 거센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네가 원하던 삶을 살아왔느냐고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자기 안으로 침잠하다보면 문득 중년기를 훌쩍 넘어버린 자신의 시간이 젊음과 가능성,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간 것 같아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인생의 정오에서 살아온 날을 돌이켜보며 우울해지기 쉬운 시기가 바로 중년기에서 갱년기로 넘어가는 때다. 이 시기의 우울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주는 자기 내면의 소리이기도 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바로잡고, 무엇이 부족했는지 찾아보라는 경종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우울은 변화와 교정을 위한 침잠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잃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때



나이 드는 것은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것, 내 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낼 때가 됨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날씬했던 허리와 정열, 모험심, 시력, 정의에 대한 믿음, 쾌활함, 유명한 운동선수나 연예인 등이 되겠다던 꿈 등이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봐야 한다. 세계 곳곳을 여행해 보겠다던 꿈도,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보겠다던 꿈도 나의 한계에 부딪혀 맥없이 주저앉아버린다. 질병과 전쟁으로부터 세상을 구해내겠다던 야망도 현실의 벽 앞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나이 들어가는 어느 시점에 우리는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뭔지 모를 두려움이 안개처럼 깔리고, 이제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으며, 그 어느 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 인생의 중심이 흔들리고 주위의 많은 것이 흩어져 사라지는 느낌에 문득 소스라친다. 친구 중 몇은 사업이 망하고, 불륜에 휩싸이거나 이혼한 친구도 있으며, 불치의 병을 앓고 있거나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도 생긴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면서 조금만 이상이 느껴져도 더럭 겁이 나 병원을 찾고, 장롱 안의 보험증서를 꺼내 본다.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고 기능이 떨어지면서 자신의 인생도 끝자락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더구나 강하게만 보이던 부모님이 늙고 쇠약해져 경제적, 심리적으로 자식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삶을 꾸려가던 우리는 다시금 부모의 생활 반경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다 자란 아이들은 우리 곁을 떠나려 하는 반면, 이제 혼자가 되거나 병든 부모님은 자신들을 돌보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늙고 쇠약해진 부모님이 기대는 것에 우리는 신체적, 정서적으로 적응을 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짜증과 원망과 슬픔과 죄책감이 때때로 부모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을 이겨 누르기도 해 우리를 괴롭힌다.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부모의 부모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린다. 자식 키우는 짐을 내려놓을 만하니까 늙은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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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남│나누리병원 정신분석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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