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형 같은 외모로 1970년대 큰 인기를 모은 배우 정윤희.
밤이 오고 호스티스 대기실 한구석에 눈치를 보며 앉아 있는 여자. 일수 찍는 아줌마가 들어와 빌린 돈을 갚으라고 닦달을 하고 돈이 궁한 호스티스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나가자, 이번에는 김밥과 떡을 한가득 이고 할머니가 들어와 아가씨들에게 외상으로 김밥과 떡을 판다. 남자가 오늘 처음 이곳으로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여자를 소개하자 호스티스들이 한마디씩 한다. “웃으며 들어왔다 울며 떠나가는 무교동 바닥”이라고 겁을 주고, 화장품과 옷을 빌려주며 “도깨비 장난 같은 호스티스를 하러 도깨비굴에 총도 없이 뛰어들어?” 신세 한탄 또는 자기비하조의 농을 던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오늘부터 아가씨를 77번이라 부르겠다고 하고 나간다. 여자는 정신이 없다. 커다란 눈망울, 소녀 같은 작은 얼굴의 작은 체구를 지닌 77번 아가씨 정윤희의 무교동 입성 첫날이다. - ‘나는 77번 아가씨’(박호태 감독, 1978)
호스티스의 탄생
1970년대 중반. 지금은 양재역 사거리라고 불리는 서울 말죽거리는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나무 널빤지를 깔아놓지 않으면 도저히 다닐 수 없었고, 과수원과 비닐하우스밖에 없는 허허벌판에 들어선 압구정동의 현대아파트에 이사 간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신사동 사거리까지 나와 버스를 타고 제3한강교를 건너 시내로 들어와야 했던 그 무렵. 서울 제일의 환락가는 단연코 무교동이었다. 대우, 삼성, 현대라는 대기업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그곳에 취직을 하면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그런 회사들에서 일하는 남성들을 샐러리맨이라 불렀고 그들은 회사일이 끝나면 접대다 회식이다 하며 불나방처럼 환락가 무교동을 향해 몰려들었다. 방석집이라 불리며 한복을 입은 아가씨들이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흘러간 옛 노래나 부르며 막걸리를 팔던 술집은 도시 변두리로 물러나고 그 대신 맥주를 팔고,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접대를 하는 홀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유흥업소가 생겨났다. 그곳에서 일하는 접대부 아가씨들을 호스티스라 불렀다. 홀에서 일하는 호스티스 아가씨들은 33번 77번 같은 번호가 이름이었고, 저녁에 출근해 아침에 퇴근하는 새로운 형태의 직업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1970년대 한국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사회였다. 자원도 기술력도 없는 개발도상국 한국의 경쟁력은 노동인력이었다. 그중 값싸고 고분고분한, 농촌에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이 청계시장과 구로공단의 공장 노동자로, 중산층의 가정부로, 버스 안내양으로 서울에서 이를 악물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던 그 시절에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영화가 있었다. 1973년 발표된 조선작 단편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를 원작으로 소설가 출신의 당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김승옥이 시나리오를 쓰고 신인 배우 염복순을 주연으로 해신인 감독 김호선이 만든 ‘영자의 전성시대’(1975)였다. 영화 포스터는 유례가 없을 만큼 도발적이었다. 고딕체의 영화제목이 포스터의 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반은 속옷 차림의 여주인공이 의자를 거꾸로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신인 여배우 염복순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는데, 영화에서 왜 노출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염복순은 자신의 가슴이 작다고 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당돌한 대답을 해 다시 한 번 장안의 화제가 된다.
정작 영화의 내용보다 여배우의 노출에 관심이 쏟아졌지만, 김호선의 데뷔작 ‘영자의 전성시대’는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어린 여성들의 비극적인 몰락이 비교적 잘 표현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