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화성시 팔탄면 월문리 복합문화공간 ‘고구마’.
총 21권이 출간됐는데, 물론 그중 비교적 중요하다고 평가됐거나 내 스스로 봐야 할 일이 있는 책 8권 정도는 내 작업실에 이미 있다. 그 제목들을 기억하면서 21권 중에서 열두세 권을 일단 확보! 상태는 극상이다. 가격도 착하다. 얼마 전 파주출판도시의 어느 헌책방에 갔을 때는 절판된 책이라면서 정가의 세 배를 받으려 했다. 사실 한동안 절판됐다가 새로 표지를 갈아입으면서 산뜻하게 재출간된 책이었다. 주인은 ‘절판된 책은 귀하다’며 두세 배 가격을 불렀다. 나는 그 사람이 책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책의 가치에 대해서, 재출간됐다는 사실에 대해서, 절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헌책방 문화’ 운운하며 분위기나 잡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간 이번에 찾아낸 니체 전집은 누가 읽으려고 샀다가 내내 책장에 모셔두었던 모양인지, 낙서 하나 없고 접힌 데 하나 없다. 아니, 이런 상태면 누가 집에서 들고 나왔다기보다 어딘가에 재고로 묵혀 있던 책이 나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피로 쓴 니체의 책들을 우선 확보하긴 했는데, 이 큰 헌책방, 아니 중고서점에 들어선 지 겨우 10분 남짓이므로 잠시 쉬고 싶어졌다. 큼직한 서점의 한 켠에 따로 책 읽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누가 와서 “그, 니체 전집 있잖아요, 저도 몇 권 가지면 안 될까요, 한 권만이라도?” 하고 물을까봐, 의자 밑에 잘 챙겨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경기도 일산의 ‘알라딘 중고서점’이다.
헌책방? 중고서점!
왜 헌책방이 아니고 중고서점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둘러보니, 널찍하다. 가을의 햇살이 넓은 창을 쓰다듬으면서 실내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헌책방 특유의 ‘오래된 냄새’가 없다. 그 냄새는 책과 먼지와 세월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고졸한 풍미이건만, 어떤 때에는, 그러니까 장마철 같은 때에는 선뜻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퀴퀴하기도 하다. 물론 책이 좋아서 수시로 헌책방을 들락거리는 사람에게는 그런 냄새 따위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헌책방에 가면 주인이나 손님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나는 듯싶다. 그 모든 게 다 좋은 향이다.
이곳에는 그런 냄새가 없다. 헌책방이라기보다는 정성껏 새로 단장한 동네 도서관 같다. 산뜻한 공기만 흐르는 듯싶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야심 찬 실험. 중고서점은 바야흐로 출판계의 뚜렷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2년 전쯤, 그러니까 2011년 9월 종로에 1호점을 개장한 이후로 전국 대도시의 핵심 상권 지역에 차례로 매장을 열었다.
기존의 헌책방이 대체로 부도심권의 낙후한 골목에 위치해 있고 가게도 비좁거나 허름하고 책들도 뒤섞여 있거나 심지어 바닥에서부터 함부로 쌓여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 중고서점은 모든 것을 이와 반대로 했다. 기존의 헌책방은 원하는 책을 제대로 찾기가 어렵고 가격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서 주인이 책의 앞뒤를 살피고 어림잡아 가격을 셈할 때 조금 섭섭할 때도 없지 않은데 이 중고서점은 또한 이를 정반대로 했다. 책은 거의 정확한 분류 원칙에 따라 정렬해 있고 가격도 비교적 시원한 수준으로 뒤표지에 매겨져 있다. 구매하면 포인트 적립도 해준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이 중고서점이 책을 구매한다는 점이다. 내가 다녀본 신촌, 종로, 대학로, 일산 등의 중고서점의 경우 매장에 들어서면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이라는 서가가 따로 있고 오늘 매입한 책의 권수가 표기되어 있으며 계산대는 책을 사려는 줄과 책을 팔러온 줄이 따로 마련돼 있다. 대체로 매장마다 하루 평균 2000권 정도가 들어오고, 대낮에는 책 사는 줄보다는 책 파는 줄이 더 길다.
이렇게 하여 책이 ‘회전’한다. 지금의 30~40대 부모들은 그 어느 세대보다 교양 욕구가 풍부하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그러한 욕구가 있었다 해도 그것을 실현할 만한 사회적 토대가 부족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가정이라 해도 ‘대망’이나 ‘소년소녀문학전집’을 구비하는 정도였다. 지금의 30~40대는 한국 출판문화의 양적 팽창과 질적 다양성을 겪으며 성장했다. 최인훈이나 황석영을 시작으로 해 신경숙, 박민규에 이르는 현대문학 30년 역사의 기본 독자들이었다. 그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은 후, 어린이책 시장이 폭발했다.
책이 너무 귀해 허기까지 겪었던 이들 세대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양의 책을 제공했는데, 어느덧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그 책을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다. 그나마 몇 군데 있던 헌책방도 점점 사라져 읽지도 않을 책을 짊어지고 이사를 다니는 형편이 되는데, 근사한 중고서점이 도심 한복판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책이 돌고 돌면서 이 중고서점의 레퍼토리도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이제는 마실 다니러 나갈 정도로 인기 있는 장소가 되는 중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도 이 중고서점의 현지 매장이 문을 열었다.