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종과 금융업종을 모두 거느린 L그룹의 연수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연수원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당연히 건설업종 사람들이 금융업종 사람들보다 술을 더 잘 마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란다. 금융업종 간부 100명이 연수원에 들어온 적이 있는데, 하룻밤에 폭탄주로 비워낸 양주병이 1인당 각 1병씩-이들은 술병을 헤아릴 때 ‘각 1병’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모두 100병이나 되더란다. 모두가 기겁할 이 전적에 건설업종 분야 사람들도 혀를 내두르더라는 것이다.
금융권 사람들은 왜 술을 잘 마실까. 막걸리학교를 다닌 40대 중반의 여자 은행원 출신 K씨와 얘기를 나눠봤다. K씨는 “세상에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없고, 마시다보면 모두가 술이 늘더라”고 했다. 그가 은행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1980년대 후반에 투자금융회사에 들어갔다가 우루과이 라운드 여파로 1992년 회사가 증권사, 은행, 종금사 등으로 분산될 때 은행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후 은행권이 통폐합되면서 투자금융사와 은행권에서 일하다 2000년대 초 퇴직했다. K씨는 직장을 옮길 때마다,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사발주 의식을 치렀단다. 대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 때 한다는, 냉면그릇이나 밥그릇에 소주를 따라 마시게 하는 악명 높은 행사다.
은행은 창구에서 받은 돈을 1원 단위까지 똑떨어지게 정산한 뒤에야 하루 일과를 마칠 수 있다. 대리, 과장, 차장 라인을 거쳐 올라오는 결산이 맞지 않으면 틀린 부분을 찾아낼 때까지는 퇴근도 못 한다. 동그라미 하나를 잘못 찍어서 900만원이 9000만원이 되고, 현금 입출납한 돈이 어긋나는데 추적할 근거도 못 찾으면 연대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런 경우엔 실수한 창구 직원이 배상하는 돈보다 책임자급이 배상하는 돈이 더 크다. 수신이고 여신이고 잠깐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실수가 생겨나고 작은 실수가 큰 손실로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부서장은 직원들을 언제나 잘 통솔하고 점검해야 한다. 직원들을 통솔하는 일은 업무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 긴장도 풀어주고 결속도 다져둬야 한다.
술자리에선 좌장만 쳐다보라
K씨가 언젠가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 남자직원을 본 적이 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곤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자 그 직원은 소주 1병을 거뜬히 마시고, 후배 신입사원에게 “나도 1년 전에는 그랬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라며 술을 권하더라고 했다.
더욱이 수신은 7시, 여신은 10시에 업무가 끝나는 일이 허다해 술을 마실 일이 잦다고 했다. 회식도 많은 편인데, 목표달성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거나 캠페인으로 상금을 받을 때, 전출입과 승진 인사가 있으면 전체 회식을 하곤 한다. 전체 회식은 한 달에 보통 한두 차례 있는데,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다고 한다. 술을 거부하면 분위기를 깨기 때문이다. ‘성격이 독특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상사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라는 것. 물론 2차에도 데려가지 않는데 이것이 업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업무에서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도 회식 때 우정을 다진 사이에선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넘어가지만, ‘회식 충성도’가 낮은 사람은 꼬투리가 잡히거나 인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듣기도 한단다. 그런 후환을 없애려면 고꾸라지고 토하더라도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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